인천연합(정파)

 

[1]


1. 개요
2. 역사
3. 성격
4. 사건사고
4.1. 용산 지구당 사태



1. 개요


국내 운동권 역사 중 민족해방(NL)계의 한 정파. 90년대 중후반 한총련에서 집권하며 온갖 병크를 터트린 자주단결파(NL 강경파)가 그 근원이다.
1991년 출범한 NL계 사회운동단체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의 인천지부였기 때문에 '인천연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때는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도 주도권을 가졌고 수도권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광주전남연합도 지도하는 등 NL계(자주파)내에서 최대 그룹이었으나, 리더격이었던 강희철이 2003년 사망한 이후 정치적 분화가 심한 지역 특성에 더해 조직 장악력도 느슨해졌다는 평가. 민주노동당을 장악하며 성장한 경기동부연합에게 최대정파 위치를 내주게 되고, 통합진보당 분당사태 이후에는 경기동부가 주도하는 NL주류와 완전히 갈라져 정의당에서 활동하는 중.
아직도 북한의 3대 세습, 독재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피하는 다른 NL정파들과는 다르게 시대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친북적 입장을 많이 버린 상태이다.

2. 역사


인천연합은 민주노동당의 창당 준비 과정부터 참여한 울산연합이나 경기동부연합과는 달리 2001년 9월 전국연합의 민주노동당 합류 결정(일명 군자산의 약속) 이후 대거 민주노동당에 입당한다. 이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당적을 이동해 용산 지구당을 장악하는 이른바 '용산 지구당 사태'가 일어난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내 자주파의 지지에 힘입어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선출된 권영길이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일심회 사건까지 일어나자 이전부터 쌓여있던 자주파의 패권주의와 종북노선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평등파는 지도부 책임론을 주장하며 비상대책위원회 구성과 종북주의 청산을 요구했다. 이 국면에서 인천연합은 대표 정치인인 김성진이 비대위에게 전권을 위임해야 한다며 '51%가 오만했음을, 그리고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무능하기까지 했음을.'이라고까지 말하는 등[2] 울산연합과 함께 심상정 비대위를 지지하나 끝내 분당을 막지는 못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야권연대에 힘입어 인천광역시에서 구청장을 두 명이나 배출하는 성과를 거뒀다.[3]
통합진보당 출범 과정에서는 이정희를 앞세워 국민참여당과 통합하려는 경기동부연합과는 달리 진보신당과 선통합해야한다는 입장을 가졌는데, 결국 진보신당에서 통합이 부결됨으로써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가 함께 통합하는 형태로 출범하게 되었다.
통합진보당 소속으로 참여한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천연합은 남구갑에 김성진을 야권 단일후보로 출마시켰으나 33,501표(43.14%)를 얻는 데에 그쳐 40,195(51.76%)를 얻은 새누리당 홍일표 후보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당원선출 여성명부였던 비례대표 1번이 인천연합계로 분류되는 윤금순[4]이었기에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이 밝혀지면서, 인천연합은 진상조사위의 조사결과를 수용한다는 입장으로 윤금순 의원을 사퇴시킨다. 인천연합은 이후 울산연합, 국민참여당계, 통합연대(진보신당탈당파, 즉,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와 함께 혁신파를 구성해 당권파인 경기동부연합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이후 당대표 선거에서도 울산연합이 혁신파에서 이탈해 경기동부연합과 함께 강병기 후보를 낸 것과는 다르게 강기갑 후보측에 선다. 인천연합은 혁신파인 강기갑을 대표로 당선시키는데에 성공하지만, 새로운 지도부도 이석기, 김재연 의원 제명안을 관철시키는데 실패했고 결국 통합진보당은 분당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천연합은 다수는 탈당해 진보정의당에 합류하고 일부는 남는데, 인천연합의 중앙은 분당하기로 결정하였고, 지방과 중앙의 일부는 경기동부연합 측의 입장을 수용하여 당에 잔류하면서 세력이 분화되었고, 잔류한 사람들은 현재 민중당 인천시당에 남아있다.
진보정의당이 당명을 변경할 때는 유력하게 검토됐던 ‘사회민주당'이라는 당명에 거부감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인천연합이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참여계나 통합연대계랑은 달리 인천연합이 전통적 운동 논리[5]에 충실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결국 사민당에 대한 인천연합의 비토에 힘입어 정의당이 당명으로 결정되었다.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관련해서 이석기 의원의 체포동의안에 정의당이 찬성표를 던지자, 이에 반발해 정의당에 소속된 인천연합계열 광역시도당 위원장들이 홈페이지에서 해명을 요구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등 내홍을 겪기도 했다. 기사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정의당 내에서 꽤 큰 역할을 맡았는데, 정의당의 지방선거 전략인 '1 + 3전략'[6]에서 인천 남동구청장과 인천 동구청장이 인천연합의 지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더격인 김성진은 인천시장에 출마했으나, 여론조사에서 통진당 후보에게도 지지율이 밀리는 굴욕을 겪은 끝에 송영길과 단일화를 하고 사퇴했다. 아무래도 정의당의 낮은 인지도가 영향을 미친 듯.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결과 인천동구청장선거에 나선 정의당 조택상 후보는 14,215표(39.81%)로 17,076표(47.82%)의 새누리당 이흥수 후보에게 패배했으며, 남동구청장후보로 나선 정의당 배진교 후보마저 105,320표(49.71%)를 받아 106,537표(50.28%)를 받은 새누리당 장석현 후보에게 근소하게 패배함으로서 인천연합계열은 기초단체장 당선자를 내는데 실패했다.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는 인천연합 소속인 이정미 대변인이 경기 수원시 병에 출마했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 저조한 득표율을 보이다가 결국 사퇴하고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후보와 단일화했다. 그러나 단일화한 보람도 없이 손학규 또한 큰 표수 차이로 새누리당 김용남 후보에 패배.
통합진보당 해산심사 청구 국면에서는 통합진보당이 해산됨으로써 애매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인천연합은 정의당의 소속이므로 직접적인 피해는 받지 않았으나, NL세력을 문제삼은 판결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꼬투리가 잡힐 수 있는 상황이다. 통합진보당 분당 과정에서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 등 구당권파와 대립한 감정의 골이 있으면서도 해산 과정에서는 그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또 같은 NL세력으로서의 유대감도 있어서 여러모로 애매한 상황.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정미 후보가 정의당 비례대표 1번[7]으로 공천되었다. 선거 기간 국민의당의 한 예비후보가 이정미 후보의 반미 활동 경력을 들어 정의당이 공산주의자를 공천하였다고 공격하였는데, 이에 대해 이정미 후보는 "북한은 보편적인 민주주의와 인권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국가"이며, "북한의 3대 세습도 보편적 상식에서 볼 때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윤소하 후보[8]도 개표 마지막에 가서 당선이 확정되었다. 지역구에서는 더불어민주당과의 연대가 어떻게든 성사되어 인천 남구을에서 김성진 후보, 인천 중구동구강화군옹진군에서 조택상 후보가 정의당 당적의 단일화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두 후보 모두 3위로 낙선했다. [9]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강은미[10], 배진교후보가 정의당 비례대표 3,4번을 배정받아 당선되었다.
2020년 6기 동시당직선거에서 인천연합의 실체(?)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배진교 등의 인천연합 인물들은 지속적으로 토론회에서 인천연합의 존재를 부정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정의당과 NLPDR 쪽에 관심이 있거나 활동을 한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인천연합은 느슨해졌을 지언정, 분명 실재한다. 하지만 당대표 선거에 인천연합 계열에서 배진교와 김종민 두 명이 따로 출마하는 등 분열상이 드러났다. 결국 인천연합 조직표가 두 명한테 분산되면서 당대표 1차투표에서 어부지리로 좌파를 대표하는 김종철이 1위를 하였고, 이어진 결선투표에서 김종민이 김종철을 지지하면서 인천연합 계열의 배진교가 10% 넘는 격차로 패배하는 등 이전 당직선거에 비해 부진한 결과를 냈다.[11]

3. 성격


임미리의 책《경기동부》(이매진, 2014)에서는 2000년대 NL의 3대 정파[12] 인천연합,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을 각각 기업 조직, 군사 조직, 정치 조직에 비유하는데, 강력한 내부 규율을 가진 경기동부연합이나 정치적 감각이 남달랐던 울산연합과는 달리 인천연합이 노동운동 제일선으로서 역사성이 있고 정치적으로 분화도 심해서 다른 지역에 견줘 운동이 세련되었기에 붙은 비유다.
과거에는 용산 지구당 사태에서 보듯이 인천연합 또한 자주파의 한 정파기 때문에 패권주의적인 행태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라든지,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에서는 문제를 제기하는 세력에게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이는 끝까지 강경한 자세로 일관하던 경기동부연합과는 대비되는데, 일반적인 시민의 정치적 감수성에 대해 다른 세력들 보다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러한 맥락에서 세련된 방식으로 운동한다고 불리는 것이다.
정의당 내에서는 조용하게 강한 정파로 평가 받는다. 이론 스터디와 노선투쟁에 집중하는 PD계, 노무현 대통령을 따르는 자유주의 참여계와는 달리 강한 대중성으로 지역조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
호남과 수도권으로 분화되는 경향도 나타나고, 조금씩 방향성의 차이도 읽혀진다. 분화가 빠르다보니 조성주와 같이 인천연합과는 완전히 분리된 정치인들도 등장하고 있는 상황. 다만 여느 운동권이 그렇듯 연령대가 높아서 신 활동가들의 유입과 물갈이가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아무래도 술자리 같은데서 다짜고짜 "우리 함께 찐하게 데이트해보자"(...)라던가 "우리 함께 학생운동 10년을 도모해보자" 같은 멘트들을 날린다는 경험담들은 인천연합에 대한 편견 을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4. 사건사고



4.1. 용산 지구당 사태


2001년 전국연합이 민주노동당 합류를 결정하자,[13] 서울에서도 영향력이 있었던 인천연합에서 용산 지구당을 장악하려고 한 사건이다. 용산 지구당에서는 원래 김종철이 용산구청장 선거에 출마하는 등 평등파가 우위에 있었는데, 인천연합이 당비대납, 위장 전입등의 방법을 통해 지구당 당직을 장악한 것이다. 강남이나 서초 등 장악하기 쉬운 지역이 아니라 굳이 용산을 장악하려 든 이유는, 용산에 미군기지가 있기 때문에 반미 투쟁하기 좋아서(...) 이 사건은 많은 비판을 받으며 결국 당직을 장악했던 인물들이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사퇴하는 것으로 일단락 된다.
이후 용산 지구당 사태는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 때나 내란음모 사태 등 자주파에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언급되는 예가 되는데, 막상 이 사건을 일으킨 인천연합은 부정경선 사태 때 경기동부연합의 반대편에 서며 정의당에 합류했다. 이후 정의당과 노동당 탈당파의 통합으로 인천연합과 김종철은 다시 만나게 되고, 정의당/2020년 전당대회 당 대표 선거에서 김종철과 인천연합이 기반이라 평가받는 배진교가 결선투표에서 맞붙게 되었다. 결국 이 선거에서 김종철 후보가 11% 차이로 당선되며 정의구현. 사실 김종철과 손잡았던 김종민 후보도 용산지구당 사태 당시 용산에서 인천연합 측 대표인물이었다.

[1] 좌익 내셔널리즘 성향도 아예 없지는 않고 사회민주주의와 거리가 있는 인물들도 있지만 현재 정의당 계파로써 주류는 사회민주주의가 대세다.[2] 여기서 51%는 선거에서의 다수파였던 자주파를 의미한다.[3] 조택상 동구청장배진교 남동구청장. 두 사람 모두 민주노동당 당적으로 당선됐으나 훗날 통합진보당에서 탈당해 정의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조택상 전 구청장은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직후 정의당을 떠나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로인해 정의당 인천시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4] 전국여성농민총연합 출신이다.[5] 사회민주주의는 개량주의적이기 때문. 이는 당내 좌파들이 사회민주당이라는 당명을 반대한 이유와도 동일하다.[6] 광역단체장은 울산시장, 기초단체장은 인천 남동구청장, 인천 동구청장, 경기 과천시장에 집중한다는 전략[7] 경선 총득표수로는 4위이나, 여성후보 할당제 덕에 1번으로 확정[8] 광주전남연합 출신이나 인천연합과 함께 행보를 해 왔다[9] 두 지역구 모두 윤상현, 안상수라는 거물이 있고 보수적인 지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전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나 조택상 후보의 경우 자신이 구청장을 역임한 동구에서만큼은 1위를 했고 중구에서도 새누리당 후보에 이어 2위를 했을 정도로 꽤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다만 보수성향의 고령층 유권자가 많은 강화군옹진군에서 안상수 후보에 대한 몰표가 나오면서 조택상 후보가 석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택상 전 동구청장은 정의당을 탈당하고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0] 윤소하의원처럼 광주전남연합 출신[11] 많은 이들이 결선투표에선 결국 인천연합 계열의 두 후보가 다시 손을 잡고 손쉽게 이길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두 후보간의 화해가 불발되었다.[12] 이외에도 범민련, 6.15공동선언 실천연대 등 진보정당 합류를 거부한 NL정파들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세력이 크게 위축돼서 존재감이 거의 없다. 무엇보다 신규인력 충원이 거의 안 되면서 사실상 망했다.[13] 군자산의 약속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