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정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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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2.1. 정대마도(征對馬島)
2.3. 정건주위(征建州衛)
2.4. 정건주위(征建州衛)
2.5. 정니마군(征尼麻軍)
2.6. 정서북로구(征西北虜寇)
3. 의의
4. 바깥고리
5. 보물 제1511호


1. 개요


國朝征討錄. 조선 전기 일어난 7차례의 대외 정벌사를 기록한 책. 보물 제1511호이며, 국내 유일본이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탈취해 간 자료를 다시 베낀 필사본이 일본에 한권 남아있다.

2. 내용


국조정토록의 최초 편찬자와 저술 과정은 불확실하다. 책에 기록된 마지막 전쟁이 삼포왜란(1510년)이고 임진왜란(1592년 ~ 1598년) 당시 일본으로 유출된 점으로 미뤄 보아 1510년 ~ 1592년 사이에 간행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기록상으로는 광해군이 국조정토록을 본 후 그 중요성을 인식, 재간행할 것을 명령하고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지시한 것이 최초다.
세종 원년(1419년) 대마도 정벌 부터 중종 5년(1510년) 삼포왜란 토벌전까지 조선 전기에 단행된 총 일곱 차례의 전쟁 기록을 담고 있다.

2.1. 정대마도(征對馬島)


1419년(세종 원년) 음력 6월 1일에서 7월 3일까지 대마도를 정벌한 내용. 5월 5일 왜선 32척이 충청도 비인현(庇仁縣)[1]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습격하여 우리 병선(兵船) 7척을 불사르자 5월 16일 상왕(태종)이 주재하는 의정부 회의에서 정벌을 단행하기로 결정, 6월 19일 병선 227척, 장교 669, 갑사 및 병사 기선군 등 16,616인 총 17,285인을 인솔하고 군량 65일분을 가지고 출정했다.
19일 두지포에서 적선 129척을 빼앗아, 20척을 취하고 모두 불태웠다. 민가 1939호를 불태우고, 114명을 참수하고 21명을 포로로 잡고, 잡혀있던 한인(漢人) 남녀 131인을 얻었다. 훈내곶에 목책을 세워 오래 주둔할 뜻을 보였으며, 다시 진격하여 민가 68호와 선박 15척을 불태우고, 적 9명을 참살하고 잡혀있던 한인 15명, 본국인 8명을 얻었다. 도도웅와(都都熊瓦)가 서신을 보내 군대의 철수를 빌었고, 또한 태풍이 올 시간이 임박하여 7월 3일 거제에 귀환하였다. 아군 전사자는 편장 박홍신 등 4명과 백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2.2. 정파저강(征婆猪江)


1433년(세종 15년) 음력 2월 27일에서 4월 20일까지 건주위 여진 이만주(李滿柱)를 토벌한 내용. 건주위 여진 이만주가 화자온(火刺溫) 야인인 것처럼 꾸며, 400여기를 몰고 와 여연군을 침입하여 많은 인민과 가축을 가져갔는데 세종 15년(1433년) 정월 8일 거짓말을 하며, 64명만을 송환했다.
이에 이순몽이 2,515명을 거느리고 이만주가 머무르는 곳을 향하고 최해산은 2,070명을 거느리고 차여(車餘) 등처로 향하고, 이각은 1,770명을 거느리고 마천(馬遷) 등처를 향하고, 이징석은 3,010명을 거느리고 오랄 등처를 향하고, 김효성은 1,888명을 거느리고 임팔랑보가 사는 근거지로 향하고, 홍사석은 1,110명을 거느리고 팔리수 등처를 향하고 최윤덕은 2,599을 거느리고, 림파랄 등의 소굴을 향했다.
최윤덕은 남녀 62명을 포로로 잡고, 98명을 사살하고 말 25필, 소 27마리를 얻고 전사자 4명, 말 2필을 잃었다. 이순몽은 남녀 56명, 최해산은 남자 1명, 참수 3명, 이각은 남녀 14명 생포, 말 11필, 소 17마리를 얻었다. 이징석은 남녀 56명, 참수 5명, 말 25필, 소 33마리, 김효성은 남녀 66명, 13명 죽이고 말 6필, 소 12마리를 얻었다. 홍사석은 남녀 생포 31명, 사살 21명, 소 21마리를 얻었다.

2.3. 정건주위(征建州衛)


1467년(세조 13년) 음력 9월 24일에서 10월 4일까지 건주위 여진 이만주(李滿柱)를 토벌한 내용. 4월 29일 건주위 여진이 처들어와 분탕을 치자 복수하려던 중 9월 13일에 명나라에서 협공 요구가 오자 정벌을 결정하였다. 중추부지사 어유소(魚有沼)가 좌상대장(左廂大將), 동지사 남이(南怡)가 우상대장, 우참찬 윤필상을 선위사(宣慰使), 진북 장군 강순(康純)을 서정주장(西征主將)으로 삼아 공격하였다. 기병 2,753명, 보병 2,646명을 좌군으로, 기병 2,685명, 보병 1,752명을 우군으로 삼고 정예 병력 600명을 중앙으로 삼아 약 만여명이 출정했다.
첫날 건주위의 추장 이만주, 고납합 등 24명을 참하고, 24명을 포로로 잡고, 잡혀있던 한인(漢人) 6명을 구출하고, 말 18필, 소 15마리를 얻고 무수한 집과 재물을 취했다. 유자광이 큰 나무 껍질을 벗겨 놓고, "조선주장(朝鮮主將) 강순(康純)이 정병(精兵) 1만(萬)을 인솔하여 건주위를 멸하였다"고 써 놓고 하루를 기다려도 명군이 오지 않자 회군하다가 적 100명의 급습을 받았으나 좌우에서 협공하여 피해없이 모두 사살하였다. 다시 회평에서 4명을 참하고, 강변에서 1명을 참수 8명을 사살하였다. 올미부를 넘어 890명이 대항하자 13명을 참하고 사살자 30여명 소 50마리, 말 2필을 얻었다. 여진족의 집과 축적해 놓은 곡식을 모두 불태운 후 큰 나무에 껍질을 벗기고, "조선국 좌상(左廂) 장군(將軍) 어유소(魚有沼)가 정병(精兵) 1만을 거느리고 올미부(兀彌府)에서 천병(天兵)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음으로 돌아 간다" 라고 써 놓았다. 이숙기 등이 13명을 사살하고 잉화평(仍火坪)에 이르러 100여기의 공격을 받자 30여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싸움에서 대승이 귀한 것이며, 더욱 귀한 것은 군사의 피해가 없음이다"이라 하고 귀환하는 척한 후 매복하고 기다리던 적 군사 7명을 사살하였다. 30여명이 투구와 갑옷을 입고 20명을 인솔하고 산 허리에서 말을 달려 대장에게 공격해오자 대장이 직접 적 2사람을 사살하고 공격해오는 적 한 명을 죽이니 모두 도망쳤다. 10월 4일 주장 강순이 이산(理山)에 돌아오고 우상대장 남이는 강계로 돌아오고 3일 좌상대장 어유소가 이산으로 귀환하였다.

2.4. 정건주위(征建州衛)


1479년(성종 10년) 음력 12월 1일에서 12월 16일까지 건주위 여진을 토벌한 내용. 도원수(都元帥)는 윤필상(尹弼相)이었고 출정 대장은 어유소(魚有沼)였다. 평안도 군사 7,000명, 황해도 군사 2,000, 함경도 군사 1,000명 등 국경 수비대로 총 10,000명을 차출하여 후원군으로 편성 대기시킨 후 도원수가 기병 950명을 인솔하고 12월 13일 도강하여 공격하고 돌아왔다.
적 15명을 참수하고, 2명의 귀를 베어 왔고, 한국인 포로 15명, 중국인 포로 여자 7명을 얻어 왔다. 아군 피해는 사망 1명, 병사자 2명이었다.

2.5. 정니마군(征尼麻軍)


1491년(성종 21년) 음력 10월 18일에서 11월 2일까지 만주의 우디거(兀狄哈) 여진 니마거(尼麻車)를 토벌한 내용. 정월 12일에 니마거 여진족이 함경도 조산보(造山堡)를 습격하여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자 이에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기병 17,200명, 보병 2,800명으로 군사 2만명을 동원하였고 3,375명을 선봉 부대로 삼아 만주로 진격했다. 첫날 적 500여 기와 싸워 잡힌 9명을 참하고 전투 중 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나 이후 대군이 동원된 걸 알고 모두 도망을 갔으므로 적들의 소굴로 돌입, 집과 농지를 모조리 불태우고 돌아왔다.

2.6. 정서북로구(征西北虜寇)


1492년(성종 22년) 음력 8월 20일에서 22일까지 압록강 너머의 건주위 여진을 토벌한 내용. 여진족들이 지난해 조선측의 침략에 대한 보복을 기획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출정, 고산리 강변에서 적 500여명과 싸워 잡힌 적 39명의 목을 베고, 화살을 맞춰 익사시킨 적이 50여명, 그 외 적의 병기를 모두 노획했다.

2.7. 정삼포반왜(征三浦叛倭)


1510년(중종 5년) 4월 19일에 삼포에서 폭동을 일으킨 왜인들을 토벌한 내용. 삼포왜란 항목 참조.

3. 의의


정벌의 원인, 지휘 체계, 작전 지시, 동원 병력과 군량, 공격 과정과 전과, 전후 포상 등 정벌과 관련된 모든 과정을 자세하게 서술해 조선 시대 전쟁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편년체의 자료이기 때문에 전쟁 기사가 집중되어 있지 않고 날짜에 따라 분산되어 서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가 사이 사이에 많이 끼어들어 있어 일반인들이 이에 대해 집중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책은 전쟁에 관한 기사만을 뽑아 놓았기 때문에 전쟁의 전체 상황을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이 책은 성리학적 강목 의식이 강하게 투영된 국가주의 내지 민족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는 강목 형식의 역사 서술서로 광해군 대의 정치적 성향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자료다.
일본에도 필사본 한권이 있는데 일본판은 뒤에 서국조정토록후(書國朝征討錄後)라는 발문이 붙어 있다. 발문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에 조선에서 탈취해 온 책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쳤던 수백 권의 책 중 하나이며, 발문을 지은 곡직뢰(曲直瀨)의 선조는 풍신수길의 주치의였으며, 임진왜란을 개탄스럽다고 적어놓아 임진왜란을 히데요시가 광기(狂氣)를 부린 전쟁으로 인식하던 일본 유학자들의 역사관을 전하고 있다.

4. 바깥고리



5. 보물 제1511호


이 책은 조선 세종에서 중종조에 이르는 동안 대마도, 파저강, 건주위, 이마차, 서북로구, 삼포왜란 등을 정벌한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체재를 보면 목록과 범례에 이어 상권에는 대마도 정벌(征對馬島)·파저강 정벌(征婆猪江)·건주위 정벌(征建州衛)이, 하권에는 건주위 정벌(征建州衛)·이마차 정벌(征尼麻車)·서북로구 정벌(征西北虜寇)·삼포반왜 정벌(征三浦叛倭)이 수록되어 있다.

서술의 체재는 각 전쟁별로 연대에 따라 강목체(綱目體)로 기술되어 있는데, 범례에서 말하고 있듯이 조선의 군사행동은 정(征) 또는 토(討)로 칭하고 적병은 구(寇) 또는 반(叛), 적을 격파한 경우는 참(斬) 또는 로(虜)로 표현하는 등 역사적 사실에 포폄(褒貶)을 행한 통감강목의 서례(序例)를 따르고 있다.

'광해군일기'(태백산사고본) 광해군 6년 7월 29일 기묘조(己卯條)에, 당시까지 사본의 형태로 유포되고 있었던 '국조정토록'은 광해군 6년 이후에 활자로 인출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경사문(經史門)의 기록에서도 활자로 인출된 후에도 구하여 보기 쉽지 않은 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국조정토록'은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유일본으로 희소가치가 있으며 조선 전기 전쟁사나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 현재의 서천군 비인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