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스터 곶 전투

 

Battle of Cape Gloucester (1943.12.26 ~ 1944.4.22)
[image]
글로스터 곶에 상륙하는 미합중국 해병대 제 1사단.
'''작전명'''
Operation Cartwheel(수레바퀴 작전)
'''날짜'''
1943년 12월 26일 ~ 1944년 4월 22일
'''장소'''
뉴 브리튼 글로스터 곶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미국
호주
일본 제국
'''지휘관'''
윌리엄 H.루퍼투스
사카이 야스시
마츠다 이와오[1]
'''병력'''
20,000명
100,000명
'''피해 규모'''
310명 전사
1,000명 전사
'''결과'''
미군의 승리
'''기타'''
상륙은 순조로웠으나 가장 큰 적은 자연이었다.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결과
5. 관련 항목


1. 개요


1943년 12월 26일부터 1944년 4월 22일까지 뉴기니 제도의 뉴브리튼 섬 글로스터[2] 곶에서 미군, 호주군일본군이 서로 벌인 전투. 이 전투를 기점으로 남태평양의 일본군 전진기지였던 라바울에 대한 포위망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미군은 1943년 12월 말부터 1944년 4월 초까지 제 112 기병연대와 해병 제 1사단을 파견하여 뉴브리튼 섬의 서부지역을 장악하였다. 이후 중부태평양 진공과 전략의 변경으로 인해, 섬 동쪽의 라바울을 고립시키는 임무는 1944년 5월부터 미 육군 제 40사단이 맡다가, 1944년 12월부터는 호주군 제 5사단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섬 중부지역을 점점 점령해가면서 라바울을 고립시켰다.
일반적으로 '글로스터 곶 전투'라고 하면 112 기병연대와 해병 제 1사단이 담당하였던 4월 말까지의 전투를 의미하며, 육군 제 40사단과 호주군이 담당했던 전투 기간까지 포함하여서는 '뉴 브리튼 전투'라고 호칭한다.

2. 배경


[image]
뉴 브리튼 섬과 뉴기니 섬 근방의 해역으로, 우측 섬의 서쪽 돌출부가 글로스터 곶.
과달카날 전투 이후, 미군은 남태평양의 일본군 전진기지였던 라바울에 대한 포위망 형성을 위해 Operation Cartwheel(수레바퀴 작전)을 수립하고 1943년 중반부터 솔로몬 제도와 동부 뉴기니 일대에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작전을 본격적으로 수립하기 전엔 라바울을 직접 공격하여 점령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군 10만명이 주둔한 거대요새가 되어버린 라바울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보급로를 끊어서 고립시키는 것으로 작전 방침이 바뀌었다. 이 결정은 미해군 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이 주도했다. 1943년 11월부터 시작할 미 해군의 중부 태평양 돌파 계획을 실시함에 있어서 해병대 같은 정예 수륙기동부대가 필요해지는데, 라바울을 직접 공략하게 되면 이들을 포함해 태평양 전선에서 가용한 미 지상군 병력 대부분이 남태평양에 발이 묶이고 그만큼 중부태평양 돌파, 더 나아가 태평양 전선에서의 미군의 전반적인 진격 자체가 와해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킹 제독은 이 문제점을 부각시키면서 미군 수뇌부를 설득시켰고 일본 본토 공습에 안달이 나있던 미 육군 항공대의 지지까지 등에 업으면서 라바울 우회 및 포위를 관철시켰다. 이 결정은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 장군이 주장하던 뉴기니-민다나오 축선 진격에 배정할 병력과 물자를 축소한다는 의미[3]였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 및 그를 지지하던 미군내 인사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킹 제독이 병력과 물자 배분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반발을 누그러뜨리고 맥아더 본인 또한 라바울 우회의 이점을 수긍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1943년 동안 솔로몬 제도와 동부 뉴기니에서 꾸준히 일본군을 밀어붙인 미군은 이제 남서태평양에서 전선을 북쪽으로 밀어 올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미군과 호주군은 뉴기니-민다나오 축선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진격하고 있었고, 공격군에 대한 원활한 보급을 위해서는 뉴기니 섬과 뉴 브리튼 섬 사이에 있는 '비티아즈 해협'과 '댐피어 해협'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했다.[4] 일본군은 댐피어 해협을 훤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자리인 글로스터 곶에 비행장은 물론 상당수의 수비대를 주둔시켜 놓고 있었고, 미군 사령부는 어차피 라바울 점령을 포기한 이상 해상 수송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글로스터 곶을 박살내기로 결심하고 병력을 파견한다.
남서태평양군 사령부는 글로스터 곶 상륙부대로 과달카날 전역(campaign)에서 용맹을 떨치고 반년이상 호주에서 재편성과 휴식을 취했던 해병 1사단을 투입전력으로 선정했다.[5][6]
한편 일본군의 경우 제 65여단을 글로스터 곶에 주둔시켜 놓고 있었는데, 마츠다 이와오 준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일본군은 제 17 보병사단을 파견하여 섬 서쪽의 방위를 강화하였다.

3. 경과


미군과 호주군의 가장 중요한 전술 목표는 첫 번째가 글로스터 곶의 비행장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며, 두 번째가 뉴 브리튼 섬과 뉴기니 섬 사이를 가르는 해역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었다. 해병 제 1사단이 상륙하기 앞서서, 미군은 1943년 12월 15일 섬 남쪽의 '아라위'에 제 112 기병연대를 상륙시켜 섬 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 라바울로부터의 보급과 일본군의 퇴로를 끊고, 이어 12월 26일 윌리엄 H. 루퍼투스 소장의 지휘 하에 해병 제 1사단이 글로스터 곶에 상륙했다. 아라웨를 점령당한 일본군은 라바울에서 항공기를 날려 보내 미군을 방해하려고 했으나, 하필이면 근처의 부겐빌 섬에 있는 비행장들이 전부 미군의 손에 떨어지는 바람에 라바울까지 두들겨 맞는 형편이라 제대로 방어를 해 주지 못했고, 112 기병연대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아라웨에 상륙하여 아라웨 반도를 모두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 해병 제 1사단은 글로스터 곶에 주력 부대를 상륙시킴과 동시에 일본군의 퇴로를 끊기 위해 섬 서쪽의 타우알리 해변에 제 1연대 2대대[7]를 상륙시켰다. 상륙작전은 대규모 항공폭격과 해군의 상륙준비포격의 지원 덕에 상당히 순조로웠고, 상륙한 미군은 처음에 해변 근처에서는 일본군의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일본군이 상당히 소극적인 저항을 하면서 라바울 쪽으로 계속 조금씩 후퇴하였기 때문이었다. 대신 미군은 지옥과도 같은 정글과 싸워야 했다. 일본군은 정글 속에서 숨어서 미군을 기습하는 등의 전술을 사용하면서 미군을 괴롭혔지만, 미군은 차근차근 전진하며 나아갔다.
미군은 상륙 당일 이미 전술 목표인 글로스터 곶의 비행장을 점령하였고, 상륙한 지 일주일 만에 마츠다 준장의 일본군 부대를 섬 서쪽에서 쫒아내고 섬을 가로지르는 공격선을 형성한 상태였다. 이후 미군은 차근차근 진격을 하면서 일본군을 동쪽으로 밀어냈고, 라바울의 일본군 본영에서는 섬 서부를 필사적으로 방어하려 애썼지만, 이 와중에 태평양 전선에는 라바울과 뉴브리튼의 운명을 결정지을 큰 전략적 변화가 일어났다.
1943년 11월의 길버트 제도 침공을 시작으로 '''미 해군의 진짜 주력이 중부태평양을 돌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44년 2월에 먀셜제도가 사실상 미군 손에 떨어졌다. 그 직후, 미군이 '''라바울의 후방이자 일본군 연합함대 사령부가 있던 트럭 섬에 대규모 폭격'''을 실행하여 약 20만 톤 이상의 함선과 수백대의 항공기들을 날려 버렸다. [8]
라바울의 항공전력은 과달카날 전역 이후 1943년 중반부터 시작된 솔로몬 제도에서의 미군 진공에 맞서면서 점점 약체화 되고 있었다. 이미 1943년 3월경에 일본 육군항공대가 라바울에서 모두 철수[9]하면서 전력이 반토막 난 뒤로, 그때 그때 필요한 전력을 항모기동부대의 항공전력까지 동원해 돌려막기[10] 하면서 버티던 상황이었다. 부겐빌을 비롯하여 라바울과 가까운 곳에 미군의 전진기지가 생겨난 1943년 11월경 부터는 미군의 공습이 매일같이 이어지면서 라바울의 제공권 유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판에 '''후방기지인 트럭이 박살나자 라바울의 항공전력을 유지할 여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결국, 트럭섬이 박살난 바로 다음날에 그나마 남아있던 해군항공대 전력마저 모두 트럭 섬으로 철수해 버렸고[11], 뉴브리튼을 비롯하여 그때까지 솔로몬 제도 일대에서 버티던 일본군은 항공지원도 없이 싸워야 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방공망이 사라지면서 라바울에 일본군 수상함이 들어오는 것도 완전히 불가능해졌으므로 이 때를 기점으로 '''라바울 및 솔로몬 제도의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보급이 사실상 끊겨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정상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라바울의 일본군 본영은 섬 서부 방어를 맡고 있던 일본군 17사단에게 라바울로 퇴각할 것을 명령하였다. 마츠다 준장의 부대는 자신들의 상급 제대인 일본군 17사단에 합류하기 위해 라바울 방면으로 퇴각하고, 미군은 마츠다 부대를 포위 섬멸하기 위하여 섬 중북부의 '윌로메즈 반도'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따라잡으려 했으나 윌로메즈 반도의 일본군 수비대가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3월말까지 마츠다 부대와 윌로메즈 반도의 수비대를 비롯해 뉴브리튼섬 서부 및 주변 도서 지역에 깔려있던 병력들을 수습한 일본군 17사단은 윌로메즈 반도와 라바울 사이의 주요 거점에 소수의 후위병력만 남겨두고 라바울로 철수했다. 그리하여, 1944년 3월 말 경 미군은 글로스터 곶에서 윌로메즈 반도에 이르는 뉴 브리튼 섬의 서쪽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한편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자, 중부태평양의 섬들을 하루 빨리 확보하고 일본 본토를 공격해야 하는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상륙전 및 정글에서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해병 제 1사단이 매우 필요해졌다. 해병 제 1사단을 휘하에 넣고 있었던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다른 상륙 작전을 핑계로 니미츠에게 해병대를 넘기지 않으려 했지만 합동참모본부는 남서태평양해역군에게 향후 뉴 브리튼 섬의 공격은 최소한의 병력으로만 수행할 것을 명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해병 1사단의 철수를 차일피일 미뤘지만, 이 모습에 열받은 어네스트 킹 제독이 미 육군의 최고 수장인 조지 마셜장군에게 직접 따졌고, 결국 해병 제 1사단은 태평양해역군으로 배속이 변경되어 재정비를 위해 파부부로 떠나게 되었다.
약 4개월 간에 걸친 글로스터 곶 전투는 이로써 종료되었고, 1944년 5월부터 과달카날에서 대기 중이던 육군 제 40사단이 파견되어 전선을 담당하였다. 육군 제 40사단은 뉴브리튼 섬의 중부지역을 계속 공략하다가, 1944년 11월 필리핀 탈환전에 참가하기 위해 호주군 제 5사단과 교대한다. 호주군 또한 꾸준하게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종전 즈음엔 라바울에서 직선거리로 약 50~60마일 거리까지 도달하여 섬의 동쪽 지역으로 일본군을 밀어붙였다.

4. 결과


사실 미군은 힘들여 섬의 서부를 장악하긴 했지만, 니미츠 제독이 이끄는 태평양해역군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북상하는 데 성공하는 바람에 별 다른 전략적인 의미는 가지지 못하였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라바울 점령을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실질적으로 라바울을 무력화 시킨건 1943년 말 부터 이뤄진 부건빌섬 공격, 에드미럴티 제도 점령과 태평양해역군에 의한 트럭섬 무력화에 따른 보급선 차단 및 제공권, 제해권 상실이었다. 특히, 상술한 바와 같이 트럭섬이 무력화 된 이후부터 라바울의 위상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한편, 미군은 과달카날보다 더한 지독한 정글과 늪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PTSD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는 더 퍼시픽 4화에 잘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해병 제 1사단은 글로스터 곶 전투 이후 파부부로 되돌아가 재정비를 하였다가, 태평양 전쟁 최고의 생지옥 중 하나로 이름 높았던 펠레리우 전투오키나와 전투에 각각 참전하게 되었다.
양 군대의 피해는 아래와 같다.
  • 미군: 전사 310명 | 부상 및 실종 1,083명
  • 일본군: 전사 1,000여명 | 부상 및 실종 알 수 없음

5. 관련 항목



[1] 이전 항목엔 시바자키 케이지라 써있었는데 시바자키 케이지는 타라와 전투에서 이미 전사해버린다.[2] 영국 영어, 특히 지명에서 자주 보이는 "-cester"는 "-세스터"가 아니라 "-스터"로 읽는다. 일례로 레스터 시티 항목으로 가서 스펠링을 확인해보기 바란다.[3] 맥아더는 계속해서 자신을 태평양 전선 단일 지휘관으로 임명하길 요구하면서 자신에게 모든 병력과 물자를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중 하나가 바로 라바울 공격이었다.[4] 뉴 브리튼 섬 상륙 당시 뉴기니 섬은 연합군이 모두 점령하여 비티아즈 해협의 안전은 이미 보장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시 글로스터 곶 전투는 필요없는 전투이지 않았냐는 설도 존재.[5] 태평양 전쟁에서 미 해병 1사단은 4개의 전역에 참가했다(과달카날 - 뉴 브리튼 - 펠렐리우 - 오키나와). 전쟁이 끝난 후에는 중국으로 전개하여 47년까지 점령군 임무를 담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점령군으로 있게된 군인의 상당수는 제대 포인트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잔류한 유형인데 전쟁 종결로 인한 미국의 군대 감축 시도로 이에 연관하여 포인트는 다소 부족했지만 어느정도 확보한 군인들은 오래 잔류하진 않고 몇달을 추가로 있다 귀국했다.[6]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자서전에선 2차대전에 징집된 미군 병사들이 마지막으로 제대한 시점을 47년 6월이라 언급했는데 그러면 이들이 포인트 적용대상의 마지막 대상자들이 아닌가 싶다. 전쟁에 참전했던 전투경험자들이 군을 떠나면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햇병아리들로 대체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크게 고전했다는 의견이 설득력이 크다.[7] HBO 제작 미니시리즈 더 퍼시픽에서 주연 등장인물 로버트 레키가 속한 부대가 바로 여기이다.[8] 일본 수상함대의 주력들은 공격 직전에 도주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 미군의 위세에 눌려서 필리핀 해 해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미군에게 등을 보이며 도망가면서 소극적인 대응만 하기에 바빴다.[9] 일본 육군은 솔로몬 제도보다 뉴기니 전선을 더 중요시했는데, 비스마르크해 해전으로 인해 뉴기니 방어에 비상이 걸리자, 라바울과 솔로몬 제도에 전개한 항공전력을 하나도 남김없이 뉴기니 전선으로 재배치했다.[10] 이 당시 일본 항모부대는 과달카날 전역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항공기 및 조종사,승무원들을 대거 손실한 뒤로 실전에 나서지 않고 후방에서 항모 작전을 위한 조종사 양성을 하면서 항공전력을 재건하고 있었지만, 일선 지상기지 지원에 항공기와 조종사들이 계속 차출되면서 훈련을 못하고 손실이 생기면서 전력 재건은 더뎌지기만 했다. 이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크게 패하는 단초가 된다.[11] 이 때 항공기와 조종사들은 라바울을 떠났지만 항공기 정비요원들은 불안정한 제공권과 제해권 때문에 철수하지 못했다. 이들은 전쟁 초기부터 활약하던 베테랑 정비사들이었는데 이들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전쟁 후반기 일본 해군항공대의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