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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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해 작전 요도. 검은색 선은 일본군 선단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붉은색 선은 연합군의 공습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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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의 폭격에 피격당한 일본 육군 수송선 켐부마루.
1943년 3월 1일부터 3월 5일까지 비스마르크해[1] 에서 벌어진 해전. 소탕전은 3월 14일까지 이루어진다. 이 해전 결과로 인해(병력 및 물자부족 등의 이유로) 일본군이 뉴기니 방어에 실패하게 되었다.
과달카날 전역이 일본군의 참패로 끝나던 1943년 1월말 무렵, 동부 뉴기니의 동남부 지역인 파푸아 반도 일대에서도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일본군이 축출되고 있었다.(코코다 트랙 전투, 밀른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 과달카날과 동부 뉴기니 동남부를 잃은 일본군은 솔로몬 제도 일대와 뉴기니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미군의 공세에 대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일본군 대본영은 파푸아 반도를 비롯한 동부 뉴기니의 동남부[2] 를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동부 뉴기니 전체를 아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동부 뉴기니 전체가 미군 손에 떨어지는 순간엔 남태평양의 핵심 거점인 라바울이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이에 뉴기니 전역의 일본군은 부나- 고나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해안지대의 라에-살라모아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방어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서 요충지로 떠오른 곳이 와우였다. 라에-살라모아에서 남서쪽 내륙 산악지대에 위치한 와우는 일찍부터 연합군 세력에 들어가 있던데다[3] 비행장도 있어서 라에-살라모아 지역에 대해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뉴기니 일대의 일본군도 이 지역을 계속 주목하고 있었다. 다만, 과달카날 전역과 뉴기니 동남부에서의 격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는 이쪽에 병력을 돌릴 여유가 없었으므로 와우와 해안지대로 통하는 길목만 차단하고 있었지만, 1943년 1월 초에 연대규모의 일본군이 증원되면서 와우지역을 점차 위협하기 시작했다.
부나-고나 전투가 마무리되어가자 미합중국 육군원수 맥아더 장군은 라에-살라모아 지역 공략의 교두보로서의 와우의 가치를 깨닫고는 와우 지역에 대해 대대적인 증원을 명령했다. 같은 시기에 일본군도 와우를 공격했지만 폭격기와 수송기를 동원한 연합군의 증원으로 인해 일본군의 공략이 실패했다. 이 전투를 거치면서 와우는 3000여명의 병력이 주둔한 연합군의 교두보가 되었다.
와우가 본격적으로 연합군의 교두보가 되자, 대본영은 라바울로부터 대규모 해상수송을 통해 라에- 살라모아 지역의 병력을 증강하여 이 일대를 방어하고자, 일본 해군소장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에게 8척의 구축함과 8척의 육군 수송선을 통해 약7,000명의 증원 병력과 물자를 호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솔로몬 일대에서의 수송작전에서 교훈을 얻어서 각 수송선은 필요한 물자의 종류와 인원을 조금씩 나누어서 균등하게 적재하여 만일 수송선이 거의 다 격침당해도 1척만 도달하면 부족하나마 제대로 된 증원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구축함과 수송선의 승조원들도 되도록 이런 종류의 작전에 경험이 많은 자들을 선별했고, 보트와 주정을 많이 적재해서 변변한 항만 시설이 없는 곳에서도 빠른 양륙이 가능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선단을 호위하는 항공기도 100기를 뽑아낼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이 수송작전의 최대 위협은 연합군 항공기들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연합군이 자신들의 의도를 모르는데다 이 일대에서의 연합군 가용 항공전력이 적어서 설령 중간에 들키더라도 집중적인 항공공격을 받지는 않을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미 일본군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으며 일본군의 예상보다 약1.7배의 항공 전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 수송선단을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전술도 가다듬고 있었다.
미 육군 제5항공군에서는 일반 폭탄을 사용해 해상전투를 수행하는 방법을 한참 연구중이였는데, 그러던 중 물수제비처럼 폭탄을 물에 튕겨 함선을 격침하는 물수제비 폭격(원문은 Skip Bombing[4] ) 이라는 방법을 고안했다. 예전부터 초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지표면에 폭탄을 튕겨서 지상목표물의 측면을 타격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이것을 대함공격에 활용한 것이다. 이 당시 미육군항공대의 대함공격 방식은 하나같이 효율이 낮았다. 중폭격기들은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했지만 함선들이 민첩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대부분 명중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 때문에 저공폭격으로 전환하려고 했지만 이 방법의 경우 일본 전투기와 함정의 대공포에 격추당하기 딱 좋았다. 항공뇌격은 당시 미군 어뢰의 낮은 성능과 신뢰성 때문에 공격에 나서는 기체를 저공 저속 조건에 노출시켜야 했으므로 일반적인 저공폭격보다도 더 위험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육군항공대 소속 폭격기들의 대함공격작전 결과가 이 단점들을 모두 보여줬다. 고공폭격은 죄다 빗나갔고, 뇌격에 나섰던 기체들은 작전기의 절반이 격추당했으며, 저공폭격[5] 조차도 기총사격으로 소수의 인명피해를 입힌걸 빼면 이렇다할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연구 끝에 나온 물수제비 폭격방식은 다음과 같다.
목표 전방 600~750m 지점에서 부터 60~75m 고도로 시속 300 중반~400km 속도로 접근하며, 접근 중엔 전방화력을 최대한 퍼부어서 적함의 대공포화를 제압한다. 목표로부터 약 100m 내외 거리에 도달하면 5초 지연신관을 세팅한 225kg 철갑탄 서너발을 연달아 투하하고 고도를 높여 이탈한다.
물수제비 폭격은 수송선이나 구축함 같은 비장갑이거나 경장갑 함선에 대해서 기존의 대함공격 방식보다 압도적인 위력을 보였다. 뇌격과 비슷한 수준의 초저공으로 진입하지만 뇌격보다도 2배 빠른 속도로 목표에 돌진할 수 있었다.[6] 어뢰의 경우, 정상적으로 투하되어 작동하더라도 느린 속력 때문에 목표가 된 배가 회피할 여지가 있었지만, 물수제비 폭격방식으로 투하한 폭탄은 기본적으로 100m 내외 근거리에서 투하되어 폭격기가 달려들던 속도에서 별로 줄지 않은 상태로 어뢰보다 훨씬 빨리 목표물에 달려들었기 때문에 회피기동을 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폭탄이 불발되거나 요행히 빗나가기[7] 만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선체 측면에 폭탄이 명중하기 때문에 현측장갑이 없거나 빈약한 함선은 마치 어뢰에 맞은 것처럼 현측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게 되며, 이는 곧 침몰로 이어졌다. 설령 물수제비뜨기가 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저공 수평폭격이므로 투하된 폭탄이 그대로 명중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통상적인 수평폭격에 비해 명중률도 매우 높았다. 실제로 본 해전에서 물수제비 폭격의 명중률은 약 50%에 달했다.
위험성도 있었다. 물수제비 폭격을 하는 기체는 저공에서 목표물을 향해 직선으로 달려들어야 하므로 목표함선의 대공포화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었다. 때문에, 물수제비 폭격에 나선 기체들은 진입 중 목표함선의 대공포화를 제압하고자 전방 화력을 증설했으며 심지어 상부 포탑도 전방으로 고정해서 쏠수 있게 했다. B-25의 경우, 총 10정의 50구경 중기관총을 전방으로 쏠수 있게 되었는데, 이 화력은 방호가 약한 대공포좌들을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그 외에 폭탄이 일찍 터져서 폭발에 같이 휘말린다던가 너무 저공으로 진입했다가 목표물과 접촉하여 추락[8] 하기도 했으나, 이는 여타 전투행위에서도 발생하는 수준의 리스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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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군의 증원 의도를 파악한 연합군은 일본군의 수송작전을 막기 위해 통상적인 출격도 될수록 자제한 채 수송선단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항공기를 이 근방에 집결시켰기 때문에 항공기의 총수는 338대 이상이었다.
3월 1일에는 수색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선단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3월 2일 일본군 선단이 발견되자, 3일에 걸쳐 보파이터 쌍발폭격기, B-17, B-25로 구성된 200여대의 폭격기와 P-38 라이트닝, P-40 워호크로 구성된 100여대의 전투기에 의한 대대적인 공습이 있었다.
2일 에는, 오전 10시 경, 초계중이던 B-24 폭격기 한대가 수송선단을 발견, B-17 폭격기 편대가 한 시간 간격으로 두 차례의 공습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수송선 한 척이 침몰하고 두 척이 손상을 입었다. 그날 저녁에도 11대의 B-17이 동원되어 폭격을 가했지만, 수송선 한 척에 경미한 피해를 주는 것으로 그쳤다.
일본군 수송 선단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3월 3일의 공격이었다.
첫번째 공격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의 보포트 뇌격기 8대가 선단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하지만 기상 악화로 두 대만이 선단을 발견하고 어뢰 공격을 가했지만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 후 오전 10시, 13대의 미 육군의 B-17 폭격기가 7000피트의 중고도 상공에서 수평폭격을 가했다. 일본 해군 제로 전투기들이 B-17 요격에 나섰고, 폭격기들을 호위하던 P-38과 공중전이 벌어졌다. 잠시 후 B-25 폭격기 부대가 추가로 도착해 역시 중고도에서 폭격을 수행했다. 이 폭격으로 일부 선박에 피해를 입히기는 했지만, 많은 전투에서 그랬듯, 중고도에서의 수평폭격은 큰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덕분에 일본군 선단은 폭격을 회피하느라 대열이 흐트러져 호위 구축함들과 수송선의 거리가 벌어졌고, 효과적인 대공방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공격은 일종의 미끼였다.'''
B-17을 요격하러 나선 일본군 전투기들은 폭격기[9] 및 폭격기를 호위하던 P-38 전투기들과의 전투로 중,고고도에 묶여있었다. 뿐만 아니라 호위함대의 대공화력도 중고도의 폭격기들에 향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 저공으로 또 다른 B-25부대와, 보파이터, A-20 하복 공격기 부대가 들이닥쳤다. 전투기의 원호도 없는데다, 대열이 흩어져 제대로 대공화망을 구성할 수 없던 일본군 선단은, 현지개수로 기수에 12.7mm 기관총 8정을 장착(+ 기체 전방으로 향한 상부 포탑의 2정)한 B-25들과, 20mm 기관포 4문+7.62mm 기관총 6정을 장비한 보파이터들의 기총소사에 그대로 노출되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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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수송선을 공격하는 B-25 폭격기.
이 공격으로 일본군 선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선박 자체의 피해는 물론, 수송선에 타고있던 상당수의 승조원들과 육군 병력이 기총소사에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11] 특히 연합군 폭격기들은 일본 해군 구축함의 함교와 방호가 취약한 대공포좌를 기총소사의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그 결과 대공포좌 상당수가 이 기총소사에 무력화 되었을 뿐 아니라, 구축함에서 함교의 장비와 인원이 피해를 입어 전투능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신나게 기총소사를 퍼부은 후, 연합군 폭격기들은 말 그대로 오리사냥감(sitting duck) 신세가 된 일본군 선단에, 마스트 높이의 초저공에서 물수제비 폭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특히 수송선을 호위하던 구축함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3척이 격침 또는 대파되었고, 나머지도 적잖은 손상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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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A-20 하복 공격기.
오후에도 B-25 폭격기들이 다시 공습을 가했다. 그나마 속도가 빠른 구축함들은 죽어라 도망친 끝에 8척 중 5척 이나마 - 그들도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지만 - 목숨을 건졌지만, 무엇보다 (전날 격침당한 1척을 제외한 남은) 수송선 7척 모두는 이날 공격으로 격침당했다. 사실상 전멸한 것.
그리고 다음 날인 4일 아침에는, B-17 폭격기의 공격으로 생존자 구조 작업 중이던 일본 해군 구축함 한 척이 추가로 격침당했다.
4일, 일본군은 부나의 연합군 비행장에 공습을 가했지만, 피해는 경미했다.[12]
게다가 공습 후에는 3월 14일까지 미 해군의 어뢰정과 전투기에 의한 소탕전까지 이어졌다. 한국에는 보통 이러한 미군의 철저한 생존자 척살을 일본군이 먼저 추락한 미군 폭격기의 조종사를 무참하게 살해한 보복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는 좀 다르다. 연합군 조종사 제임스 머피는 우드무어 중위가 탑승한 B-17이 격추될 당시 일본군이 탈출하는 승무원들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분노해서 일본군 생존자들을 죽이기로 했다고 보고했지만 실은 이미 우드무어의 B-17이 박살 나기 전 이미 연합군 조종사들은 일본군 생존자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하고 있었다.[13] 만약 일본군이 탈출하는 승무원을 공격했다는 것이 학살의 이유라면 일본군 또한 연합군의 기총소사가 먼저였다고 항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연합군은 (일부는 정말 복수심이 있었을지 몰라도) 일본군 기지가 멀지 않으니 생존자들이 빠르게 재합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생존자 소탕을 한 것이다.[14] 일부 연합군 조종사들은 이 명령을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작전 전이든 작전 중이든 생존자들을 남김없이 소탕하라는 명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5] 위에서 언급되었듯 우드무어가 죽기 전에 이미 기총소사를 가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작전 전에 내려진 명령으로 보이는데, 이러면 사실상 복수라는 것은 소탕의 정당성을 갖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던 셈이다. 일반적으로 일본군보다는 미군에 우호적이기 마련인 한국 밀덕계에서는 이를 여과 없이 일본이 먼저 잘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수송선 8척 모두가''', 구축함 중 4척이 '''격침'''되고, 선단 상공을 호위중이던 제로센 6기(3월2일 2기, 3월3일 4기)가 격추되었다.[16] 살아남은 나머지 구축함도 상당한 피해를 입고 호송작전 지휘관인 기무라 제독도 중상을 입었다. 이 와중에도 강운함으로 유명한 유키카제는 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수송선이 죄다 격침되면서 '''3,700여명의 육군이 땅을 밟지 못하고 물고기 밥이 되었다.'''(...) 그나마 이 수치도 필사적인 구조작업 끝에 손실을 줄인 것이다. 게다가 살아남은 표류자들도 육지에 상륙한 자들은 식인풍습이 남아있던(!) 현지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서 끔살당했다. 3월 내내 인간사냥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공습으로 연합군 역시 폭격기 2대, 전투기 4대를 손실[17] 했지만, 일본군이 입은 타격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이 전투가 일본군에 준 여파는 매우 컸다.''' 일단, '''일본군의 뉴기니 방어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미 뉴기니의 동남부 지역을 잃은 상태에서 뉴기니 내륙의 연합군 거점을 제압해야만 뉴기니의 일본군 점령지를 안정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는데, 그 전제조건인 병력 증강/확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 수송작전이 대실패로 끝나자 일본군 수뇌부들은 육군, 해군 너나 할 것 없이 뉴기니 전선이 당장 붕괴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이 당시 일본 육군은 라바울과 솔로몬 제도에 집중하던 해군과 달리 뉴기니 전선에 더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뉴기니 전선 유지에 비상이 걸리자 라바울을 비롯한 솔로몬 제도에 전개했던 일본육군항공대 전력을 모두 철수시키고 뉴기니 일대를 담당하는 웨왁 기지로 재배치시켰다. 그러나, 보급선이 크게 위협받는 상황[18] 에서 전선의 유지는 점점 어려워졌다.
일본 해군의 경우 상술한 라바울 포위 가능성을 더욱 우려하고 있었다. 이 사건 이전에 미군이 과달카날 북서쪽의 러셀제도를 점령하여 전진기지를 만드는 등 솔로몬 제도에서 미군이 반격에 나설 조짐이 조금씩 보였던 판에, 뉴기니 방면의 증원 실패 소식이 들려오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군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항모 함재기들까지 지상기지로 동원[19] 하여 과달카날과 뉴기니 일대의 연합군 기지에 대한 대규모 항공공격(이호 작전)을 단행하였지만, 초라한 전과만 거두고 항공기 피해만 입은 채 실패했다.(1943년 4월 7일~14일) 그러나, 야마모토에게 검증없이 올라온 전과 보고는 터무니 없이 과장[20] 되었고, 이를 그대로 믿은 야마모토는 솔로몬 해역 일대의 일선 항공기지인 부겐빌 섬의 부인기지로 시찰을 나갔다가 암호 해독을 통해 그의 이동을 파악한 미군이 출격시킨 전투기 기습 공격에 의해 사망하고 만다.(1943년 4월 18일)
요약하자면 '''수송작전실패로 인해 불안이 더해진 일본 육군은 황급히 방어태세를 정비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일본 해군은 조급하게 반격에 나섰다가 적의 군세는 꺽지도 못한 채 되려 최고지휘관을 잃게되는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게 된 것이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과달카날 전역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라바울의 포위를 목표로 일련의 거대한 작전(Operation Cartwheel / 수레바퀴 작전)을 이미 수립해둔 상태였고, 1943년 중반부터 솔로몬 제도 일대와 동부 뉴기니 일대에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보급선이 끊긴 동부 뉴기니의 일본 육군은 자신들의 거점이었던 라에와 살라모아에서 계속 저항했지만 결국 1943년 9월에 연합군에 의해 밀려나 버렸다. 야마모토가 죽은 뒤 일본해군 수뇌부의 역량은 더욱 떨어졌고, 솔로몬 제도에서도 일본군은 일방적인 수세에 몰려서 연합군에게 자신들의 점령지를 점점 내주기 시작했다.
'''결국 1943년 말에 이르면 일본군 스스로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되어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대부분의 지역이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다.''' 급기야 라바울이 있는 뉴브리튼 섬에도 연합군이 침공하면서 일대를 담당하는 중요 거점이었던 라바울은 포위당한채 점점 말라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일대의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 육군은''' 1943년 9월에 설정된 절대방위선 안쪽의 방어에 집중하면서 '''사실상 동부 뉴기니 전체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21]
반대로, '''일본해군은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일대가 절대방위선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위선에 미군이 도달하는 시간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이 일대의 방어에 더욱 집착'''하였으나, 일본해군이 이 일대에 정신이 팔려있던 1943년 11월부터 '''미 해군의 진짜 주력이 중부태평양을 돌파하기 시작'''(길버트 제도 침공, 먀셜제도 침공, 캐롤라인 제도 공습)하면서 전황은 크게 뒤집어진다. 특히, 캐롤라인 제도 공습으로 인해 후방기지인 트럭 섬의 해군기지가 박살나 버리자 '''일본 해군이 그토록 매달리던 라바울은 순식간에 군사적 가치를 잃고 말았다.'''[22]
한편, 이 전투 이후 불안정한 제공권하에서 전선으로 이동하는 일본 지상군 병력들이 연합군의 항공기에 의해 떼죽음 당하는 일이 계속 이어지자, 일본 육군은 지상병력에 대한 항공엄호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일본육군은 43년 9월 이후로 일명 '전투기 초중점주의'를 도입하고 육군항공대 전력내 전투기 비중 확대 및 신형 전투기 배치를 꾀한다. 이는 항공력을 앞세운 미군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성격이 다분했다. 반면, 일본해군은 해군 항공대의 체질 전환이 꽤나 늦어져서, 공격기, 폭격기 중심의 전력구조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고, 미군이 일본본토 코앞에 들이닥친 시점이 되어서야 제로센을 대체할 신형 전투기의 개발이 이뤄졌지만 너무 늦었다.
수송작전의 지휘관이었던 기무라 제독은 그가 학교 성적이 낮고 전투 능력이 떨어진다며 무시하고 깔보던 해군 장교들에게 꼬투리를 잡혀 선단 호위 임무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찍히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물론 해당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기무라 제독은 무능력은 커녕 훗날 키스카 섬 철수 작전의 기적을 이뤄 낸 명장이 된 지극히 정상적인 능력있는 지휘관이었고, 이런 사람조차 대응하지 못하고 중상을 입을 정도의 사지로 장병들을 내몰은 일본 육해군 수뇌부야 말로 비정상적이자 무능력의 절정에 다다른 인간들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댐피어 해협(Dampier Strait)의 비극으로 불린다. 70년대 나온 태평양 전쟁 및 구일본군의 해전사와 관련된 부분을 다루거나 한 일본어 서적이 해적판으로 나왔을때 이러한 해적판들에서 단피루(변이음 반영에 따라서는 담삐루)[23] 해전이나 단피루 비극이라는 용어가 대부분 이 사건, 만화 지팡구에서도 언급이 된다.
Battle of the Bismarck Sea
Battle for Australia Association The Battle of the Bismarck Sea
Battle of the Bismarck Sea, 2-4 March 1943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ational Museum of the U.S. Navy, Battle of the Bismarck Sea
Chapter V Battle of the Bismarck Sea
비스마르크해 작전 요도. 검은색 선은 일본군 선단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붉은색 선은 연합군의 공습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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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의 폭격에 피격당한 일본 육군 수송선 켐부마루.
1. 개요
1943년 3월 1일부터 3월 5일까지 비스마르크해[1] 에서 벌어진 해전. 소탕전은 3월 14일까지 이루어진다. 이 해전 결과로 인해(병력 및 물자부족 등의 이유로) 일본군이 뉴기니 방어에 실패하게 되었다.
2. 발단
과달카날 전역이 일본군의 참패로 끝나던 1943년 1월말 무렵, 동부 뉴기니의 동남부 지역인 파푸아 반도 일대에서도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일본군이 축출되고 있었다.(코코다 트랙 전투, 밀른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 과달카날과 동부 뉴기니 동남부를 잃은 일본군은 솔로몬 제도 일대와 뉴기니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미군의 공세에 대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일본군 대본영은 파푸아 반도를 비롯한 동부 뉴기니의 동남부[2] 를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동부 뉴기니 전체를 아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동부 뉴기니 전체가 미군 손에 떨어지는 순간엔 남태평양의 핵심 거점인 라바울이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이에 뉴기니 전역의 일본군은 부나- 고나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해안지대의 라에-살라모아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방어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서 요충지로 떠오른 곳이 와우였다. 라에-살라모아에서 남서쪽 내륙 산악지대에 위치한 와우는 일찍부터 연합군 세력에 들어가 있던데다[3] 비행장도 있어서 라에-살라모아 지역에 대해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뉴기니 일대의 일본군도 이 지역을 계속 주목하고 있었다. 다만, 과달카날 전역과 뉴기니 동남부에서의 격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는 이쪽에 병력을 돌릴 여유가 없었으므로 와우와 해안지대로 통하는 길목만 차단하고 있었지만, 1943년 1월 초에 연대규모의 일본군이 증원되면서 와우지역을 점차 위협하기 시작했다.
부나-고나 전투가 마무리되어가자 미합중국 육군원수 맥아더 장군은 라에-살라모아 지역 공략의 교두보로서의 와우의 가치를 깨닫고는 와우 지역에 대해 대대적인 증원을 명령했다. 같은 시기에 일본군도 와우를 공격했지만 폭격기와 수송기를 동원한 연합군의 증원으로 인해 일본군의 공략이 실패했다. 이 전투를 거치면서 와우는 3000여명의 병력이 주둔한 연합군의 교두보가 되었다.
와우가 본격적으로 연합군의 교두보가 되자, 대본영은 라바울로부터 대규모 해상수송을 통해 라에- 살라모아 지역의 병력을 증강하여 이 일대를 방어하고자, 일본 해군소장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에게 8척의 구축함과 8척의 육군 수송선을 통해 약7,000명의 증원 병력과 물자를 호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솔로몬 일대에서의 수송작전에서 교훈을 얻어서 각 수송선은 필요한 물자의 종류와 인원을 조금씩 나누어서 균등하게 적재하여 만일 수송선이 거의 다 격침당해도 1척만 도달하면 부족하나마 제대로 된 증원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구축함과 수송선의 승조원들도 되도록 이런 종류의 작전에 경험이 많은 자들을 선별했고, 보트와 주정을 많이 적재해서 변변한 항만 시설이 없는 곳에서도 빠른 양륙이 가능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선단을 호위하는 항공기도 100기를 뽑아낼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이 수송작전의 최대 위협은 연합군 항공기들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연합군이 자신들의 의도를 모르는데다 이 일대에서의 연합군 가용 항공전력이 적어서 설령 중간에 들키더라도 집중적인 항공공격을 받지는 않을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미 일본군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으며 일본군의 예상보다 약1.7배의 항공 전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 수송선단을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전술도 가다듬고 있었다.
3. 전개
미 육군 제5항공군에서는 일반 폭탄을 사용해 해상전투를 수행하는 방법을 한참 연구중이였는데, 그러던 중 물수제비처럼 폭탄을 물에 튕겨 함선을 격침하는 물수제비 폭격(원문은 Skip Bombing[4] ) 이라는 방법을 고안했다. 예전부터 초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지표면에 폭탄을 튕겨서 지상목표물의 측면을 타격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이것을 대함공격에 활용한 것이다. 이 당시 미육군항공대의 대함공격 방식은 하나같이 효율이 낮았다. 중폭격기들은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했지만 함선들이 민첩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대부분 명중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 때문에 저공폭격으로 전환하려고 했지만 이 방법의 경우 일본 전투기와 함정의 대공포에 격추당하기 딱 좋았다. 항공뇌격은 당시 미군 어뢰의 낮은 성능과 신뢰성 때문에 공격에 나서는 기체를 저공 저속 조건에 노출시켜야 했으므로 일반적인 저공폭격보다도 더 위험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육군항공대 소속 폭격기들의 대함공격작전 결과가 이 단점들을 모두 보여줬다. 고공폭격은 죄다 빗나갔고, 뇌격에 나섰던 기체들은 작전기의 절반이 격추당했으며, 저공폭격[5] 조차도 기총사격으로 소수의 인명피해를 입힌걸 빼면 이렇다할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연구 끝에 나온 물수제비 폭격방식은 다음과 같다.
목표 전방 600~750m 지점에서 부터 60~75m 고도로 시속 300 중반~400km 속도로 접근하며, 접근 중엔 전방화력을 최대한 퍼부어서 적함의 대공포화를 제압한다. 목표로부터 약 100m 내외 거리에 도달하면 5초 지연신관을 세팅한 225kg 철갑탄 서너발을 연달아 투하하고 고도를 높여 이탈한다.
물수제비 폭격은 수송선이나 구축함 같은 비장갑이거나 경장갑 함선에 대해서 기존의 대함공격 방식보다 압도적인 위력을 보였다. 뇌격과 비슷한 수준의 초저공으로 진입하지만 뇌격보다도 2배 빠른 속도로 목표에 돌진할 수 있었다.[6] 어뢰의 경우, 정상적으로 투하되어 작동하더라도 느린 속력 때문에 목표가 된 배가 회피할 여지가 있었지만, 물수제비 폭격방식으로 투하한 폭탄은 기본적으로 100m 내외 근거리에서 투하되어 폭격기가 달려들던 속도에서 별로 줄지 않은 상태로 어뢰보다 훨씬 빨리 목표물에 달려들었기 때문에 회피기동을 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폭탄이 불발되거나 요행히 빗나가기[7] 만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선체 측면에 폭탄이 명중하기 때문에 현측장갑이 없거나 빈약한 함선은 마치 어뢰에 맞은 것처럼 현측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게 되며, 이는 곧 침몰로 이어졌다. 설령 물수제비뜨기가 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저공 수평폭격이므로 투하된 폭탄이 그대로 명중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통상적인 수평폭격에 비해 명중률도 매우 높았다. 실제로 본 해전에서 물수제비 폭격의 명중률은 약 50%에 달했다.
위험성도 있었다. 물수제비 폭격을 하는 기체는 저공에서 목표물을 향해 직선으로 달려들어야 하므로 목표함선의 대공포화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었다. 때문에, 물수제비 폭격에 나선 기체들은 진입 중 목표함선의 대공포화를 제압하고자 전방 화력을 증설했으며 심지어 상부 포탑도 전방으로 고정해서 쏠수 있게 했다. B-25의 경우, 총 10정의 50구경 중기관총을 전방으로 쏠수 있게 되었는데, 이 화력은 방호가 약한 대공포좌들을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그 외에 폭탄이 일찍 터져서 폭발에 같이 휘말린다던가 너무 저공으로 진입했다가 목표물과 접촉하여 추락[8] 하기도 했으나, 이는 여타 전투행위에서도 발생하는 수준의 리스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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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군의 증원 의도를 파악한 연합군은 일본군의 수송작전을 막기 위해 통상적인 출격도 될수록 자제한 채 수송선단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항공기를 이 근방에 집결시켰기 때문에 항공기의 총수는 338대 이상이었다.
4. 절정
3월 1일에는 수색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선단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3월 2일 일본군 선단이 발견되자, 3일에 걸쳐 보파이터 쌍발폭격기, B-17, B-25로 구성된 200여대의 폭격기와 P-38 라이트닝, P-40 워호크로 구성된 100여대의 전투기에 의한 대대적인 공습이 있었다.
2일 에는, 오전 10시 경, 초계중이던 B-24 폭격기 한대가 수송선단을 발견, B-17 폭격기 편대가 한 시간 간격으로 두 차례의 공습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수송선 한 척이 침몰하고 두 척이 손상을 입었다. 그날 저녁에도 11대의 B-17이 동원되어 폭격을 가했지만, 수송선 한 척에 경미한 피해를 주는 것으로 그쳤다.
일본군 수송 선단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3월 3일의 공격이었다.
첫번째 공격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의 보포트 뇌격기 8대가 선단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하지만 기상 악화로 두 대만이 선단을 발견하고 어뢰 공격을 가했지만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 후 오전 10시, 13대의 미 육군의 B-17 폭격기가 7000피트의 중고도 상공에서 수평폭격을 가했다. 일본 해군 제로 전투기들이 B-17 요격에 나섰고, 폭격기들을 호위하던 P-38과 공중전이 벌어졌다. 잠시 후 B-25 폭격기 부대가 추가로 도착해 역시 중고도에서 폭격을 수행했다. 이 폭격으로 일부 선박에 피해를 입히기는 했지만, 많은 전투에서 그랬듯, 중고도에서의 수평폭격은 큰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덕분에 일본군 선단은 폭격을 회피하느라 대열이 흐트러져 호위 구축함들과 수송선의 거리가 벌어졌고, 효과적인 대공방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공격은 일종의 미끼였다.'''
B-17을 요격하러 나선 일본군 전투기들은 폭격기[9] 및 폭격기를 호위하던 P-38 전투기들과의 전투로 중,고고도에 묶여있었다. 뿐만 아니라 호위함대의 대공화력도 중고도의 폭격기들에 향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 저공으로 또 다른 B-25부대와, 보파이터, A-20 하복 공격기 부대가 들이닥쳤다. 전투기의 원호도 없는데다, 대열이 흩어져 제대로 대공화망을 구성할 수 없던 일본군 선단은, 현지개수로 기수에 12.7mm 기관총 8정을 장착(+ 기체 전방으로 향한 상부 포탑의 2정)한 B-25들과, 20mm 기관포 4문+7.62mm 기관총 6정을 장비한 보파이터들의 기총소사에 그대로 노출되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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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수송선을 공격하는 B-25 폭격기.
이 공격으로 일본군 선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선박 자체의 피해는 물론, 수송선에 타고있던 상당수의 승조원들과 육군 병력이 기총소사에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11] 특히 연합군 폭격기들은 일본 해군 구축함의 함교와 방호가 취약한 대공포좌를 기총소사의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그 결과 대공포좌 상당수가 이 기총소사에 무력화 되었을 뿐 아니라, 구축함에서 함교의 장비와 인원이 피해를 입어 전투능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신나게 기총소사를 퍼부은 후, 연합군 폭격기들은 말 그대로 오리사냥감(sitting duck) 신세가 된 일본군 선단에, 마스트 높이의 초저공에서 물수제비 폭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특히 수송선을 호위하던 구축함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3척이 격침 또는 대파되었고, 나머지도 적잖은 손상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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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A-20 하복 공격기.
오후에도 B-25 폭격기들이 다시 공습을 가했다. 그나마 속도가 빠른 구축함들은 죽어라 도망친 끝에 8척 중 5척 이나마 - 그들도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지만 - 목숨을 건졌지만, 무엇보다 (전날 격침당한 1척을 제외한 남은) 수송선 7척 모두는 이날 공격으로 격침당했다. 사실상 전멸한 것.
그리고 다음 날인 4일 아침에는, B-17 폭격기의 공격으로 생존자 구조 작업 중이던 일본 해군 구축함 한 척이 추가로 격침당했다.
4일, 일본군은 부나의 연합군 비행장에 공습을 가했지만, 피해는 경미했다.[12]
게다가 공습 후에는 3월 14일까지 미 해군의 어뢰정과 전투기에 의한 소탕전까지 이어졌다. 한국에는 보통 이러한 미군의 철저한 생존자 척살을 일본군이 먼저 추락한 미군 폭격기의 조종사를 무참하게 살해한 보복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는 좀 다르다. 연합군 조종사 제임스 머피는 우드무어 중위가 탑승한 B-17이 격추될 당시 일본군이 탈출하는 승무원들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분노해서 일본군 생존자들을 죽이기로 했다고 보고했지만 실은 이미 우드무어의 B-17이 박살 나기 전 이미 연합군 조종사들은 일본군 생존자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하고 있었다.[13] 만약 일본군이 탈출하는 승무원을 공격했다는 것이 학살의 이유라면 일본군 또한 연합군의 기총소사가 먼저였다고 항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연합군은 (일부는 정말 복수심이 있었을지 몰라도) 일본군 기지가 멀지 않으니 생존자들이 빠르게 재합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생존자 소탕을 한 것이다.[14] 일부 연합군 조종사들은 이 명령을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작전 전이든 작전 중이든 생존자들을 남김없이 소탕하라는 명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5] 위에서 언급되었듯 우드무어가 죽기 전에 이미 기총소사를 가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작전 전에 내려진 명령으로 보이는데, 이러면 사실상 복수라는 것은 소탕의 정당성을 갖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던 셈이다. 일반적으로 일본군보다는 미군에 우호적이기 마련인 한국 밀덕계에서는 이를 여과 없이 일본이 먼저 잘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5. 결말과 여파
이로 인해 '''수송선 8척 모두가''', 구축함 중 4척이 '''격침'''되고, 선단 상공을 호위중이던 제로센 6기(3월2일 2기, 3월3일 4기)가 격추되었다.[16] 살아남은 나머지 구축함도 상당한 피해를 입고 호송작전 지휘관인 기무라 제독도 중상을 입었다. 이 와중에도 강운함으로 유명한 유키카제는 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수송선이 죄다 격침되면서 '''3,700여명의 육군이 땅을 밟지 못하고 물고기 밥이 되었다.'''(...) 그나마 이 수치도 필사적인 구조작업 끝에 손실을 줄인 것이다. 게다가 살아남은 표류자들도 육지에 상륙한 자들은 식인풍습이 남아있던(!) 현지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서 끔살당했다. 3월 내내 인간사냥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공습으로 연합군 역시 폭격기 2대, 전투기 4대를 손실[17] 했지만, 일본군이 입은 타격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이 전투가 일본군에 준 여파는 매우 컸다.''' 일단, '''일본군의 뉴기니 방어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미 뉴기니의 동남부 지역을 잃은 상태에서 뉴기니 내륙의 연합군 거점을 제압해야만 뉴기니의 일본군 점령지를 안정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는데, 그 전제조건인 병력 증강/확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 수송작전이 대실패로 끝나자 일본군 수뇌부들은 육군, 해군 너나 할 것 없이 뉴기니 전선이 당장 붕괴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이 당시 일본 육군은 라바울과 솔로몬 제도에 집중하던 해군과 달리 뉴기니 전선에 더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뉴기니 전선 유지에 비상이 걸리자 라바울을 비롯한 솔로몬 제도에 전개했던 일본육군항공대 전력을 모두 철수시키고 뉴기니 일대를 담당하는 웨왁 기지로 재배치시켰다. 그러나, 보급선이 크게 위협받는 상황[18] 에서 전선의 유지는 점점 어려워졌다.
일본 해군의 경우 상술한 라바울 포위 가능성을 더욱 우려하고 있었다. 이 사건 이전에 미군이 과달카날 북서쪽의 러셀제도를 점령하여 전진기지를 만드는 등 솔로몬 제도에서 미군이 반격에 나설 조짐이 조금씩 보였던 판에, 뉴기니 방면의 증원 실패 소식이 들려오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군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항모 함재기들까지 지상기지로 동원[19] 하여 과달카날과 뉴기니 일대의 연합군 기지에 대한 대규모 항공공격(이호 작전)을 단행하였지만, 초라한 전과만 거두고 항공기 피해만 입은 채 실패했다.(1943년 4월 7일~14일) 그러나, 야마모토에게 검증없이 올라온 전과 보고는 터무니 없이 과장[20] 되었고, 이를 그대로 믿은 야마모토는 솔로몬 해역 일대의 일선 항공기지인 부겐빌 섬의 부인기지로 시찰을 나갔다가 암호 해독을 통해 그의 이동을 파악한 미군이 출격시킨 전투기 기습 공격에 의해 사망하고 만다.(1943년 4월 18일)
요약하자면 '''수송작전실패로 인해 불안이 더해진 일본 육군은 황급히 방어태세를 정비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일본 해군은 조급하게 반격에 나섰다가 적의 군세는 꺽지도 못한 채 되려 최고지휘관을 잃게되는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게 된 것이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과달카날 전역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라바울의 포위를 목표로 일련의 거대한 작전(Operation Cartwheel / 수레바퀴 작전)을 이미 수립해둔 상태였고, 1943년 중반부터 솔로몬 제도 일대와 동부 뉴기니 일대에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보급선이 끊긴 동부 뉴기니의 일본 육군은 자신들의 거점이었던 라에와 살라모아에서 계속 저항했지만 결국 1943년 9월에 연합군에 의해 밀려나 버렸다. 야마모토가 죽은 뒤 일본해군 수뇌부의 역량은 더욱 떨어졌고, 솔로몬 제도에서도 일본군은 일방적인 수세에 몰려서 연합군에게 자신들의 점령지를 점점 내주기 시작했다.
'''결국 1943년 말에 이르면 일본군 스스로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되어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대부분의 지역이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다.''' 급기야 라바울이 있는 뉴브리튼 섬에도 연합군이 침공하면서 일대를 담당하는 중요 거점이었던 라바울은 포위당한채 점점 말라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일대의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 육군은''' 1943년 9월에 설정된 절대방위선 안쪽의 방어에 집중하면서 '''사실상 동부 뉴기니 전체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21]
반대로, '''일본해군은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일대가 절대방위선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위선에 미군이 도달하는 시간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이 일대의 방어에 더욱 집착'''하였으나, 일본해군이 이 일대에 정신이 팔려있던 1943년 11월부터 '''미 해군의 진짜 주력이 중부태평양을 돌파하기 시작'''(길버트 제도 침공, 먀셜제도 침공, 캐롤라인 제도 공습)하면서 전황은 크게 뒤집어진다. 특히, 캐롤라인 제도 공습으로 인해 후방기지인 트럭 섬의 해군기지가 박살나 버리자 '''일본 해군이 그토록 매달리던 라바울은 순식간에 군사적 가치를 잃고 말았다.'''[22]
한편, 이 전투 이후 불안정한 제공권하에서 전선으로 이동하는 일본 지상군 병력들이 연합군의 항공기에 의해 떼죽음 당하는 일이 계속 이어지자, 일본 육군은 지상병력에 대한 항공엄호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일본육군은 43년 9월 이후로 일명 '전투기 초중점주의'를 도입하고 육군항공대 전력내 전투기 비중 확대 및 신형 전투기 배치를 꾀한다. 이는 항공력을 앞세운 미군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성격이 다분했다. 반면, 일본해군은 해군 항공대의 체질 전환이 꽤나 늦어져서, 공격기, 폭격기 중심의 전력구조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고, 미군이 일본본토 코앞에 들이닥친 시점이 되어서야 제로센을 대체할 신형 전투기의 개발이 이뤄졌지만 너무 늦었다.
6. 여담
수송작전의 지휘관이었던 기무라 제독은 그가 학교 성적이 낮고 전투 능력이 떨어진다며 무시하고 깔보던 해군 장교들에게 꼬투리를 잡혀 선단 호위 임무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찍히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물론 해당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기무라 제독은 무능력은 커녕 훗날 키스카 섬 철수 작전의 기적을 이뤄 낸 명장이 된 지극히 정상적인 능력있는 지휘관이었고, 이런 사람조차 대응하지 못하고 중상을 입을 정도의 사지로 장병들을 내몰은 일본 육해군 수뇌부야 말로 비정상적이자 무능력의 절정에 다다른 인간들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댐피어 해협(Dampier Strait)의 비극으로 불린다. 70년대 나온 태평양 전쟁 및 구일본군의 해전사와 관련된 부분을 다루거나 한 일본어 서적이 해적판으로 나왔을때 이러한 해적판들에서 단피루(변이음 반영에 따라서는 담삐루)[23] 해전이나 단피루 비극이라는 용어가 대부분 이 사건, 만화 지팡구에서도 언급이 된다.
7. 외부 링크
Battle of the Bismarck Sea
Battle for Australia Association The Battle of the Bismarck Sea
Battle of the Bismarck Sea, 2-4 March 1943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ational Museum of the U.S. Navy, Battle of the Bismarck Sea
Chapter V Battle of the Bismarck Sea
[1] 비스마르크해의 비스마르크는 우리가 알고있는 그 비스마르크가 맞다. 독일의 반대편인 남태평양 가장자리에 생뚱맞게 비스마르크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의외로 이 부근이 한때 프로이센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독일이 한참 잘나가던 19세기말, 세계경영(...)의 큰 꿈을 가진 프로이센이 세계 각지를 기웃거려봤으나 웬만한 지역은 모두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델란드의 식민지가 된 지 오래였고, 어쩔수없이 스페인에게서 뉴기니섬의 일부를 돈주고 사들였다고 한다. 물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이 해외 식민지들이 모두 공중분해되어, 해전이 벌어진 시점에는 독일하고는 아무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2] 부나-고나 일대를 기점으로 동쪽 지역[3] 일본군이 뉴기니에 쳐들어오자 현지인으로 구성된 친 연합군 민병대가 결성되었고, 연합군 병력도 조금씩이나마 증원되고 있었다.[4] 일본에서는 반도폭격이라 표현한다.[5] 사실 저공 폭격이라 하기엔 좀 높은 약 1천미터 고도였다. 전투 막바지에 하와이에서 미드웨이로 증원차 오던 B-17들이 일본함대를 공격했는데, 연료 잔량 때문에 고도를 높이지 않고 그대로 공격했다.[6] 이 당시 미군 항공어뢰 투하조건은 미드웨이 해전 당시의 '''고도 15 m에 진입속도 200 km/h'''라는 막장스런 조건보다는 고도 조건이 쬐끔 나아졌지만 여전히 까다로웠다.[7] 폭탄이 너무 튕겨올라서 함선 너머로 지나가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8] 실제로 훈련중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9] 날아다니는 요새라는 별명에 맞게 충실한 방어포탑과 튼튼한 설계로 폭격기를 요격하러 나온 전투기들이 반대로 격추당하는 사태도 상당히 많았다. [10] 이 와중에, 일본군 선단은 저공으로 돌입하는 보파이터 폭격기들을 외형히 흡사한 보포트 뇌격기로 오인했다. 물론 이 전투에 앞서 보포트 뇌격기로부터 어뢰공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군 선단은 어뢰공격에 노출면을 감소시키기 위해 보파이터들이 진입하는 방향으로 선수를 돌려 세로 대형을 취했다. 그런데 이 또한 연합군의 낚시에 걸린 것이었다. 보파이터 부대는 뇌격으로 착각하라고 일부러 뇌격코스로 진입했던 것. 덕분에 그나마 대열이 흐트러져 효율이 떨어진 대공화력이 더 비효율적인 상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총소사로 일렬로 죽 긁고가기 딱 좋은 표적이 된 것이다.[11] 수송선에 타고 있던 일본 육군 병력들이 공격해오는 연합군 폭격기들을 향해 소총으로 대항하려다 기총소사에 몰살당하는, 영화 같은 장면도 벌어졌다고 전해진다.[12] 남서태평양 연합군 항공대를 지휘하던 태평양 지구 미 육군 제5항공군 사령관인 육군 중장 조지 C. 케니 장군은, 그의 메모에서, 이날의 일본군의 보복 공습에 대해 기록하며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짓'(원문은 '마구간의 말을 도둑맞은 다음에 after the horse had been stolen from the barn'이다)이라 말하며, "일본군 항공 사령관이 바보라는 게 정말 다행이다. (공습에 동원된) 저 백대의 비행기들이 지난 3일, 수송선단의 머리 위에서 벌어진 대 전투에 투입되었다면, 우리의 임무는 무척 힘들어졌을 텐데 말이다"라고 비웃었다. 다만 일본군은 선단호위에 가용 전투기 전력을 모두 투입하였고, 4일의 편대는 폭격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선단호위에 투입됐다 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므로 가용한 항공전력이 있음에도 수송선단이 궤멸해버리고 전투가 끝난 다음에야 연합군 비행장을 공격한 것을 비웃는 뜻 정도로 보면 옳을 것이다. 그에 반해, 연합군은 바로 3월 3일 전투 당일에, 일본군의 항공엄호를 약화시키기 위해 20여기의 A-20 하복 폭격기를 동원해 라에의 일본군 비행기지를 공격했었기 때문이다.[13] In fact, Allied aircrews had commenced strafing survivors immediately after the initial attacks—before the loss of Lieutenant Moore’s plane. And aircrews who hadn’t witnessed Japanese fighters fire on the Americans in their parachutes also participated in the strafing of Japanese survivors. 출저[14] Gillison, Douglas (1962). Royal Australian Air Force 1939–1942. Canberra: Australian War Memorial[15] johnston, mark (2011). Whispering Death: Australian Airmen in the Pacific War. Crows Nest, New South Wales: Allen & Unwin. ISBN 978-1-74175-***-3.[16] 2일- 252공 이치히라 비장 행방불명, 252공 노다 이비조 불시착후 구조, 3일- 즈이호 비행대 단죠 상비조 피격추 전사, 즈이호 비행대 마키 비장 Moore중위의 B-17과 충돌 전사, 204공 야토 비장 불시착후 구조, 204공 니시야마 이비조 행방불명, 영어권 위키 비스마르크해 해전에 있는 Fortress Rabaul: The Battle for the Southwest Pacific, January 1942 – April 1943, 페이지 313 출처에서는 손실 7기 손상 3기[17] 3일- 43rd BS B-17 Moore 중위 마키기와의 충돌과 탈출에 성공한 승무원은 기총소사로 전원 전사, 90th BS B-25 파일럿 불명 착륙 중 추락, 39th FS P-38F Faurot 중위 행방불명, 39th FS P-38F Eason 중위 행방불명, 39th FS P-38F Shifflet Jr. 중위 행방불명, No.30 SQ Beaufighter Jones 중위 불시착 구조[18] 뉴기니 섬은 그 지형적 특성상 동부와 서부가 사실상 갈라진 상태였기 때문에 보급은 라바울을 경유하는 해상 수송에 의존해야 했다.[19] 상술한 바와 같이 그때까지 솔로몬 제도의 항공전력을 담당하던 한 축이었던 육군항공대 전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면서 이 일대의 일본군 항공전력이 약화된 사정 때문에 항모기동부대의 반발을 자신의 지위로 억누르며 동원했다.[20] 약 30척에 달하는 함선과 180대에 달하는 항공기를 파괴했다고 보고되었지만, 실제 연합군의 피해는 7분의 1에 불과 했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빠른 진격에 비해 방어태세 정비가 늦어져서 1944년 초중반에 맥아더 군의 서부 뉴기니 침공때엔 이 일대에 대한 추가 증원을 포기하였다.[22] 미군이 라바울을 직접 공략했다면 태평양상의 미 지상군을 묶어두기라도 했겠지만, 현명하게도 미군은 라바울을 포위만 한 채 그대로 건너뛰어 버렸다.[23] 비슷한 오역으로는 <담피르>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있다. 항목 참조. 심지어 이 캐릭터는 영미권에서도 오역된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