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밴 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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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 육군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최종 계급은 미합중국 육군 대장.
6.25 전쟁 당시에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직을 맡은 이후 대한민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한국군의 현대화와 미국의 원조에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 퇴역 이후에도 종종 방한했으며, 미국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고 평생 한미관계 발전에 헌신하였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행적
제임스 밴 플리트는 1892년에 뉴저지 주 코이테스빌(Coytesville)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네덜란드계이다. 5대조인 얀 아드리안선 판 블리트(Jan Adriansen Van Vliet) 대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민 온 집안의 후손이다. 밴 플리트(Van Fleet)는 후대에 네덜란드식 판 블리트(Van Vliet)을 의미만 살려 영어식으로 바꾼 것이다.[1] 그러다가 점점 가세가 기울어 조부 대에는 오하이오의 빈농으로 전락했다. 부친 윌리엄 밴 플리트(William Van Fleet, 1833~1919)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릴 적에 단신으로 시카고로 출향한 뒤에 각종 막일을 하며 번 돈으로 사업을 벌여 자수성가했다. 그러나 1871년 시카고를 잿더미로 만든 시카고 대화재 때 큰 재산 손실을 보며 위기를 맞았다. 이후 아직 덜 개발되어 있던 플로리다로 건너가 철도 건설사업을 벌였으나 여기서도 큰 재미는 보지 못했다.# 제임스 밴 플리트는 이렇게 사업 실패로 허덕이던 시절에 낳은 막둥이 아들[2] 이었다. 제임스의 출생 직후 아버지 윌리엄은 재기의 꿈을 접고, 가족을 이끌고 철도 건설사업으로 친숙해진 플로리다로 이주하여 소소한 말년을 보냈다. 이 때문에 제임스 밴 플리트는 플로리다에서 줄곧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3]
제임스 밴 플리트는 1911년에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1915년에 졸업하였다. 재학 당시에는 미국육군사관학교 미식축구 팀에서 풀백으로 맹활약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 1915년 졸업 기수는 미국육군사관학교 역사상 가장 화려한 기수로, 원수 2명(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 대장 2명(밴 플리트, 조지프 맥나니)을 포함해 졸업생도 164명 중 59명이 장군이 되어 이른바 별들의 기수라고 불린다. 미 육군 보병 장교로 임관 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퍼싱 장군이 이끄는 미국 유럽 원정군의 일원으로 파병되어 보병대대(제17기관총대대) 대대장을 역임하였다.[4]
이후 전간기에는 미국 내 여러 대학의 학군단 단장을 맡았다. 캔자스 주립 농업대학, 사우스다코타 주립대학을 거쳐갔고, 플로리다 대학교 학군단을 이끌 당시인 1921~24년에는 플로리다 대학교 미식축구부 감독까지 맡기도 했다. 그 후에는 파나마 운하를 경비하는 제42 보병연대의 예하 대대장을 지낸 뒤, 조지아 주 포트 베닝의 육군보병학교에서 교관으로 복무했다.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메인 주 포트 윌리엄스의 제5보병연대, 제29보병연대의 대대장 등을 역임하며 순탄한 경력을 쌓아갔고, 1941년 2월에는 제8보병연대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비록 이 평화 시기에 두드러진 활약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부임했던 모든 부대에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육군보병학교에서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기관총 소대를 지휘한 경험 덕분에 최신 화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이동할 수 있는 병력의 가능성을 예견하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전간기 육군보병학교 교관 시절에 그의 경력을 두고두고 꼬이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이 무렵 육군에는 알코올 의존증으로 골칫거리인 장교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장교 이름이 밴 플리트와 비슷했다. 문제는 당시 육군보병학교 부사령관 중 한 명이던 조지 마셜이 밴 플리트의 이름만 보고 바로 그 주정뱅이 장교로 오인하고 말았던 것.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셜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중용되어 육군 전체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승장구했지만, 이때 뇌리에 박힌 밴 플리트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지 못하고 계속 갖고 가고 말았다.
이 오해는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미 육군이 대대적으로 확장되면서 밴 플리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부대가 대거 창설되고 지휘관 수요가 폭증하자 그의 동기, 선후배들은 빠르게 진급하며 높은 보직을 맡기 시작했는데, 누구보다도 유능한 지휘관으로 꼽히던 그는 대령 계급, 제8 보병연대 연대장 직위에서 전혀 진급도, 보직 이동도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이나 전쟁대학 같은 최고위 지휘관 양성과정 입교도 이뤄지지 못했다. 상급 지휘관들이 밴 플리트를 추천해도 최종 단계에서 마셜이 계속 탈락시켰기 때문이었다. 굉장히 억울했지만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그저 안습일 따름이다.
결국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될 때까지도 3년 넘게 그는 대령 계급의 제8 보병연대 연대장이었고, 이때서야 실전에 투입되어 유타 해안에 상륙했다. 여기서도 그는 탁월한 지휘관의 자질을 발휘해 셰르부르 함락 당시 뛰어난 전공을 세웠는데도 여전히 진급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를 두고 보다 못한 밴 플리트의 육사 동기이자 유럽전선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는 마셜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왜 밴 플리트가 계속 진급에서 누락되는지를 물었다. 마셜은 그러자 밴 플리트가 알콜중독자여서 그렇다고 대답했고, 아이젠하워는 깜짝 놀라서 밴 플리트는 술을 안 마신다고 이야기를 해줬다. 그제서야 마셜은 비로소 자신이 밴 플리트를 다른 장교와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이에 동기였던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는 이미 1941년에 준장 계급을 달고 1944년에는 3성, 4성장군으로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당장 그의 제8 보병연대의 상급부대였던 제7군단의 군단장 로턴 콜린스 소장[5] 은 2년 후배(1917년 졸업)였고, 같은 사단(제4 보병사단) 소속인 제12 보병연대 연대장 러셀 리더는 무려 9년 후배(1920년 입학, 1926년 졸업/임관)였다. 물론 사단장 레이먼드 바턴 소장은 5년 선배(1912년 졸업)였으니 꼭 터무니 없는 계급과 보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간 밴 플리트가 보여준 능력과 주변의 높은 평가를 감안하면 억울한 이유로 인정을 못 받은 것도 분명하다.
본인의 실수로 유능한 지휘관의 앞길을 망친걸 깨달은 마셜은 이후 부랴부랴 기회가 될 때마다 밴 플리트를 진급시켰다. 1944년 8월 1일에 드디어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2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을 맡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90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한다. 이어 11월 15일에는 다시 소장으로 진급한다. 벌지 전투 후반부에 그는 후방 부대인 제23군단[6] 군단장으로 잠시 있었으며, 전쟁 말기인 1945년 3월 17일에는 다시 최전선으로 나와 제3군단 군단장에 부임하였다. 그는 레마겐 교두보에서 미 육군 제1군의 저돌적인 돌파작전을 이끌어 이른바 루르 포위전의 한 날개를 완성하고, 서부전선의 독일군의 전투력을 분쇄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이후 4월 17일부터는 군단을 이끌고 패튼 장군의 제3군 소속으로 독일 남부를 소탕하는 임무도 성공리에 완수하였다. 제90보병사단과 제3군단 사령관 당시의 활약은 저돌적인 패튼 장군에게도 큰 인상을 주어, 그는 밴 플리트가 '''자신이 거느려본 부하 장군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며 극찬했다고 한다.
유럽전선 종전 이후에는 태평양전선에서 일본 상륙 준비를 위해 제3군단 사령부를 이끌고 미국 루이지애나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원폭 투하로 일본도 이내 항복하자, 루이지애나에서 1946년 2월까지 군단장으로 대기하다가, 이후 미국 국내에서 전후 정리 작업(전시 편성된 부대의 해체, 재배치 등)을 수행하였다.
2.2. 그리스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간의 이념 대립 즉 냉전이 시작되고 유럽 각지에서 공산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자,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많은 유럽 우방국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밴 플리트는 1947년 12월 프랑크푸르트의 미 육군 유럽지구 사령부에 부참모장 직을 맡아 나와있다가, 당시 공산화 위협에 시달리던 그리스의 군사고문단장으로 파견된다.
당시에는 공교롭게도 마셜은 트루먼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영전했고, 아이젠하워가 육군 참모총장을 지내고 있을 때였다. 마셜은 1948년 1월 아이젠하워에게 그리스 군사고문단장 후보를 추천하도록 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5명을 추려 보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밴 플리트였다. 아이젠하워는 그의 추천 사유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유일하게 연대장부터 군단장까지 모두 경험'''해 본 현직 장교[8] 이다. 그는 지적인 타입은 분명 아니지만, 직설적이고 단호하며 누구라도 존경하게 만드는 전투이력을 갖고 있다."라고 적었다. 뜨끔한 마셜은 추천받은 장군들 가운데 밴 플리트를 낙점하고, 2월 5일에 그를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눈 뒤 곧장 최대한 빨리 그를 정규 중장으로 진급시켜 그리스로 보내라고 '''강력히 권고'''한다. 이후 일사천리로 다음 날인 2월 6일에 육군성은 군사고문단장 인사 발령을 내고, 그 다음 날인 2월 7일에 대통령 명의로 중장 진급을 발표한다.
아이젠하워의 추천 의견에도 나오듯이, 그는 참모를 역임한 경험도 없고 정치 경험도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과감한 성격과 추진력을 발휘하여 막장 상태였던 그리스군의 혼란을 잘 수습해냈다. 시원시원한 강골 무인의 성격이 맞아서인지 당시 그리스군에 현역으로 복귀한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Alexandros Papagos) 장군[9] 과도 돈독한 사이였다고 한다. 파파고스는 1940년 나치 독일의 침공 당시 그리스군 육군 총사령관이었고 이후 레지스탕스 운동도 이끌어 이미 65세가 넘은 노회한 인물이었으나, 그리스 내전에 직면해 현역으로 복귀해 1949년 다시 육군 총사령관을 맡아 그리스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신기하게도 파파고스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밴 플리트는 그리스어를 할 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눈빛과 몸짓, 짧은 단어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은 밴플리트 장군이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고 한다.
미국은 그리스 내전에서 밴 플리트를 위시한 250여 명의 군사 고문단과, 4억 달러에 이르는 군사 원조를 퍼부어서 결국 그리스의 공산화를 저지해냈다. 이 과정에서 밴 플리트는 다시 한 번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다. 다만, 당시 전황상 불가피했던 이유로 실패한 작전 등에 대해서도 그리스군의 무능함을 과하게 책망한 경우가 종종 있어서 나중에 다소 안 좋은 평을 듣기도 하였다.
2.3. 6.25 전쟁의 활약
이후 1950년 8월에 메릴랜드에 주둔 중이던 제2군 사령관을 역임하다가, 1951년 4월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제8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10] 그가 부임한 직후 대한민국 국군 최악의 흑역사 현리 전투가 발생했고 국군 제3군단은 밴 플리트 장군의 손에 해체당했다.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밴 플리트 장군은 나름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공산군에게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있었다는 점이다. 유엔군은 확전을 피하기 위해서 중국과 소련의 영토는 공격하지 않았는데, 정작 공산군의 전쟁 물자는 여기서 생산되고 있었으므로 유엔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는 그리스 군사고문단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당시에는 그리스군만 이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었을 뿐, 그리스 내전만 종식시키는 것이 임무였던 밴 플리트 장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무지막지한 물량공세에 맞서기 위해 '''밴 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이라는 전술을 창안하기도 했다. 이것은 '''밴 플리트 포격'''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둘 다 종군기자들이 이 전술을 목격하고 붙인 명칭이었다.
1951년 5월에 벌어진 중국 인민지원군의 5차 공세 때 전선사수 명령과 함께 그가 택한 방식은 화력제압이었다. '''바로 포병의 탄약통제보급율을 5배로 늘려 이른바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05mm 포는 300발, 155mm 포는 250발, 8인치 포는 200발, 175mm 포는 250발을 쏘며 중공군의 사상률을 높였는데, 덕분에 중공군의 5차 공세는 빠른 시일 내에 좌절되었고 그 후 중공군이 자랑하는 '보병 산악 기동전'도 시야가 제한된 야간에만 쓸 수 있을 정도로 제한당했다. 게다가 이 '밴 플리트 탄약량'에 힘입어 미군은 적이 있거나 이용할만한 모든 곳을 초토화시켰는데, 미군 조종사들이 공중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는 "더 이상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들 할 정도였다.
한편 밴 플리트가 미군이 작전 시 규정한 탄약의 사용 한도를 5배나 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의회의 일부 의원이 그의 전적을 칭찬하기는 커녕 그가 혈세로 만든 탄약을 필요 이상 펑펑 날리고만 있으니 의회에 출석시켜 질의를 받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밴플리트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의원들보고 여기 와서 적군 시체랑 포로들 좀 보라고 해. 오지 않을 거라면 '밴 플리트 탄약량'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해!"'''라고 일갈했으나, 상황이 상황이고 미국도 포탄 가격보다 인명을 중시하는 나라였기에 그가 의회에 출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11] (출처 - 왕수쩡의 《한국전쟁》)
아무튼 5차 공세 이후 중공군은 보병을 이용한 기동전을 포기하고 한국전쟁 중후반부터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지전에서 야음을 틈타 공격준비사격 후 축차 투입으로 일관하게 된 것도 밴 플리트 장군이 펼친 화력공세의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여간 불리한 머릿수를 그에 상응하는 화력으로 보완해 전황을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이끈 점을 인정받은 밴 플리트는 1951년 7월 31일 드디어 대장으로 진급한다. 그는 여세를 몰아 1951년 중반에 전선을 평양~원산 선까지 밀어붙이고 싶어했으나(맹조의 발톱 작전), 이미 6.25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휴전회담에 돌입한 미군 수뇌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대신 밴 플리트는 제한된 목표에 한해 '전투정찰' 명목으로 유리한 전선 확보를 위한 일련의 작전들을 기획한다. 이 과정에서 양구 해안분지(펀치볼) 일대에서 펀치볼 전투, 가칠봉 전투 등이 전개된다. 이외에도 밴 플리트는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 하였으나, 1951년 10월 25일에 휴전회담이 재개되면서 유엔군 사령부 명령으로 모두 취소된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후 대규모 공세가 불가능해지자 한국군의 양적,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한국군의 문제점을 "우수한 장교 인력 및 사단급 이상의 대규모 군사훈련의 부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1951년 10월 경상남도 진해에 육군사관학교 건물을 신축하여 한국군의 정예화를 꾀했다.
이후 밴 플리트 장군은 1953년 1월 말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의 직위를 맥스웰 테일러 중장[12] 에게 이임하고[13] 미국 본토로 돌아왔으며, 2달 후인 3월에 전역하여 38년간의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3. 아들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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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Alward “Jimmy” Van Fleet, Jr. (1925~1952)
한편 밴 플리트는 6.25 전쟁에서 외아들을 잃는 안타까움을 겪기도 하였다. 밴 플리트 장군의 외동아들인 제임스 A. 밴 플리트 주니어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48년 6월에 졸업하자마자 이본 루이스(Yvonne Cloud Lewis, 1927~2000)와 결혼하였다. 밴 플리트는 아들도 보병 병과로 가길 바랬다고 하나, 아들은 항공 병과를 지원해 신설된 미 공군 소속으로 임관한다. 6.25 전쟁 당시 신혼이었고 갓난 아들(제임스 밴 플리트 3세, 1949~2008)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돕기 위해 참전하였다.
그는 제3폭격비행단 제13폭격비행대대 소속의 공군 대위로 B-26 폭격기를 몰고 북한 후방의 보급로를 공격하는 작전을 주로 수행했다. 1952년 4월 3일 밤에 그는 3번째 야간 작전 비행에 나섰는데, 목표는 평안남도 순천의 철도시설이었다. 그러나 이날 밤 목표 상공에는 짙은 안개와 구름이 끼어 공격이 불가능했고, 4일 새벽 3시 15분에 연료가 부족하니 다른 목표를 공격하겠다는 교신을 끝으로 소식이 두절되었다. 북한의 대공포화에 격추되었는지, 연료가 떨어져 북한 지역에 불시착했는지도 불분명했다. 이에 4월 4일 및 5일에 걸쳐 수백 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어 폭격을 겸한 대대적인 수색 작전이 벌어졌으나, 불필요한 희생을 우려한 밴 플리트 대장의 명령으로 5월 밤에 모두 중지되었다. 결국 끝내 행방이 밝혀지지 않아 밴 플리트 주니어 대위는 실종 처리되었다.
이후 밴 플리트 대장은 아들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옥구 비행장을 가끔 방문했다. 옥구 비행장에서는 기지 사령관의 배려로 공군 조종사 막사 내 밴 플리트 주니어가 쓰던 침실에 그의 유품을 그대로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전선의 최고 사령관인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특별대우하지 않고 전선에 내보내는 솔선수범의 사례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례. 그런데 당시 미군을 상대한 중국 인민지원군 측에서도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도 당시 신혼의 몸으로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기 때문에, 양군 사이에 공통점이 생긴 셈이다. 다만 마오안잉의 경우 최전선에 투입된 것은 아니고, 후방에 위치한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하다 폭격으로 사망했다.[15]
2016년 6월 24일 KBS1에서 방영한 KBS 스페셜 제547회 〈장군과 아들: 한국전쟁의 기억〉에서 이들 밴 플리트 부자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2020년 9월 16일에는 밴 플리트 대장의 외손자인 조 맥크리스천 주니어(Joe McChristian, Jr.)가 주 LA 한국 총영사관이 주최한 온라인 세미나에서 밴 플리트 주니어가 실종된 뒤 사실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중국과 소련으로 끌려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을 제시하였다. 명확한 근거는 밝히지 않았으나, 조 맥크리스천 주니어의 아버지이자 밴 플리트 대장의 사위로서 미 육군성 정보참모부장을 지낸 바 있는 조셉 맥크리스천(Joseph Alexander McChristian, 1914~2005) 소장[16] 에게 생전에 들은 내용이라고 하니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저 정도 거물(?)을 포로로 잡았다면 좋은 선전감이나 협상 카드로 쓸 수 있었을 것인데 소리소문 없이 죽었다는건 좀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문답무용으로 처형하는 북한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중국이나 소련 정도면 협상카드로 쓸 시도 정도는 하는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17] 아마 부상이나 질병 등으로 소련으로 끌려간 직후 사망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 부분은 추가적인 조사를 해봐야 확실하게 결론이 나올듯.
4. 퇴역 이후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3월 31일에 군에서 퇴역했다.[18] 당초 퇴역 직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에게 주한미국대사를 맡기려 하였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6.25 전쟁을 끝내고자 정전협정을 밀어 붙이고 있었는데, 분단 고착화를 이유로 이를 완강히 거부하는 이승만을 설득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밴 플리트는 아이젠하워와는 육사 동기이고, 이승만과도 의기투합한 사이로 양국 대통령 모두와 긴밀한 관계였기에 적임자로 꼽혔던 것이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본인도 정전에 반대하는지라 소신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다며 이를 고사하였다. 이후 굵직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기에 지역 사회에서 플로리다 주지사 출마 제안도 여러 차례 받았으나, 본인은 정치에 뜻이 없다며 이 역시 고사하였다. 플로리다에선 목장을 운영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퇴역 후에도 이승만과 밴 플리트의 끈끈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이승만은 얼마나 밴 플리트를 신뢰했는지 1954년 3월 11일에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군을 35~4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동아시아 반공 국가들의 지상군 훈련을 위해 밴 플리트를 다시 파견해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당연히 아이젠하워는 난색을 표했지만, 대신 극동 지역 우방국에 대한 군사원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특사로 그해 5월에 밴 플리트를 파견하였다.[19] 이때도 밴 플리트는 한국 육군을 기존 20개 사단에서 30개 사단으로 증강할 것을 권고하며 한국측 입장을 최대한 뒷받침해줬다. 이런 깊은 친분으로 인해 밴 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절 생일 축하 겸 미국 민간기업과의 사업 중개 등의 목적으로 연 1~2회 꼬박꼬박 한국을 방문했다.
- 1954년 5월 6일, 군사원조 문제 협의를 위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내한 (대한뉴스 제40호 밴 장군 내방)
- 1955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내한 (대한뉴스 제54호 리 대통령 각하 제80회 탄신 경축)
- 1955년 9월 23일, 한·미재단(American-Korean Foundation)의 명예 이사장 자격으로 내한하여 육사 졸업식 등에 참석 (대한뉴스 제67호 밴프리-트 장군 내방)
- 1956년 5월 5일, 내한하여 구호주택 건설 상황 등을 시찰하고 5월 26일에 귀국 (대한뉴스 제82호 밴푸리-트 장군 내방, 대한뉴스 제84호 밴푸리-트 장군 귀국)
- 1957년 3월 25일, 내한하여 제주도 개발 상황 등을 시찰
- 1958년 2월 6일, UN군 사령관의 초청으로 내한하여 2월 26일에 귀국 (대한뉴스 제151호 '밴' 장군 내방)
- 1958년 9월 29일, 내한하여 제주도 개발 상황 등을 시찰 (대한뉴스 제183호 경무대 소식)
- 1959년 9월 22일, 내한하여 경무대에서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수훈 (대한뉴스 제233호 경무대 소식)
- 1960년 3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의 85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내한 (대한뉴스 제258호 경축 리 대통령 각하 제85회 탄신)
이외에 이승만 정부의 제주도 국립목장(송당목장) 개발 사업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이 사업은 변변한 산업이 없던 제주도의 개발과, 70만명이 넘던 한국군의 급식 개선을 명분으로 했다. 실제 당시 한국군은 거대한 규모로 팽창했으나 보급 상황은 형편 없어서 각종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던 상황이었다. 밴 플리트는 나름 한국을 돕겠다는 취지로 플로리다에서 우량한 품종의 소를 구입하여 제주도로 보내 대량 사육하자는 계획을 자문하고, 미국측 파트너로 직접 참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플로리다 현지 소값은 마리당 100달러 정도이나, 한국까지의 운송비가 300~400달러씩이나 들어 경제성이 그다지 높지 않음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당초 계획에 비해 들여온 소는 소수에 불과했다. 구좌읍 송당리에 마련한 목장 부지 또한 사유지를 임대료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사용하는 바람에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이승만 하야 이후에는 사업 자체가 적폐로 몰리고 정부 지원이 끊겨 표류하게 되었고, 1963년 1월에 목장은 민간에 불하되고 만다.#1#2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밴 플리트의 사업 수완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승만과의 이런 우정이 지나친 나머지, 4.19 혁명이 일어나자 그 의미를 폄하한 흑역사도 있었다. 밴 플리트는 4.19 혁명 발생 소식을 듣고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였으며, 한국 국민이 자유에 수반되는 책임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5.16 군사정변에 대해서는 극히 우호적인 시각을 보이며 재빨리 강력한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후 박정희 집권기에도 밴 플리트는 한국과의 교감을 이어가며 꾸준히 방한하고 지원 활동을 이어갔다.
1964년 8월에는 전사한 아들의 유족인 며느리 이본 클라우드 밴 플리트와 친손자 제임스 밴 플리트 3세를 데리고 내한하여, 그해 19주년 광복절 기념식에 함께 참석했다. 또한 1965년 7월 19일에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사망하자, 그의 유해를 미 의장대 특별기 편으로 옮길 수 있게 주선하고, 고국의 땅에 묻힐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생전 마지막으로 내한한 것은 1975년 9월로, 이 때 국군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내한하여 김종필 총리 및 역대 육군 참모총장 등 각계 인사들과 만찬을 가졌으며, 박정희 대통령도 예방했다.
이처럼 밴 플리트는 6.25 전쟁 이후 별다른 교류가 없던 다른 미군 장성들과 달리, 대한민국의 발전을 돕기 위한 헌신적인 활동을 이어갔다.[20] 특히 1957년에는 미국 최초의 한국 관련 비영리단체인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여, 미국과 한국 사이의 우호 증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플로리다 자택의 집무실 이름을 '한국의 방'이라고 짓기도 하고, 평소에도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자주 이야기하며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에 대해 자랑스러워 했다고 전해진다. 1988 서울 올림픽에도 꼭 참석하고 싶어 했으나, 당시 96세의 고령으로 주치의가 장거리 여행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만류하여 뜻을 접었다고 한다.[21]
1984년 1월에는 부인 헬렌 무어(Helen Hazel Moore, 1892~1984)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후 1984년 11월에 6.25 전쟁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버지니아 히긴스(Virginia Skinner-Higgins Wells, 1919~1986)와 재혼했으나[22] , 1년 반만인 1986년 4월에 다시 사별했다.
1992년 3월 19일에는 폴크 시티의 '자유 공원(Freedom Park)'에서 1000명이 넘는 축하객이 참석[23] 한 가운데 100세 생일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콜린 파월 합참의장의 경축사가 대독되었고, 대한민국에서도 한광덕 주미한국대사관 국방무관이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축전을 전달하였다.
밴 플리트는 이후 기력이 점점 쇠약해진 끝에 1992년 9월 23일, 자고 있던 도중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버지니아 주의 포트 마이어에서 장례식을 치른 뒤,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창설자 밴 플리트 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1995년부터 한미관계의 우호 증진에 기여한 사람에게 제임스 A. 밴 플리트 상을 수여하고 있다.
5. 기타
- 명망 높은 전쟁 영웅이지만 육군사관학교 시절 성적은 중간보다 조금 낮았다고 한다. 동기생인 아이젠하워는 중간 정도였다고.
- 퇴역 후 인터뷰에서 이승만을 존경한다고 말했으며, 많은 지혜와 경험을 가진 대통령이었다고 치켜세웠다. 이승만 입장에서도 미군 수뇌부 중 북진을 주장하고 한국군 증강에도 매우 호의적이었던 밴 플리트는 매우 든든한 후원자였으니 둘의 사이가 꽤 좋았다.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국군의 증강을 호소하는 이승만을 보면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 한국에 대한 애정도 많아서 퇴역 이후 그의 농장을 찾아 오는 한국인이 있으면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반갑게 맞이해주었다고 한다. 본인도 한국이 제 2의 조국이라고 밝혔고 집무실의 이름도 한국의 방으로 했고 그곳에는 본인이 내한할 때 찍은 사진, 한국 골동품 등이 가득했다.
- 반공포로 석방 사건 당시에는 이미 퇴역한 지라 한국에 없었지만 반공포로 석방에 찬성했으며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 한국에 있을 때 한식을 즐겼는데 퇴역하고 나서도 쌀밥이 있는 한국식 식단을 즐겨 먹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산 쌀밥이 한국에서 먹었던 쌀밥과는 맛이 좀 달라서 한식의 맛을 제대로 못 내는 것 같다며 다소 아쉬워했다.
-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 밴 플리트는 고착화된 전선을 북상시킬 목적으로[24] 아이젠하워에게 미군의 증강 없이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세부적인 작전 계획도 발표했다. 당시에 대화 분위기가 좋아 본인도 곧 북진이 승인될 것으로 믿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인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회고했다. 계획이 승인되지 않은 이유로 밴 플리트는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오마 브래들리가 반대 의견을 피력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 압록강으로 재진격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많았는지 퇴역한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당시 연합군은 충분히 북진통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워싱턴 정부가 압록강 진격을 허락하지 않아 북한이 존속하여 지금까지 불리한 결과를 낳았고 이는 크나큰 실책이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 중공군이 참전했을 때 만주에 전술 핵무기를 쓰자는 맥아더의 계획에 처음에는 찬성했다고 밝혔다. 적정한 장소에 핵무기를 투입하면 조기에 전쟁을 끝내 수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25] 그러나 이 경우 소련이 맞대응으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말란 법이 없었고 3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이 있었기에 나중에는 생각이 바뀌었으며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도 결과적으로 옳았다고 밝혔다.
- 여러모로 맥아더와 비교도 되는 인물인데 실제로 그는 전투에 있어 맥아더처럼 공격적인 성향에 가까웠다. 본인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적이 공격해올 때 방어하는 그런 성향이 아니라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혔다.[26] 이러한 공격적인 성향 때문에 나중에 맥아더처럼 정치하려고 저러느냐는 주변의 시선도 받았다고 한다. 다만 맥아더와는 달리 밴 플리트는 상부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단 군인인 이상 그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워싱턴과 불협화음을 불러 일으켰던 맥아더와는 달리 상부와 크게 마찰을 빚는 일은 없었다. 본인도 군인들은 선출된 민간 지도자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여러번 밝힌 적이 있다.
- 부정적으로는 현재 한국 군대에서 구시대적 악습이라는 비판을 받는 직각식사를 한국에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밴 플리트 장군의 주도로 1952년 진해에 4년제 정식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는데 당시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의 제복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사관학교 문화를 일단 그대로 이식했다. 이 와중에 직각식사까지 도입한 것. 물론 고체 위주의 미국 식사와 달리 밥과 국물로 이루어진 한국 음식의 특징 덕분에 국물이 흐르고 난리도 아니었다는 증언이 남아있다.[27]
-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미군 제3 보병사단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포로가 될 위험 때문에 사단 정보참모로 보직 이동되었다.[28] 제8군 사령관을 지내다 사고로 사망한 월튼 워커 장군의 아들 샘 워커는 제24 보병사단 중대장으로 부자가 모두 6.25 전쟁 일선에 참전했다. 그 외에 조지 S. 패튼 장군의 아들 조지 S. 패튼 4세도 1953년에 제40 보병사단 소속 전차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이처럼 6.25 전쟁에는 수많은 미군 장성의 아들들이 죄다 최전선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반면에 당시 한국군 장성들은 너무 젊어 미군 장성들의 아들 뻘이었다.)
- 6.25 전쟁에서 활약한 여러 미군 장성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전공을 세웠고, 전후에도 한국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는 등 한국 입장에서는 분명 은인으로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그에 대한 인지도는 맥아더, 워커, 리지웨이 등에 가려진 편이다. 그나마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쟁 당시 한국군의 장교 양성, 교육훈련 강화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그의 동상을 제작, 지금도 화랑대 교정 한 켠에 서 있다.
6. 둘러보기
[1] Van은 독일어 von과 같은 의미의 귀족 성씨에 붙이는 것이고, 블리트(Vliet)은 개천, 수로라는 뜻으로 영어의 플리트(fleet)에 해당된다. 영어의 플리트는 주로 함대라는 뜻으로 쓰이나, 영국에서는 네덜란드처럼 수로라는 뜻으로도 쓰인다.[2] 그의 아버지(1833년생)가 59세, 어머니(1855년생)가 37세에 본 아들이다.[3] 이 때문에 그는 평생 플로리다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퇴역 후 여생도 플로리다에서 보냈다.[4] 전시 진급으로 1918년에 임시 중령까지 진급한다. 미 육군은 정규군(Regular Army) 계급이 있고, 전시에 확장되는 임시군(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National Army) 계급이 별도로 있다.[5] 이후 1949~53년에 미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여, 6.25 전쟁 중에 상황 점검을 위해 내한한 바도 있다.[6] 당시 영국에 주둔했던 군단급 지원부대로 전투부대가 아닌 다수의 전투지원(대공포 및 훈련보충부대)과 병참부대가 편제되었다. 최전선의 환경에 익숙했던 밴 플리트 장군은 잠시 동안의 이 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군단의 많은 기간장병들이 전상으로 인해 최전선 복무의 불가능함(?)을 이해한다.[7] 이 영상은 미군 제14기갑사단이 독일 모스부르크의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해방시킨 뒤, 패튼과 밴 플리트가 1945년 5월 1일에 현장을 순시하는 장면이다. 영상 초반에 지도를 보며 설명하는 장군은 제14기갑사단장 앨버트 C. 스미스 소장이고, 제3군단장 밴 플리트는 옆모습만 나온다. 영상 후반에 수용소를 걸을 때 패튼 바로 오른편 뒤에서 수행하는 소장 계급 장군이 밴 플리트이다. (철모의 소장 계급장 위에 제3군단 마크가 있음)[8] 밴 플리트 외에 이런 경력을 가진 인물은 다 퇴역한 상태였다. 단순한 칭찬 같지만 마셜 때문에 억울하게 진급에 물 먹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말로도 들린다. 밴 플리트 급의 능력과 연배를 갖춘 인력들은 대부분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에 사단장 정도는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9] 대장 계급으로 복귀해 1949년 10월에 원수로 진급하였다.[10] 진급이 늦은 편이라 전임자이자 이제 UN군 사령관으로 된 리지웨이 장군이 밴 플리트의 웨스트포인트 2기수 후배이다. 동기인 아이젠하워는 이미 1944년에 유럽전선 총사령관이었고.[11] 언뜻 보면 군사 부문에 무지한 정치인들이 일 잘하는 장군에게 쓸데없이 태클을 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돈이 넘쳐나는 미군이라도 저 정도의 물자를 생산하고 전선까지 운반하는 건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고 무엇보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국민의 세금이고, 그 세금이 어떤 용도로 활용되는지 확인하는건 의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만약 벤 플리트가 무능한 작자라 실적 없이 쓸데없이 포탄만 낭비하고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이기 때문이다.[12]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나오는 제101공수사단의 사단장으로 1953년 시점에선 중장 계급이었고,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군 합참의장을 지냈다.[13] 자서전의 내용으로는 근속정년이 완료됨에 따라 본래 1953년 1월에 전역할 것으로 예정되어 1952년 후반기에 이임할 것으로 예고되었지만, 마무리 준비를 위해 2개월 연기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현재와 과거의 여러가지 사례로 볼 때 미군/한국군의 중장급 이상 장성들은 복합적인 이유로 군인 인사관련법에 규정된 정년복무에 크게 제한받지는 않으며, 조건이 맞으면 40년 이상도 근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적인 예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 육군 제6군을 지휘했던 월터 크루거 대장은 독일계 이민자 출신 사병출신 장성으로 미국-스페인 전쟁 때인 1898년을 시작으로 1900년대에 장교로 임관했고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모두 해외파병으로 겪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6년 초에 전역했다(48년 근속).[14] 영상 초반은 여의도공항에서 후임 제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장군의 환송을 받으며 비행기에 오르는 모습, 후반은 중간 기착지인 하네다공항에서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의 환영을 받는 모습이다.(British Pathé)[15] 일국의 지도자 아들을 최전선에 보냈다가 포로가 되거나 전사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에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을 곁에 두고 단단히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제공권을 장악한 미 공군은 후방까지 거침없이 폭격을 할 수 있었고, 마오안잉은 대유동에 위치한 사령부 건물에 있다가 기습적인 네이팜탄 세례를 받아서 죽었다. 사실 마오안잉은 제때 대피했으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는데, 중국측의 공식적인 입장은 기밀서류를 챙기다가 대피가 늦어져서라고 하지만 계란을 먹으려고 대피하지 않고 있다가 공습을 받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6] 밴 플리트 장군의 둘째 딸인 뎀시 캐서린 밴 플리트(Dempsie Catherine Van Fleet, 1918~2013)과 결혼했다.[17] 더 뒷날의 이야기지만 존 매케인이 베트남전 도중 포로로 잡혔을때 북베트남은 그가 태평양 사령부(현재의 인도-태평양 사령부))의 사령관인 존 메케인 제독의 아들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협상카드로 써먹으려고 했다. 물론 메케인 제독이 이에 응하지 않아서 무산되기는 했지만.[18] 불과 4개월 된 7월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19] 이외에도 윌프레드 맥닐 국방부 차관보, 윌리엄 워렌 콜롬비아 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등이 동행했다.[20] 물론 그 이면에는 강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집착한 나머지 민주화 지원에는 무심했던 한계가 있긴 했으나, 평생 군인으로 살아왔고 6.25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그의 이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도 간다.[21] 이때 밴 플리트는 "군인으로서 어떻게 명령을 어기겠는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 [22] 주한미국대사관, 코리아 소사이어티 등에서도 활동하는 등 한국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교분이 있던 사이였다고 한다.[23] 폴크 시티는 인구가 1500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지방 소도시였으니, 지역 주민들만큼의 외빈들이 온 셈이다.[24] 당시 미국 정부는 3차 세계 대전을 우려하여 북한 지역으로의 진격을 제한하고 있었다.[25] 트루먼 대통령이 해당 계획을 승인하지 않아 핵무기는 결국 투입되지 않았다.[26] 그가 압록강까지 재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방어적인 성향을 취했던 리지웨지와의 성향과는 확실히 대비된다.[27] 출처: 천금성, '황강에서 북악까지'.[28] 초기에 자신의 아들을 후방으로 옮겨 달라는 제의에 밴 플리트는 탐탁치 않아 했으나 아이젠하워가 "내 아들이 전사한다면 슬픈 일이 되겠지만 난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들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흥정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나는 국민들이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며 정부에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압력을 가하는 사태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밴 플리트가 수긍하며 즉시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