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크 막 둥갈
스코틀랜드 게일어: Giric mac Dúngail (기리크 막 둥갈)
영어: Gregory (그레고리)
(?~889? 890?, 재위:878~889)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픽트 왕국의 국왕이다. 키나드 1세 이후 최초로 등장한 키나드 1세와 혈연관계가 확인되지 않는 왕이다. 기록의 부족과 신빙성 문제로 현재는 잊혀졌지만, 중세 시대의 스코틀랜드에서의 자국사를 대표할만한 명군으로 높게 평가한 왕이다. 별명은 막 라스(Mac Rath), 우리말로 운명의 아들이다.
2. 통치
쇼러스 보허넌, 윈튼의 앤드류 등 저명한 중세 스코틀랜드의 역사가들은 모두 그에게 대왕이라는 호칭을 붙이며, 그가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절반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는 신빙성이 떨어지는데, 당시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절반 가까이를 점령한 세력은 픽트인들이 아닌 바이킹, 즉 데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근대의 역사가 윌리엄 스킨은 11세기 문서 '세인트 커스버트의 역사'라는 문서를 발견해 데인인의 왕 구드프레드가 잉글랜드 북서부의 컴브리아인들과 동맹을 맺고 픽트 왕국의 남하를 막으려 했다는 기록을 통해 기리크의 치세에 적어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이 있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다른 설로는 그가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절반을 정복했다는 기록은 영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치세에 영토 확장이 이뤄지면서 아일랜드인과 잉글랜드인까지 픽트 왕국에 포함된 것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또한 중세기의 여러 문헌에서 그는 픽트족의 반기독교적 관습을 억누르고 스코틀랜드의 교회를 해방한 성스러운 왕으로도 표현된다.[1] 이후 기록에선 기리크의 치세 중후반, 성 키리쿠스[2] 축일에 일식이 떠 이 때문에 퇴위당했다고 전한다. 분석결과 실제로 885년 성 키리쿠스의 축일에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식을 불길하게 여기던 관습 상 왕권의 약화에 일조했으리라 추측된다. 기리크는 889년 퇴위 혹은 사망 이후 행적이 묘연해지는데, 보통 이 때 죽었다고 보며 몇 가지 기록은 기리크의 목숨을 빼앗은 이가 그의 후임 돔날 2세라고 기록한다.
3. 오하드 왕과의 관계
여러 기록에서 기리크 왕과 치세 기간이 겹치고, 심지어 아예 아드 왕의 후임이 바로 돔날 2세라고 기록한 문서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역사학자들이 둘의 관계를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키나드 1세에 대한 연구 결과 중 픽트족에게 모계상속 문화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기리크는 일반적으로 알핀 가와의 연관을 찾기 힘든 반면 오하드는 어머니가 키나드 1세에 딸이므로 그가 훨씬 픽트 왕위 계승권이 높았을 것임에도 스코틀랜드 역사가들은 기리크 왕에 훨씬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근대의 역사가 존 라이스 경은 기리크는 왕족의 혈연이 아니었으며, 어스트라드클라이드에서 들어온 브리튼인인 오하드를 이용해서 권력을 누린 픽트 실권자로 추정했다. 윌리엄 스킨은 기리크의 아버지 둥갈의 이름을 오하드의 할아버지 디프날과 연관지어 기리크와 오하드가 삼촌-조카 사이였을 것이라는 설을 냈다. 반면 현대 역사가인 아치발드 던컨은 사실 기리크가 혼자 픽트 국왕으로 재위했으며, 그가 오하드의 후견인이었다는 기록은 양쪽의 라틴어 표기의 오류[3] 주장했다. 알프레드 스미스는 아예 그가 돔날 1세의 아들이자 키나드 1세의 조카라는 설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사실 기리크와 오하드는 공동 통치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기리크는 픽트 왕국을, 오하드는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을 같은 시기에 각자 지배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벤자민 허드슨은 그가 알핀 가가 아닌 다른 소왕국의 왕족 혈통이며 기리크의 형제인 알려지지 않은 왕 카우산틴의 존재를 주장했다. 지금도 기리크와 오하드 간의 관계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많은 연구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