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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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기산도(奇山度)
일명
기산도(奇山濤)
생몰
1878년 10월 16일 ~ 1928년 12월 4일
본관
행주 기씨[1]
출생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2]#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을사오적 처단 시도
2.3. 일제강점기 시기 행적
2.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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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2.1. 초년기


기산도는 1878년 10월 16일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에서 식재(植齋) 기재(奇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행주 기씨 족보에 따르면,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깨우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다고 한다. 16살 때 고광순의 딸과 결혼했고 장성의 기독교계 학교 교사를 맡았다. 또한 그는 박인호(朴寅浩), 이기(李綺) 등과 자강회(自强會)를 조직, 국권회복에 힘썼다.

2.2. 을사오적 처단 시도


1905년, 기산도는 이지용, 이근택, 이하영, 박용화를 '사간(四奸)'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그해 10월 10일, 기산도는 손효경(孫孝慶)과 함께 국민교육회 연회석상에 참석해 이지용, 이근택, 이하영을 살해하려 했지만 이지용과 이근택은 없고 이하영 혼자 앉아 있는 걸 보고 그만 죽이는 건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이후 이근택의 아버지 이민승(李敏承)을 죽여 적신의 예기를 꺾기로 하고 10월 27~28일에 김성초, 송창영, 이근철, 이종대, 박종섭, 박경하, 안한주 등 7인과 함께 각각 총, 쇠망치를 들고 잠입했으나 경계가 심한 것을 보고 중단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공포되었다. 기산도는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계획하다가 이종대(李鍾大)의 집에서 매국 대신 처단을 계획하고 있던 김석항(金錫恒)을 만났다. 그는 김석항의 지원을 받아 단도 3자루와 육혈포 1정을 매입하고 이동(泥洞)의 한광국(韓光國) 집에서 숙식하면서 결사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기산도는 거사를 앞두고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이후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발설하지 않아 1개월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1906년 2월 16일, 기산도는 이범석(李範錫)[3], 이근철(李根哲)과 함께 군부대신 이근택의 집을 습격했다. 당시 이근택은 오후 7시에 퇴궐한 후 8시 경에 손님 6명의 방문을 받고 이들과 대화를 나눈 후 11시경에 침실로 들어갔다. 기산도 일행이 습격했을 당시, 이근택의 후실은 옆에서 국문잡기(國文雜記)를 읽고 있었다. 기산도 일행 셋이 방 안으로 난입해 한 명은 이근택의 팔을 손으로 잡고 다른 한 명이 칼로 찔렀다. 이근택은 재빨리 방 안의 촛불을 껐고, 일행은 칼로 이근택의 머리에서부터 어깨와 등 10여 곳을 찔렀지만 치명상을 입히지 않았다.
얼마 후 이근택과 후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하인이 달려오자, 기산도 일행은 칼로 하인의 배와 얼굴, 다리 등 4곳을 찔렀다. 이어 집안을 경비하던 병정 6명과 순검 4명이 달려왔고, 일본 헌병과 순사도 이근택의 집에 설치한 경종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이에 기산도 일행은 남쪽 담에 설치해 놓은 밧줄을 타고 탈출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군부대신 이근택씨가 재작일 하오 12시경 그의 별실과 함께 막 옷을 벗고 취침하려 할 무렵에, 갑자기 양복을 입은 누구인지 모르는 3명이 칼을 들고 돌입(突入)하여, 가슴과 등 여러 곳을 난자하여 중상을 입고 땅에 혼절한 바, 그의 집 청직(廳直)이 김가(金哥)가 내실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괴이히 여겨 탐문하고자 하니, 갑자기 양복 입은 3명이 안에서 급히 나와 놀라 누구냐 하고 물은 즉, 이들이 역시 칼로 김가를 타격하여 귀와 어깨에 부상을 입히고, 곧바로 도망갔다. 이 군부대신은 한성병원에서 치료중이나 부상이 극중(極重)하여, 위험이 팔구분(八九分)이라더라.

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18일, <이씨봉자(李氏逢刺)>

이근택은 중상을 입은 채 호송되어 새벽 2시경에 한성병원 특별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후 한 달간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졌으며, 하인 역시 자신의 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기산도는 현장을 빠져나왔지만 인조 수염을 현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덜미를 잡혀 1906년 2월 18일에 체포되었다. 기산도는 공초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여 5적을 주살하기로 한 이가 800명이라고 밝혔고, 5적 주살을 지시한 이는 "고 민충정(민영환), 조충정(조병세), 심창정(심상훈) 3인"이라고 밝혔다. 이 일로 참정대신 심상훈이 체포되었고, 관련자 수십 명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이완용의 이복형 이윤용이 주관한 형사재판소의 판결선고서에 의하면, 기산도, 김석항, 김일제, 박경하, 박종섭, 이종대, 안한주, 손성원, 손요철, 정재헌, 현학표 등 11명이 재판을 받아 1906년 5월 13일자로 각각 징역 3년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외 정순만, 이석, 손효경, 김성초, 송창영, 이태화, 박용종, 김팔화 등 8인은 도주했다. 주범으로 지목된 김석항은 3년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07년 7월 3일 옥중에서 병사했다.

2.3. 일제강점기 시기 행적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전남 고흥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짓고 있던 기산도는 1919년 1월 고종이 붕어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고종의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 그는 서울 재동에 거주하는 심재설(沈載卨)의 집에서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군자금을 모금하고 있던 김철(金澈)과 만났다. 기산도는 김철과 함께 의무금을 모금하기로 결심하고 전라남북도 의무금 요구 특별위원에 임명되어 김철로부터 사령장을 받았다. 그는 김철을 자신의 부친 집에 데리고 갔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인근에서 동지들을 물색했다.
1919년 음력 4월 25일, 기산도는 김철과 함께 영광군 백수면 장신리에 거주하는 김종택(金鍾澤)을 방문하여 국민대회취지서와 선포문 등의 문서를 보여주면서 동참을 권유했다. 김종택은 흔쾌히 수락하면서 이인행(李仁行)을 추천했다. 이후 기산도는 5월 상순경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에 거주하는 박균상(朴均庠)의 집에서 1907년 기삼연 의병 부대에서 종군했고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보낸 파리 장서의 서명자이기도 한 박은용을 만나 독립자금의 모집 활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해 승낙받았으며, 역시 1908년 광양에서 의병에 가담했던 황병학도 참여시켰다.
이후 기산도와 김철은 김요선(金堯璿)의 집을 방문해 그로부터 180원을 받아냈다. 김철은 이 자금 중 60원을 기산도에게 주고 나머지 돈을 챙겨 상하이로 돌아갔다. 기산도는 전라도 지역 특파위원의 책임을 맡고 김종택, 이인행, 황병학, 박은용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음력 7월 하순경, 조면식, 김창규, 안창선, 이화영, 이선근, 조용준, 김형석, 최재학, 김학수, 황용주, 윤용섭 등을 만나 <국민대회취지서>, <선포문>, <고유문> 등을 보여주면서 군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해 총 499원을 확보했다.
기산도는 자금을 확보한 뒤 일본 경찰의 추적을 회피하기 위해 8월 초순경 일행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그해 10월, 김종택이 부하들과 함께 서울에서 부자 홍종옥(洪鍾郁)의 집에 침입해 370원의 적금 통장을 훔쳤다가 종로 경찰서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군자금 모금 활동 마저 적발되고 말았다. 기산도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상하이로 도피하려 했지만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무위에 그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당오리에서 일본군 밀정에게 습격당해 사장나무에 묶인 채 매질을 당해 실신했다. 밀정은 날이 밝으면 경찰서로 압송하려 했지만, 이 마을에 사는 김봉순 할머니가 새벽녁에 부엌갈로 결박한 포승줄을 잘라 도피하게 했다.
이후 기산도는 제자 박길용의 누이 박순임과 재혼한 뒤 숨어지내다가 1920년 4월 일본 헌병 야우다(矢羽田)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고흥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광주형모소로 옮겨졌다. 형사들은 그의 여덟 손가락에 못질을 하는 등 심한 고문을 가했지만 기산도는 끝내 동지들을 발설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이빨로 혀를 잘라 벙어리가 되려 했다고 한다.
1920년 5월 5일, 기산도는 김종택, 박은용, 이인행과 함께 광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았다. 공판은 2달간 진행되어 7월 19일에 판결이 내려졌고, 기산도는 박은용과 함께 징역 3년형, 이인행은 징역 1년 형을 받았다. 김종택은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자택에서 요양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상하이로 돌아간 김철은 궐석 재판을 통해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2.4. 사망


기산도는 출옥 후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가 절단되는 등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장흥에서 처 박순임의 도움을 받으며 떠돌이로 살아가다가 1928년 12월 4일에 사망했다. 향년 51세. 기산도의 아들 기노식씨의 증언에 따르면, 기산도는 죽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유리개걸지사 기산도지묘(流離丐乞之士 奇山度之墓)'란 나무 비 하나만 세워다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기산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9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1] 27대손 도(度) 항렬[2] 행주 기씨 집성촌으로, 의병장 기우만, 기삼연도 이 마을 출신이다.[3] 한국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