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영(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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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관료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을사삼흉[4] 중 사람이기도 하다. 1858년 음력 8월 15일 생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관이다.
을사조약 당시에 표면상으로는 반대를 했으나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었고 이후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고문으로 지내는 등 친일 행보를 이어갔다.
2. 생애
3. 평가
사실 이하영이 미국 정부로부터 백만불을 당겼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김옥균은 그로부터 불과 3년 ~ 4년 전 일본에 무상 차관을 빌리러 갔다가 실패했고, 차선책으로 국채 발행을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었다.
어쨌든 이하영이 미국에 돌려주지 않은 16만 불 중 얼마를 비상금으로 놔뒀는지는 몰라도, 당시 조선으로서는 막대한 돈이었을 텐데 그 행방이 투명하지 않다. 하여간 고종(대한제국)이 목돈을 만들라고 사람을 보내면 곱게 오는 경우가 없었다. 원래부터 부패 집단인 수구파들은 고사하고, 갑신정변을 말아먹은 김옥균 역시 1882년 제물포 조약 직후 일본에 가서 받은 17만 엔을 귀국해서는 수중에 한 푼도 안 남았다고 하는 걸 보면, 용처가 개혁을 위한 군자금이었다고 해도 불투명하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고(한성순보를 창간하는데 썼다고도 한다), 결과적으로 개혁에 독이 됐다. 당시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았던 많은 중도적 정부 인사들마저 등 돌리게 만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84년 무상 차관을 준대서 김옥균이 일본에 갔건만 수구파들이 뒤에서 방해(비자금 루머 퍼뜨림)했고 결국 일본 정부한테 찬바람을 맞았었다. 1882년 임오군란 역시 불량미라는 불투명한 재정 집행이 도화선이 된 참사였다. 리더라는 사람들이 이 모양이었던 구한 말을 돌이켜볼 때 고종 옆에 있었던 인간들에게 근대화를 믿고 맡기기에는 경제적 식견이나 정치적 리더로서의 도덕성, 정치력 그 어떤 것도 부족하게만 보인다.
이하영은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2007년 대한민국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의 친일 반민족 행위 195인 명단에 올랐다. 2008년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 인명 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됐다.
4. 기타
-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최형배(하정우) 시골집 벽사진의 주인공이다. 찢어지게 없는 집에 태어나서 온갖 우연의 연속으로 출세 후, 가족들에게 벼슬을 안겨주었고, 게다가 자기 회사에 정계 거물들을 주주로 앉혀놓고 빽으로 성공한다는 방식도 영화 내용과 비슷하다. 윤종빈 감독이 알고 사진을 썼는지는 미지수.
5. 같은 가문의 일원인 인물 목록
6. 같이보기
[1]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2] 경주 이씨 35세손 '榮'자 항렬이다.[3] 을사조약 당시에는 중립을 지키거나 반대하였지만 후에 친일로 전향한 민영기, '''이하영'''과 고종을 압박한 이재극 이렇게 3인을 통틀어 말하는 용어로 정식 학술 용어는 아니다.[4] 을사조약 당시 반대했었지만 이후 변절을 했거나 을사오적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조약에 찬성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 민영기과 이재극, '''이하영''' 이 3인을 통틀어 말하는 용어로 정식 학술 용어는 아니다.[5] 다만 이완익은 1870년대에 친일파로 전향했으며, 을사늑약이 체결되기도 전인 1904년에 죽었다.[6] 오성 이항복의 후손으로 항렬의 돌림자가 '榮'이다.[7] 오성 이항복의 후손으로 항렬의 돌림자가 '榮'이다.[8] 오성 이항복의 후손으로 항렬의 돌림자가 '榮'이다.[9] 이회영의 손자 이다.[10] 역시 구한말에 영어를 습득한 인물이며 둘다 친일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