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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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과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을사오적, 민족 반역자, 매국노이다.
1905년 당시 군부대신(지금의 국방부 장관) 시절 을사조약에 지지를 표명했다.
2. 생애
1865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성종의 9남 경명군의 12대손인 어영청파총(御營廳把摠) 이민승(李敏承)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근용(根湧)이며 1901년을 전후하여 이근택(李根澤)으로 개명하였다. 무신 집안[2] 이었지만 출사의 계기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 민씨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명성황후 민씨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입문하였고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당시 친위 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꾀하던 도중 발각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8년 한성판윤, 의정부 찬정 등을 거쳐 1905년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역임하였는데 이완용이 주도한 을사조약 체결에서 적극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힘으로서 을사오적이 되었다. 때문에 조선 민중들과 의사의 표적이 되어서 습격을 받거나 위협을 받았지만 살아남았고 이후로는 일본군을 호위 대동하여 출퇴근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1919년 사망했다.
3. 여담
-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한규설의 딸이 이근택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서 사돈 관계였다고 한다. 그런데 한규설은 을사조약을 반대한 애국자이다. 그래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이근택에게 딸을 따라온 교전비(여종)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 꾸짖기를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 돼지보다도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내가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라고 말하고 옛 주인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그의 고기베던 머슴과 침모가 집을 나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걸 보니 자기 집 노비들에게도 경멸받으며 주인 대접을 받지 못했던 듯.
라고 말하고 옛 주인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그의 고기베던 머슴과 침모가 집을 나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걸 보니 자기 집 노비들에게도 경멸받으며 주인 대접을 받지 못했던 듯.
- 의외의 사실이지만 원래 이근택은 친러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이용익과 함께 고종의 군비 증강 정책을 이끌던 인물이었지만 이근택은 해군 양성을 주장했기에 육군 양성을 주장한 이용익과는 서로 암살자까지 보낼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 이근택은 일본의 군사 정보를 캐내기 위해 대한제국 정보대를 창설한 인물이기도 한데 정보대를 통해 일본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알게 되었고 정보대가 보내는 정보들이 너무 비관적이어서 점점 친일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괴물과 싸우려다 심연에 삼켜져 버린 사람.관련 링크
4. 둘러보기
[출처] 《조선귀족열전》(朝鮮貴族列傳) [1] 13대손 근(根)◯ 항렬. 시조로부터는 42대손이다.[2] 고조부 이종혁(李宗赫)과 증조부 이형재(李亨在)는 수군절도사, 조부 이종준(李鍾俊)은 훈련원정, 아버지 이민승은 병마절도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