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용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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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백작'''
<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이지용
李址鎔 | Lee Ji-yong'''
'''이름'''
이지용 (李址鎔)
'''초명'''
용구 (龍驅)
→ 은용 (垠鎔)
'''본관'''

'''자'''
경천 (景天)
용구 (龍駒)
'''호'''
향운 (響雲)
'''출생'''
1870년 10월 23일
경기도 광주부 궁촌[1]
'''사망'''
1928년 6월 30일 (향년 57세)
'''사인'''
병사
'''직업'''
정치가, 관료
'''작위'''
조선귀족 백작
'''약력'''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 학부대신
조선총독부 중추원#s-4 고문
'''비고'''
'''을사오적''', 한일 의정서 체결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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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관료,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을사오적 중 한 사람으로 매국노의 대표격이지만 이완용과 을사오적도 아닌 송병준유명세에 밀리는 인물이다.
전주 이씨 왕족으로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의 손자이다. 원래는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17대손이다.[2] 광흥령 이희하의 친아들이었으나 1881년 사망한 흥인군의 아들 이재긍의 양자로 들어갔다.[3] 이로 인해 고종과는 사실상[4] 5촌 당숙부와 당질의 관계가 된다. 본래 이름은 '이용구(李龍驅)'였다가 이재긍의 양자가 되면서 '이은용(李垠鎔)'으로 바꿨고 1900년 8월에 4살 난 고종의 3황자 이름이 '이은(李垠)'으로 결정되자 피휘를 위해 다시 '이지용(李址鎔)'으로 재개명하였다.

2. 생애


《조선귀족열전》
(朝鮮貴族列傳)
《이미지로 보는 한일병합사》
(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
1887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95년 칙명을 받아 일본을 유람하고 돌아왔으며 경상도감찰사, 황해도감찰사를 거쳐 궁내부 협판을 역임하다가 궁내부(宮內部), 법부(法部), 경부(警部)대신 서리를 맡고 1901년 주일 공사를 지냈다. 1903년 10월 무렵부터 일본 측과 협상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하는데 힘썼으며 1904년 2월 외부대신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 의정서에 서명했다. 1905년 내부대신(지금의 행정자치부 장관 격)으로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고 백작 작위를 얻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이지용은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올인했다고 한다. 사망하기 직전에 유언으로 "일본에게 속았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이 후회가 '동아공영론'에 낚였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자신의 단순한 신세 한탄인지는 논란이 있다.

3. 여담


  • 많이 알려진 이름이 아니기에 모르고 '이지용'을 이름으로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유명세가 떨어진다.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1] 한성부 혹은 전북 완산에서 출생했다는 주장도 있다.[2] 원래는 '範'자 항렬이다. 독립운동가이범진이범석의 형제뻘이다.[3] 실제 혈통 상으로는 무려 '''35촌(...)''' 숙질 간이다.[4] 사실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고종 역시 문조의 양자가 되어 출계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종의 생가 친형제들 및 사촌 형제들은 이지용과 법적으로 정확히 5촌.[5] 다른 버전으로는 어떤 친일파의 경우 집에 일하던 하녀가 "친일파에게 밥을 지어줄 수 없다!"며 요리하던 칼을 던졌다는 얘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