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손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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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 '''조선의 영의정
《第 25ㆍ27ㆍ41 代》
정창손
鄭昌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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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 '''太宗 2年 - 成宗 18年'''
'''제25대'''
1458. 12. 07 - 1459. 11. 06
'''제27대'''
1461. 04. 29 - 1462. 05. 10
'''제41대'''
1475. 07. 01 - 1485. 03. 27

'''이름'''
정창손 (鄭昌孫)
'''출생'''
1402년 (태종 2) 3월 11일
한성부
'''사망'''
1487년 (성종 18) 1월 27일 (향년 84세)
한성부
노환으로 인한 병사
'''직업'''
관료, 유학자, 언어학자
'''종교'''
유교 (성리학)
'''재임 기간'''
제25대 영의정
1458년 12월 7일 - 1459년 11월 6일
제27대 영의정
1461년 4월 29일 - 1462년 5월 10일
제25대 영의정
1475년 7월 1일 - 1485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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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44> '''군호'''
봉원부원군 (蓬原府院君)
'''시호'''
충정 (忠貞)
'''본관'''
동래 정씨 (東萊)
''''''
준(浚)
''''''
효중(孝仲)
''''''
동산(東山)

1. 개요
2. 생애
3. 세종의 분노를 사다
4. 계유정난 이후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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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종~성종 시기에 활동한 관료.

2. 생애


1402년(태종 2) 중추원사 정흠지와 최씨 사이에서 형 정갑손에 이어 차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지금의 서울시장 급인 한성부윤 정정부이다.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선 것은 1423년 사마시와 1423년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며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된 것으로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통감훈의(通鑑訓義)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1441년 사섬서령, 1443년 집현전 응교가 되었으나 1444년 최만리 등과 함께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던 중 "백성들은 어차피 교화가 안 되는데 어찌 부질없는 일을 하느냐"라는 요지의 발언으로 파직당하게 된다. 그 해 다시 집현전 응교로 복직되었다가 1445년 집현전 집의가 되었는데 1446년 세종이 불경 간행을 추진하자 "성리학의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것은 아니 된다"라며 강경하게 맞서다 좌천되었다.
1447년 세종에게 용서받아 직예문관에 등용됐으며 그해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448년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세종의 불교 숭배에 대해 반대하는 상소문을 꾸준히 올리며 대립하기도 했으나 능력은 출중해 1449년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 등을 편찬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세종 사후 문종 재임 당시 우부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제학, 대제학, 병조판서를 거치며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3. 세종의 분노를 사다


1444년 2월 20일, 세종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하려 하자 이에 대해 최만리, 하위지 등과 함께 반대 상소를 올렸다. 세종은 상소를 올린 전원을 의금부에 하루 동안 투옥시켰는데, 정창손만큼은 아예 '''파직'''을 시켜 버렸다.[1] 보통 토론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신하들을 제압하는 세종의 평소 모습과는 달리 이 때는 이례적으로 왕권을 발동시켜 강압적으로 진압시켰는데, 이는 논쟁 과정에서 정창손이 한 치명적인 실언 때문이었다. 최만리의 경우에는 정치적, 과학적인 논리[2]를 내세웠기에 세종도 명분상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워 즉답으로 반박하기 힘들었지만, 정창손은 '''선비라는 자가 유교 정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논리로 반대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고, 너무 치명적인 실언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변호받을 여지도 없이 파직당했다.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 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로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세종실록』1444년 2월 20일 원문

간단히 말하면 '''"삼강행실도[3]훈민정음으로 번역해 봐야(=백성들에게 읽히고 가르쳐 봐야) 태생 자체가 글러먹은 멍청한 백성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는 엄청난 소리를 대놓고 '''유교 국가의 왕 앞에서''' 한 것이다.
당연히 현대의 기준에서도 선민의식에 찌든 문제성 발언이지만, 당시(1400년대 조선 전기)에는 더욱이 엄청난 망언이었다. 상술된 것처럼 이 발언은 '''조선의 건국 이념인 성리학을 정면에서 부정했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누구나 수양을 통해서 성인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평생 수양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주된 요지였고,[4] 성리학등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가르침이 있을 뿐 부류란 없다(有敎無類)"란 문장을 통해 사람은 누구나 바른 가르침에 의해 수양하여 군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이를 증명하듯 빈민 출신 안회와 양아치 출신 자로를 제자로 육성해 보였다. 또한 맹자도 사람이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바 있다. 즉 이 자가 한 말은 문자 그대로 유교와 공맹의 정신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말이며, 유교를 국가 운영의 근간으로 삼고 과거 시험까지 거기에 맞춰 출제해 가면서 등용한 나라의 공직자란 놈이 저런 정신줄 놓은 말을 하니 유교 국가인 조선의 수장이 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이 만들어진 원인이 된 고려 시절 권문세족들 입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니... 군주가 세종이라 그나마 얌전히 파직 정도로 끝났지, 또라이 같은 왕 잘못 만났으면 '''반역'''죄로 꼬투리 잡혀 삼족이 멸살당할 수도 있었던 엄청난 실언이었다.
이에 세종은 "훈민정음을 통해 오히려 백성들이 효, 충을 깨우치기 쉬울 것이다"라며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세종실록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감정적이고 강도 높은 '용속한 선비'라는 발언을 남겼다. 저것도 사실 실록이라 표현이 정제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는 대충 '쓸모없는 선비놈 같으니라고' 정도로 상당한 욕설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렇게 의금부에 하루 동안 수감된 후 풀려난 다른 이들과는 달리 파직을 결정했다. 다만 이후에는 용서받아 이듬해 직예문관에 등용됐으며, 그 해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직제학을 거쳐 1448년 집현전부제학이 되었다.

4. 계유정난 이후


단종 재위 원년에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 사헌부로부터 "홍원용과는 친척지간인데, 친척끼리 업무 연관 관청에서 근무하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일단 논란이 있으니 해결될 때까지 관직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죠.[5]"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단종이 나서서 피혐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계유정난이 터졌고 이때 정창손은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후 좌익공신 3등에 녹훈되어 봉원군에 봉해졌는데 이듬해에 사위였던 김질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꾸미다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장인이었던 자신에게 이를 고하자, 세조에게 직접 고변했다. 이에 대해 세조는 정창손을 좌익공신 3등에서 2등이었던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으로 올려주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더해졌다. 그리고 봉원군에서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어쨋거나 이런 모습으로 인해 생육신들, 특히 김시습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으나, 1457년에 좌의정까지 올랐으니 세조의 최측근이 된 정창손 입장에서는 뭐....
이듬해인 1458년엔 모친인 최병례가 사망하며 3년상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세조는 직접 1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있는 그를 기복[6]시켜 영의정으로 임명한다. 정창손은 자신은 부담스럽다며 여러 번 거절했지만 세조는 거절했다.
3년상을 치르고 정계에 복귀한 그는 죽은 세조의 장남이자 세자였던 이장에게 의경(懿敬)[7]이라는 시호를 올리는 데에 적극 앞장서며 세조의 신임을 얻었으나 1462년에 양위와 관련된 발언을 해 삭직되었다가 곧 정계에 복귀 1468년 예종 즉위 후에는 남이강순의 국문을 직접 맡아 그 공을 인정받고 익대공신 3등에 올랐다.
1469년엔 성종 즉위 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원상(院相)이 되었다.
1470년, 나이가 70살이 되어 정계에서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왕이 허락치 않았다. 한편, 남효온(南孝溫)이 소를 올려 세조 즉위 초에 폐위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 복위를 주청하자, 소릉의 폐출에 참여한 그는 복위에 반대했는데, 후일 복위된 뒤 이 일로 지탄을 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되었으며, 이듬해 성종왕비 윤씨를 폐하려고 할 때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강력하게 간하지 못하였다. 이후 여러번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1485년, 나이 84세의 고령에 영의정으로 재임된 지 10년 만에 사직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487년, 86세로 죽자 왕은 청빈재상이라 하여 많은 물품 등을 부의로 하사하였다.
죽기 1년 전인 1486년에는 집에 유령이 나타났다고 실록에 나온다. 그러나 정창손 본인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긴 듯. 집안의 기물들을 옮겼다고 한 걸 보면 폴터가이스트를 겪은 것 같다.

특진관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가 아뢰기를,

"성안에 요귀(妖鬼)가 많습니다.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안의 기물(器物)을 옮기고''', 호조 좌랑(戶曹佐郞) 이두(李杜)의 집에도 여귀(女鬼)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대낮에 모양을 나타내고 말을 하며 음식까지 먹는다고 하니, 청컨대 기양(祈禳)하게 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유문충의 집에 가 나와 절을 하고 서서 있었는데, 집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유문충에게 고하니, 유문충이 말하기를, ‘이는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을 퍼뜨려 주라.’고 하였고,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집에 재앙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보아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저절로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정창손의 집에 괴이함이 있으므로 집 사람이 옮겨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창손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요귀로 인하여 피하겠느냐?’고 하였는데, 집에 마침내 재앙이 없었습니다."하였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火砲)로써 이를 물리치소서."'''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7년(1486) 11월 10일

끝에 나오는 "화포로 물리치자"는 것은 보통 양진(禳鎭)이라고 했는데, '방술(화약)을 써서 재앙을 막는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귀신이 나온다니까 대포 한 번 쏴보지요"라고 상신했다가 성종이 반려했다는 이야기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미즈키 시게루가 그려서 일본에도 소개되었다. 미즈키 본인이 요괴 연구가로서, 한국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민담과 신화를 직접 방문해서 취재했다고 한다. 중간의 '돌 던지는 요괴 도깨비' 항목
1504년 갑자사화부관참시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 개인으로서는 "충정"이라는 시호를 특별히 하사받을 정도로 능력 있었던 관료고, 검소한 청백리로도 이름 높았던 인물이긴 하지만 상술된 것처럼 "백성이 유교를 배워도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세종과 대립해 놓고서는 자신은 수양대군에게 붙어 권신이 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표본을 보이는 실책으로 인해 매체에서는 좀체 긍정적인 이미지로 비춰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선민의식에 빠진 찌질한 악당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5. 대중매체에서


왕과 비에서는 안대용이 연기했는데, 전형적인 기회주의형 노회한 권신의 이미지로 나왔다. 초반부에는 수양대군의 세조 즉위를 강력히 찬성했고 단종복위운동을 밀고한데다가 단종 사사를 주청하는 동시에 한명회와도 손을 잡고 세조 반대파 숙청에 나서는 강경파의 이미지가 두드러졌고, 중반부에도 원로대신이면서 한명회 등과 함께 남이의 옥사 때 남이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등 강경파의 이미지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노쇠한 이미지로 나오면서 약간 온건해졌으며 한명회와 함께 훈구파의 중심축을 지키는 동시에 원로대신의 이미지로 나왔다.
대왕 세종에서 오용이 연기했다. 여기서는 비뚤어진 사상을 가진 모습인데 명나라와의 교류를 우선하고 문자창제를 반대하며 마지막에 세종에게 호통을 듣기도 한다. 게다가 비뚤어진 중화사상으로 인해 명나라에게 국가비밀에 해당하는 정보를 자꾸 넘기려는 사실상 고정간첩과 맞먹는 행위를 하는 찌질한 악당으로 묘사된다.
인수대비에서도 나왔는데 노쇠한 권신으로 나왔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정남손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배우는 김태우. 작중에서 주역들과 가장 많이 충돌하는 메인 빌런으로 대사헌을 맡고 있으며 세종과 장영실과 대립하는 신하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강경하게 나서는 인물로 거기다 명나라와 내통해 서신을 주고 받기까지 했었다. 명나라 사신이 세종의 천문관측을 문책하러 오자 적극 협조하여 장영실을 체포, 명나라로 압송하다가 강화도에서 명나라 사신과 함께 잔치를 벌이던 중 조롱하려고 부른 장영실에게 오히려 조롱을 당하자 장영실의 목을 베려다가 세종이 보낸 친위군 병력에게 저지당하고 체포된다. 어가가 부서지는 사고가 난 후 세종의 명령으로 집이 수색을 받아 명나라와 내통한 서신이 발각되고 이후 세종에게 명나라와 작당해 반역을 꾸몄냐는 질타를 받게 되자[8] 억울하다며 데꿀멍하게 된다. 거기다 '''"이 개새끼야"'''라고 욕을 들은 건 덤. 유일하게 본편에서 세종에게 욕을 들은 인물이다. 게다가 세종이 직접 칼을 빼서 참수하려다가 이 작품의 빌런 최종보스인 황희[9]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계획을 알고 있다고 역공에 나선 덕분에 목숨은 건진다.
[1] 정창손 외에도 투옥 이상의 징계를 받은 이가 있었는데, 훈민정음 제작 찬성파에서 반대파로 돌아섰던 김문이다. 세종이 친히 '김문이 임금 앞에서 말을 바꾼 이유가 무엇인지를 국문을 통해 알아내라'며 추국 명령을 내렸다.[2] 특히 '''중국의 표의문자와 그 주변 오랑캐의 표음문자'''로 대결 구도를 만들었다.[3] 백성들이 보고 배워야할 효(孝), 충(忠)의 사례를 그림과 함께 기록한 책으로 일종의 도덕책인 셈이다. 세종은 이것을 배우기 쉬운 훈민정음으로 번역해서 출간했다.[4] 실제로 조선시대 관리들 중에 간간이 서얼, 천민, 양민 등등 양반 아래의 신분들이 나온다. 일례로 세종의 조부인 태조 이성계도 왕이 되기 전 자신의 사가에서 음식을 해 주던 이인수라는 농부에게도 "음식 솜씨가 최고에 달했다"며 벼슬을 내렸다. 그 이후로도 신분이 미천하지만 학문이 아닌 자신이 수행한 능력으로 벼슬길에 오른 이들은 장영실이나 허준 등이 나왔다. 또 여성 중에서도 임윤지당이라는 성리학자가 있었다. 성리학 교조주의의 원흉이라 까이는 송시열조차 딸이나 며느리를 한글까지 써 가며 교육시킬 정도였다. 그럼 정작 신분제가 존재하는 것이 모순 아닌가 싶겠지만, 당시에는 이걸 한순간에 뜯어고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문제였기에...[5] 이를 피혐(避嫌)이라고 한다.[6] 起復:나라의 일이 있을 때 상중에 있는 대신을 3년상이 지나기 전에 벼슬에 임명하던 제도.[7] 덕종 묘호는 성종 이후에 올라갔다. 왕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먼저 죽은 아들에게 왕의 묘호를 올리는 경우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8] 거기다 자신을 도와줄거라 생각한 사신은 명나라에서 요구한 물품보다 더 요구한게 밝혀지고 역모와 엮이면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얌전히 명나라로 돌아갔다. 이전까지 무례한 태도와 달리 존댓말까지 하며 돌아간 건 덤.[9] 이 작품에서는 다른 창작물들과 다르게 황희를 임금을 능멸하는 권신으로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