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김재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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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金載圭 | Kim Jae-Gyu
'''
<colbgcolor=#012060><colcolor=#FFFFFF> '''출생'''
1926년 3월 6일[1]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이문리
(現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80-6)
'''사망'''
1980년 5월 24일 (향년 54세, 호적 기준)[2]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본관'''
김녕 김씨 충의공파 26대손
'''호'''
덕산(德山)
'''재임기간'''
제11대 건설부 장관
1974년 9월 18일 ~ 1976년 12월 5일
제8대 중앙정보부장
1976년 12월 6일 ~ 1979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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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2060><colcolor=#ffffff> '''배우자'''
김영희
'''자녀'''
슬하 1녀
'''학력'''
대구농업전문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대학원 (산업공학 / 석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 석사)
'''종교'''
무종교불교[53]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9'''
'''약력'''
1957년 육군대학 부총장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장
제6군관구사령관
대한민국 육군 보안사령관
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장
제9대 국회의원
1974년 건설부 장관
1976년 중앙정보부
'''상훈'''
[54]


사우디아라비아 킹 압둘 아지즈 훈장[55]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2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43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 ~ 1973년
'''최종 계급'''
중장

1. 개요
2. 생애
2.1. 최태민에 대한 조사, 그리고 경고
2.2.1. 민주화 운동 층의 평가
2.2.2.1. 긍정론
2.2.2.2. 부정론
2.2.3. 최후 진술
2.3. 최후와 그 뒤
3. 재평가
3.1. 흐름
4. 여담
4.1. 생전
4.2. 사후
5. 매체에서
5.1. 여담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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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군인·정치인.
유신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했다. 다음 날 새벽 육군본부에서 검거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재규 육성 최후 진술. 1979년 12월 8일의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 녹음 중 하나다.

2. 생애


고향은 경북 선산군이다. 현대의 행정구역은 경북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이문리에는 김재규의 생가가 아직도 남아 있다.[3] 김재규의 아버지는 정미소를 운영했다. 당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김재규도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1943년 안동공립농림학교[4]를 졸업한 후, 대구농업전문학교[5] 중등교원양성소[6]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 국내 웹상에서 김재규가 일본해군 요카렌 출신이란 잘못된 정보가 퍼져있는데 그는 일본국 특별 간부 후보생 출신으로 이는 해군 휘하의 간부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육군에서 운용하던 프로그램이었다. 즉, 김재규는 일본군 육군 출신이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7]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이때 동기생으로 입교한 박정희와 인연을 맺는다. 고향이 같고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9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하게 된다.
1946년 12월, 196명 중 14등이라는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경비대 참위로 임관하였다. 그러나 중대장 대리로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과 충돌하였다가 면직된 후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8]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 후 복직, 22연대 정보주임으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충무무공훈장을 받고 3사단 22연대 제2대대장으로 부임하는데, 공교롭게도 부임일에 6.25 사변이 발발한다. 김재규는 2대대를 지휘하여 의정부·대구·영덕에서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고, 6.25의 전투 중 치열하기로 손꼽혔던 황간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북진의 선봉에 서서 함경남도의 땅까지 밟았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되어 남으로 후퇴한 후 여수 제2보충연대장으로 부임한다. 따라서, 6.25 참전유공자이다.
1957년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냈고,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쿠데타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며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었다.
1.21사태 후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여,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9] 1971년 8월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의 전화를 도청하다가 발각되어 제3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
군단장 시절 한계령 도로 건설을 지휘했으며, 이 때문에 한계령에 건설 중 사망한 장병 위령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으나 현재 위령비에는 그 부분이 삭제당했다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안동댐 건축 기념탑에도 원래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10.26 사건 직후 그 이름 부분이 뜯겨나가 있다. 여담이지만 인트라넷 3군단 역대 군단장과 그가 복무했던 모든 부대에도 김재규는 삭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김재규의 출신부대에 사진이 걸려있다.#
▲ 육군중장 김재규.
1973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한 후 유신정우회 1기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그 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때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으며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 때 김재규는 신직수를 매우 껄끄러워했는데 자신이 제5보병사단 참모장일 때 육군 법무소령 신직수가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지냈기 때문이다. 상하관계가 역전이 되어버린 셈이다. 결국 10개월가량의 불편한 동거는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으로 승진하면서 끝나게 된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1977년 박정희에게 직선제를 건의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건의했다. 이때 김재규는 “긴급조치 9호는 효력을 다했으니 더 강력한 긴급조치 10호가 필요합니다.” 라며긴급조치 10호를 건의했다가 반려당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에는 노동및 종교의 추가탄압이 들어가있어 과격하기는 마찬가지였던지라 현재까지도 그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다만 김재규는 훗날 법정에서 그 건에 대해 말하길 박정희의 눈을 속이고 긴급조치 9호의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고 해명했다.[10] 김재규는 또한 당시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외출을 눈감아주어서 김대중이 김영삼측 단합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서 김영삼의 전당대회 당선을 도와주기도 했다.[11] 당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정국을 순리대로 풀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모색한 것.

2.1. 최태민에 대한 조사, 그리고 경고


'''최 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

김재규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읍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 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읍니다.

김재규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최태민과 박근혜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를 처음 입수한 언론에서 공개한 시점이 2012년 말, 즉 18대 대통령 선거 직전이었기 때문에 당시엔 찌라시 취급을 받으며 묻혀졌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최태민박근혜의 관계에 주목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위 항소이유서에서 보다시피 '''현재 최순실박근혜와 함께 기업들에게서 돈을 뜯어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40년전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박근혜와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뜯어내었다. 1970년대 아버지가 했던 사기행각을 딸이 그대로 2016년까지 써먹은 셈이다. 당연히 최태민의 범죄행각을 비판하는 민원이 빗발쳤으나,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에게 직언을 할 용기를 가진 관료들은 아무도 없었다. 소수만이 직언을 했다 핍박받는 실정이었다.
위의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나왔듯이, 청와대 내에서 실세 권력이 높았던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조차 방법이 없어서 김재규에게 직접 하소연했다는 내용을 생각해보자. 당시 박근혜는 단순한 공주가 아닌 육영수의 분신이었고, 저격 사건으로 죽은 영부인의 딸이란 동정표까지 더해져, 당시 노인들은 박근혜만 보면 '''"공주님 오셨다"'''며 큰 절을 올리며 눈물 흘릴 정도였다.# 더욱이 마음에 안드는 경찰청장이나 도지사를 호출하여 호통칠 정도로 국정을 농단하는 최태민에게 분노한,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최태민과 박근혜를 떼어놓으라고 직언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재규의 직언을 듣기는 커녕 박근혜를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직에 올리고 최태민을 명예총재직에 올리는 조치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때 느꼈던 절망감이 10.26 사건의 동기가 되었다고 김재규는 증언하였다.
거기다가 김재규의 말이 아예 사실이라면, 박정희는 김재규를 불러 최태민을 대질시켜놓고 친국을 벌였다는 말이 된다. 당시 김재규는 독재정권의 중앙정보부장으로 의전상 부총리였다. 대통령의 왼팔이 '''일개 사이비 종교인을 고자질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엄청나게 체면을 구긴 일이다. 2017년 기준으로 보자면 검찰총장이 사이비 교주 하나 기소했다고 대통령에게 친국을 당하는 것보다 더 심한 꼴이다. 거기다가 김재규가 최태민이 저지른 온갖 부정의 입증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최태민(정확히는 박근혜)을 신뢰하는 꼴을 보였다. 이는 김재규 입장에서 자신이 끝까지 모신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인 자신보다 어디서 굴러와 영애를 홀린 사이비 종교인을 더 신뢰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 있던 충성심도 바닥이 날 수밖에 없다.
즉, 10.26 사건을 결심한 동기 중 하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 - 박근혜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항소이유보충서로 남겼다. 김재규는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가 지속될 경우 벌어질 잠재적 위험성을 알고 이를 항소이유보충서로 남기며 최후의 순간까지 경고 했지만, 그의 우려와 경고는 37년 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악의 정치 스캔들이 터지면서 결국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2.2. 10.26 사건



[image]
당시 최후 진술의 녹음본이 있다. 무려 4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들을 만한 음질이다. 유튜브 이 녹음본은 월간지 신동아 1996년 10월호에서 첫 공개가 되었는데, 이 녹음본을 듣고 감동한 독자들로부터 "김재규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신동아 편집부에 쇄도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인맥의 영향력이 더 컸다. 박정희와 고향 후배이며 육사 동기라는 2중의 인맥인 김재규는 그야말로 심복이었다. 하지만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차지철PPK 권총S&W M36[12]으로 저격하여 암살했다. 이것이 이른바 10.26 사건이다.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이 경호원들과 함께 현장에 동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할 줄로는 생각하지 못한 경호팀은 무력했고 그들 모두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제압당한다.
어쨌든 거사에 성공한 김재규가 이동한 곳은, 엉뚱하게도 중정이 아닌 육군본부였다. 만약 김재규가 거사 후 중앙정보부로 향했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지금까지도 중론이다. 암살장소인 안가는 중앙정보부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으므로, 부장인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이 박정희를 죽인 사실을 은폐하고 불순세력의 소행으로 몰아가 국무위원과 장성들을 깨끗하게 속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사태 수습을 빌미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시나리오를 써갈 수도 있었다.
특히 박정희를 암살한 장본인이 차지철이었다고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평소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라는 미명으로 온갖 월권행위와 경거망동을 서슴치 않았고, 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주동자 1순위는 단연 차지철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실제로 사건이 터진 후 청와대로 들어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유고 소식을 들은 김치열 당시 법무장관은 "그 새끼가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군!!" 하고 호통을 쳤는데, 그 새끼는 물론 차지철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육군본부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체포되면서 사태를 장악하지 못했다. 김재규가 육군본부로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 ① 대통령의 그늘 밑에서만 권력을 휘두를 뿐 대통령 사망 후에는 특별한 권한이 없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비상계엄 상황에서 특권을 휘두르는 군부의 협조가 절실하므로 이를 얻기 위해 육군본부로 갔을 거라는 설. 특히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김재규와 원만한 관계였으므로, 그에게 자신의 박정희 저격을 알리고도 그의 협조를 받아낼 수 있으리라 오판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기본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박정희 암살자에게 협조하여 그의 정권 획득을 도울 장성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당시 군에 자기 인맥이라고 볼 수 있는 장군을 거의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 ② 김재규가 박정희를 순전히 우발적으로 저격했으므로 거사 후 사태장악에 대한 아무 계획이 없었다는 설. 사건 수사결과에 의하면 거사 후 김재규는 정승화와 승용차에 동행하여 사건현장을 떠나 이동하던 중,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에게 "정보부와 육본 중 어디로 가는 게 좋겠느냐"고 묻자 정승화가 말을 가로채어 "육군본부로 가는 게 좋겠다"고 제의하였고, 김재규는 아무 생각 없이 운전기사에게 육군본부 행을 지시했다. 이때 정승화는 안가 본관(연회장은 나동)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사건을 저지른 김재규와 차에 동승한 것이었는데, 그땐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가 육본으로 갈 때 신발도 신지 못하고 박흥주 대령의 구두를 빌려 신을 정도로 우왕좌왕했던 행동을 볼 때, 이 견해도 설득력은 있다.
  • ③ 김재규는 오로지 박정희의 암살로 말미암아 유신 정권의 붕괴로 도래하게 될 자유민주주의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이 탓에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중정행이 아닌 육본행을 선택했다는 설. 김재규의 유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실제론 사건 조사를 담당한 전두환 군정이 널리 퍼트린 '욱하는 성격'과 '그에 따른 피해망상증 환자의 우발적 살인'이 아니라 군에 오래 투신한 만큼 일상에서도 군기가 배어 있었으며, 8남매의 맏이로서 항상 동생들과 인척들에게 자상했고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사형 전날까지도 면회를 온 부모에게 큰절을 올리며 법정에서 증언한 "큰 뜻이 있어 했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동생들에게 "(자신 탓에 아버지를 잃은)근혜에게 나보다 먼저 기도해달라."고 말하는 등 자신이 벌인 행위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에 따른 여파를 알고 있었으며, 친모에 이어 친부까지 잃은 아이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최후진술에서까지 부하들은 자신의 명령으로 인해 계획에 참여하게 됐다며 극형을 면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권력욕이라든지 우발적 행위로 인해 대통령을 암살하고 정신이 없어 육본으로 갔다고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평소의 행실과 유가족들의 증언을 신뢰한다면 김재규는 1번설과 2번설을 모두 부정하고 법정에서 진술한 대로 오로지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 이 추측들에 대해서는 10.26 사건#s-5.2에 보다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은 알려진 바와 같이 12.12 군사반란 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긴급체포하여 군을 장악하게 되었고, 김재규는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박선호, 유성옥, 김계원과 같이 사형이 확정되어 기각 4일 만인 5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대법관들 사이에서는 소수의견으로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내란목적이 아니라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단순 살인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특히 형사3부 판사인 양병호와 서윤홍은 '''내란 목적이라기에는 암살 후 김재규의 움직임이 너무나 어설펐기 때문에 내란을 목적하고 박정희를 죽인 게 아니고 그저 우발적으로 죽였다고 본 것'''이며 최종판결 당시 민윤기 등 6명의 판사들이 내란죄 불성립 의견을 냈다. 이로 인해 소수 의견을 낸 판사 6명은 신군부의 보복으로 전부 법복을 벗어야 했으며 특히 양병호는 보안사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훗날 양병호는 김재규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박정희를 사살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당시 판결문은 비공개 처리되어 묻혀버렸으나[13], 훗날 공개되면서 당시 몇몇 재판관들의 용기있는 소수의견들이 밝혀졌다. 한홍구,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참조.
10.26과 관련한 김재규의 보다 자세한 입장표명은 김재규/항소이유 보충서에 되어있다.

2.2.1. 민주화 운동 층의 평가


민주화 운동 층에서는 평이 서로 상반되게 갈라지는 편이다. 옹호하는 쪽에서는 ''''유신독재라는 암흑기 속에서 독재자를 몰아낸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대변하는 용어로 요즘 인터넷에 빈번히 보이는 단어가 '''김재규 의사'''.[14] 이렇게 영웅으로 치켜 세우진 않더라도 10.26 사건이 독재를 몰아내는데 일정부분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경우도 많다.
유야무야 하면서 유신이 장기 되었다면, '''최악의 경우 북한처럼 반대 세력이 모두 숙청되거나 중국, 싱가포르처럼 정도는 덜해도 독재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5] 박근혜가 만약 이 상태로 정치에 참여하였다면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박씨 일가가 다스리는 독재국가'''였을지도 모르고, 다른 독재자들과 같이 말년이 비참하고 후세의 평가가 좋지 못했을 수도 있다.[16] 이렇게 김재규를 긍정하는 사람들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강신옥, 장호권, 이해학 등이 있다. 함세웅 신부는 "김재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효림 스님은 "여러가지 정황 근거로 봤을때 재평가할 가치는 충분하며, 사회 분위기 때문에 좀더 시일을 요구할 뿐 명예 회복은 희망적"이라고 보고 김재규의 행적과 뜻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작업에 매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여기다가 한국은 군주가 암살 당하는 일이 의외로 역사적으로 몇 번 있었다. 박정희의 말년은 백제동성왕과 비슷한데, 최측근들의 충언을 개무시한 끝에 결국 자신이 등용한 신진세력인 위사좌평(현재의 대통령경호처장 정도 된다.)인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으니..
반면 상대적으로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 또한 과거 유신정권하에서 한 자리 해먹던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박정희를 암살해 결과적으로는 박정희를 국민의 손으로 정당하게 심판할 기회를 빼앗았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그동안 갖은 압제와 고문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노력해오던 자신들 보다, 단순히 박정희 한 명 암살했다고 김재규가 포커스를 더 받는 건, 몇십 년을 민주화 투쟁한 사람들 입장에선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17] 그런데 전두환, 노태우 정권조차도 5공화국 청문회 때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심판도 안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소극적인 국민들의 성격과 견고한 기득권의 힘 때문인지 몰라도 근·현대사를 통틀어 당사자 개인에게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진 사례는 실제로 흔치 않다. 또한 박정희 본인은 이승만이나 전두환, 노태우와는 달리 어떤 상황이 온다고 해도 결코 자리에서 물러날 의사가 없었다는 평가가 압도적이다.[18] 또,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적게 잡아도 수천, 많으면 수만에서 수십만의 애꿎은 목숨이 필요할 터인데 그것을 대신 이루어준 것이 과연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사안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실제로 장준하가 긴급조치로 구속되었을 당시 감방 동기였던 이해학 목사는 "당시 장준하가 '이제 민중투쟁으로는 안 된다. '''양심적인 군인을 포섭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수 말고는 박정희를 몰아낼 방법이 없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절망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참고로 이해학 목사는 김재규의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이중배상금지 조차도 위헌 판결을 때린 대법관을 강제로 해고시켰던 전례가 있었으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김재규를 비판하는 재야/민주운동가들은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동기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의한 기여도 및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역시도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19] 진보적 사회운동가 백기완도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항쟁이 거셌고,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어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사건일 뿐이며 민주화운동의 본체, 기본적인 흐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출처
하지만, 김재규를 긍정평가하는 의견이 점차 많아지면서 김재규 비판 세력은 점점 힘을 잃고 있는 상황이다. 이승만이야 스스로 물러났으니까 박정희 보다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라도 했다는 옹호라도 있지, 박정희는 이승만과는 달리 그러한 옹호론 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물러나라고 해서 물러날 존재가 아니니까."'''였다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였다. 당장 총선에 패하자 7.4 남북 공동 성명을 통해, 지지율을 올렸으니.[20] 설령 박정희 정부의 붕괴는 예상된 수순이였다고 해도, 그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당장 10월 유신까지 도입해서 영구 집권을 꿈꿨다고 한 사실이 김재규 말고도 김형욱 조차도 똑같이 주장한 사실이였으니까 말이다.

2.2.2. 그게 최선이었을까?



2.2.2.1. 긍정론

김재규는 정권 내에서 온건파였고, 당시 부마항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때 박정희는 먼저 이승만과 곽영주 운운하며 총기 사용을 지시했고 차지철캄보디아킬링필드[21] 거론하며 아부를 하여 무력사용을 부추겼다. 결국 대통령인 박정희가 직접 유혈진압을 지시한 이상, 김재규가 10.26 사건으로 박정희를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부마항쟁 때 5.18 민주화운동이나 천안문 6.4 항쟁처럼 사격명령이 동반된 진압이나 심각한 경우 차지철 말대로 킬링필드급 학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아예 학계에서는 '''보도연맹 학살사건보다도 더 심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시 차지철이 킬링필드 같은 개소리를 지껄여도 박정희가 저지하지 않은 점은 김재규나 차지철 입장에서는 박정희가 학살을 묵인하겠다는 암시로 해석될 수 있다. 김재규의 항소이유 보충서를 보면, 김재규는 부마항쟁에 대해서 대단히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었고 자칫하다간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라고 판단했다. 또한 박정희의 곽영주&총기 사용과 차지철킬링필드 운운하는 발언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선 박정희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김재규가 자신의 변호인인 안동일에게 털어놓은 내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았지만 박정희의 성격은 절대로 물러설 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국민과 정부 사이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박정희를 사살한 것이라 말하였다.#
  • 실제로 항쟁 당시 부산마산 내의 시민들이 대거 경찰서로 끌려가거나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또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 외에도 김대중, 이철승 등 호남인사가 신민당에 있었고 여촌야도 현상이 강하여 수도권 민심이 야당에 있었으므로 단순히 부마에만 그치지 않고 호남, 수도권까지 퍼져 전국적으로 경찰, 군인들과 시민들의 대규모 충돌이 생겨 엄청난 희생자가 났을 것이다.
또한 당시 한국미국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22]는 점을 생각해보면 박정희가 미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경 진압을 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서울에도 계엄을 내리고 군을 투입할 계획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유혈사태로 번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김재규 역시 박정희 사망 이후 비상계엄령을 추진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5개월 한정이라는 전재를 달았으며 부마민주항쟁 때도 유혈 진압을 비판했던 입장[23]이기 때문에 강경한 방식으로 막가파 운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군부의 시각을 돌리기 위해 그럴싸한 핑계를 대려고 했다가 뽀록이 났다는 견해다.
김재규는 차지철과의 갈등 이전에도 유신의 방향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자주 내비쳤고, 장준하 등의 민주화 운동 인물들을 비밀리에 도우면서 관련 가족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기도 했으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게 박정희를 '환자'로 비유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법정에서도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보이며 사형 선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자세를 보았을 때 단순히 차지철과의 갈등으로 인한 우발적인 권력 싸움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결정적으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결단했던 건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대응책 방향이었는데, 박정희와 차지철은 강압적인 진압을 요구했으나 김재규는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결국 이것이 10.26이라는 도화선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의 구속을 반대하는 동시에 김대중의 가택 연금을 일시적으로 해제시키고 김영삼과 만나게 승인했으며, 차지철과의 갈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승진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다가 발생한 갈등이 아니라 국정 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갈등이 생겼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조갑제 조차도 김재규가 사욕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칼럼을 개시했을 정도였다. 김영삼의 측근이었던 김봉조의 회고에 의하면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 시절 자신을 방으로 불러 격려하며 김영삼은 한국을 위해 큰 일을 할 인물이고 앞으로 김영삼이 정치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자신있게 잘 모시라며 격려하였다고 한다.#
1970, 80년대에도 국정 방향에 대해서는 뒤에서 "박정희에게 실망했다"는 의사를 자주 표명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으며, 7대 대선에서 마지막만 하고 다시는 안 하시겠다는 약조를 김재규가 청원했다는 증언과 더불어, 한 때 진지하게 하야를 권고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다. 결국 10.26은 박정희에게 오랫동안 직언을 통해 온건한 설득을 하려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차지철을 중용하며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동안 쌓였던 실망감과 울분이 폭발하여 강경한 수를 두었다는 주장이다.
윗 내용들이 복합적으로 담긴 관련 출처
그동안 김재규를 썩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한홍구도 2013년에는 주장이 달라졌다.#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2개의 10·26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략)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 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대한민국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덧붙여 한홍구는 "김재규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해야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최상천 전 교수는 각종 문헌과 증언들을 근거로 김재규의 10.26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강의를 하기도 했다. 강의 1 강의 2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 장군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와 마찬가지로 봐야 한다."고 상당히 극단적으로 평가하였다.#
야권의 거물 정치인인 천정배 의원도 10.26 희생자 30주기 합동 추모제에 참석하여 "김재규 장군과 의인들이 역사의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것을 "더 큰 희생을 막은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10.26 재판 때 인권변호사들에게 김재규의 변론을 부탁하기도 하였고, 훗날 김재규와 그 부하의 가족들이 구명 탄원을 위해 김 추기경을 찾아갔을 때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김영삼의 측근으로 현재 민주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봉조 전 의원도 처음에는 김재규를 유신정권의 사냥개쯤으로 여겼으나, 자신을 직접 찾아와 격려하며 김영삼에게도 격려와 덕담을 전해 달라는 김재규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이유는 사심이나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닌 역사 앞에서의 정의감 때문이었다며, 훗날 이런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 주장했다.#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의사라 칭하며 박정희는 절대로 스스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기에 김재규의 거사가 없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불가피했을 거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최태민 문제 관련하여 박근혜와 최태민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김재규의 충언을 무시하고 김재규의 주장이 모함이라는 박근혜의 말만 믿고 사건을 덮어 버린 박정희의 행태도 10.26의 원인이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회창 전 총리는 김재규의 저격이 박정희 시대라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다음 시대를 여는 역사의 전환을 가져왔다고 평가하였다.#
10.26 사건의 재판을 맡았던 양병호 전 대법원 판사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것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였다고 평가하였다. 양병호 판사는 김재규를 내란목적 살인범으로 판결할 수 없다는 소신을 고수했고, 보안사로 연행되어 강제사직을 당하고 변호사 개업에도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이철 전 국회의원은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위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이 때문에 10.26 사건이 발생한 것이라고 하면서 10.26 사건을 의거로 지칭하였다.
자유총연맹 회장이자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친박 정치인''' 김경재는 저서 '쓰러지는 역사, 일어나는 역사'를 통해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하여 독재정권에 부역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씻었다면서 민주 인사들이 김재규의 거사를 폄훼하거나 냉소적으로 보는 분위기를 비판하였다. 소위 진보 및 민주인사들은 박정희 정권 말기 민중혁명의 성공이 눈 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갑자기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해 버려 당시 끓어오르던 혁명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고 주장하는데, 김경재는 이들의 주장이 화려한 응접실에 앉아서 입으로 노동계급의 승리를 외치는 '안락의자 속의 급진주의자'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였다. 설사 그들의 주장대로 민중 혁명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살상 당할 수백, 수천의 무고한 희생자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며 반문하였다.
2015년 박권흠 전 의원이 김영삼과 김재규가 단 둘이 나눈 대화 내용을 한 언론매체에 공개하였는데, 당시 현직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상당히 큰 인상을 남기고 있다. 1979년 김영삼은 뉴욕 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은 김영삼의 발언을 '사대주의적 망언'으로 규정하고 국회의원직 제명을 시도한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양쪽을 중재하고자 김영삼에게 만남을 요청하여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박권흠 전 의원이 공개한 둘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이건 YS가 나한테만 한 얘기야. YS가 김재규를 만나고는 나를 불러서 한다는 소리가 '박 의원, 김재규 그 사람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전화를 걸어서는 우리 집에 오겠다고 하길래 내가 그랬지. 아니, 여기 기자들 우글거리는데 왜 여길 오냐. 내가 공관에 가겠다고 했어.' 그러면서 김재규랑 만난 이야기를 쭉 들려주더라고."

김재규- "총재님, '뉴욕 타임스 기사는 내 본뜻이 아니었다. 뉴욕타임스 기사가 잘못된 거다'라는 해명서 하나만 내 주면 제명 안 되게 박정희 대통령에게 말하겠습니다."

YS- "그 기사에 내 원래 취지와 맞지 않는 표현이 있는 건 사실이야. 내 취지와 다른 대목이 있으니 해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가 해명을 하면 박정희한테 굴복하는 게 되는 거야. 날 제명하라고 해. 나는 제명당할 수 있어."

김재규-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YS가 다시 상도동 집에 돌아가려고 공관을 나오고 있는데, 김재규가 대문 앞까지 나와서 YS를 배웅하더라는 거야. 그러면서 김재규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이러더래."

김재규- "김 총재님, 아주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말 잘 결정하셨습니다."

"그걸 보고 YS가 나한테 '그 사람 참 이상한 사람이야' 그런 거지. 김재규가 YS에게 박정희에게 총을 쏠 것을 암시한 건지, 혹은 김재규가 속으로는 YS를 지지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지. 이건 정말 비밀이야.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다고."

가정이긴 하지만, 박정희가 살아있었다면 3저 호황을 통한 경제발전, 핵무기 개발 등을 통해 리콴유처럼 박씨 일가의 세습독재 체제를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다. 육사를 나와 장교가 된 박지만은 군부를 장악하여 리셴룽처럼 젊은 나이에 장성을 지내고 나서 정계로 들어와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고 박근혜는 최씨 일가의 도움으로 문화, 여성, 종교계를 장악했을 것이다. 반면, 박정희의 무리한 국가주도식 경제정책과 국민들에 대한 과도한 통제, 오랜 독재정치로 인한 선진국들과의 외교 갈등 등의 요소들을 고려해보면 과연 박정희가 80년대의 격변기를 유연히 대처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당시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미국정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가도 아니었으며 영국, 프랑스 같은 강대국도 아니었기에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하였다고 하여 미국 등의 강대국들이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박정희의 오랜 독재체제를 못마땅해하던 카터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해 봤을 때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했을 경우 국제적인 경제 제재가 가해져 외교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말 더 간단한 예를 들어 반박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북한은 주민들이 다 멍청이라 3대 독재가 이루어졌나?''' 박정희는 헌정 사상 가장 군을 잘 장악한 독재자였다. 박정희는 공무원, 군인 등을 다룰 때 소위 '금일봉 정치'라는 것을 행하였다. 이는 누군가에게 포상을 줄 때, 훈장이나 공적 상금 등의 공식적 포상을 주지 않고, 지극히 사적인 포상인 '금일봉'을 전달하여 포상을 주는 사람이 바로 '박정희'라는 것을 부각, 충성심을 유도하는 정치 행위였다. 이는 조선 시대에 국왕이 내탕금을 가지고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포상을 주는 것과 동일한, 말 그대로 중세 수준의 정치 행위였지만 효과는 매우 굉장했다. 이런 금일봉 정치는 상당한 비자금을 필요로 해서 박정희 휘하 3, 4공 실세들은 정치 자금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특히 출처나 사용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중앙정보부의 돈이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활용되었고, 관행이 되었다.''' 당장 2010년대에만 해도 대통령이 국정원의 돈을 개인 쌈짓돈마냥 써서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터졌는데, 이는 박정희 당시, 정보기관이 대통령에게 돈을 갖다 바치던 '관례'가 고스란히 유지된 것임을 알 수 있다.[24]
박정희의 금일봉 정치는 단순히 금전을 제공해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만은 아니었다. 전두환에게 고급 자동차를 선물한 것처럼, 박정희는 자신이 해당 군인에게 가지고 있는 '총애'의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아무리 금일봉이라지만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다더라.'는 여기저기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박정희가 그 '누구'에게 보이는 '총애의 정도'가 되었다. 돈 자체도 좋지만 금일봉의 액수는 박정희가 자신에게 보이는 총애와 관심이었고, 유신 정권 아래에서 이는 곧 '''자신의 발언권과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 수뇌부는 충성경쟁을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사실상 박정희의 사병(私兵)이 되었다. 국토를 수호하고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이 마치 조선인민군마냥 독재자 개인의 친위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박정희는 군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의 독재 정치, 우상화를 통해 사회 곳곳에 자기 세력들을 확보한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이승만, 전두환도 박정희만큼의 무소불위의 권력, 충성스러운 군대를 갖지 못했다. 그런 인물을 민중혁명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낭만주의, 모험주의적 시각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김재규 입장에서는 박정희의 폭주를 매우 위험하게 볼 만한 업무적 연관성이 있다. '''바로 70년대 말, 베트남을 시작으로 전 세계적인 공산권의 잠식현상이다.''' 김재규는 1976년부터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남베트남을 시작으로 라오스, 캄보디아, 니카라과의 공산화를 눈으로 목도하고 대응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공산화 이전의 정권들이 어떤 식으로 민심을 잃고 공산당을 집권하게 만들었는지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남베트남 몰락의 시발점인 응오딘지엠 같은 민주주의 탄압과 친족세습을 시작하려는 행보에 단순히 독재에 대한 반발이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자체가 적화통일로 멸망할 위험을 느꼈을 가능성도 높다. 거기에 가뜩이나 대한민국의 적국은 공산권 지도자 중에서도 또라이 중의 또라이로 손꼽히는 김일성이었다는 점도 적화통일에 대한 김재규의 우려를 더 강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군사정권 전체적인 부분에서 보면, 박정희라는 머리가 따이면서 군사정권의 내실은 붕괴되었다. 박정희는 유신 이전에 이미 대통령 직선제에서 3선의 임기를 거친 인물이었다. 이후 10월 유신을 하면서 완전히 타락한 바람에 잊혀지곤 하지만, 3선을 한 것 자체로 어떻게든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제거당하고 전두환이 직선제는 경험도 못한 체육관 대통령이 되면서, 군사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군사정권의 공고함이 확실히 헐렁해졌으며, 독단적으로 전방 병력과 특전사를 움직이고, 정치적 정당성도 없던 결과 전두환 정권은 미국에게 극도로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2.2.2. 부정론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결국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권력투쟁' 속에서 벌인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2004년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도 김재규의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출처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에 대해서 격분했다는 증언이 주변 인물들로부터 흘러나온 바 있다.[25] 출처 이런 점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김재규가 민주화 운운하는 것도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차지철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비해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온건 성향으로 비쳐질 따름일 뿐, 그 역시도 '''결국 독재정권에 부역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출처
유신정권의 3개의 권력축인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26], 국군보안사령부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차지철, 김재규, 전두환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 간에 치열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출처 바로 이러한 구도 속에서 파장이 일어난 것이 10.26이라는 것. 출처 드라마 제5공화국, 제4공화국 등 공화국 시리즈 등에서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시절에도 이들은 사이가 몹시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문제와 부마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을 하게 될 공산이 컸다는 주장이 있다. 출처
실제로 쿠데타 이후 김재규는 박정희를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장관들을 모아놓고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압박했는데, 이를 정권 탈취 시도로 보는 경우도 많다. 김재규 본인은 권력 장악을 의도하지 않았고, 유신의 잔재를 청산한 뒤 물러나 박정희 묘에 시묘살이나 할 생각이라고 했었지만, 이런 거야 자기만 아는 일이니까.
다른 한편으로 그가 쿠데타 당시 보여주었던 일련의 치밀하지 못했던 행동 역시도 결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당시 김재규는 차지철박정희를 암살한 후, 자신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이동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 수 시간 만에 체포되었다. 이는 김재규가 단순히 차지철, 혹은 박정희를 암살한다는 계획만 세웠을 뿐, 그 후 신정부 수립이나 정국 주도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계획이나 마찬가지였음을 보여준다.
국가 원수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통해서 급진적 권력 교체를 시도한다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치밀한 계획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10.26이 역사에 긍정적 영향을 주려고 한 계획이었다면, 단순히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박정희를 암살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이와 관계된 사람들과 철저하게 입을 맞추었어야 했다. 그리고 난 이후 정권 교체 및 민주화까지 질서 있고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진정으로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중대한 일을 저지르는 입장에서 김재규는 너무나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다 보니 10.26으로 박정희의 장기 철권 통치는 끝났을지 몰라도, 이를 대체할 새로운 권력 질서가 안정적, 민주적으로 등장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아는 전두환의 신군부 등장과 12.12, 5.18, 그리고 8년 동안의 또 다른 군부 독재였다. 만약 김재규가 좀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동조자를 늘리는 동시에[27] 신정부 수립에서 정권 이양까지의 과정을 안정적으로, 질서 있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면, 신군부의 폭주를 막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단하게 거사 직후 육군본부로 가지 않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신군부의 폭주를 간단히 막을 수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재규는 10.26 사태 직후 유신의 잔재를 5개월 내로 설거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전국으로 비상 계엄령 확대를 구상했는데, 출처1, 출처2 민주공화당은 이러한 구상안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낮다. 10.26 직후 김종필민주공화당의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되었는데, JP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시절 청구동 가택수색과 협박까지 당한 터라 김재규에게 호의적이기도 어려웠다.# 거기다 10.26 이후 JPYS, DJ과 함께 개헌과 민주 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 역시도 김재규의 구상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 #2
또한 체포되기 전까지 김재규는 박정희 암살 사실을 숨기려고 했고, 박정희 사망 이후 국민들의 박정희에 대한 동정과 추모 분위기 등을 감안해 본다면 김재규가 암살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지 않는 한 저항에 직면했을 공산이 크다.
김재규는 10.26 이후 전국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를 취하고, 군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육군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은 뒤 유신의 잔재를 제거하겠다는 방안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출처1, 출처2 대법원 판결에서는 김재규가 계엄군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사태를 제압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장악한 이후 대통령 출마까지 계획했다고 판결하였는데, 김재규 본인은 대통령 출마 의사나 사리사욕은 없다고 부인하였다.[28] 그러나 김영삼이나 김대중 등 야당이 과연 김재규의 계획에 동의하거나 협조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계획대로 이루어지기는 거의 어려웠을 것이다.

2.2.3. 최후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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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진술을 통해 박정희 정권 동안 나라에는 많은 쓰레기가 꽉 들어차 있고, 당시까지 정부나 대통령이 순리대로 선출된 적이 없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앞장서서 순리대로 하는 사례를 만들어보고 싶어 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에게 자유민주주의가 문 앞에 왔으니, 받아들이기를 간청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으로 하여금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20~25년 앞당겨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간다는 말과 함께 그 자유민주주의의 만발을 보지못하고 가는 게 아쉽다고 하였다. 끝으로 자신을 따라준 부하에 대해 그들은 좋은 사람이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며 선처를 바라면서 극형만은 면해줄 것을 청하였다. 특히 '''박 대령'''을 찝어 말했는데 이는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박흥주 대령이었다. 이렇게 김재규가 직접 간곡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박흥주 대령은 재판부의 사형판결에 이은 초고속(...) 사형집행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2.3. 최후와 그 뒤


'''먹구름 하늘을 덮고 광풍 몰아 덮칠 때'''
'''홀로 한 줄기 정기를 뿜어 어두운 천지를 밝혔건만'''
'''눈부신 저 햇살을 다시 맞지 못하고'''
'''슬퍼라만 사람 가슴을 찢는구나'''
'''아! 회천의 그 기상 철색 무지개 되어'''
'''이 땅위에 길이 이어지리'''
- 김재규 묘비 윗면에 쓰인 추모시
그리고 8:6으로 내란목적 살인죄가 적용돼 사형판결을 받는다. 80도306[29] 사형 판결을 받은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에 교수형으로 숨진다. 사형집행일 김재규는 아침을 먹지 않고 냉수마찰을 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길을 나섰는데, 이는 이승에 남기고 갈 마지막 흔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였다고 한다.# 당시 교도관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사형 집행 직전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으며 "남길 말이 있으면 하라"는 참관 검사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가 향년 54세. 사형 집행 장면 그 비극은 김재규의 남은 가족들에게도 이어져, 부인 김영희와 동생 김항규는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고 재산까지 빼앗기는 비극을 당했으며 '3족을 멸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변인들 역시 갖은 고초에 시달려야 했다.
김재규는 죽기 전 아내 김영희 씨에게 자신의 남은 재산으로 부하 가족들을 돌봐 달라고 당부하였고, 김영희 씨는 김재규의 유언에 따라 부하 가족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해준 덕분에 김재규의 부하 자녀들은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의 삼성공원묘지에 있다. 묘비에는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義士 金載圭 將軍 追慕碑)'라고 적혀 있었다. 당초 그는 유언으로 묘비에 '의사 김재규 장군 묘'를 쓰라고 했지만 신군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89년에 1월에야 광주/전남 송죽회가 세웠다. 그러나 수십 년 전에 박정희 지지자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의사' 와 '장군' 이라는 글씨를 훼손시켰고, 추모비를 굴러 떨어뜨려 금이 가게 만들었다.
이 추모비는 아직까지도 금이 가고 글자가 훼손된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추모비를 새로 세우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김재규의 유족과 송죽회가 현 상태 그대로 두겠다고 밝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추모비가 훼손되고 금이 가 있는 모습도 역사의 기록이라는 판단에서라고. #
'''국군기무사령부의 후신인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김재규의 사진이 붙여진다는 기사가 났다.''' 결국, 명예회복이 되고 있는 셈.

3. 재평가


'''나는 여기서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늘의 심판인 제4심에서 이미 나는 이겼다는 것입니다.''' - 유언 중 일부

김재규의 "의사(義士)"로서의 재평가는 그를 옹호하는 소수 사람들이 그 명맥을 이어왔으나 당시 대중들에게는 대부분 헛소리로 취급당했다. 10.26 사태도 객관적으로 볼 때 사상 초유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30] 이상할 정도로 언급 자체가 많지 않았다. 본격적인 재평가 흐름 이전 그에 대한 이미지는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자 홧김에 주인을 공격한 독재정권 권력자"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함세웅 신부의 재평가 주장을 비롯하여 시사in 등의 일부 언론과 문영심 작가, 김재규를 변호했던 안동일 변호사, 천정배 의원 등이 김재규 재평가에 힘을 실어줬고, 공화국 시리즈 등 드라마에서도 비교적 호의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또 월간지 신동아 1996년 10월호에선 김재규를 특집기사로 다루었고, 최후진술이 담긴 육성 테이프를 최초로 공개하면서 신동아 독자들에 의한 재평가 여론이 일었다. 당시 김재규의 최후 진술을 듣고 감동받은 많은 독자들이 신동아의 편집실로 전화하여 "김재규를 그동안 잘못 알았다.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허나 당시는 박정희 신드롬이 점점 떠오르던 시기라 김재규의 재평가 여론은 금세 묻히고 만다.#
그러다 2010년대 들어 박근혜 정부가 집권한 이후 김재규 재평가론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하는데, 박근혜의 실책에 대한 반발, 조롱으로 "의사 김재규"라는 유머 컨텐츠가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 유행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김재규 드립을 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어디까지나 드립이었고, 그가 진짜 의사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헌데 이러한 유머 소재로써의 흥행을 통해 대중들에게 언급되는 일이 많아지며 김재규 본인과 당시 사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게 된 것은 어찌보면 행운이었다. 김재규가 인지도를 얻으면서 그가 살아생전 남긴 글과 행적들 역시 진지하게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김재규는 평소에도 민주주의와 민주 개혁 세력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이들을 알게 모르게 도와왔다는 사실, 부마민주항쟁 당시 학살극이 벌어질 뻔한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 사실 등이 발굴되고 알려지며 김재규 지인들이 밝힌 미담 등과 함께 자연스럽게 "진지한 재평가"에 대한 정보들도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최소한 2015년 전후부턴 이런 평가가 인터넷상에선 베플 등으로 진지하게 퍼져가던 시기. 덕분인지 10.26에 대한 평가 자체도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데, 이전까진 박정희 사망일이라는 것이 좀 더 부각되었다면, 이 때쯤부터는 김재규 의거일을 기념하는 분위기가 SNS 등을 중심으로 더 활발해진다. 심지어 10.26을 10.26 의거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리고 이러한 재평가 흐름에 정점을 찍게 만든 것이 바로 2016년 말 벌어진 한국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였다. 1970~80년대 독재 정권에서나 일어날 법한 박근혜의 후안무치한 행각과 헌법 부정으로 인해 퇴진 운동이 불붙으며 자연스럽게 그 아버지인 박정희와 그의 독재정권을 종결시킨 김재규에 대한 관심도도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비록 그의 암살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주장은 있지만 적어도 그의 행동이 박정희의 절대 권력을 깨부순 것은 사실이며, 이전부터 보여온 친민주화적 행각이 대중들 사이에서 조명 받으며 재평가 움직임은 대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단순히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박정희 독재를 종결'한 것이 재평가 받은게 아니라, '생전에도 존경받을 만한 많은 언행 + 특히 독재정권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민주세력들을 배려하는 행동 + 사형 직전까지 재판에서 보여준 평소 신념에 대한 논리정연함' 등이 조명받으면서 '''"권력 투쟁이 아닌, 진심으로 시민과 민주주의를 생각한 거사"'''로 뒤바뀐 평가가 퍼져나간 것이다.
그동안 계속되는 박정희에 대한 프로파간다[31]로 인하여 언론 및 교과서 등에서 김재규가 10.26 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해 앞 뒤 다 잘라먹고 그냥 대통령 암살사건 하나만 언급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김재규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는 바람에 박근혜와 관련된 모든 부정적인 평가가 한방에 모조리 드러나다 보니 결국 박정희가 왜 암살당했는지 그 진짜 이유가 밝혀졌으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기점으로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전혀 정반대의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으로 확 달라졌다.
1 2 3 4 그 결과 정치에 관심이 많은 반독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김재규에 대한 "진지한 재평가"가 보편화되었다.
그를 안중근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세세한 걸 따지기 이전에 정말 공교롭게도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과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날이 10월 26일로 동일하고 그 간극이 정확하게 70년'''이라는 점 때문에 상당한 이야깃거리가 되기는 한다. 특히 저 간극이라는 기간은 '''정확하게 인간의 평균 수명'''에 부합되기 때문에 상징성이 커졌다. 실제로도 이토 히로부미가 죽을 때 태어나서 박정희와 같은 날 수명을 다해서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3.1. 흐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직후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 인터넷 상에선 김재규 의사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에 대한 드립과 진지한 논쟁이 지속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디시인사이드 주식 갤러리는 '10·26 의거 명예회복 추진위’라는 조직까지 꾸리고 재평가에 앞장서고 있다. 여기에 일찍이 2013년 김재규와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담긴 평전인 문영심 작가[32]의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역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부상한 대중의 김재규 재평가 여론과 맞물려 빛을 발하며 배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2016년 12월 17일 대한민국의 유력 일간지이자 진보매체 중 하나인 경향신문에 '''박근혜가 묻어버린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기사가 올라오고 기사의 상당 부분이 김재규 재평가에 대한 내용이 할애되는 데 이르렀다.
인터뷰에 응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과거 발언내용인 2004년 8월 11일 한겨레21 기사와 최근 발언 내용을 비교하면 그의 김재규에 대한 평가가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몇 년 전까지는 김재규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나, 2013년 5월 17일 한겨레 기사를 통해 재평가 여지가 있음을 밝혔고 2016년 12월 17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 입장임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기사를 참고하면 한 교수는 지금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쳐내는 시기'''라고 규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과거 한 교수는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아래 기사 참고.

한 교수는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김재규의 행동이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그 뒤 실제로 5·17 쿠데타를 통해 더욱 폭압적 군사정권인 전두환 체제가 들어선 점에서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2004년 8월 11일''' 한겨레21 기사

'''↓'''

김재규는 보수우익계의 마지막 대륙형 인간

(중략)

김재규의 거사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엔 완전히 이르지 못했어도 여성연예인들이 대통령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은 확실히 차단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가 뒤를 이은 셈이다.

(중략)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2013년 5월 17일''' 한겨레 기사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김재규가 살아나는 것은 박정희 신드롬에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10·26의 주범일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장 시절 박 전 대통령에게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의 비위사실을 알린 당사자다. 한 교수를 김재규를 ‘박정희의 충신’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며 “유신시대의 자료를 꼼꼼히 읽으면서 김재규란 사람이 자기가 잘릴 수도 있는데 박정희의 충신으로서 자기 몸을 던져서 최태민을 막으려 했던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최태민을 막았다면 오늘의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런 내막이 최근 들어 다시 알려지면서 집회에 김재규 얼굴이 들어간 깃발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중략)

한 교수는 “그래도 박정희박근혜보다는 낫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는 “박정희에게는 그래도 충신들이 있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나 박승규 민정수석처럼 자신의 직을 걸고 최태민 보고서를 올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도 다른 비서관들에게 최태민과 어울리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로 유신정권의 핵심 참모들은 분별력과 상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드러난 바로 볼 때 박근혜 정권의 참모 중에 최순실 문제에 대해 올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아니냐”며 씁쓸해했다.

'''2016년 12월 17일''' 경향신문 기사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삼성공원 묘지에 위치한 김재규의 묘소[33]10.26 사건 당시 김재규를 변호했던 변호인단이나[34] 몇몇 민주화 운동가들, 그의 생전 부하들만 찾는 쓸쓸한 묘소였다. 박정희 신드롬이 한창이었을 땐 박정희의 추종자들이 찾아와 김재규의 묘비나 제단의 글자를 훼손하거나 심지어 추모비를 산 밑으로 굴려 떨어뜨리기까지 하였다.[35]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높아진 이후 그를 추모하는 젊은이들이 묘소에 김재규의 영정을 갖다놓거나 주변을 꽃다발이나 헌정시 등으로 장식하여 현재는 제법 묘소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재평가 받은 것과는 별개로 유족들이 왜 훼손된 상태로 묘비를 놔뒀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텐데, 2013년 당시 김재규 유족과의 인터뷰에서 '훼손된 것도 역사의 일부'라는 취지로 내린 결정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덧붙인 "훗날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라는 부분에서 무언가 의미심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image]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직후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제단 위의 술병은 '''시바스 리갈'''. 10.26 사건 당시 연회상에 올라온 술로 유명한 그 술이다.
참배객들이 쓴 글들. # 박근혜 탄핵 인용 직후의 방문.
언론에서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김재규의 묘소에 추모객이 늘어나는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중앙일보, 해럴드 경제
채널A의 보도에 의하면 최순실 게이트 이후 김재규 관련 책들의 판매량이 18배 이상이나 급등했다고 한다.#
시사IN의 정희상 기자가 김재규를 재평가하기 위해 시작한 스토리펀딩 프로젝트 '김재규, 역사의 심판대 다시 오르다'는 목표금액 1천만원을 270% 초과한 2700만 2900원을 모금하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기무사의 2017년 계엄령 모의 사건 이후 고강도 개혁이 시행되며, 기무사의 후신인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김재규의 사진이 다시 내걸릴 전망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다만 사령관실이나 회의실은 사령부 자체가 신설되는만큼 사진 자체를 치우고, 사진은 역사관 같은 곳에 함께 걸릴거라는 모양.
2019년 5월 국방부는 "국방장관 및 장성급 지휘관 사진 게시 규정안"을 개정해 예하 부대의 역대 지휘관 사진들을 역사 기록 차원에서 차별없이 게시하라는 훈령 개정안을 하달할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지휘관을 지냈었던 육군 3군단과 제6사단 홈페이지에 사진과 약력이 게시될수 있게 될 예정이다.
2019년 7월 31일에 3군단과 6사단에 김재규의 사진을 새로 걸었다는 공식 보도가 나왔다.

4. 여담



4.1. 생전


박흥주 전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의 말에 따르면, 김재규는 인망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중앙정보부장에 부임하고 난 뒤 남산의 고문실을 없애고 강압수사 금지 조치를 시행하였으며, 비대해진 기구를 축소하거나 해외정보업무 중심으로 중정을 개편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장 판공비 8억 원을 내놓아 직원들의 퇴직기금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했다. 알다시피 10.26 사건 당시의 8억 원이면 정말 큰 돈이다.오마이뉴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본 순사가 조선인 나무꾼을 구타하는 걸 보고 '이 순사 도둑놈이다'라고 했다가 유치장에 갇힌 적이 있다.[36]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의 첫인상은 겸손하고 정중하였으며 대화를 나눌수록 진정성이 느껴졌다고 평하였다.
김재규의 또다른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면회한 뒤 "아주 훌륭한 인물"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김재규를 나라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라 평가하며 안중근 의사와 역사적으로 같게 평가받을 인물이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 네티즌들이 안중근에게 비교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 김재규의 최측근들 조차도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
그를 부마항쟁에서 만났던 이는, 최루가스에 고통스러워하는 어린아이를 그가 구하려고 애썼다고도 말한다.# 장준하 의문사 이후 그의 식솔들에게 조그만 전세를 얻을 수 있도록 손써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심지어 일요신문 1996년 1월 21일자 2~3면 기사에서 윤보선 측근인 이한두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가 거사 21일 전에 이 사실을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알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온화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따뜻한 성격이었으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는 욱하는 성격이 발동해서 바로 반격을 가했기 때문에 지위를 막론하고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김재규는 10.26사건 이전인 1979년 봄부터 '자유 민주주의', '위대의', '민주민권자유평등' 등의 휘호 6점을 남겼다고 한다.
1972년 3군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유신헌법을 3번이나 읽어 본 뒤 불같이 화를 내며 '''"더러운 놈의 나라! 이것이 무슨 헌법이냐? 독재하자는 것이지!"'''라고 소리치면서 헌법책을 던져버렸다고 한다. # 이 당시에 3군단장에 근무한 사람 증언에 의하면, 이거 만든 사람 잡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단다.
1979년 12월 1일 변호인단과의 3차 면담에서 김재규가 털어놓은 이야기에 의하면 김재규는 1977년 감옥에 갇혀 있는 김대중을 서울대병원으로 옮긴 뒤 모친에게 ''''어머니,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는 한 분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 모셨습니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박정희의 전화를 받을 때 일어서서 차렷자세로 받았고, 다른 사람한테 박정희를 지칭할 때는 항상 존칭을 썼다고 한다.[38] 또한 남은 여생을 박정희 무덤에 묘막을 짓고 시묘하며 보내겠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며,(또 다른 증언으론 박정희를 죽이고 자신도 박정희 무덤에 가서 자살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다만 이 말을 했던 시점은 10.26이 벌어지기 전이기에, 최종적으론 시묘살이를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최후진술에서 박정희와는 친형제간도 그럴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수환 추기경 역시 김재규가 자신의 입으로 친형제 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10.26 이전에 수차례나 박정희의 암살을 시도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한 바 있고, 김재규의 수사를 총 지휘한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도 회고록에서 김재규의 언동에서 박정희에 대한 존경심이나 충성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10.26 직후 김재규를 목격한 국무위원들이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고도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고 의아해했다는 증언 등 위의 언급을 반박할 행적들이 많이 존재한다.#
박정희와 친형제 이상으로 각별한 사이라는 것은 사실로 김재규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 친해진 김계원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박 대통령이 김재규를 매우 아꼈다는 증언은 많다. 김계원 비서실장의 말(회고록)이다.‘1965년 4월 대통령이 제1군사령부 시찰차 원주에 오셨다. 서울 상경 길에 “김재규 사단이 여기서 멀지 않지? 오늘 저녁은 재규 사단에 가서 한잔 하지” 하셨다. …저녁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데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재규, 저놈 참 괜찮아. 저 친구 내가 장군이라는 칭호로 불러줘야 되는데 버릇이 되어서 말이야. 꼭 고향집 집안 막냇동생 놈 같으니 말이야. 참 착한 자요.”’ 기사

김종필도 둘이 굉장히 친밀하다고 말하고 있다.

김재규는 나와 동갑이지만 육사는 박 대통령과 동기생(육사 2기·46년 입교)이다. 고향도 경북 구미로 박 대통령과 동향인데다 중·고등학교 교사를 한 경력이 있어 국민학교 선생님 출신인 박 대통령은 젊어서부터 그를 따뜻하게 살펴줬다. 박 대통령에게 김재규는 차지철과 비교(5·16 혁명 때 처음 만남)하면 인연과 세월의 깊이가 달랐다. 아랫사람을 앞에 두고 좀처럼 하대하지 않던 박 대통령도 “재규” “재규”하며 그의 이름을 편하게 불렀다. 혁명 뒤 김재규는 6사단장과, 6관구 사령관에 이어 육군방첩대장, 보안사령관을 지내고 3군단장 중장으로 예편해 바로 유정회(73년) 국회의원이 됐는데 박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가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는 영전의 연속이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선 김재규처럼 30여 년을 알아온 인물을 옆에 두면 안전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음직하다. 대통령이 그렇게 믿음을 준 자한테 목숨을 잃었으니 사람의 일이란 허망하기 그지없다. 김종필 소이부답

실제로 그는 요직 중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라는 양대 정보기관의 수장을 지냈고, 고도성장기의 요직 중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건설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다만 이 친밀함이 지나쳐 박정희는 김재규를 친동생인 양 지나치게 격이 없이 대하고 혼내기도 했다고 한다.

- 朴 대통령이 김재규를 대할 때 동생처럼 대했지요.

『네, 朴 대통령이 아무에게나 말을 안 놓는데, 김재규는 동생처럼 얘기해요』

- 朴 대통령이 김재규를 너무 몰아세워 그에게 미안한 감정 같은 것은 못 느꼈나요.

『미안한 느낌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김재규를 너무 믿고 귀여워했어요. 「저놈은 야단쳐도 괜찮다」는 식이었지요. 김재규는 자기대로 다 컸는데,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나보다 나은 놈이 없는데 나를 멸시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 어떻게 보면 朴 대통령이 차지철보다 김재규를 더 신뢰한 것 같지 않나요.

『네, 맞아요』

- 김재규도 朴 대통령을 진심으로 깍듯하게 모셨지요.

『네, 그럼요』

- 朴 대통령이 차지철에게 대하는 것은 김재규와는 달랐지요.

『그렇게 친밀하진 않았아요. 뭔가 간격을 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김계원 인터뷰

김재규는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임할 때 중앙정보부에 자신의 심복들을 심어놓았다. 의전과장 예비역 해군 보병대령[39] 박선호는 그가 대륜중학교 체육교사로 잠시 재직할 때 가르친 제자이며, 수행비서 육군 포병대령 박흥주사단장 시절 그의 전속부관이었다.
김재규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최초로 명예면관[40]을 당한 장교이기도 하다.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6월, 군경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자기 부하를 강제로 연행하려는 미 육군 장교와 대립각을 세우며 칼로 위협하다 면관을 당한 적이 있다. 이후 고향인 경북 선산으로 내려와 대륜중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쳤는데 이때의 제자 중 유명한 사람들이 꽤 있다. 위에서 말한 박선호와 전 국회의장 이만섭[41] 등이 그 예다. 그러나 면관 1년 4개월 만에 군에 복귀하였다. 정부수립 초기 군과 경찰은 서로 총질까지 하는 등,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42]
김재규의 주치의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유신독재 시절 "데모하는 학생들을 처벌하지 말라"는 지시를 대학총장들에게 내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어떤 대학총장에게는 "학생을 잡아가라고 하는 사람이 스승이냐!!!"라면서 꾸짖기도 하였다.
김재규의 지인인 김진우 전 판사가 주진우 기자와 한 인터뷰에 의하면[43]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당했을 때 박정희는 김영삼을 구속하라고 지시했으나 김재규가 설득하여 지시를 철회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김진우 전 판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1979년 시베리아 철도사업의 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 상공부 장관이 김재규에게 차관보를 보내 업체선정에 대한 로비를 하였으나 김재규는 "난 정책만 결정하지, 이권에는 개입 안 한다"며 로비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외에도 김재규의 종친회 부회장이 삼양라면 상무이사로 재직하던 시절 김재규에게 삼양라면 한 박스를 선물했으나 바로 돌려준 적도 있고, 심지어 자신의 누이동생을 통한 로비조차 한 번도 들어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1978년 말 유신독재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던 시절, 김진우 전 판사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면담하며 "데모한다고 중정에서 막 잡아넣으면 안 된다. 학생들을 석방하고 학교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러자 김재규는 맞장구를 치며 "어쩌면 내 생각과 그리 같느냐? 나라를 걱정해서 데모도 못 하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국가가 위급하면 나라를 지키느냐?"고 말하면서 그런 자신의 뜻과 다르게 장관들이 말을 안듣는다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김진우 전 판사가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지방법원장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김재규는 부산에서 기관장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군인들이 절대로 국민들에게 총을 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민들도 군인들에게 잘 협조하도록 당부하여 무고한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힘쓰기도 하였다. 회의가 끝날무렵 김재규는 "이런 상황에서는 '제3의 길'밖에는 없다"는 말을 남긴다. 부산지방법원장은 김재규가 말하는 제3의 길이 무엇인가 의아해 했지만 10.26 사건이 터진 뒤에야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되었다고 한다.
김진우 전 판사는 1970년 김재규가 충의공파 초대 종친회 회장을 맡던 시절 처음 알게 되었는데, 김재규의 첫 인상은 친절하고 당당한 사나이였다고 회고한다. 종친회 일로 서로 의견이 충돌하여 듣기싫은 말을 여러차례 하여도 김재규는 조용히 들어주었고 나중에는 격려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1976년 김재규는 김진우에게 중앙정보부의 특별보좌관 직을 제의하며 자신은 중앙정보부를 해외정보 업무기능의 비중을 높인 진정한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게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김진우는 고사하였지만, 훗날 자신이 그 직을 맡았다면 김재규를 따라갔을 지 모른다며 아찔해했다고 한다.
이철 전 국회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선산학교 후배인 고교 교사에게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들은 의로운 일을 한 사람들이며 공산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박정희에게 분개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철은 '''민청학련 사건에서 사형 판결을 받기까지 했던 사형수였다.''' 따라서, 박정희 관련 인사에게는 인식을 좋게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는데, 김재규만큼은 좋은 평가를 했다.
10.26 사건 4일전 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국무의원 중 유일하게 부마민주항쟁 관련하여 박정희에게 직언을 하였다. 부마민주항쟁의 원인은 무거운 세금과 잘못된 시정[44], 낮은 임금과 제약받는 노동권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직언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에겐 우이독경. 소 귀에 경 읽기였고, 결국 4일 뒤...
유신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들을 전부 빨갱이로 몰아서 취직을 포함해 아무것도 못하는 폐인으로 만드는 박정희의 통치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방식으로 생긴 '자생적 빨갱이'가 북한에서 넘어오는 '진짜 빨갱이'보다 무서운 존재"라며 박정희에게 정책의 시정을 요청했으나,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평소에 유능한 인재들이 빨갱이란 이유로 탄압받는 일에 안타까워 하였고,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원인이 개인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인재들이 잘못된 이념에 빠지도록 몰아가는 사회 제도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형 직전까지 쓴 옥중 수양록을 보면, 본인은 사형을 피할 수 없더라도 동조한 부하들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변호를 맡은 안동일 변호사와의 접견에서 자기보다는 부하들을 위해 변호해달라고 부탁하였으며, 법정에서도 본인은 죽더라도 부하들은 선처해달라며 재판관들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하 가족들의 생계를 염려하여 자신의 남은 재산으로 이들을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김재규의 부인인 김영희씨가 김재규의 유언에 따라 부하 가족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해준 덕분에 김재규의 부하 자녀들은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끝으로 나의 부하들은 착하고 순한 양 같은 사람들입니다. 무조건 복종했고 선택의 여유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저 하나가, 중앙정보부장 지낸 사람이 총책임 지고 희생됨으로써 충분합니다. 저에게 극형을 주고, 나머지는 극형만 면해 주도록 부탁합니다. 특히 박 대령은 단심이라 가슴 아픕니다. 매우 착실하고 결백하며 가정적인 사람입니다. 청운의 꿈이 있던 사람입니다. 군에서 곤란하더라도 여생을 사회에서 봉사 할 수 있도록 극형을 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재규의 최후 진술)

문제는 밑에 친구들인데 무슨 방법으로든지 살리고 싶다. 법도 정상참작이 있을 법한데... 관세음보살님 저 젊은 사람들 살려주소서(1월 21일)

박흥주 대령 살릴 길 없겠는가. 한량없이 마음에 아프고다. 박선호 군 선량한 얼굴, 경비원들 저 무심한 표정들 살리고 싶다.(1월 23일)

부처님께 서원한다. 박선호, 박흥주 외 경비원 일동, 김계원, 정승화 장군 극형만은 면제되게 해 주십시오.(1월 24일)

저 젊은 생명 여하히 하겠는가. 나에게 끝까지 충성하고 있지 않는가.(음력 12월 29일)

김재규 옥중수양록

제 부하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제 명령에 복종한 죄밖에 없습니다. 과거 일본에서도 부하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나보다는 그들(부하들)을 위해 열심히 변론해주십시오.

안동일 변호사와의 접견#

서명숙 현 제주 올레 이사장이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사기 혐의로 들어온 한 ‘장군의 부인’을 만난다. 이 장군의 부인은 수감 중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지만, 죽인 이가 다름 아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소식에 안면을 바꾸었다고 한다. '김재규 장군이 그랬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며 서명숙에게 김재규가 군 시절 얼마나 참된 군인이었는지 조목조목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세운 학교도 있다. 지금은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중경고등학교가 그 학교로, 원래는 서빙고동 지금의 한강중학교 위치가 학교 위치였다. 중경고등학교는 설립 당시에는 군 간부 자녀 전용학교였던 걸로 유명했는데, 최초의 특수목적고등학교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덕분에 박정희 정권 당시 후덜덜한 빽을 지닌 자녀들의 총집합소 비슷한 곳이 되었던 과거가 있다.
그 시절에 학교 스쿨버스가 청계고가차도[45] 위를 휙휙 날아다녔다는 도시전설이 있고, 지금 육군사관학교 비슷한 스타일의 교복폭풍간지였다고. 그런데 10.26 사건 후 학교 부지가 몰수크리. 마침 중경고 근방에는 오산고등학교가 있었고, 한강중 근처에는 용강중학교[46]이 있었기 때문에 두 학교 위치를 바꿔버린 것.[47] 그 와중에 교훈이며 교표며 싸그리 갈렸다가 1999년에 와서야 교훈은 원래대로 환원됐다.
<사나이 결심>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 목록에 자신의 조상인 김문기의 이름을 넣도록 하기 위해 학계에 압력을 가한 적이 있다. 사육신 문서 참고. 이는 사육신만 알고 삼중신을 몰라서 벌인 촌극이다.
1950년대 말 대령 시절에 참모총장 송요찬 장군에게 브리핑을 하다가 실수를 하여 송요찬 장군이 그를 크게 질책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욱한 김재규 대령이 '''욕을 퍼부으면서 "옷 벗으면 그만 아니냐!!"고 문을 걷어차서 나가버리는'''(!) 행패를 부린 사건이 있었다. 송요찬 장군은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선 화도 못 내고 김재규 대령을 영창으로 보내버리려 했는데, 이를 이종찬이 말려서 육군대학 부총장 자리를 제의함으로 처벌을 피했다 한다.
다만, 이때는 송요찬 장군 본인의 무리한 요구도 문제였다. 김재규 대령의 사단은 당시 사단장이 다른 업무로 부재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전 통보없이 갑자기 불시에 방문해서 김재규 대령에게 부재중인 사단장의 업무보고까지 요구하며 이것저것 트집을 잡았는데, 선술했듯 평소엔 온화하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폭발하는 성격이 나온 것이다.
첫 번째 결혼을 실패한 후, 김영희와 재혼하여 외동딸 김수영을 두었다. 그리고 당시 3대 요정 중의 하나였던 선운각[48]의 마담 장정이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다. 김재규는 당시 유부녀였던 장정이가 이혼한 후, 서빙고동의 약 200평대 부지에 고급주택을 지어주었고 15년간 동거했다고 한다. 장정이는 선운각 마담으로 일하던 당시, '몸빼', '억척이' 등으로 불릴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희는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안동일 변호사는 '''안가에서 질펀하게 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느냐'''라고 했다. 링크
사실, 그 시절에는 조선시대 혹은 전통시대적인 윤리관이 강하게 남아 있어 재력이나 권력이 있는 남성이 을 하나 두는 것 정도는 큰 흠이 되질 않았는데,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는 박정희는 심했다고 평가했다.[49] 이 후궁을 두는 것 자체는 비판 받을 일은 아니지만, 채홍사를 통해 많은 여성을 궁궐로 불러들인 연산군은 비판을 받은 것과 비슷한 이유인 것이다. 김재규가 이를 생전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히지 않고 변호사에게만 털어놓은 것은 이런 파장을 의식한 것이다.

4.2. 사후


국가정보원 홈페이지에서는 그래도 역대 원장들 중 한 명으로 기록해주고 있다. 하지만 육군에선 대우가 전혀 다른데, 이 사람이 사단장을 지냈던 6사단의 역대 사단장, 연대장으로 지냈던 5사단 독수리연대 역대 연대장 목록에는 제명당한 상태다. 다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가결된 2017년 이후 들어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3군단과 6사단 등, 부임했던 부대에 다시 초상화가 걸리고 역대 지휘관 목록에는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복권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두환10.26 사건 이후 김재규에게 "왜 거사 후 자살하지 않았느냐? 당신이 한 자리 차지하려고 그런 것 아니냐??"며 힐난했다. 훗날 5공 청문회에서 국회의원이 된 김재규의 변호사 강신옥이 전두환에게 '''"당신이나 자결하라"'''는 말로 말한 적 있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원로이자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대표인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2012년 8월 인터뷰에서 "33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민과 역사가 김재규 부장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기사
김재규와 장정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김재규 사후 어렵고 빈곤하게 살고 있다. 김재규는 10.26을 일으키기 전에 자신의 아들에게 "나 없이도 잘 살아야 한다"라고 했다고 하며, 김재규의 아들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아버지를 말렸을거라고 털어놓았다. 관련 링크 이는 그의 어머니인 장정이가 막장으로 살았기 때문인데, 김재규 사후인 1980년대에 부동산 사기로 구속되기도 하였으며, 2008년 12월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다만 현재 김재규의 유족은 수백억대의 재산을 가지고 유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기사 당시 동아일보의 기자였던 김충식이 쓴 남산의 부장들에 따르면 제주 지역에서 수렵장을 건설하겠다는 청탁을 김재규가 받아들였는데, 이를 김정렴 실장이 제지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50] 당시,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의 주장에 따르면 장충동에 있는 자신의 30억짜리 집을 1억 주고 뺏어가서 10.26 이후에 전두환에게 돌려받았다고 한다. 다만, 어폐가 좀 있는 것이 상기한 것처럼, 전두환은 김재규에게 10.26 사건을 일으키자, 왜 자결하지 않았냐고 힐난했기 때문에...
한국 미술계의 대형 스캔들인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미인도는 한때 김재규의 개인 소장품이었는데, 10.26 사건 후 김재규의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이 그림이 국가로 귀속되어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후 위작논란이 시작되었다. 즉, 김재규가 이 작품의 위작 여부를 알고 있었는지,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경위가 어떤 지를 밝히는 게 위작논란의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일단은 김재규의 남동생에 의하면 "형수가 그 그림이 진품인지는 알지못하고 걸었다"라고 인터뷰한 바가 있고 검찰에 의하면 김재규의 부인이 친한 오모 대령의 부인에게서 받은 그림이라고 한다. 처음 이 논란이 시작되었을 때는 단순히 전 소유주라는 사실 이상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2016년 그 사건이 터지고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다루면서 '''김재규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위한 신군부와 미술계의 결탁'''이라는 가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시인 정호승은 1992년에 김재규 사형 전후를 배경으로 한 세 권짜리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를 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을 인용한 이정미 재판관은 "본래 수학교사가 꿈이었는데, 고등학생 때 10.26 사태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보고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
2018년 1월 24일경,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자칭 '애국순찰팀'이 김재규의 묘비를 훼손하였다. 이 건 보배드림에서 '고 김재규 장군의 묘 근황'이라는 제목으로 먼저 알려지기도 했다.
생전에 살던 자택은 성북구 보문동 7가에 있었다. 김재규의 수사 진술서에 자세한 주소가 나와 있다. 정릉동에 김재규의 집으로 알려진 다른 건물이 있는데 폐건물 상태이다.

5. 매체에서


  • 욕망의 문
정한용정주영 회장이 연상되는 거대 재벌총수로 나오는 드라마.[51] 여기서는 실명 대신 정보부 부장이라는 호칭 아래 백찬기가 열연했다. 사진상의 김재규와 상당히 비슷했고 원래 정치자금 문제로 박정희와 같이 회장님에게 충고하는 1회성 출연이었으나 의외로 인기를 끌어 고정 게스트화 되었다. 여기서 박정희로 나온 사람은 연극인 이진수. 박정희와 정보부 부장 2명은 실제 인물과 꽤 비슷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인기가 있었다.
  • 다큐멘터리 극장 - 12.12편
KBS에서 방영된 12.12 사건 세미 다큐 드라마. 여기서는 김재규라는 이름으로 초기부터 나온다. 역시 백찬기가 김재규를 맡았고, 드라마 진행상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에게 체포되면서 리타이어된다. 이 다큐 드라마에서 박정희이창환, 최규하김성겸, 전두환박용식으로 이후 정치드라마의 고정 배역의 시초가 된 작품.
  • 야망의 세월
유인촌이 주연을 맡은 당시 건설회사 대표였던 이명박의 전기 드라마. 이휘향에게 정치공작을 지시하는 부장님으로 백찬기가 나왔다. 김재규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으나, 몇 번의 출연 후 작중에서 대사로 각하를 저격했다는 언급이 나와 그가 김재규임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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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이 극강의 김재규 연기를 보여주었다. 역대 최강의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김재규가 차지철을 쏠 때에 "이 새끼 너 건방져!"는 가히 명대사로서 차지철과의 말싸움과 그 싸움이 끝나고는 "이 개새끼!"라고 뇌까린 적도 있다. 10.26 사건을 일으키기 전 총을 겨누며 일본어로 '고로시마스(죽여버리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릴 때의 포스는 압도적이다. 10.26 사건을 다룬 영상 매체에서 김재규가 '고로시마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 장면에선 아이러니하게 박정희의 사진이 배경으로 보이면서 총을 겨누니 가히 긴장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명장면.[52] 박정희를 저격한 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더 이상 언급이 없다가 5.18 민주화운동 이후 4공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차지철과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 개그 캐릭터화가 될 뻔 하였으나 배우의 포스로 그나마 무게를 잡았다.
덧붙이자면 전작인 제3공화국의 김재규는 김동현이 맡았다. 6사단장 시절로 나왔는데 비중은 실로 미미했다. 이후 김동현은 코리아게이트에서 장태완 소장을 맡게 되었으나, 2005년 제5공화국에서 같은 배역을 맡은 김기현의 포스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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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서 정도전 전문배우로 유명했던 김흥기가 김재규 역을 맡았다. 제4공화국과 같은 시기에 방영되어 드라마는 신통치 않았고 4공에 묻힌 감도 있다. 배우가 배우인지라 연기력은 훌륭했지만 워낙 4공에서의 박근형 포스가 막강했던지라 그에 비하면 살짝 역부족. 그런데 드라마 초반에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가 후반부에 착용한다. 이 드라마 19화와 마지막 화인 20화는 김재규의 일생이 중심이다.
신성일이 연기한다. 메인 플롯은 김희라가 연기하는 김형욱이 주인공인 영화지만 김재규도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주연이며 영화 마지막 장면이 10.2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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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윤식이 열연했다. 김재규와 박정희 살해 사건을 주제로 한 블랙 코미디 영화. 이런 류의 풍자 코미디가 드문 한국에서는 괜찮은 수작이다. 다만 조롱에 중점을 둔 나머지 영화 속 청와대 사람들에 대한 묘사의 리얼리티는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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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명품 역사 드라마. 여기서도 김재규가 포스 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연기자 김형일은 실제 김재규와 외모, 분위기가 매우 비슷하다. 얼굴은 김형일이 잘생겨진 김재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다만 김형일은 체구가 크고 목소리도 되게 묵직한데 비해서, 실제 김재규는 체구가 작고 목소리도 가늘게 높다. 본관까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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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수가 연기하였다. 작중 묘사되는 10.26은 김재규가 술에 취해 갈지자 걸음으로 나와 부하한테 총을 빌리고 쐈다는 뉘앙스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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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관련된 원문이 삭제되어 짤만 존재하는 상태. 여포동탁을 살해하는 장면. 이말년 시리즈 하차 이후 이말년 서유기를 연재하기 전 삼국지를 검토한 적이 있긴 하지만 만화로 사용하려고 그린 것은 아니고, 모 패션업체와 콜라보레이션 작업 때문에 그린 그림이다. 한동안 이말년 신혼집 방에 전시되어 있었다.# 링크에 들어가보면 당시 같이 그렸던 전두환노태우패러디한 이각과 곽사가 김재규로 패러디한 여포를 낙양성에서 쫓아내는 그림도 있다. 실제 역사와도 유사한 게, 여포(김재규)가 동탁(박정희)를 죽였으나, 정작 이후 이각과 곽사(전두환노태우)가 권력을 잡게된다.
굽시니스트본격 시사인 만화에서는 항상 재규어(동물)로 등장한다.#
김병기가 연기한 김재욱 중정부장. 실존 인물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이는 그가 차지철을 참고한 역할인 장철환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 장철환이 그에게 전면전을 선포하려 하자 차수혁(이필모)이 "김 부장은 각하와 동향(경북 선산)으로 특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고 진언한 점 등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김재욱은 정권이 바뀐 후에도 죽지 않고 사업가로 변신하여 강기태(안재욱)를 뒤에서 지원해준다.
김재규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김훈(태권V)의 과거 회상에서 김부장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며, 김훈은 신군부에게 대통령을 시해한 김부장과 한패라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았다.
  • MBC 스페셜 ‘부마항쟁 40주년 특집 1979’
2019년 10월 방송된 다큐멘터리로 부마항쟁 당시의 상황과 10.26 사건을 보여줬다. 여기서는 배우 박동빈이 김재규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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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에 개봉한 영화로 김충식의 저서 <남산의 부장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김형욱 실종 사건 및 10.26 사건을 중심 소재로 하고 있으며 배우 이병헌이 연기했다. 김규평 중앙정보부장이라는 가명으로 등장.

5.1. 여담


  • 김재규 역을 맡지 않는 이 중에서는 배우 정해균이 김재규를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6년 12월 기준으로) 네이버에 정해균을 검색하면, 자동완성으로 김재규가 뜰 정도. 특히, 극중 긴머리를 하고 있을 때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듣는데, 10.26 사건 이후 머리를 풀어헤치고 현장 검증을 하고 재판을 받을 당시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배우 박철민도 많이 닮았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박철민은 순하고 둥그러워 보이고, 정해균은 날카롭고 도도한 이미지라 기본적으로는 서로 인상이 많이 다르다. 이 기사에서도 정해균박철민이 가장 닮은 배우라고 꼽혔다. # 그 중 김형일이 계속 언급된다.

6. 관련 문서



[1] 최후진술에서 본인은 1926년생이 아닌 1924년생이라고 밝혔다.[2] 1980년 5월 24일에 교수형으로 사망했다.[3] 김재규의 딸이 잠시 귀국해서 몇 년 전에 담을 복원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보수공사를 진행했다.[4] 해방 후 안동농림고등학교,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의 전신[5] 이 당시에는 2년제 전문학교였다. 해방 후 대구농과대학을 거쳐 1951년 대구사범학교 등과 통합하여 경북대학교로 개교한다.[6] 일제강점기 당시 중등교원의 수가 부족한 데 반해, 조선 내에는 고등사범학교가 없었다. 문과의 경우 경성제국대학 졸업자 등으로 수요를 채울 수 있었지만, 이공계 쪽의 교사가 부족하여 일제는 각종 전문학교에 2년제 '교원양성소' 과정을 도입하여 교사인력을 충원했다.[7] 당시 체육교사였다.[8]대륜중학교&대륜고등학교[9] 이 시절 재일교포 서승 형제 간첩단 사건에 관여한 흑역사가 있다. 이 형제는 방한 전 재일교포 신분으로 북한에 방문하고 선물까지 받아온 전력이 문제가 되어 보안사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고문을 동반한 고강도의 조사를 받았는데, 고통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간첩 혐의를 인정하게 되고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는 훗날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이었음이 밝혀졌다. 김재규를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이 건에 대해서는 옹호하지 않는다. 기사 [10] 출처 [11] 그리고 여기에 책임을 진다는 구실로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사의를 표했으나 거절당했다. 출처 이는 그가 권력욕에 취해 10.26 사태를 일으켰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논거로 쓰인다.[12] 가장 먼저 쏜 발터가 유명하지만, 확인사살 때 격발 불량으로 옆에서 총을 빌려 뒤통수를 마지막으로 쐈다.[13] 80도306 판결 참조. 내란죄에 있어서 목적에 대한 인식의 정도는 미필적 인식, 즉 자신의 행위가 범죄발생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상태만 돼도 행위자가 그러한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로인해 구성요건이 충족된다. 즉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일 때 국헌문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목적은 없었으나, 대통령의 사망이 국헌문란을 가져올 것을 미필적이나마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으로도 국헌문란에 대한 목적의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소리다.[14] '''열사'''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만약 칭호를 붙인다면 무력을 사용했으므로 '''열사가 아닌 '의사(義士)'라고''' 해야 맞다. 열사는 보통 자신의 지조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이를테면, 전태일 열사.)을 의미하는 반면 의사는 무력을 통해 의거를 한 사람을 뜻하므로 '김재규 의사'가 의미에는 좀 더 부합한다. 김재규 묘비에도 의사(義士)로 적혀 있다.[15] 학계에서 늘 논쟁되어 오는 이야기가 "북한처럼 8월 종파사건 같은 숙청을 박정희라고 안 했겠느냐?"는 것이다. 박정희는 차지철을 곁에 두고, 박근혜와 최태민의 추태는 묵인하면서까지 김재규를 거의 버려진 사람 취급을 했기 때문. 걸핏하면 탄압 받던 야당인 민주당까지 안 가더라도, 정부 여당이였던 민주공화당 의원이 박정희를 비판했었다거나 박정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김종필 조차도 고문을 당하고 그랬었으니.. 무엇 보다 자신이 남로당을 입당해서 국가전복을 지휘했다는 사실도 철저히 숨겨서 윤보선을 포함한 경쟁자들을 상당히 많이 탄압하던 박정희였으니까 말이다.[16] 당장, 니콜라이 차우셰스쿠,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를 보자. 자업자득이긴 했으나, 정말 그렇게 비참한 죽음도 없을 것이다.[17] 그러나 민주주의를 의해 투쟁해온 이들과 동일시할 수 없다. 애초 김재규는 박정희와 친형제 같은 사이였고 중정부정이라는 대통령 다음 가는 2인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10.26 단행 이전의 행보를 보더라도 정보 수집 과정에서 유신 정권도 유한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박정희도 말년에는 20년 절대 권력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도 10.26 단행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최소한 그는 차지철, 이후락 같은 다른 유신 인사들과는 달리 국가에 대한 고민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18] 재밌는 점은 딸인 박근혜도 하야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탄핵 당해서 쫓겨났다. 다만 이건 민주화가 이뤄진 대한민국이니까 가능했다는 것을 상기하자.[19] 그러나 이렇게 말하던 한홍구조차도 하단의 긍정론에 서술되어 있듯 2013년을 기점으로 김재규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다.[20] 비슷한 예로 딸인 박근혜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나서 지지율이 역대 최저 지지율인 '''4%'''까지 떨어진 것도 모자라,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줄기차게 "퇴진하라, 하야하라" 등의 박근혜 퇴진 운동을 했었지만, 끝까지 거부하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거기다가 계엄령 문건까지 만들어 검토까지 했으니..[21] "캄보디아도 3백만을 죽였는데 시위 국민 1~2백만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22]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국대사를 폭행하거나 주한미국대사관 침입을 하는 등, 한미관계가 역사적으로 안 좋다 어쩐다 하지만, 이 시기 박정희 정부는 '''정부가 나서서 주한미군 철수 같은 반미 시위를 대학생까지 동원하면서 주도했었다!!!'''[23] 김재규는 이 당시 부마민주항쟁을 보며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24] 다만 노무현, 김대중의 경우 특수 활동비에 대한 사적 유용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많다. 그러나 진위여부가 불분명한 두 대통령과 달리 박정희 이후의 '''나머지 대통령은 다 받았다.'''[25] 대표적으로 김재규는 그가 교사 시절 제자였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가까웠는데, 10.26이 터지기 전 이만섭과의 식사 자리에서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차지철이 때문에 골치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출처1 [26] 강직한 군인, 유능한 건설부장관, 무능하고 유약한 중정부장을 보면 알듯이 폭주하던 중정을 제어한 것을 보면 이런 비난도 무색하다[27] 물론 시간이 배로 걸린다는 전제가 붙는다. 실권을 쥐고 있는 핵심 요직원들과 군부쪽 인사들은 확고한 박정희 지지자이기 때문에 설득하기 어렵다는 부분도 걸리긴 하다.[28] 김재규 본인은 소위 설거지론을 얘기하며 5개월간 유신의 잔재를 처리하려 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자신이 담당하는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다만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권력을 인수하겠다는 정도를 생각했다고 밝혔다.[29] 민문기,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정태원, 서윤홍 이렇게 6명은 그냥 살인이라고 소수의견을 냈다.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하지 않은 정태원 대법관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고초를 겪다가 사표를 써야했다. 특히 양병호 대법관은 서빙고문실로 끌려가 고문까지 받았다. 그 당시 법원행정처장 서일교가 당시 이영섭 대법원장에게 대법원장이 사표를 수리해 주셔야만 양병호가 풀려날 수 있다면서 친필 사표를 내밀었고 결국 사표를 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한 시간 정도만에 양병호 판사가 대법원장실에 나타났고 양병호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 커피를 마셨지만 커피가 입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슴과 와이셔츠를 적시는데도 그것을 모른 채, 정신나간 사람처럼 눈에 초점이 풀려있었다고... 특히 양병호는 풀려나서도 고문 후유증으로 3년간 중풍과 실어증에 시달렸다.[30] 독재 국가에서 독재자가 살해당한 사례는 많이 있지만 집권 도중 최측근인 부하에게, 그것도 권력 찬탈 목적의 암살이 아닌 대놓고 너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살해한 사례는 많지 않다.[31] 굳이 박정희라서는 아니며 대한민국은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입지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높은 편이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최소한의 프로파간다는 항상 존재한다. 심지어 박근혜 이전에 가장 평가가 안좋았다는 전두환조차 전사모가 있을 정도이다.[32] SBS 환경 다큐멘터리 '물은 생명이다' 의 원고 집필로 유명, 이외에 2016년에는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에 대한 재고찰과 관련한 내용을 담은 <<이카로스의 감옥>>을 집필하기도 했다.[33] 묘소 위치를 자세히 설명한 글 링크[34] 당시 변호인단들은 김재규의 인품에 반해 수십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김재규를 장군이라 칭하며 추모하고 있다.[35] 추모비 하단에 금이 가있는 것은 이 때의 흔적이다.[36] 아버지가 찾아오자 풀어줬다고 한다. 출처는 안동일 저서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37] 이는 이토 히로부미도 생전에 했던 말이었다. 이토는 생전에 매우 문란한 인물이었다.[38] 심지어 10.26 사건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항상 "대통령 각하"라고 존칭을 쓰면서 말한다. 또 궁정동에 대한 이야기는 심지어 재판정에서 박선호의 증언을 제지하면서까지 막았다. 당시 박정희조차 김영삼김대중의 사생아 문제가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음에도 "남자의 허리 아래는 거론하지 말라"[37]고 일축할 정도로 당시 시대에 남자의 성생활 문제를 언급하는 게 금기시되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39]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 해체 후 해병대 인원들은 해군 상륙전 계열 병과 인원들로 서류상 변경되었다.[40] 예편과 비슷[41] 이만섭이 중학교 3학년때 왔었다고 한다. 본인이 언급한 부분으로 김재규가 이만섭 본인을 많이 아꼈다고 한다.[42] 전부 좋지 않은 건 아니고 광복군 출신과 일제 순사 출신과의 사이.[43] 인터뷰의 출처는 2005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발행한 <기억과 전망> 제12권의 인터뷰 기사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서: 김진우가 본 인간 김재규'[44] 이 중 하나는 광주대단지사건이었다고 한다.[45] 마이크로버스 이상은 통행금지였다.[46] 당시에는 용산여자중학교.[47] 하필이면 한강중학교가 이전한 곳에도 근방에 남중인 오산중학교가 있다. 이것 때문에 현재 한강중에는 여학생이 훨씬 많다.[48] 선운각의 에이스 기생이 바로 정인숙이었다.[49] 이것이 박정희가 후대에 들어서 점점 이토 히로부미와 똑같은 취급을 받는 이유.[50]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707~708쪽[51] 여담이지만 정한용은 영웅시대에서는 정몽구 역할을 맡았었는데, 외모가 정몽구와 정말 많이 닮았다.[52] 그런데 이것은 영화 택시 드라이버 표절 냄새가 나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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