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학

 


1. 개요
2. 생애
3. 당백전의 입안자
4. 매체에서


1. 개요


金炳學
1821년 ~ 1879년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2. 생애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이 그의 숙부다. 동생으로는 김병국이 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일원이었다. 세도가의 자제 답게 1853년 급제한 이후 곧바로 대사헌과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 막을 내렸음에도 흥선 대원권과의 친분 관계로 인해 동생 김병국과 함께 중용되어 186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이듬해 공조판서, 좌찬성을 거쳐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실록 총재관이 되어 철종 실록을 편찬하고 찬집소총재관이 되어 대전회통을 완성하였다.
개화에 어느 정도 생각이 있었던 동생 김병국과 달리 대표적인 보수 척화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고 탄압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당시 척화론을 주장하던 이항로를 흥선 대원군에게 천거해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게 하였다. 영의정을 거쳐 1875년 영돈녕부사가 된 뒤 강화도 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사망하기 직전에도 인천의 개항만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을 정도로 철저한 척화론자였다.

3. 당백전의 입안자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병학'''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다 떨어졌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조절하여 메워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였지만 아직 그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돈이라는 것은 경중을 잘 맞추어 준절하여 쓰는 물건입니다. 옛적에 당십전이나 당오전을 쪼개어 당이전이나 당삼전으로 만들어 쓴 법은 모두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한 정사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된 때에 응당 이익되는 것과 손해보는 것을 절충해서 쓰는 원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백대전(當百大錢)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통보(通寶)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신의 좁은 소견을 대번에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官)에게 하문하시기를 바랍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아주 좋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 고종 3년(1866년) 10월 30일 2번째 기사
흥선대원군 집권시절 경복궁 중건을 위해 찍어낸 당백전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조선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상평통보 최고액권이 당이전이었으니 갑자기 50배의 주화를 시장에 쏟아내게되어 경제가 엉망이되었다. 그 입안자가 바로 '''김병학'''이다.


4. 매체에서


사극 명성황후에서는 박영지가 연기했다. 대원군의 거의 유일한 평생지기 친구로 나온다. 흥선대원군을 물심양면 돕는가 하면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고종과 화해하라며 주장하고 민승호 일가가 폭사할 때도 흥선대원군을 지지하는 일파가 벌인 일이라며 흥선대원군의 무죄를 주장한다. 흥선대원군이 어려울 때도, 가택에 연금을 당할 때도 항상 흥선대원군 옆에만 있는 사람이다. 어느정도나면 죽기 얼마 전 모두가 명성황후의 편에 서자 '''"자네들은 중전 마마의 편에 서시게! 나마저 떠나면 누가 대원위의 편에 서 있겠나?"'''라고 말하는 것이 묘미.
배우 박영지의 나이 때문인지 사실 김병기보다 3살 어린데 여기서는 형님으로 나오며 안동 김씨의 일파인 김좌근과 아들 김병기, 친동생 김병국 앞에서는 대원군의 편에 서라고도 한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선 전쟁에 나간 사이 가문의 수장인 김좌근이 역모를 기획하자 이에 반대했으나 설득에 실패하고, 이에 김좌근과 결별하고 평양에 있는 왕에게 이를 알렸다. 덕분에 역모의 실패로 가문이 몰락하는 와중에도 멸문까지는 막을 수 있었다. 전쟁 후 회담에서 청이 서구열강들에게 힘을 못 쓰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원역사와 같은 보수 척화론자와는 거리가 있는 행보를 보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