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백전
當百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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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에 발행되었던 화폐.
주화에 새겨진 한자는 '이 화폐는 호조(戶曹)에서 주조하였으며, 다른 화폐의 100배 값어치가 있다.'라는 뜻의 호대당백(戶大當百)이다.
2. 역사
2.1. 발행
1866년 (고종 3년) 11월에 발행된 화폐로 6개월 간 유통되었다. 조선 후기에 일반적으로 쓰이던 화폐는 상평통보였는데, 당백전은 명목상의 가치는 100배에 해당(애초에 당백전의 뜻이 100배(百)에 맞먹는(當) 엽전)했지만 소재 가치는 상평통보의 5배 ~ 6배에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양을 찍어낼 수 있었다. 당대에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총액은 약 1천만냥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 풀린 당백전의 총액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1600만냥 정도나 되었다. 즉 시장에 기존의 1.5배에 달하는 자금이 풀린 셈인데, 실물 경제는 그대로인 상황에서 화폐만 불어나면 어떤 사태가 터질지는...좌의정 김병학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다 떨어졌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조절하여 메워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였지만 아직 그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돈이라는 것은 경중을 잘 맞추어 준절하여 쓰는 물건입니다. 옛적에 당십전이나 당오전을 쪼개어 당이전이나 당삼전으로 만들어 쓴 법은 모두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한 정사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된 때에 응당 이익되는 것과 손해보는 것을 절충해서 쓰는 원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백대전(當百大錢)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통보(通寶)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신의 좁은 소견을 대번에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官)에게 하문하시기를 바랍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아주 좋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당백전이 발행된 가장 큰 이유는 조선 정부의 재정 악화에 있다. 조선 후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정부의 재정이 매우 궁핍하였다. 게다가 화폐와 함께 기축통화로 작용하던 면포도 19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를 통해 영국이 인도의 목화와 영국의 기계로 대량 생산해낸 옥양목이 들어오면서 그 가치가 크게 폭락하면서 말그대로 인플레이션으로 실물 경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을 추진하면서 이에 많은 재원이 투입되면서 더욱 궁핍해졌다. 경복궁 중건에 들어간 돈은 원납전으로만 750만냥이 들어갔다. 현물 징수나 노동력 강제 동원 등은 모조리 제외한 금액으로도 이 정도인데, 순조 22년에 호조에서 낸 통계에 따르면 조선 조정의 1년 세수는 평균 60만냥이므로 대원군이 걷어들인 원납전은 조선 조정의 12년분 예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인 것이다. 물론 이것에는 당백전과 청전 발행으로 이어지는 인플레이션의 영향도 있는데, 결국 청전이건 당백전이건 다 폐지해야 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결국 빚잔치한 셈이다.
이 때문에 실시되었던 것이 백성들에게 (강제로) 기부를 받는 원납전이었으나[1] , 시간이 갈수록 기부 금액이 줄어들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발행한 것이다. 당백전을 발행하여 일시적으로 이득을 보기는 했다.[2]
2.2. 문제점
문제는 당백전이 유통되면서 엄청난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는 데에 있다. 실질 가치는 5~6배인데 명목 가치는 100배라서, 실질 가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일반 백성들에겐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돈이었고 일상 생활에 쓰기에도 액수가 너무 컸다. 일반 백성들은 당백전을 불신하여 상평통보와 교환을 하려 하지 않았고, 상인들도 이를 꺼려서 물물 교환의 모습까지 일어났고 물가는 치솟았다. 이건 더도 덜도 아닌 그레샴의 법칙이다. 이 엄청난 양의 당백전이 단 6개월만에 쏟아져나오면서 이런 혼란을 더더욱 부채질하였다. 더구나 기존 상평통보가 있는 상황에서 당백전을 발행한 바람에 유통되는 화폐의 총액이 몇배로 치솟았다.[3] 그리고 정부에서는 조세 수납에는 이 당백전을 받지 않으면서, 공신력을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정부의 공식적인 이유야 당백전 유통을 활성화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악화인 당백전을 정부가 거부하는 것은 당백전에 대한 불신을 더더욱 가중시킬 뿐이었다. 몇몇 수령은 실물로 세금을 받고 당백전으로 중앙에 납부하는 퍼포먼스까지 보였다.
여기에 일종의 위조화폐, 즉, 사주전(사적으로 주조한 돈) 또한 기승을 부렸다. 조선 시대에 화폐를 위조하면 '''그 자리에서 사형'''이었지만, 산속, 심지어 배 위에 대장간을 차려놓고 강에서 주조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유통량이 많은 당백전이 이제 위조 화폐까지 나도니 그 총액이 얼마인지는 짐작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2.3. 폐기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1867년 4월에 주조가 중단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유통도 금지되었다. 이렇게 폐지된 당백전 1600만전[4] 을 회수할 때는 청전[5] 1냥이나 상평통보 1냥으로 교환을 해주었고[6] 이렇게 회수한 당백전은 다시 녹여서 철로 만들어버렸다.
3. 평가
실물의 가치와 국가의 보증 가능성을 무시하고 화폐를 발행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말해주는 좋은 예. 당백전의 가치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당시 백성들은 땅돈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에서 땡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지금도 자주 쓰이는 '땡전 한 푼 없다'는 말은 이 당백전 한 개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는 뜻이다.
이 당백전의 폐해는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큰데, 단순한 인플레이션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경제를 철저히 박살내버렸다는 것이다.[7] 결과적으로 고종 친정이 시작된 다음엔 군비가 죄다 축소되어서 운요호 사건을 불렀으며[8] 재정 부족으로 인한 구식 군대에 대한 푸대접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임오군란으로 청에 대한 예속 상태가 이어지면서 외국이 조선을 무시하는 외교적 위신 추락과 개화파들의 급진적인 행동인 갑신정변까지 야기하는 그야말로 초거대 나비 효과가 일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화폐 개혁에 대한 당백전과 같은 삽질은 고종 친정 이후로도 반복되었다...
그래도 아주 배운 것이 없지는 않아서 당백전 같은 걸 발행하진 않고 그나마 고액화폐를 찍어낸 것이 당오전인데, 이는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같이 서양인의 시각으로 봐도 답이 없었기 때문에 나온 주장이다.[9] 당오전 시기만 해도 급진개화파의 주장인 차관도입은 실패했기 때문에, 당오전만 실현된 것에 가깝다. 실제로 당백전 후폭풍과 조선의 열악한 재정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고, 부족한 귀금속은 본질적 대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일본으로 대표되는 대외세력과 그에 동종한 이들, 이 과정에서 이익보겠다는 이들까지 끼어드는 혼돈의 카오스가 펼쳐진다. 당백전처럼 심플해서 오히려 그 전개를 이해하기에 인과와 전개를 이해하기 쉬운 물건은 아니다. 단적으로 백동화 문제의 뒤에는 대한제국의 귀금속 부족, 자금 부족, 일본의 방관 속에서 일어난 위조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현대 대한민국의 화폐 발권기관인 한국은행 내에서도 발권정책의 흑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실제로 화폐박물관에서도 당백전을 전시하고 있으며, 2016년 한국은행 노동조합 측에서 한국형 양적완화라 불린 발권력 동원을 이 당백전 발행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의 다른 행적은 어떻게든 쉴드를 쳐본다 해도, 이 당백전 사건은 정말이지 흑역사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미친 짓이다.[10] 어떤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단위가 높은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서 유통하거나 위조지폐를 범람시켜서 '''해당국가의 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통화위조죄 문서 참조. 실제로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런던 상공에 파운드 스털링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뿌리는 이른바 베른하르트 작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하나 지으려고 '''자기 나라에 스스로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이런 거대한 실책에 대해 역사교육 과정에서 앞선 문제점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지는 않는다. 대부분 배우는 내용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정책 중 당백전을 발행하였고 이는 국가 경제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정도로 간단하게 서술하는 수준이고 설명을 보충해도 실물가치가 떨어지는 화폐가 유통되었다로만 설명하고 실제 당백전으로 파생된 효과에 대해서는 심도있게 언급되지는 않는다. 역사학자들이나 역사교과서 담당자들이 당백전의 폐해를 과소평하해서는 아니고, 안 그래도 구한말-일제강점기 파트는 가르칠것이 매우 많다보니 강의시간이 촉박해서 당백전 하나만 중점적으로 가르치기 어렵고, 또한 상세하게 설명을 할려면 경제 교과를 따로 공부해야되는데 그러면 준비 시간이 따로 드는데다가 설명도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간략하게 서술하는것이다. 따라서 가르쳐야 한다면, 역사가 아니라 경제 교과에서 인플레이션과 화폐를 다룰 때 역사적 사례로서 언급하는 것이 맞다.
[1] 자원해서 낸다는 의미에서 원(願)납전이었으나 백성들 사이에선 '''원한을 품으면서''' 낸다는 원(怨)납전이라고 뒷담이 돌았다고 한다.[2] 인플레이션을 배제한다면, 조선 정부는 당백전 1냥을 제조할 때마다 상평통보에 비해서 18배의 이득을 본다.[3] 6개월만에 1섬에 7문하던 쌀값은 48문으로 올랐다. 6개월만에 인플레이션 700%! 2016년 기준 서울의 가구당 식비가 월평균 71만원인데, 이걸 단순히 대입하면, 486만원으로 비용이 상승한다. 같은 기간 월평균 경상소득이 366만원이었으니, 다른 것 아무것도 안하고 식비만 유지해도 월평균 120만원 적자.[4] 상평통보의 총합이 1000만전이었다.[5] 淸錢, 청의 화폐. 청의 화폐도 조선 말기 상평통보 가치의 1/3정도로 통용되곤 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수입하기도 했고, 밀수로 유입되기도 했다. 애초에 고려 시대부터 당의 화폐들을 들여와 사용하곤 했다. 이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데, '''유입전'''이라 한다.[6] 명목 가치는 1/100, 실질 가치는 1/6이 된 셈이지만 유통이 금지된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공식적으로 주조한 화폐를 녹여서 금속을 건지려고 했다가는 당시 조선의 국법으로 처벌받았다.[7] 그리고 구한말 일제에 의해 이뤄진 화폐정리사업이 결정타가 되어 조선의 경제는 일본에 종속되고 말았다.[8] 물론 고종은 일본에 겁을 먹고 개항한 것이 아니라 이득이 있을 것 같다고 개항한 것이기는 했다.[9] 다만 당오전도 폐해가 발생했다고 하며 묄렌도르프는 필요하면 당'십'전 심하게는 당백전의 발행도 검토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이 대목에서 얼마나 조선 경제 상황이 엉망이었는지도 보여주는데 당백전의 실질 가치가 상평통보의 5~6배라면 당오전 정도는 원래 경제에서 그런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다. 근데 그마저 실패했다는건 결국 당백전 발행 전보다 계속해서 나빠졌다는 말밖에 더 안 된다.[10] 굳이 쉴드를 쳐보면 당시 조선경제상황으로 봤을때 상평통보의 부족으로 상시적 디플레상황이 지속됐다는 점이다. 상평통보가 상시 부족한 상황에서 면포가 그 부족한 화폐량을 때워주는 기축통화 역할을 했는데, 옥양목 유입으로 면포 값이 하락해서 조선후기 기형적 화폐체제가 완전붕괴해버린게 원인이다. 애초에 인플레이션을 피할수가 없는 상황이었던것. 200년간 발행한 상평통보 발행량이 GDP의 5%도 감당 못하는 상황에서 통화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면포가 사실상 휴지가 됐으니 이로인해 인플레이션이 급격하게 발생하는 상황이었고 상평통보 통화량을 급하게 늘렸어야 하는 판국이었으나 아무리 급하게 찍어내려고 해도 없는 구리가 나올리가. 그리고 애초에 상평통보는 금값이나 은값에 좌우되는 금화나 은화와 달리 실제 구리가치보다 액면가치가 최소 2배 이상, 최대 5배까지 높은 기형적인 전근대 금속화폐였다. 이런 상황에서 당백전이라는 고액권을 찍으니 신용화폐인 당백전이 여론의 반발로 신용을 잃게된건 당연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