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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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의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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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colbgcolor=#315288> 경복궁
景福宮 | Gyeongbokgung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면적
432,703㎡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축조시기
조선시대, 1395년
링크
공식 홈페이지
경복궁 전경
북궐도, 혜촌 김학수, 1975년
1. 개요
2. 경복궁의 이름
3. 건축자
4. 구조 및 지리
8. 기타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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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정도전,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0월 7일 정유 2번째기사 中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이자 조선의 정궁, 법궁이다.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1] 소재.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2]하면서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2. 경복궁의 이름


경복궁의 이름을 지은 이는 정도전이다. <시경> 주아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어라. 임이시여, 만 년 동안 큰 복을 누리소서."(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끝의 景福을 딴 것으로 큰 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잔치 끝에 천자에게 바치는 노래였는데, 정도전은 연회 중 대취한 태조가 "경은 이번에 새로 지은 궁궐의 이름을 지어서 우리 왕조가 만 대까지 빛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자마자 즉석에서 일어나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으로 지었다고 한다.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의 이름도 모두 정도전이 붙였다.[3]
다만, 정도전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면서 정도전이 경복궁 건축의 실질적 책임자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정도전이 경복궁에 개입한 것은 위치를 잡는 데 왈가왈부한 것과 건물에 이름 붙인 것뿐이다.

3. 건축자


경복궁 건설을 위해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 설립되었고, 그 책임자로는 조선개국공신이었던 심덕부가 임명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경복궁 건축을 한 인물은 또 따로 있다. 바로 환관 김사행(金師幸)이다. 김사행은 원래 고려인이었지만 원나라 환관으로 차출된다. 그런데 김사행이 원의 환관으로 있으면 있었던 곳이 원의 궁궐 수리를 담당했던 관청 전연사(典涓司)였다. 이후 김사행은 노국대장공주가 고려로 오면서 같이 고려 땅을 밟게 되는데, 이후 최고의 건축 전문가로 이름을 알렸으며,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환관을 총감독하는 판내시부사까지 올랐다. 이후 김사행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능의 건설을 주도했고, 이는 이후 조선왕릉의 기본이 된다. 경복궁 건설에 김사행이 차출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 구조 및 지리


신진사대부가 계획한 궁궐이기 때문에 '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유교 이념을 반영하여 이전 왕조들의 궁궐에 비해 화려한 장식 없이 수수하고 검소한 형태로 지어졌다.[4] 다만, 현재의 경복궁은 과거의 경복궁과 차이가 있고 이전 국가들의 궁궐도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으며, 실질적 건축 책임자인 김사행이 원 황실 건축에서 배웠고 고려에서는 사원 건축 전문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당시 경복궁이 유교 이념을 얼마나 반영해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의 건축은 사원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5] 조선 왕조의 원찰이었던 회암사는 구조가 경복궁과 상당히 유사하고, 초기에 경복궁에서 사용했다는 청기와도 회암사 터에서 발견된다.
임진왜란 전 조선 전기 동안 조선 왕조의 법궁[6]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경복궁은 법궁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엄정한 기하학적 공간 분할, 반듯한 축선 상의 건물 배치, 정연한 대칭 구조로 설계되었다.[7] 이궁인 창덕궁(+창경궁)과 양궐 체제를 갖췄는데, 임금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두 궁궐을 번갈아 가며 사용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그 자리만 출입이 금지된 채 200여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이 지은 경복궁과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경복궁의 모습은 다소 차이가 있다. 세종이 왕자 시절 2층에서 자다가 병이 났다는 등 다층 건물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또한, 근정전에 청기와를 얹었다는 언급 등 차이점이 보이며,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 왕실에서 제작했다는 석가탄생도 등에서 묘사된 건축 양식을 통해 그 당시의 경복궁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최대 규모 5,000칸까지 서서히 확장되었던 이전 건물과 다르게 흥선대원군은 단숨에 7,400칸짜리로 중건했다. 단숨에 1.5배 크기가 된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해 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경복궁역이며,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안국역이나 광화문역에서도 걸어갈 수 있다. 경복궁 앞길에는 각종 관청이 있어 육조 거리라고 불렸으며, 이 길이 오늘날의 세종대로다.[8] 당대에도 국가의 중심 거리였기 때문에 육조 거리는 지금의 세종대로의 폭과 거의 같은 폭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세종대로 중앙에는 광화문광장이 있다. 주변에는 청와대, 헌법재판소, 정부서울청사, 주한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등이 있으며, 인사동거리도 경복궁에서 꽤 가깝다.

5. 역사




6. 건축물




7. 관람




8. 기타


  • 2018년 2월 7일, 서울역사박물관은 2016년 공개구입 후 보존처리를 완료한 '경복궁도'를 최초 공개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 경복궁내 건물(전각)들의 배치 모습을 그린 족자이다. #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의 경복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는 경복궁도(국립중앙도서관), 경복궁전도(삼성출판박물관), 경복궁지도(장서각), 조선국왕성지도(일본 와카야마 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 경복궁 재건에 기원을 둔 경기 민요인 경복궁타령이 있다. 합창을 위해 편곡된 것도 있다.
  • 자금성 내에 경복궁이라는 이름의 전각이 실제로 존재하는데, 한자까지 똑같다. 자금성 내 동북쪽 가장자리에 있다. 관련 포스팅
KOF 97 한국 스테이지로 등장했다.
2012년 9월 20일에 애플 지도에서 '청화대'로 오기되었다.

9. 관련 문서



[1]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일대[2] 천도하기 전에는 개성 수창궁에서 기거했고, 천도한 뒤 경복궁이 다 지어지기 전까지는 한양부 객사를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3] 고려의 궁궐은 이름이 없었다. 단지 본궐(本闕)로만 불리다가 나중에 그 터가 만월대로 불렸다.[4] 목재가 부족해 건축물의 규모가 작았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5] 대표적인 사례로 서원이 있다.[6] 법궁이 사무를 볼 수 없는 경우 역할을 이어받는 보조 궁궐 이궁, 궁 밖으로 나가서 기거할 행궁 등 여러 궁궐 중 왕이 평상시에 직접 사무를 보는 중심 궁궐이다.[7]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8] 의 이름도 세종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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