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일(고려)

 

1. 개요
2. 생애

金富佾
(1071 ~ 1132)

1. 개요


고려의 문신. 자는 천여(天與),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 생애


경주 출신으로 선계는 신라의 종성(宗姓)이다. 국자좨주 좌간의대부를 지낸 김근의 차남으로, 김부필의 동생이고 김부식과 김부철의 형이다. 선종 재위 즈음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직한림원이 된다.
숙종 5년(1100) 상서[1] 왕하(王嘏), 시랑 오연총을 따라 북송에 사신으로 가서 송휘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표문을 대신 짓는다. 이 표문에 따르면 김부일 등은 송의 수도에 이르지 못하고 명주(明州, 닝보시)에서 돌아가야 했는데, 휘종은 김부일의 글이 아름답다고 칭찬하기 위해 내신을 따로 보낸다. 고려로 돌아온 뒤에는 습유 지제고의 벼슬을 받고 원주, 상주 두 주의 수령을 역임한다.
예종이 즉위한 뒤에는 예부낭중에 임명된다. 여진족 추장 완안아골타가 요나라에 반기를 들자 예종 10년(1115) 요나라는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한다. 예종은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게 했는데, 대부분이 거란에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부일과 그 동생 김부식, 호부원외랑 한충, 우정언 한충, 위위소경 척준경 등은

우리나라는 정해년(1107), 무자년(1108)의 병란 이후 군민이 가까스로 쉴 틈을 얻었습니다. 지금 다른 나라를 위해 군대를 보내면 스스로 불화를 만드는 것이니 그 이해를 헤아리기 어려워 조심스럽습니다.[2]

라고 말하며 파병 지원에 반대한다. 요나라 측에서는 이 해 5월에 사신을 보냈다가 11월에 재차 사신을 보내 출병을 독촉했는데, 결국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가야 했다.
이후 김부일은 국자사업 기거주로 보문각대제를 맡으며 또 직학사에 오른다. 학문을 좋아하는 예종 앞에서『주역』, 『시경』 등을 강론하는데 문인 중 대적할 만한 자가 없어 명망이 두터웠다고 전한다. 인종은 김부일을 중용해 동지추밀원사 정당문학 한림학사승지로 승진시키고 인종 5년(1127) 호부상서 판예부사를 거쳐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에 오른다.
풍허(風虛)로 인종 8년(1130) 세번 주청한 끝에 은퇴해 수태위 개부의동삼사 판비서성사 주국에 임명됐으며 인종 10년(1132) 4월 10일(음력) 62세의 나이로 죽는다. 사후에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예부사 상주국으로 추증되며 시호를 받는다.

[1] 고려사 김부일 열전에는 추밀원사라고 하는데 왕하가 추밀원사에 오른 것은 예종 즉위 후의 일이다.[2] 國家自丁亥·戊子兵亂之後, 軍民僅得息肩. 今爲他國出師, 是自生釁端, 其利害恐難測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