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
詩經
유교 경전 중 하나. 이름은 시(詩)지만, 현대의 시를 의미하기 보다는 율(律)이 있는 주나라 시대의 노래를 담은 '''민요집'''에 가까운 작품이다.
내용은 본디 311편이었다고 하나, 분서갱유 과정에서 6편이 제목만 전한 채 실전되고 현전하는 것은 305편이다.[1] 현전하는 흔히 말하는 시경의 경우, 한나라 시대에 노공왕이 공자의 집을 철거할 때 나온 주나라 당대의 과두문자[2] 로 기록된 죽간본 시경[3] 에 모장(毛萇)과 모형(毛亨)의 양모씨에 의해 주석이 달린 모시를 근간으로 삼고, 여기에 주자의 주석이 더해진 시경집전(詩經集傳)을 근간으로 삼는다.
본디 주나라에서 쓰이던 많은 노래들 3000편을 공자가 산삭하여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후 유교에서 중요한 경전으로 대우를 받다가 진나라 대에 벌어진 분서갱유로 모든 유교 서적들이 불태워질때 함께 소실되었다가 한나라 대에 유교가 국가의 사상으로 숭상받으면서 오경박사를 두어 훈고학을 통해 유교서적에 대한 복원이 시도되었는데, 시경 또한 다른 경전들과 함께 복원이 시도되었고, 그 결과문이 삼가시(三家詩)다.
삼가시란 제(齊)의 원고생(轅固生)에 의해 전해진 제시(齊詩), 노(魯)의 신배(申培)에 의해 전해진 노시(魯詩), 한영(韓嬰)에 의해 전해진 한시(韓詩)의 세 학파에 의해 탄생한 시경으로, 이 삼가시를 금문경이라 부른다.
삼가시는 전한대에 노공왕이 공자의 집을 철거하다가 시경의 원문인 죽간본인 고문경을 발견할 때까지 시경연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고문경이 발굴되고, 이에 주석을 단 모시(毛詩)가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삼가시는 그 명맥이 단절되었고, 후한-동진의 혼란기에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한시의 외전 10권만이 전하고[4] , 삼가시 원문은 전하지 않게 되었다.[5]
여기에, 송나라 대에 주희가 주석을 단 집전(集傳)까지 더해져, 이후 시경은 고문경에 모씨와 주자의 주석이 달린 채로 전하게 되었다.
흔히 시경에 대하여 말할 때, 공자가 3000편을 편집하여, 300편으로 산삭했다는 산삭설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대개 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본다.
이는 공자가 생애에 시삼백을 논한 바는 있어도, 시삼천을 논한 바는 없으며, 당대에 공자 본인이 수집할 수 있었던 정보도 주나라와 노나라의 학사에 모인 기록이 대부분이었을텐데, 이 노나라와 주나라의 학사에 전하는 시들이 300여 편 정도로 시경의 편수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공자가 시에서 올바른 것만 산삭했다고 하기에는[6] 풍(風)에서, 위풍 ,정풍, 빈풍 등에는 음란하다고 볼 수 있는 남여상열지사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이 보이는 등[7] , 산삭했다고 볼 수 있는 흔적이 없다. 따라서 현대 학계에서는 주나라와 노나라 학사의 문헌을 그대로 수록하고 정리했다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시경의 기본적인 특징은 다름아닌 4언체다. 한 구에 4언으로 이루어진 구절이 무한히 반복되고, 당시에 실제로 불리던 노래였기 때문에 초기형태의 성조에 의한 운율이나 압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경의 문체는 이후 발전하여 5언체 중심의 북방문학을 발전시켜서, 초기 한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반대로, 이 시경의 딱딱한 4언에 반대되게 6언 또는 7언이 중심이 된 초사가 있다. 초사는 중국 남부의 초 지방에서 발생한 시로 시경에 대비되는 남방문학의 시초로, 이 시경과 초사는 각각 오언시와 칠언시의 효시가 되었고, 둘은 서로에 영향을 주어, 한대의 악부시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시경을 분류할때 대표적으로 분류하는 방법에는 육의(六義)가 있다. 이 육의를 나누는 것은 시경의 대서(大序)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대서의 경우에도 사실 누가 지었는가 말이 많다. 자장이 지었다는 말도 있고, 또 일부에서는 공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이 육의는 시경에 담긴 여섯가지 뜻이라는 것으로 크게 시의 성질에 따라 나눈, 풍아송(風雅頌)과 서술방식에 따라 나누는 부비흥(賦比興)으로 나뉜다. 또한 풍아송중 아(雅)를 규모에 따라 대아와, 소아로 나누어, 풍(風), 대아(大雅), 소아(小雅), 송(頌)로 나눈 것을 사시(四始)라고 한다. 또한, 부비흥의 경우, 현대로 치면 수사법에 가까운 것으로 어떤 식으로 시를 표현하는가를 의미한다.
정이란, 그 내용이 교화되어 올바르고 단아한 것을 나타내며, 변(變)이란 교화가 흐트러져 그 내용이 어지럽혀 진것을 가리킨다.
풍의 경우 남(南)으로 끝나는 주남과 소남을 각기 주공과 소공의 교화아래 올바른 문화가 펼쳐져서 지어진 노래란 의미로 정풍이라 하며, 나머지 13열국풍은 교화되지 못하여 어지러워진 이후의 민요라고 하여 변풍으로 부른다.
아의 경우, 대아는 정아, 소아는 변아로 분류했고, 송의 경우도 주송과 상송은 정결하다고 하여 정송으로 보고, 노송은 흐트러져 변송으로 분류한다.
국내에는 시경번역이 생각보다 많은 편이긴 한데, 시경의 경문만을 번역한 경우가 있고, 주희의 주석을 번역한 경우가 있으며, 그 외 주석가들의 주석을 함께 번역한 예도 있다. 시경의 경문만을 번역한 것으로는 이기동의 《시경강설》(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4.), 정상홍 역 《시경》(을유문화사, 2014.), 김학주 역 《시경》(명문당, 2002.)이 유명한데, 이 가운데 김학주 역은 교수신문 선정 최고의 시경 번역으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주희의 주석인 《집전》을 번역한 것으로는 성백효 역(전통문화연구회, 1998.), 김기평 역(아세아문화사, 2012.) 등이 있는데 둘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그 외 주석가들의 주석을 번역한 것으로는 다산의 《시경강의》(실시학사 경학연구회, 사암, 2008)가 있다.
2017년부터 박소동 한국고전번역원 명예교수의 번역으로 『모시정의』가 출간되고 있다. 현재 2책까지 출간된 상태.[8]
임진왜란 때의 재상 류성룡이 저술한 징비록(懲毖錄)의 제목이 바로 이 시경의 한 구절에서 유래했는데, 시경 소비편의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여기'''징'''이'''비'''후환:)"라는 구절에서 따 온 것으로, 소비편은 위의 구분에서 송(頌)의 '주송'에 포함되어 있는 편이다.
'우연히 만나다'라는 뜻의 해후(邂逅)도 시경이 본 출처다.
고사성어 '절차탁마(切磋琢磨)', '훈지상화', '일취월장(日就月將)', '타산지석', '오매불망(寤寐不忘)', '연비어약(鳶飛魚躍)', '요조숙녀', '전전긍긍'도 역시 시경이 출처다.
정도전이 즉석에서 지은 경복궁역시 주아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어라. 임이시여, 만년 동안 큰 복을 누리소서.(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끝의 景福을 딴 것으로 큰 복이라는 뜻이다.
임란 시기를 다룬 오희문의 피난일기 쇄미록의 제목도 시경에서 따왔다. 모구장(旄丘章)의 쇄혜미혜 유리지자(瑣兮尾兮 遊離之子)이며 뜻은 무엇보다 누구보다 초라한 것은 여기저기 객지를 떠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 유명해진 낱말인 손타쿠도 시경에서 유래되었다.
심해에 사는 해면동물의 이름이자 동명의 고사성어인 해로동혈(偕老同穴)도 시경에 나온 偕老와 同穴이라는 단어를 합쳐서 만든 것이다.
1. 개요
유교 경전 중 하나. 이름은 시(詩)지만, 현대의 시를 의미하기 보다는 율(律)이 있는 주나라 시대의 노래를 담은 '''민요집'''에 가까운 작품이다.
내용은 본디 311편이었다고 하나, 분서갱유 과정에서 6편이 제목만 전한 채 실전되고 현전하는 것은 305편이다.[1] 현전하는 흔히 말하는 시경의 경우, 한나라 시대에 노공왕이 공자의 집을 철거할 때 나온 주나라 당대의 과두문자[2] 로 기록된 죽간본 시경[3] 에 모장(毛萇)과 모형(毛亨)의 양모씨에 의해 주석이 달린 모시를 근간으로 삼고, 여기에 주자의 주석이 더해진 시경집전(詩經集傳)을 근간으로 삼는다.
2. 역사
본디 주나라에서 쓰이던 많은 노래들 3000편을 공자가 산삭하여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후 유교에서 중요한 경전으로 대우를 받다가 진나라 대에 벌어진 분서갱유로 모든 유교 서적들이 불태워질때 함께 소실되었다가 한나라 대에 유교가 국가의 사상으로 숭상받으면서 오경박사를 두어 훈고학을 통해 유교서적에 대한 복원이 시도되었는데, 시경 또한 다른 경전들과 함께 복원이 시도되었고, 그 결과문이 삼가시(三家詩)다.
삼가시란 제(齊)의 원고생(轅固生)에 의해 전해진 제시(齊詩), 노(魯)의 신배(申培)에 의해 전해진 노시(魯詩), 한영(韓嬰)에 의해 전해진 한시(韓詩)의 세 학파에 의해 탄생한 시경으로, 이 삼가시를 금문경이라 부른다.
삼가시는 전한대에 노공왕이 공자의 집을 철거하다가 시경의 원문인 죽간본인 고문경을 발견할 때까지 시경연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고문경이 발굴되고, 이에 주석을 단 모시(毛詩)가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삼가시는 그 명맥이 단절되었고, 후한-동진의 혼란기에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한시의 외전 10권만이 전하고[4] , 삼가시 원문은 전하지 않게 되었다.[5]
여기에, 송나라 대에 주희가 주석을 단 집전(集傳)까지 더해져, 이후 시경은 고문경에 모씨와 주자의 주석이 달린 채로 전하게 되었다.
2.1. 공자의 산삭설
흔히 시경에 대하여 말할 때, 공자가 3000편을 편집하여, 300편으로 산삭했다는 산삭설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대개 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본다.
이는 공자가 생애에 시삼백을 논한 바는 있어도, 시삼천을 논한 바는 없으며, 당대에 공자 본인이 수집할 수 있었던 정보도 주나라와 노나라의 학사에 모인 기록이 대부분이었을텐데, 이 노나라와 주나라의 학사에 전하는 시들이 300여 편 정도로 시경의 편수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공자가 시에서 올바른 것만 산삭했다고 하기에는[6] 풍(風)에서, 위풍 ,정풍, 빈풍 등에는 음란하다고 볼 수 있는 남여상열지사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이 보이는 등[7] , 산삭했다고 볼 수 있는 흔적이 없다. 따라서 현대 학계에서는 주나라와 노나라 학사의 문헌을 그대로 수록하고 정리했다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3. 특징
3.1. 문학적 특징
시경의 기본적인 특징은 다름아닌 4언체다. 한 구에 4언으로 이루어진 구절이 무한히 반복되고, 당시에 실제로 불리던 노래였기 때문에 초기형태의 성조에 의한 운율이나 압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경의 문체는 이후 발전하여 5언체 중심의 북방문학을 발전시켜서, 초기 한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반대로, 이 시경의 딱딱한 4언에 반대되게 6언 또는 7언이 중심이 된 초사가 있다. 초사는 중국 남부의 초 지방에서 발생한 시로 시경에 대비되는 남방문학의 시초로, 이 시경과 초사는 각각 오언시와 칠언시의 효시가 되었고, 둘은 서로에 영향을 주어, 한대의 악부시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3.2. 육의(六義)
시경을 분류할때 대표적으로 분류하는 방법에는 육의(六義)가 있다. 이 육의를 나누는 것은 시경의 대서(大序)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대서의 경우에도 사실 누가 지었는가 말이 많다. 자장이 지었다는 말도 있고, 또 일부에서는 공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이 육의는 시경에 담긴 여섯가지 뜻이라는 것으로 크게 시의 성질에 따라 나눈, 풍아송(風雅頌)과 서술방식에 따라 나누는 부비흥(賦比興)으로 나뉜다. 또한 풍아송중 아(雅)를 규모에 따라 대아와, 소아로 나누어, 풍(風), 대아(大雅), 소아(小雅), 송(頌)로 나눈 것을 사시(四始)라고 한다. 또한, 부비흥의 경우, 현대로 치면 수사법에 가까운 것으로 어떤 식으로 시를 표현하는가를 의미한다.
- 성질에 따른 분류
- 풍(風): 서민의 노래. 주나라 각 제후국들의 일반적인 민요로, 각기 15개국의 민요를 담고 있다. 단 주나라 본국의 민요의 경우, 주풍이 아니라, 왕풍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남(周南)·소남(召南)·패풍(邶風)·용풍(鄘風)·위풍(衛風)·왕풍(王風)·정풍(鄭風)·제풍(齊風)·위풍(魏風)·당풍(唐風)·진풍(秦風)·진풍(陳風)·회풍(檜風)·조풍(曹風)·빈풍(豳風)의 15국풍 160편.
- 아(雅): 조회나 연향 때 연주하는 노래
- 대아(大雅): 주나라 왕실의 행사나 의식에 쓰인 왕실의 흥폐를 논한 노래. 총 31편.
- 소아(小雅): 제후국의 행사나 의식에 쓰이거나, 작은 정사를 논할때, 민간에서 의식이 있을경우 쓰인 노래. 대아가 왕실에서 사용되 무게가 있는 반면, 제후나 신하, 서민의 의식에 쓰여 대아에 비해 작기 때문에 소아라고 한다. 총 80편이나 6편이 실전되어 현전하는 것은 74편.
- 송(頌): 선현을 기리는 노래. 주나라왕실에서 쓰인 주송, 노나라제후국에서 쓰인 노송, 송나라에서 선대인 상나라를 기린 상송의 3종류가 있다. 총 40편.
- 작법에 따른 분류
- 흥(興): 흥이 무엇인가는 정확하게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사실 이른바 흥이라는 것을 보면 왜 흥이라고 부르는 지는 알겠는데, 이걸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올바르다. 굳이 억지로 말로 표현하자면, 연역적 감정의 전파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하여 하안과 공안국은 인비연류(引譬連類)라고 표현하였으며, 주자는 감발지의(感發志意)라고 풀이하였다. 다만 하안의 해석에 대하여서는 그럼 비와 흥은 뭐가 다르냐는 반론이 따르게 되기에, 현대 학자들은 주로 주자의 감발지의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 부(賦): 하고자 하는 뜻을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 비(比): 하고자 하는 뜻을 무언가에 빗대어 표현한다. 비유법.
3.3. 정(正)과 변(變)
정이란, 그 내용이 교화되어 올바르고 단아한 것을 나타내며, 변(變)이란 교화가 흐트러져 그 내용이 어지럽혀 진것을 가리킨다.
풍의 경우 남(南)으로 끝나는 주남과 소남을 각기 주공과 소공의 교화아래 올바른 문화가 펼쳐져서 지어진 노래란 의미로 정풍이라 하며, 나머지 13열국풍은 교화되지 못하여 어지러워진 이후의 민요라고 하여 변풍으로 부른다.
아의 경우, 대아는 정아, 소아는 변아로 분류했고, 송의 경우도 주송과 상송은 정결하다고 하여 정송으로 보고, 노송은 흐트러져 변송으로 분류한다.
4. 번역본
국내에는 시경번역이 생각보다 많은 편이긴 한데, 시경의 경문만을 번역한 경우가 있고, 주희의 주석을 번역한 경우가 있으며, 그 외 주석가들의 주석을 함께 번역한 예도 있다. 시경의 경문만을 번역한 것으로는 이기동의 《시경강설》(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4.), 정상홍 역 《시경》(을유문화사, 2014.), 김학주 역 《시경》(명문당, 2002.)이 유명한데, 이 가운데 김학주 역은 교수신문 선정 최고의 시경 번역으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주희의 주석인 《집전》을 번역한 것으로는 성백효 역(전통문화연구회, 1998.), 김기평 역(아세아문화사, 2012.) 등이 있는데 둘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그 외 주석가들의 주석을 번역한 것으로는 다산의 《시경강의》(실시학사 경학연구회, 사암, 2008)가 있다.
2017년부터 박소동 한국고전번역원 명예교수의 번역으로 『모시정의』가 출간되고 있다. 현재 2책까지 출간된 상태.[8]
5. 시경과 관련 있는 것
5.1. 류성룡의 징비록
임진왜란 때의 재상 류성룡이 저술한 징비록(懲毖錄)의 제목이 바로 이 시경의 한 구절에서 유래했는데, 시경 소비편의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여기'''징'''이'''비'''후환:)"라는 구절에서 따 온 것으로, 소비편은 위의 구분에서 송(頌)의 '주송'에 포함되어 있는 편이다.
5.2. 단어
'우연히 만나다'라는 뜻의 해후(邂逅)도 시경이 본 출처다.
고사성어 '절차탁마(切磋琢磨)', '훈지상화', '일취월장(日就月將)', '타산지석', '오매불망(寤寐不忘)', '연비어약(鳶飛魚躍)', '요조숙녀', '전전긍긍'도 역시 시경이 출처다.
정도전이 즉석에서 지은 경복궁역시 주아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어라. 임이시여, 만년 동안 큰 복을 누리소서.(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끝의 景福을 딴 것으로 큰 복이라는 뜻이다.
임란 시기를 다룬 오희문의 피난일기 쇄미록의 제목도 시경에서 따왔다. 모구장(旄丘章)의 쇄혜미혜 유리지자(瑣兮尾兮 遊離之子)이며 뜻은 무엇보다 누구보다 초라한 것은 여기저기 객지를 떠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 유명해진 낱말인 손타쿠도 시경에서 유래되었다.
심해에 사는 해면동물의 이름이자 동명의 고사성어인 해로동혈(偕老同穴)도 시경에 나온 偕老와 同穴이라는 단어를 합쳐서 만든 것이다.
6. 바깥고리
7. 관련 문서
[1] 실전된 6편은 소아(小雅)에 속하는 남해(南陔), 백화(白華), 화서(華黍), 유경(由庚), 숭구(崇丘), 유의(由儀). 이 작품들은 내용없이 이름만 전한다.[2] 고대 서적들의 경우 과거 필기구의 발전이 미비해서 이전에는 대나무를 쪼갠 죽간에 점도가 높은 옻먹을 사용해 기록했는데, 이 때문에 처음은 유난히 두껍고 점점 가늘어져 마치 올챙이같은 모양의 글자가 쓰여졌다. 이를 과두문자라고 한다. 수호전에서도 천강지살 108호걸의 이름과 별호를 새긴 석갈천문이 과두문자로 쓰였다는 내용이 나온다.[3] 이를 고문경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한대에 훈고학으로 복원된 시경을 금문경이라 부른다.[4] 원전 22권의 경우 송나라가 고려에게 그 책이 있으면 전해달라고 요청한 기록이 있다. 시경의 존재에 대해 말한 가장 오래된 기록.[5] 그나마 시경은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것이, 이 과정에서 서경의 경우, 원문이 발견되지 못하고, 전한대의 금문상서에 진나라 시대의 위작인 위고문상서가 등장하여 그 내용이 섞여서 원전의 내용을 알 수가 없어서 가치를 많이 잃어버지만, 위고문상서가 후대의 유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칭화대학에서 죽간으로 적힌 서경의 10여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악경의 경우 내용이 남아 있지 않아, 복원조차 되지 못하여 현전하지 않는다.[6] 흔히 말하는 시삼백을 한마디로 하자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詩三百一言之蔽之曰思無邪)[7] 이걸 두고 화랑의 후예에서 '공자님께서 시경에 음문을 두셨거늘'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시경의 음문문제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떡밥이었던 부분인데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은 이걸 어떻게든 설명해 보고자 思無邪의 邪를 마음에 반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서 思無邪는 마음과 달리 거짓말 하는것이 없다고 설명한다.[8] 그 외에 고주 번역으로는 『모시정전역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영식 역이 있는데, 역자의 약력이 자세하지 않고, 출판 역시 자비 출판 형태인지라 우선 여기서는 제외하였다. 참고로 이 책은 모형, 모장의 전과 정현의 전만을 포함하고 공영달의 소는 포함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