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준경

 

고려국 명예 태사
고려국 태보
고려국 중서문하성 차관
고려국 서경 분사 조정 장관
고려국 상서성 호부 장관
척준경

직위
<colcolor=#000>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1]
본관
곡산 척씨(谷山 拓氏)
이름
척준경(拓俊京) / 탁준경(卓俊卿)[2]
아내
제안군대부인(齊安郡大夫人) 황씨(黃氏)
아들
척순(拓純)[3]
아버지
척위공(拓謂恭)[4]
동생
척준신(拓俊臣)
출생
미상 고려 황해도 곡산
사망
1144년 음력 2월 고려 개경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척준경
1. 개요
2. 역임 관작
3. 생애
3.1. 초기 생애
3.2.1. 제1차 여진 정벌
3.2.2. 제2차 여진 정벌
3.2.2.1. 석성 전투
3.2.2.2. 가한목 · 영주성 전투
3.2.2.3. 공험진 전투
3.2.2.4. 제1차 웅주성 전투
3.2.2.5. 기동대를 이끌고 여진을 막다
4. 평가
5. 기타
5.1. 창작물에서
6. 관련인물
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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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시대의 무인[5]이자 문관[6]으로 황해도 곡산[7] 출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사 시간에 무신정권 배울 때 얼핏 들었던 것 같은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나마 성씨인 척씨가 흔하지 않아서 아주 잊히지는 않는 편.[8]
하급 남반 관리 출신으로 숙종 명효왕 대에 무관이 됐고 예종 문효왕 시기 여진정벌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다. 1, 2차 정벌 동안 재상윤관과 친해졌으며 전쟁 종결 후 문관직에 올라 점차 강한 권력을 쥐게 된다. 인종 공효왕 대에는 외척 이자겸에게 포섭되어 정권을 주도했지만 결국 인종에 의해 제거된다. 척준경은 전쟁에서의 공은 걸출했으나 정쟁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고 이는 결국 초라한 결말로 이어져 후대의 평가도 갈리게 되었다.
하지만 무예만 놓고 보면 특정 인물 뽕, 까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척준경을 한반도 최강의 무사로 인정한다. 한국사에 등장한 무장 중, 전술 전략의 구상 및 지휘의 형태가 아닌 개인의 무력만으로 척준경보다 더 큰 전공을 세운 무장은 없다.

2. 역임 관작


이자겸 배신 후, 척준경의 마지막 직위
공신호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
(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인종이 준 위사공신호. 신흥사의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갔다.
향직 품계
삼중대광
(三重大匡)
1품 1등위 품계로서 최고위 품계. 향직 품계는 원 태조가 만든 정식 품계였으나 성종이 문산계 품계를 만들면서 명예직으로 밀려났다.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
종1품 품계로서 최고위 품계. 문산계 품계는 성종이 도입한 정식 품계이다. 문관, 무관 모두 문산계의 구분을 따랐다.
검교직
검교태사(檢校太師)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올리는 명예직이다.
수직
수태보(守太保)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에 수직을 붙힌다. 태보는 삼사 직 중 하나다.
직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 판호부사(判戶部事) 겸(兼)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문하시랑~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이다.[9] 판호부사는 호부의 장관이다.[10] 서경유수사는 서경 분사의 최고 장관이다.
훈위
상주국(上柱國)

척준경은 정8급 무관직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무관 출신이기도 했는데, 그 후 큰 권력을 얻으면서 무관 출신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이전까진 상장군 출신 왕국모[11]가 참지정사 직에 임명된게 최고였지만 척준경이 참지정사 위의 평장사가 되면서 기록을 깼다.[12] 이 기록은 척준경이 실각하여 취소되지만 사후 인종이 또 평장사 직을 추증함으로서 다시 유지되었다. 허나 무신정권이 시작되면 정중부문하시중을 얻고 이후 무신 집권자들도 모두 높은 직위를 얻게 되면서 기록이 깨진다.
척준경 실각 후 최종 직위
직위
문하시랑평장사
(門下侍郞平章事)
척준경이 죽은 뒤 추증되었다.
문산계 품계
조봉대부
(朝奉大夫)
원 척준경이 가지고 있던 종1품보다 한참 떨어지는 품계.
검교직
검교호부상서
(檢校戶部尙書)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걸쳤다는 의미이며 호부상서는 호부의 장관으로 판호부사의 별칭이다. 척준경이 실각 전 호부상서였던 것을 감안해 검교호부상서를 준 것으로 보인다.
조정을 압도하는 권력을 가졌으나 본인이 실각하고 이자겸과 똑같이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척준경은 이자겸 실각의 주역이었음으로 어느 정도의 대우는 받았다.[13]

3. 생애



3.1. 초기 생애


곡산에서 가난한 향리이자 곡산 척씨의 시조인 척위공(拓謂恭)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의 향리는 맨 위의 호장부터 여러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호장, 부호장 정도 되면 지방의 유력자로 상당한 권세를 가졌는데[14] 척준경은 집안이 가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호장급이 아닌 일선 행정 업무를 담당한 하급 향리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지방제는 수령이 있든 없든 현에 행정 업무를 보는 향리들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무술 연마를 더 좋아했는데 과거에 무과가 따로 없던 고려 시대에[15] 그것도 가난한 집안에서 무술에 뜻을 두다 보니 아무래도 학문은 자연스럽게 멀리하고 무뢰배들과 친해지기 쉬웠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고 한동안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1077년 3월 문종의 3남 계림후 왕희가 계림공으로 승작됐을 때 계림부[16] 소속 종자로 들어간다.
이때의 인연으로 1095년 계림공이 어리고 몸이 약했던 조카 헌종을 제치고 보위에 올랐을 때 '추밀원 별가(別駕)' 즉 추밀원의 말단 관리로 들어가 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宿衛)·군기(軍機) 업무 등을 하는 남반으로 지냈다.

3.2. 대 여진(女眞) 전쟁기의 활약



3.2.1. 제1차 여진 정벌


1104년 2월, 여진족이 정주성에 쳐들어왔을 때 전면 패주의 위기에 몰린 총사령관 임간 휘하에서 뛰어난 용력을 발휘하며 정평과 선덕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공을 세웠다. 이때 척준경은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인 별가(別駕) 직책에 불과했다.[17]
척준경은 총사령관 임간(林幹)에게 직접 말 한 필과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품계도 없는 무명에 불과한 소졸이 사령관에게 바로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매우 시건방진 행동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임간은 척준경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기회를 잡은 척준경은 적장 2명을 전사시키고 여진족 추격대를 뿌리치면서 고려군이 전면 패주하는 상황을 막아냈다.

아군이 패배하자 척준경은 임간에게 부탁해 무기와 갑옷 입힌 말을 얻은 다음 적진으로 돌진해 적장 한 명의 목을 베고 아군 포로 두 명을 되찾았다. 그런 뒤 교위(校尉) 준민(俊旻)·덕린(德麟)과 함께 활을 쏘아 각각 한 명씩을 거꾸러뜨리자 적들이 약간 물러났다. 척준경이 퇴각하는데 적 1백 기(騎)가 추격해오자 또 다시 대상(大相) 인점(仁占)과 함께 적장 두 명을 사살했다. 적들이 전진하지 못하는 틈을 타 아군은 무사히 성으로 들어 갈 수 있었으며, 이 공으로 천우위(千牛衛)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 벼슬을 받았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척준경

그런데 이때 뭔가 잘못되었는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옥에 갇혀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왜 투옥되었는지는 역사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유추해보면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가 건방지게 총사령관에게 요구한 게 높으신 분들의 눈에 거슬려서 괘씸죄를 적용했다거나 공을 세운 것에 우쭐하다가 사고를 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척준경의 공을 시기하여 엉뚱한 죄를 뒤집어 씌워서 투옥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사람이 바로 윤관이다. 곤경에 빠진 것을 구해준 인연으로 윤관을 따라 여진정벌에 참가했고 인간으로는 보기 힘든 엄청난 무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의 전공으로 하급 남반 신세에서 벗어나 천우위(千牛衛) 소속 녹사(錄事)가 된다. 천우위는 궁중 숙위와 국가 행사에서 의장대 역할을 하던 부대로 핵심 전투부대인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나 치안부대인 금오위보다 규모와 중요성이 떨어지나 엄연히 6위의 일원으로 척준경은 여전히 말단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벼슬아치가 되었다고 볼 순 있었다.

3.2.2. 제2차 여진 정벌


고려의 별무반 행영 군단
대원수(大元帥)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 윤관
부원수(副元帥)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 오연총
판관(判官)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
병마판관(兵馬判官) 황군상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
기타 지휘관
녹사(錄事) 척준경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
병과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
항마군(降魔軍)
도탕군(跳盪軍)
사궁군(射弓軍)
경궁군(梗弓軍)
정노군(精弩軍)
강노군(剛弩軍)
대각군(大角軍)
철수군(鐵水軍)
발화군(發火軍)
석투군(石投軍)
도합 170,000 명
별무반 대원수 윤관과 친해진 척준경은 천우위에서 중군(中軍)[18] 소속 녹사로 보직을 바꾸어 참전했다.

3.2.2.1. 석성 전투

윤관이 이끄는 17만 명의 별무반은 진격하던 도중 함흥 인근의 성에 도달했는데 이곳에 있던 여진족이 성에 틀어박혀 거세게 농성을 벌였다. 여진족 족장들을 함정에 빠뜨려가며 마비시킨[19] 윤관은 시일이 지체될 경우 여진족의 대응 체계가 굳건해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척준경을 불러 장군 이관진의 지원 아래 성을 함락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척준경은 '"죄를 지어서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칼과 방패를 들고 홀로 성벽 위로 올라가 추장 서너 명을 죽이는 기염을 토했다.[20] 이걸 보고 사기가 오른 이관진 휘하 고려군은 기세를 올려 성을 함락시켰다.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 차림에 방패를 잡고 적진 속으로 돌입해 추장 여러 명을 쳐서 죽였다. 이틈을 타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이 합세해 결사적으로 싸워 적을 대파하니 적은 절벽에서 투신해 자결하기도 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섬멸되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3.2.2.2. 가한목 · 영주성 전투

이후 병목 지형을 믿고 깊숙히 들어왔던 윤관은 우회로를 통해 침투한 여진 대부대의 기습을 받고 소수의 부하들만 거느린 채 포위된다. 부사령관 오연총이 화살에 맞고 윤관도 위기에 빠졌을 때 척준경이 결사대 10명을 이끌고 윤관의 활로를 뚫으려 하자 낭장(郞將) 계급으로 함께 전투 중이던 동생 척준신(拓俊臣)이 자살 행위라면서 뜯어말리지만 척준경은 "나는 한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늙으신 아버님을 부탁하마!" 하며 돌격한다. 이렇게 척준경이 윤관을 구출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이유는 윤관이 먼저 자신을 알아주고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척준경이 여진군 10여 명을 해치우며 고군분투하는 사이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해 윤관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척준경 역시 털끝 하나 안 다치고 살아돌아왔다. 이때 윤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앞으로 너를 자식처럼 생각할 테니 너 역시 나를 아버지처럼 보라!라면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윤관은 패잔병을 수습해 영주성으로 물러났는데 며칠 후 여진의 명장 알새가 군사 20,000여 명을 이끌고 영주성을 공격해왔다. 고려군은 한 차례 큰 패전으로 기세가 꺾인 데다 병력과 군량이 모두 부족했다. 윤관 등 다른 모든 장수들은 적이 많고 아군은 적으니 농성을 하면서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척준경은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인데 성 안의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고 외부에서 구원도 오지 않는데 어떻게 농성을 하는가?라며 홀로 반대했다. 그리고 전투에 나서길 자청했다. 결사대를 이끌고 성을 나선 척준경은 여진군을 몰아내고 19개의 수급을 취했다. 척준경이 피리를 불며 개선하자 윤관 등 성 안에 있던 장수들이 누대에서 내려와 척준경의 손을 잡고 절을 하며 맞이했다고 한다.

3.2.2.3. 공험진 전투

2번이나 척준경 덕분에 구사일생한 윤관은 갈라전 각지에 넓게 분산된 병력을 1곳에 모아서 대응하기 위해 영주로 각 지역의 고려군을 소집했다. 권지승선 왕자지(王字之)는 윤관의 명령에 따라 공험진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영주로 향하다가 사현(史現)이 이끄는 여진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갑작스런 기습이라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왕자지는 타고있던 말까지 잃어버려 걸어야 했다. 급보를 들은 척준경은 구원에 나섰다. 척준경의 구원군이 도착하자 사현의 군대는 일거에 패해 도망쳤고 척준경은 말을 잃은 왕자지를 위해 철갑마 한 필을 노획해 선물해주었다.

3.2.2.4. 제1차 웅주성 전투

동년 2월 알새는 고려 주력군이 집결한 영주성 대신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성을 공격했다. 최홍정이 이끄는 고려군은 여진군이 완전히 자리잡지 못했을 때 성문을 열고 일시에 공격하는 방법으로 한 차례 대승을 거두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여진군의 포위는 더욱 견고해졌다. 최홍정은 성 안에 있던 척준경에게 "당신이 포위를 뚫고 외부로 나가 구원군을 이끌고 오지 않는다면 성 안의 사졸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척준경은 밤 중에 해진 옷을 입고 성벽을 타고 내려와 단신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뒤 고려 국경인 정주까지 내달려 병력을 집결해 통태진, 야등포, 길주를 거치며 만나는 여진군을 격파한 다음 최종적으로 웅주성 방어군과 연합해 성을 포위한 여진군을 격파해 웅주성을 구해냈다.[21]

척준경이 군사의 떨어진 옷을 입고 밤에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정주(定州)로 돌아와 군사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22]

으로 가서,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23]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해 대패시키니 성 안 사람들이 감격해 울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3.2.2.5. 기동대를 이끌고 여진을 막다

이후 완안부가 유격전으로 전략을 바꿔 10개 대로 나뉘어 돌아가면서 고려군을 기습하자 척준경은 왕자지와 함께 일종의 기동부대를 편성해 유격전을 벌이는 여진군과 교전을 벌였다. 각각 함주와 영주에서 여진의 기동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8월 무자일.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함주(咸州)[24]

·영주(英州)[25]에서 여진과 싸워 33명의 목을 베었다.

9월 계해일.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사지령(沙至嶺)에서 여진을 공격해 27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

『고려사』 권12, 세가12 예종1

9성 원정 후반부는 고려군이 갈라수에서 참패하는 등 전체적으로 답답한 진행이 이어졌는데 그나마 기동대를 이끈 척준경과 왕자지는 소소하게나마 전과를 낸것이다.

3.3. 여진 정벌 이후


뛰어난 활약을 보이자 하급 무관 신세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승진해 위위경(衛尉卿)[26] - 직문하성(直門下省)[27] 직위에 올라 본격적인 문관 테크를 타기 시작한다.
이때 경험한 여진의 강대한 힘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후일 이자겸과 함께 대금 사대를 주도했다. 척준경은 후대의 묘청이나 정지상과 달리 여진과 직접 싸웠고 큰 공을 세운 인물인데도 화의를 주장한 것이다. 정치적인 고려를 하고 움직이는 인물은 아니지만 군사적으로는 전문가인만큼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금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전쟁보다는 낫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치킨호크 문서에서 나오는 것처럼 전쟁 경험이 없는 문관들이나 정치인들이 강경책을 주장하는 반면 전쟁에 직접 참전한 군인이나 군인 출신 정치인들이 오히려 유화책을 쓴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외로 흔하다.[28] 꼭 전쟁 경험이 있다고 해서 강경책을 고집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이다.[29]

3.3.1. 이자겸과 손을 잡고 반역자가 되다


믿고 따를 수 있었던 상관인 윤관과 오연총이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최홍정과 이관진 등 함께 활약한 장군 상당수가 잊혀져 간 가운데 척준경은 이자겸 일파가 되어 권세를 지켜냈고 이자겸의 지원으로 무신으로서는 꿈도 못꾸던 정2품 벼슬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어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 때 동생과 아들이 화를 입었고 본인은 인종의 중재를 무산시키고 궁궐을 방화하여[30]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궁성에 불을 지른 뒤에 척준경은 말을 타고 자신의 친족들을 죽인 자들을 찾아다니다가 수춘궁 정문에서 기습을 당해 죽을 뻔하기도 했다. 분노한 척준경은 수춘궁에서 나오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했으며 왕의 침실까지 쳐들어갔지만 왕의 호위무사 2명에게 패하여 퇴각하기도 했다.

2월 신유일.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粲),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 ·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將軍) 고석(高碩) 등과 함께 이자겸과 척준경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자겸과 척준경이 군사를 동원해 궁궐로 침범해 왔다.

임술일. 들이 궁궐을 불태웠다.

계해일. 이자겸과 척준경이 왕을 협박해 남궁(南宮)으로 옮기게 한 다음, 안보린·최탁·권수·고석과 숙위하던 좌복야 홍관(洪灌) 등 17명을 죽였다. 이 외에도 죽은 군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고려사』 권15, 세가15 인종1

인종 세력이 먼저 동생과 아들을 죽였으니 척준경의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냐고 할 수도 있는데 인종 쪽도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과 그 일파를 친다는 명분이 있었으니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던 척준경이 억울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문하시랑평장사 - 판병부사(判兵部事)의 직위까지 올라간 척준경은 이자겸과 함께 최고의 권세를 누리며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인물이 된다.

백관들은 근처의 사관(寺館)으로 옮겨 임시로 붙어있으면서 수만 채울 뿐이었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더욱 강성해져 그들이 하는 짓을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이자겸

그러나 가만히 있을 인종이 아니었다.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이간질시켰고 이자겸과 사이가 벌어진 틈에 지다방사(知茶房事) 최사전과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이 척준경을 타이르고 이자겸의 난 이전에 낙향했을 때부터 자신을 신임해준 인종의 개입으로 척준경은 왕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게 된다.

3.3.2. 유배와 최후


난을 성공시킨 지 불과 3개월 후인 5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로 침입하려던 이자겸의 계획을 사전에 알게 된 인종이 척준경을 시켜 잡아오게 했고, 결국 이자겸은 모든 것을 잃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척준경은 이 변란을 막고 이자겸을 제압한 공으로 검교태사(檢校太師) - 수태보(守太保) -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의 직위에 오르게 된다. 이자겸을 몰락시키며 자신이 고려 최고의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인 1127년 3월 정지상, 김안 등이 척준경의 죄를 물어 그를 탄핵하기 시작하였고, 인종도 내심 척준경을 견제했는지 끝내 신안의 엄타도로 유배를 보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최고 권력자가 되었음에도 왕의 명령에 순순히 따라 유배길에 올랐다는 것. 모종의 이유로 군권을 빼앗겼거나, 홀로 인종에게 직접 반기를 드는 행동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척준경의 정치적인 삶을 보면 주체적으로 뭔가를 도모한다기보다는 어떤 리더 격의 지도 하에 움직임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척준경의 유배는 길게 보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무신정권과도 이어진다고도 볼 여지도 어느 정도는 있다. 전자의 경우 서경 천도론의 중심인물이었던 정지상이 이때 척준경을 탄핵한 공로로 정계의 중심 인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여진 정벌 등의 전공으로 세력을 이루었던 무신들은 여진 정벌 이후 문신들의 견제로 이미 정계에서 밀려난 상황에서 남은 이들은 최고 전쟁영웅 척준경에 동조하거나 그에 반대하여 대립하다가 꽤 많이 숙청당해서 한동안 무신들의 권력 공백상태가 이어졌기에, 후자의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자겸이 척준경에게 던진 당근은 그 이전까지 고려 최고 무관직 품계를 넘는 정2품의 벼슬이었다.[31][32] 이자겸의 난으로 인해 이자겸이 몰락하고, 이후에 척준경 또한 실각하면서 척준경 승진의 반작용으로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해진다.[33]
그래도 유배형에 처해진 이듬해에 인종이 그래도 본인을 구한 것을 생각해 그를 곡주(谷州)로 옮겨주었고, 이후엔 처자식들에게 척준경이 가지고 있던 직전(職田)을 돌려주라는 명을 하게 된다. 이후 유배지에서 삶을 보내던 척준경은 1144년(인종 22년)에 등창으로 인해 사망했다.

4. 평가


고려 초기의 유금필, 후기의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무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여진 정벌기 내내 정신 나간 무공을 보여주며 활약했다.[34] 윤관 휘하로 들어가기 전부터 뛰어난 맹장으로서의 편린을 보였고, 윤관 휘하로 들어가서는 윤관의 기록 대부분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동북9성을 세울 그곳의 지형차 제대로 다 파악하지 못한 채 벌어졌던 9성 정벌은 그가 없었다면 윤관이 전사하는 비극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척준경 본인은 단순히 순수한 무인이었을 뿐, 나름의 정치적 식견은 결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지 않았지만 표리부동하지도 않았고, 전장에선 일당백이었으나 큰 그림을 그리거나 정국을 주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탓에 반드시 본인을 올바른 방향으로 써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여진과의 전쟁 땐 고려의 명장이자 존경받는 문관이기도 한 윤관의 밑에서 눈부신 전공을 쌓고 구국의 맹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그 이후 그를 써준 사람이 하필이면 권신 이자겸이라 간신을 지키는 맹견으로 전락하여 그 전횡에 일조하다 뒤늦게나마 임금의 편으로 돌아섰음에도 결국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5. 기타


  • 젊어서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 보려고도 했으나, 배움이 없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지 못했다. 근데 또 행정업무 외엔 나름 지식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나이 들어 좀 배워보려 한 건지, 인종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하루는 인종이 깨 5되와 황규(黃葵. 누런 아욱) 3되를 얻은 꿈을 꾸고 이를 척준경에게 말하자
>깨는 한자(漢字)로 임(荏)이요, 임(荏)은 임(任) 자와 음이 같으니, 임(任) 자 성을 가진 후비를 맞을 징조요, 그 수가 다섯이란 것은 다섯 아들을 둘 상서입니다. 황(黃)은 황(皇)과 음이 같으니 임금의 황(皇)과 같은 뜻이고, 규(葵)란 것은 바로 규(揆)와 음이 같으니 도(道)로 다스린다는 의미의 규(揆)와 같고, 황규(黃葵)란 것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요, 그 수가 셋이 된 것은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이 임금이 될 징조입니다.
>
>《고려사절요》, 1126년 6월 미상(음) 이자겸의 두 딸을 내치고 임원애의 딸을 왕비로 삼다
이자겸의 두 딸이 폐비된 후 인종이 후비(后妃)[35]로 맞은 여인은 공예태후 임씨였으며, 그녀가 낳은 다섯 아들 가운데 의종, 명종, 신종이 왕이 되었다. 결코 좋은 의도와 결과는 아니었지만… 일단 고려는 형이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으면 동생이 뒤를 잇는 게 자연스러웠다. 태조의 아들 중 세 명이 모두 왕위에 올랐고,(혜종(고려), 정종(고려) 광종(고려)), 현종의 아들 중에서도 세명이 왕이 되었으며 (덕종(고려), 정종(고려), 문종(고려)) 문종의 아들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세명이 왕이 되었다. (순종(고려)), (선종(고려), 숙종(고려))
단, 꿈 이야기 중 후비의 경우엔 척준경이 단순한 꿈풀이를 해준 수준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공예태후 문서에 나오듯이 그녀의 친정인 장흥 임씨 가문은 상당한 명문가였으며, 일찌기 이자겸과 충돌한 가문이었다. 임씨의 아버지인 임원후는 이자겸과 대립하다가 밀려서 개성부사로 좌천된 적도 있었다. 이자겸을 척준경의 손으로 축출한 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공예태후를 왕비로 들이고, 그 과정에서 척준경의 꿈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달리 해석하면 척준경이 임씨를 왕비로 들이는데 어떤 식으로든 관여를 했음을 암시하는 증거일 수도 있다.
  • 성격은 전형적인 무인상으로 다혈질에 의리있는 사나이로 보이는데, 자신을 인정해 준 윤관을 목숨을 걸고 구출한 일화나, 전투 중에 을 잃은 친구 왕자지를 위해 직접 여진족을 추격해 말을 가져다준 일화,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이자겸의 아들들에게 역정을 낸 일화 등에서 이런 성격을 알 수 있다. 한때 이런 성격 탓에 정치판을 버리고 낙향하려 하기도 했으나, 인종이 직접 사람을 보내 그를 달래가며 복귀시키기도 했다. 이때가 아직 이자겸이 권세를 부리던 시절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후에 그에게 보낸 배려 등을 생각한다면, 인종도 그를 꽤나 아꼈던 듯하다.
  • 동생 척준신 역시 무관으로 종사하며 형과 함께 여진정벌에 참여해 공을 세웠고, 형의 후광을 등에 업고 병부상서까지 올랐으나 이자겸의 난 직전에 인종의 친위세력들에게 살해당했다. 아들 척순은 내시[36]로 근무하다가 척준신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37]
  •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고려의 척준경, 사묘아리, 한세충. 만인지적용장 3명이 동시기를 살다갔으며 시기상 척준경과 사묘아리, 한세충과 사묘아리가 전장에서 부딪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부딪혔다는 기록은 없지만, 워낙 시기가 절묘하다보니 이를 소재로 한 패러디물이 역덕후들 사이에서 자주 나온다.
  • 윤관과의 관계나 이후의 무신 최고직에 오르는 모습이 촉한의 마지막 사령관 강유와 비슷한데 척준경과 강유 모두 유능한 상관 밑에서 공을 세웠고, 그 상관이 죽자 무신 최고직에 오르는 모습도 비슷하다. 다만 척준경은 권신이 되어 반역열전에 올랐지만 강유는 유선을 보필하며 30년동안 북벌을 이끌며 자신의 모든것을 촉한을 위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5.1. 창작물에서


  • 초롱이의 옛날여행 묘청편의 배경 설명에 잠시 등장하는데 이자겸을 척결한 공으로 권세를 얻고 횡포를 부린 것으로 묘사된다. 그후 정지상에게 탄핵크리를 맞고 퇴장한다. 지상파 방송에서 척준경의 모습이 묘사된 것은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하다.
  • 2000년대에 척준경은 한국 인터넷에서 아예 소드마스터 척, 척미네이터 등으로 불리는데, 정사의 기록을 생각하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거 같다. 실존하는 소드 마스터로 판타지 갤러리나 한국인 서번트 등의 창작물 관련 커뮤니티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상이다. 심지어 척 노리스의 조상이라는 드립도 있었다. 척준경이란 이름에서 받침을 떼면 더욱 강해 보이는 '처주겨'가 된다는 드립도 있었다.
  • 과거 신동우 프로덕션의 국사만화 시리즈에 "척, 척 베어버리는 척준경이가!!"라고 여진족이 두려워 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작품 내에 종종 고증 오류가 보인다. 1화에서 이자겸의 난을 조명하고 있는데 왕궁에서 치고 받았다고 기록된 《고려사》의 기록과는 달리 야전으로 그려져 있는데다, 이자겸의 난 발발 당시 1126년인데 이미 1122년에 사망한 왕자지가 버젓이 살아서 척준경과 붙어다니질 않나, 뭣보다 전형적인 문관인 윤관이 인간흉기급 무관으로 그려진다. 극의 흐름을 위한 각색이라고 보면 되지만, 그나마도 조기완결당한 듯하다...
  • 그야말로 여러 면에서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인물로, 능력도 뛰어나고 인간적인 매력도 풍부했으며, 흥미진진한 시대[38]를 살았기 때문에 드라마로 잘만 만들면 대박날 소재 같지만, 어째서인지 한 번도 다루어진 적이 없다. 여진과의 전쟁 및 동북 9성에 대한 대중들의 인지도가 크지 않은 점이 이유로 추정한다.

사극에서는 현재까지 등장한 적은 없지만, 육룡이 나르샤를 포함해 선덕여왕, 뿌리깊은 나무 세계관에서 가장 강하다고 추측된다. 이 육룡이 나르샤 세계관에서 척준경이 얼마나 괴물이었는지 알 수 있는데 그와 비슷한 재능을 가진 현손녀 척사광이 실전 경험이 한번 뿐인데도 삼한제일검인 이방지보다 강하고 대륙 제일검 개파이와 동급으로 취급받는다. 하물며 남자라 체력도 우월한 데다가 곡산 검법의 창시자이며 일생을 여진족 학살과 함께 해 실전경험까지도 풍부한 척준경은 얼마나 괴물이었을까.(...) 장삼봉이 버티고 있지만, 이 세계관에서는 장삼봉보다 척준경이 강할 확률이 높다. 장삼봉이 길선미에게 자신의 제자를 죽인 자를 묻자 길선미가 척준경을 아냐고 물어봤을 때 장삼봉은 "어찌 칼을 잡고 사는 무인이 그 자를 모를 수 있단 말인가"라고 척준경을 동경하는 뉘앙스로 말했다. 물론 소설과 다르게 실제역사는 서열놀이가 적용되지 않는다.
  • 창작물에서 척준경을 잘 다루지 않는 이유를 창작자의 기준에서 추측한다면 의외로 분명해지는데 바로 당사자의 행적 때문이다. 이미 평가 항목에서도 '잡고 휘두르는 주인에 따라' 달라졌다고 평가될 만큼 척준경의 생애는 본인이 무언가를 선택해서 밀어붙인 삶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밑에 있느냐에 따라서 구국의 명장도 됐고 간신을 지키는 맹견도 됐다. 이렇게 일생을 다른 이의 뜻에 따라 정반대의 행적을 보인 사람을 창작물의 주인공으로 삼기는 대단히 어렵다. 보통의 한국 TV 사극 드라마처럼 무조건 주인공에게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면 터무니없는 미화가 될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고 고증을 살려 그대로 묘사하면 주인공이 그냥 이리저리 휘둘리는 힘만 센 바보가 되버린다. 역설적이지만 차라리 살아온 생애에서 무언가 큰 욕심을 보인 흔적이 있었다면 도리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악역 주인공으로 묘사해 볼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겸을 제거한 이후의 행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척준경은 군부를 장악한 다음 최고 권력까지 쥔 상태에서 자신에 대한 탄핵이 들어오자 순순히 이를 받아들여 권력을 놓아버렸다. 현실이 이러하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모르고 과도한 욕심을 부리다 결국 망하고 마는 인물로 묘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척준경의 삶에서 빠질수 없는 그분 왕자지가 문제라는 개드립도 있지만 왕공으로 부르거나 가명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 그 외에도 딱히 청렴결백하지는 않았어도 최고권력을 단번에 놓아버릴 만큼 과욕은 부리지 않았고, 별 고민없이 이자겸을 왕을 능가할 만한 권신으로 만들어줬지만 결정적인 시점에서는 아무 힘도 없던 왕의 명을 받들어 이자겸을 제거했으며, 평소에는 군사 분야를 제외하고는 딱히 식견이나 재주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해몽같은 특정 분야에선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보여주는 등 뭐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대단히 복잡한 인물이다. 이런 복잡한 인물상이 척준경을 창작물의 주인공으로 쉽게 다룰 수 없게 하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된다고 볼 수도 있다. 캐릭터의 성격을 결정짓기도 어렵거니와 창작자의 의견이 개입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
  • 또 하나의 약점은 기록이나 창작물의 부재이다. 이 정도 무인이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글소설 같은 게 있어서 인지도를 유지시켜줘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고, 애초에 조선시대에 척준경을 언급하고 찬양하는 이도 없었던 듯 하다. 아니면 하다못해 본인이 남긴 기록이라도 있어야 했다. 난중일기가 이순신 창작물에 있어 하나의 등불이 되고 지침이 되는 반면, 척준경은 누굴 몇백명 베었다는 기록은 있어도 본인이 남긴 어록은커녕 명언 한 마디도 없어서 무슨 생각하고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앞으로 척준경이 주인공인 사극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사극에 나오는 대사나 심리묘사는 전부 작가의 허구일 것이다. 이름만 사극이지 그냥 가공의 전기물이 되기 쉽다.

  • 대체역사물 척준경이 달라졌어요에서의 주인공이 빙의한 인물이다.[39] 여기서는 미래인이 빙의한 덕에 문무겸비형 무장으로 거듭나며 소드마스터 기질은 여전해 무력으로 거란, 여진, 심지어 서방의 십자군(!!!)[40]등을 이겨나가며 국제적으로 맹활약한다.
  • 사신소년에서 경호의 33번째 사용 영혼으로 등장한다. 수식어로는 검성.

6. 관련인물



7. 같이보기


[1] 사후 추증된 마지막 공식 직위.[2] 고려 말 대학자 이제현이 쓴 익재난고(益齋亂藁)의 9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4년에 국구(國舅) 이자겸(李資謙)이 평장사(平章事) 탁준경(卓俊卿) 【척준경(拓俊京)을 말한다.】(후략)[3] 내시가 되었는데, 삼촌인 척준신과 함께 살해되었다.[4] 아들 덕에 검교대장군 직을 받았다. 여기서 검교는 명예직을 의미한다.[5] 무관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다. 척준경은 장군, 낭장, 교위, 대정처럼 자기 아래 정식으로 편제된 병력이 있는 무관직을 한 번도 거친적이 없다. 여진정벌 때 천우위(千牛衛)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 중군(中軍) 병마녹사(兵馬錄事)을 역임했지만, 군문의 녹사는 해당 부대의 행정사무를 처리하는 직책으로 문관이 주로 임명되었다. 근데 또 고려 때는 문관 출신들이 병마녹사나 병마판관으로 전투에 참전하는 일이 흔해서 완전히 무관이 아니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현대로 따지면 평소엔 지휘관의 보좌를 하다가 유사시 병력 일부를 할당받아 전투에 나서는 특수한 군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 [6] 2차 여진정벌 때 활약으로 상서성 공부의 하급 관리로 문관 커리어를 시작해 평장사까지 올랐다.[7] 오늘날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이다. 곡산은 고려 때 곡주(谷州)였다.[8] 이 척(拓)이란 한자를 성씨로 읽을 때는 '척'이 아니라 '탁'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9] 중서문하성의 장관은 문하시중. 바로 밑이 문하시랑~평장사다.[10] 판호부사는 약칭이다. 풀네임은 '판상서호부사'로 줄여서 판호부사, 호부상서 등으로 불렸다.[11] 숙종의 배향공신.[12] 고려 최고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은 장관이 문하시중, 차관이 평장사, 3급이 참지정사이다.[13] 이자겸도 인종의 외조부라 사후 검교태사 - 한양공에 추증되었다.[14] 신라 말 혼란기의 지방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향리가 되었기 때문에 고려 초중기에는 거의 호족이나 다름없었다.[15] 고려의 무과는 예종 때 무학재와 함께 잠깐 생겼다가 인종 때 혁파되고 이후 공양왕 때 가서야 생긴다.[16] 고려에서는 3등작을 받은 왕족에게 제왕자부를 봉해 관저로 삼게 해주었다.[17] 이 직책은 향리(鄕吏)의 자손 중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작은 벼슬이었다.[18] 중군은 2군 6위처럼 특정 부대가 아니며 고려의 전시편제인 오군중 하나이다. 6위의 병력이 수도 혹은 북방에서 부병하다 전시에는 오군으로 편성되는 방식으로 척준경의 소속 부대는 여전히 천우위이다.[19] 이 일화를 가지고 윤관과 고려는 정말 비겁하다고 욕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쟁에서 비겁하거나 치졸한 방법을 쓰는 것은 결코 문제되지 않는다. 손자병법에도 싸움을 하는 자는 속임수나 기이한 꾀를 써야 한다(兵者詭道也)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건 예의를 따지며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치는 과정이 아니라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을 물리치는 결과인 것이다. 한 예로 1518년 여진족 속고내의 토벌 사례에서 여진족 추장인 속고내를 사로잡을 절호의 기회에서 조광조가 도적의 꾀로 엄습한다면 의리에 어긋납니다, 선비로써 체면이 있는데 기습은 예의에 어긋난다라고 주장한 것을 보면 어떤 방식이 더 옳은가를 고르기 쉬울 것이다. 또 항우가 미리 준비한 병사들을 숨겨놓고 유방을 잔치에 초대하여 죽이려 했던 홍문의 연이나 아랍의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들을 잔치에 불러서 대접하고 있다가 미리 숨겨둔 병사들을 풀어서 모두 죽였던 사건들이 있듯이 고대 동양에서 잔치를 가장하여 적을 불러들여 죽이는 일은 일상화된 풍습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홍문의 연을 두고 항우의 참모인 범증은 항우더러 비겁하다고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항우가 유방과 그 부하들을 왜 죽이지 못하고 돌려보냈느냐며 그의 결단력이 없음을 비난하였다.[20] 가장 먼저 성벽에 돌격하는 병사들은 전사할 경우 대부분의 문명에서 해당 병사의 가족을 국가가 평생 부양해준다는 약속을 해줄 정도로 공성전에서 먼저 성벽을 오르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인해전술로 몰아붙여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일을 혼자 해낸 것도 모자라 성벽을 올라 체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추장과 병사들을 죽인 것이다.[21] 이것이 1차 웅주성 전투. 2차 웅주성 전투 때는 임언과 최홍정이 구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했다 참패해 위기에 처했으나 오연총이 정예군 1만명을 데리고 개경에서 급히 달려와 27일만에 포위에서 벗어났다.[22]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23]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24]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 함주군.[25]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일원.[26] 위위시(衛尉寺)의 차관. 종3품. 위위시는 부서명으로 왕실의 의장용 비품을 관리하는 부서다.[27] 중서문하성 소속 서열 8번째 직위. 종3품.[28] 미국 부시 행정부를 보면 군인 출신 콜린 파월은 걸프전 때부터 온건파였고 징병제를 시행하던 시절 5번이나 병역을 연기해 끝내 가지 않은 체니가 매파였다.[29] 이스라엘의 장군이자 후에 총리가 된 이츠하크 라빈도 총리가 된 후에 팔레스타인과 적극적인 평화 무드를 조성하지만 군대조차 가기 싫어하면서 대책없는 극단적인 정책만 요구하는 유대교 원리주의인 하레디 청년에게 암살당했다.[30] 궁궐에 쳐들어간 후 불이 될만한 땔감 등을 모아서 궁성 동문 동화문(東華門)의 행랑에다 놓고 불을 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31] 중서문하성 차관인 평장사.[32] 최고 무관직인 상장군은 정3품이다. 무관 출신 중 가장 높은 직위를 받은 신하는 숙종 대 상장군 출신 왕국모로 종2품 참지정사였다. 이걸 천우위 녹사 출신인 척준경이 깬 것.[33] 무신정변이 일어난 실질적인 이유는 의종 후반대의 지나친 문신 우대 기조 때문이긴 했었지만.[34] 군대를 통솔할 때는 물론, 단신으로 무장한 병사 십수명을 베는 말도 안되는 공적을 세웠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건 동네 주먹싸움과는 차원이 다른, 오롯이 전쟁에서 세운 공이다. 하물며 뒤에 병사 한 명 없이 십수명을 나홀로 거뜬히 베었다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얼마냐 죽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영향을 끼쳤느냐다. 군사들의 사기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유금필, 최영, 이성계는 장군으로서도 백전불태에 가까운 명장들이었고 정치적으로도 최소한 평균은 쳤다.[35] 황제 또는 국왕의 정실과 후궁을 통틀어 일컫는 말.[36] 환관이 아니라 내직관리를 의미[37] 아울러 여기서 내시란 흔히 아는 내시가 아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고자인 내시는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일 때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그때 정착된 것이다. 물론 고자인 인물이 당시에 환관으로 궁에서 일하긴 했으나, 조선처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사고로 그렇게 되고만 이를 채용했다. 조선도 원칙적으론 사고로 고자가 된 사람만 채용했지만, 뽑는 인원이 고려조보다 많다 보니 몰래 거세해서 들어온 경우가 허다했으며, 걸렸을 경우 내시에서 짤렸다. 따라서 고려의 내시는 당연히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38] 그래서, 척준경이 주인공인 사극을 만들면 고려판 세조숙종의 왕위찬탈을 다룰 수 있다. 아예 더 나아가서 숙종의 아버지이자 고려의 황금기인 문종의 시대도, 선종 시대의 대각국사 의천 이야기까지 엮어넣을 수 있다.[39] 정확히는 가상 현실 게임의 오류 때문이었다고. 다만 이는 척준경의 한탄을 들은 이순신의 개입일 가능성이 높다.[40] 무역을 위해 셀주크 제국으로 갔다가 술탄의 요청으로 안티오크 공성전에 개입해 보에몽과 레몽을 포로로 잡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