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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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의 제13대 임금. 묘호는 선종(宣宗), 시호는 고려사 선종 총서 기준으로는 안성사효대왕(安成思孝大王), 선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으로는 현순관인사효대왕(顯順寬仁思孝大王).
휘는 운(運)[3] , 자는 계천(繼天). 고려의 황금기를 이끈 명군 문종의 차남이다. 부왕 문종의 재주를 닮아서인지 재위 기간 내내 출중한 능력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고려의 황금기를 유지시킨 명군이다.
2. 생애
형 순종이 1083년에 왕위에 오른지 3개월 만에 붕어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사실 즉위하기 전에 아버지와 형님까지 줄초상을[8] 치르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어찌보면 다소 얼떨떨한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9]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재위기간 내내 별 탈 없이 무난히 왕위를 다스린 걸 보면 능력은 꽤 출중했던 듯 싶다.幼而聰慧, 及長, 孝敬恭儉, 識量弘遠. 博覽經史, 尤工製述.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장성해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지식과 도량이 넓고 깊었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두루 읽었고 특히 글을 잘 지었다.
《고려사》 선종 세가 총서 중.
2.1. 황금기의 지속
이 시대에는 큰 변화보다는 기존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데 선왕들이었던 할아버지 현종에 부왕 문종에 이르기까지 명군들이 줄줄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워낙 국정을 잘 이끌어 나갔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일을 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탓인지 선종의 재위 기간도 별 큰 사건 없이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다만 재위 초반 가뭄, 중간에 한파와 같은 기상 이변이 문제시되었는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것말고 문제가 없었다는 것.[10]
2.2. 유교와 불교의 발전
즉위 이듬해인 1084년 정월에 보제사의 승려 정쌍 등이 선종에게 승과에 관하여 "중들을 진사 규정에 준하여 3년에 1차씩 승직에 선발해달라" 고 청하였는데 이는 곧 승려들도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선종은 이들의 청을 수락하여 3년에 한번씩 승과를 치를 수 있도록 허가했는데 사실 승과는 선종 즉위 후가 아니라 광종(고려)때 귀화인 쌍기의 건의로 진사과와 명경과가 창설될때 승과 역시 이미 마련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승과는 비정규직이었지만 선종 대에 이르러 드디어 승과가 3년에 한 차례씩 시행하는 식년제로 격상되었다.
선종 시대의 특이점이라고 할만한 것은 바로 문종의 4남이자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이 본격적인 활약을 보이면서 불교가 크게 흥했다는 점이다. 이미 국가 시스템은 선왕 때인 제11대 문종 시기에 거의 완성된터라 대각국사 의천을 중심으로 불교의 계파인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는 종교 통합 사업인 천태종 사업을 전면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이는 제도가 완비된 조선 성종 시대 전국 곳곳에 유교 장려 정책을 펼친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 제도를 갖췄으니 사상 통일을 시도한 것인데 실패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왕실이 화엄종과 천태종을 지원한 것과 달리 지방 세력들과 다른 승려들은 귀족 중심의 정치를 이루기 위해 법상종을 밀어줬기 때문이다.[11] 더군다나 천태종은 백성들에게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한데다 이후 조계종이 떨어져 나가기까지 한다. 결정적으로 의천이 세상을 떠나자 천태종이 쇠퇴해서 망했다. 또한 그는 승과를 확대하고 사탑을 대규모로 건립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켰다.[12]
선종 본인 또한 불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본인이 아픈 와중에 부처님 곁으로 가고 싶다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선종이 무조건적으로 불교만 장려한 것은 또 아니었다. 선종은 국학에 공자의 제자 안회(안자)를 비롯한 72현의 상을 그린 벽화를 그리게 했으며 72현에 대하여 제사를 올렸다. 절차는 송나라의 국자감의 것을 본받고 복장은 중국 십철을 본받았는데 이는 고려 유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것이다. 이로서 유학은 하나의 통치 철학에서 불교와 같은 종교적 반열로 서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의 치세에는 고려가 불교에만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통치 이념인 유교와 조화를 이루며 서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是月 王憂勞萬機 頗覺不豫 移御文德殿 命內醫進養性方藥。忽有感 作古風長篇 其末云 藥效得否何敢慮 浮生有始豈無終 唯應愿切修諸善 淨域超昇禮梵雄。王春秋鼎盛 而有此作 見者驚恠。
○ 이 달에 왕이 정무로 인한 과로로 몸의 이상을 느끼고 문덕전으로 처소를 옮긴 다음 내의를 시켜 양성방약(養性方藥)을 바치게 했다. 이때 왕 자신의 소회를 장편 고시로 읊었는데 그 뒷 연은 이러했다.
“약효야 있든 없든 무엇을 걱정하리(藥效得否何敢慮)
뜬 구름 같은 삶, 태어남이 있으니 어찌 죽음이 없으리.(浮生有始豈無終)
다만 간절히 바라노니 많은 선근 쌓아서(唯應愿切修諸善)
서방 정토로 올라가 부처님 뵈오리.(淨域超昇禮梵雄)”
왕의 나이가 한창인데도 이런 시를 지으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고려사》선종 9년 3월 병진일 기사
2.3. 동아시아 강국으로의 성장
2.3.1. 대요 관계
문화 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인 거란, 송, 여진족, 일본 등 외국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국가의 재정도 탄탄해졌다. 그만큼 국력도 비약적으로 상승해 명목 상 상국인 거란에 대해서도 밀리지 않고 시종일관 당당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 증거라 할 만한 사례로 선종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가 생일날에 도착하지 못하고 늦게 온 거란 사신을 대놓고 놀렸던 예가 있다. #.
10일. 왕이 친히 순종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요나라에서 어사중승(御史中丞) 이가급(李可及)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는데,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사신의 이름은 가급(可及. 가히 이를 만함)인데 어찌하여 불급(不及. 이르지 못함)이 되었는가?"라고 조롱했다.
《고려사》 선종 2년(1085년) 9월 10일 기사
한편 거란이 압록강에 시장을 설치하려 하자 서희 때의 담판을 근거로 무산시키고 사과의 답례품을 받아내기도 했다.9월 요가 사신을 보내와 생일을 하례하였다. 사신 이가급(李可及)이 왔으나 기일에 닿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조롱하기를, "사신의 이름은 가급(可及)인데 어찌 불급(不及)했는가?" 하였다.
《동사강목》선종 2년
2.3.2. 대송 관계
문종대에 송나라와 재수교한 후[13] 고려의 국력이 급격하게 상승해서 송나라와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대부분 송나라가 좀 안습한 에피소드다.(...)
송나라가 보내준 선물이 의심스러워서 송나라 사신 앞에서 금은알을 모조리 다 깨버리는 짓을 저질렀는데 송나라에선 "고려 놈들이 거란과 내통하는 게 아니냐"며 끙끙 앓기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원우(元祐)[14]
5년 2월 17일에 왕백호(王伯虎) 병(炳)을 만났더니 그는 말하기를, “옛날에 추밀원(樞密院) 예방(禮房) 검상문자(檢詳文字)로 있을 때 비로소 고려 공안(高麗公案)을 보았는데,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 이야기를 하면서 거란의 군막 속에 고려 사람이 있어 자기 나라 임금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는 뜻을 말하더라고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이를 황제[15] 에게 아뢰었더니,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비로소 고려 사신을 불러볼 뜻을 갖게 되었다. 추밀사(樞密使) 이공필(李公弼)이 뜻에 맞추어 친필로 문서를 황제에게 올려 고려 사신을 부르자고 청하여, 드디어 발운사(發運使) 최극(崔極)에게 명령하여 상인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세상에서는 최극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공필의 잘못은 모르고 있으며 장성일 같은 자는 족히 이야기할 것도 없겠다.” 하였다.“회동제거(淮東提擧) 황실(黃實)의 말로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 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까지 쪼개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
이때 고려 사람들은, ‘감히 우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을 거란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가 우리에게 내통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고, 더러는 다른 기회에 고려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틀린 것이 아니랴.” 하였다.
《동란섭필(銅蘭涉筆)》
위의 얘기를 풀어보면, 고려의 사신이 송나라에 가서 "책을 포함해서 이것저것 살께요"라고했다. 그러자 송나라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시인이며 고려를 굉장히 싫어하던 소동파가 "고려 저 오랑캐 놈들이랑 교역하면 우리만 손해입니다. 저 무식한 놈들이 우리 것을 사가서 똑똑해지면 우리에게 얻는 이익이 뭡니까? 저 새퀴들 달라는 거 절대 주지 마세요."라는 이야기로 엄청나게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당시 송나라는 요나라의 성장으로 압박이 심했고, 그 때문에 요나라가 (군사적인 압박이든 정치적인 압박이든)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고려와 손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원우(元祐) 7년(1092년)에 (고려가) 황종각(黃宗慤)을 보내와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치면서 구입해 가겠다는 서적이 매우 많았다. 예부상서 소식이 "맥적(貊狄)[16]
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송나라에)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첫째 돈이 너무 많이 들며, 둘째 백성이 힘들며, 셋째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 넘기고, 넷째 고려가 예의는 고사하고 실리만 챙겨가는데다 송의 허점을 탐구하며, 다섯째 고려와의 관계가 거란이 트집잡을 거리가 된다.) 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金箔) 등은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아뢰니, 조칙을 내려 금박만을 사서 (고려로) 가져가도록 했다. 그러나 끝내 《책부원귀(冊府元龜)》[17] 도 구입하여 귀국했다.
《송서》 외국열전 고려전
이러한 상황에서 송나라는 고려의 요구를 웬만하면 다 받아주는 상황이었고, 위의 사건 때 제대로 대처 못한 것 뿐 아니라 후에 의천대사가 불교를 배우기 위해 송나라를 방문했을 때 '''고려를 싫어했던 소동파는 고려의 왕족이자 스님인 의천대사의 개인 가이드 노릇까지 해야 했다.'''(...)
2.3.3. 대일본 관계
일본과의 교역은 1084년 이후에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 1084년 - 일본 축전주 상인 노부미치가 내항하였다.
- 1087년 - 일본 상인 시게모토와 치카무네가 내항하였다. 대마도의 모토히라가 내항하였다.
2.4. 서거
번영한 나라를 큰 사변 없이 무난히 이끌어 나가다가 1094년 5월에 붕어.[19] 향년 46세였다.五月 壬寅 王薨于延英殿內寢 卽日遷殯于宣德殿。壽四十六 在位十一年。 謚曰思孝 廟號宣宗 葬于城東 陵曰仁陵 仁宗十八年 加謚寬仁 高宗四十年 加顯順。
5월 임인일. 왕이 연영전[18]
의 침소에서 훙하자 그 날로 시신을 선덕전(宣德殿)으로 옮겼다. 향년 46세로 11년 동안 재위했다. 시호를 사효(思孝)라 하고 묘호를 선종(宣宗)이라 했으며 성의 동쪽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인릉(仁陵)이라고 했다. 인종 18년에는 관인(寬仁)을, 고종 40년에는 현순(顯順)이라는 시호를 덧붙였다.
3. 태묘 악장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구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 대 선종 왕운의 찬가 제목은 "청녕(淸寧)"이다. 네글자 운구이다.
예종의 부왕인 숙종은 형 선종의 아들로서 보위를 계승한 헌종을 퇴위시키고 보위를 차지했다. 고려시대엔 형제 상속이 일반화 되있던 만큼 숙종은 명분 상 꿀릴게 없다지만... 영 미묘해 보이는건 어쩔 수 없는 듯.[21]당신은 요의 인덕과 순의 효성, 그 도를 쫓으셨습니다.
한 시대동안 임조(臨朝)하셨으나, 빈천(賓天)하신지 몇년이나 됐는지요.
당신이 남기신 많은 강렬한 유풍(遺風)은 천고(千古)를 채우고 풍부하게 해줍니다.
당신의 가마를 바라보니 여전히 모습이 보이는듯 합니다.
궁정에 악(樂)이 있으니, 그 음(音)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방가(邦家)의 영광은 실로 신(神)[20]
덕분입니다.궐사(厥祀)를 고쳐 종묘에 고합니다.
영원히 생각하는 제 마음을 보아 흠향하러 오셔서 효도를 받아 주십시오.
4. 평가
아버지에 이어 형까지 승하한 그야말로 줄초상난 어지러운 상황에서 즉위하였음에도 별 탈 없이 나라를 무난히 이끌어 나갔다. 특히 송, 요와의 외교 관계에서도 시종일관 당당함을 견지하며 동아시아를 주도하는 삼대 축 역할을 충실히 소화했으며 불교와 유교의 조화를 도모하며 정치 이념의 균형을 일궈냈다. 실로 그가 보위를 이어받은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는 부분.
우리나라의 다른 왕조나 중국의 역사만 봐도 최전성기를 이뤄낸 왕의 다음 시기에 급격히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데 전성기를 무사히 잘 지켜냈고 재위기간이 크게 짧은 편은 아닌데도 시험 문제로 낼게 딱히 없다보니 교과서나 한능검, 공무원 시험 등에서는 언급조차 되질 않는다.[22] 따라서 인지도는 최하급이다. 반면에 동생인 숙종, 숙종의 아들과 손자인 예종, 인종대에는 시험문제 소재가 많다보니 셋의 비중은 점점 올라가고 있다.[23]
다만 그가 승하한 뒤 고려 왕실에는 한 차례 피바람이 불게 된다.[24] 선종 본인 역시 책임을 피할 순 없는 것이,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상당한 능력과 재주를 지닌 동생 계림공 왕희가 아닌 자신의 장남이었지만 몸이 병약해 병석 생활이 잦았던 헌종에게 보위를 넘겼고 그 탓에 후궁인 원신궁주의 오빠 이자의[25] 가 원신궁주의 아들 한산후 왕윤을 밀면서 숙종[26] 과 대립하였기 때문.
5. 가족
선종은 아내가 왕후 한 명, 비(妃) 한 명, 궁주 한 명이 있었다. 자식으로 아들 둘, 딸 둘이 있었다.
존호는 현(賢). 문종 대의 명신 이자연의 조카 이예의 딸. 예종의 1비 경화왕후의 어머니.
남편 선종이 국원공일 때 결혼해 국원공비라 불렸다. 시호를 정신(貞信)이라 했으며 예종은 현비가 선종과 같이 있던 기간이 짧다고 하여 묘당에 합치지 않았다. 선종의 1비지만 오래 살지 못했기 때문에 서열에 비해 품계가 낮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숙태후와 태후의 자식에 대해선 문서 참조.
문종 대의 명신 이자연의 손녀이며 족보상 사숙태후, 이자겸의 사촌이다.
본디 원희궁을 하사 받은 원희궁비였으나 궁비의 오빠 이자의가 한산후를 왕으로 세울려고 반역을 도모하자 그 변란를 제압하고 이자의의 목숨을 빼앗은 당시 실세 숙종이 궁주로 강등한 후 그녀와 한산후를 본궐서 내쫓았다.
고려사 위계정 열전에 따르면 첩 만춘(萬春)이 있었으며 만춘은 선종의 총애를 받아 자신의 저택을 아주 크게 지어 비난받았다고 한다.
6. 기타
찬이슬에 가을 바람 불어오니 / 露冷風高秋
이 맑은 밤 달은 밝구나. / 夜淸月華明
피향전은 이제 삼경이 되려는데 / 披香殿裏欲三更
노래 소리 아직도 요란쿠나. / 沸歌聲擾擾
인생은 모두가 허깨비 같으니 / 人生都似幻
부귀영화 탐내지 마라. / 莫貪榮
좋은 술 금잔에 가득부어 / 好將美醁滿金觥
기쁨을 나누는 게 좋으리. / 暢懽情
『하성조사(賀聖朝詞)』
- 시를 쓰기 좋아했다. 위에 아픈 와중에도 부처님 찾은 시뿐 아니라 선종 6년인 1089년 9월 정축일에 요나라 사신을 맞이한 잔치에서 지은 『하성조사(賀聖朝詞)』가 있다.
-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에선 '요황(瑤皇)', '만승(萬乘)'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