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민

 



'''제 4대 무신 집권자'''
'''이름'''
이의민(李義旼)
'''생몰연도'''
? ~ 1196년 음력 4월 9일(양력 5월 8일)[1]
'''출신지'''
고려 동경(東京)
'''사망지'''
고려 미타산(彌陀山) 별장[2]
'''신장'''
190cm
'''배우자'''
부인 최씨
'''아들'''
이지순, 이지영, 이지광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일생
2.2. 무신 정변
2.3. 집권
2.4. 처참한 말로
3. 민폐력
4. 평가
5. 베트남의 황손인가?
6.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7. 같이보기


1. 개요



고려무신(武臣). 고려 무신정권 4대 집권자로 계림천민 출신 한량에서 시작해 천하를 호령하는 권신의 자리까지 오른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허나 이렇듯 화려하게 비상했지만 탐욕스러움을 주체하지 못해 여러 난행을 벌였고 그만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기 일생


'''무신정변 이전 이의민의 관직'''
'''직위'''
대정(隊正)
소속 부대는 국왕의 친위대로 보임. 종 9품
별장(別將)
대정에서 승진. 정 7품.
경주 출신이며 본관은 정선(旌善)이다.[3]
3남막내로 아버지 이선은 소금과 체(篩)를 팔던 장사꾼이었고 어머니는 옥룡사라는 절의 노비였다. 이의민이 어렸을 때 이선은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은 채로 황룡사(黃龍寺) 9층 목탑을 올라가는 꿈을 꾸었고 깨어난 뒤 이의민이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라 여겼다.[4]
기골이 장대해 키가 무려 8척(약 190cm)[5]에 완력이 유달리 빼어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형들과 함께 횡포를 부리다 경주 안렴사[6] 김자양의 손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 끝에 두 형들은 옥에서 굶어 죽었으나 이의민은 혼자 살아남았다. 이를 가상하게 여긴 김자양이 이의민을 무관으로 발탁하였고 아내와 함께 개경으로 상경해 경군에 속하게 되었다. 수박 실력이 뛰어났던 그를 의종이 눈여겨 보아 최하급 장교인 대정에서 단번에 정7품 별장까지 파격 승진시켜줬다.

2.2. 무신 정변


'''무신정변 이후 이의민의 관직'''
'''직위'''
중랑장(中郞將)
정 5품 직위. 무관직 중 4번째로 높다.[7]
장군(將軍)
정 4품 직위. 무관직 중 3번째로 높음.
군인이 되어 나름 장교로 특진했을 시기는 문관과 무관의 갈등이 격해지고 의종이 주색에 빠져 국정이 혼란해져 있었던 때였다.
1170년 8월 마침내 그동안 쌓인 불만이 폭발한 정중부, 이의방 등이 보현원에서 무신정변을 일으키자 이의민 역시 이에 가담해 문신#s-2들을 마구 학살했다. 기록으로는 이의민이 죽인 사람의 숫자가 매우 많았다고 하는데 그의 행적을 감안해보면 그가 문신들에게 큰 원한이 있거나 싸이코패스였다기보다는 무신정변 당시 의종의 총애를 받은 무신이라서 함부로 문신들을 옹호했다가는 자칫하면 본인에게 칼이 날아올 가능성도 있었기에 더 설친 면모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의종의 총애를 받던 무사라 무신 정권에 바로 신용받지는 못했는지 무신정변의 주역 가운데 얼굴마담이었던 정중부를 제외한 나머지 2명인 이의방, 이고의 직급은 정8품 산원의 견룡행수로서 정7품 별장인 이의민의 하급자들이었으나 정변을 통해 곧바로 중랑장으로 진급하였고[8]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옹립한 공으로 대장군으로 진급하는 등 초고속 승진을 하는 동안 이의민은 장군 진급에 만족해야 했다.
이의민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수박을 좋아한 의종에 의해서 낙하산으로 임명된 케이스였기에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아예 이 부분을 따로 언급하면서 이 때문에 이의민은 오랫동안 계급에 비해 인정받지 못했었다고 나온다.
그리고 이의민이 천출이라서 낮은 취급당했다는 근거가 없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천출을 떠나서 낙하산인 것이 문제며 이때 나오는 말이 이의방의 가문도 별거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심하게 잘못되었다.
이고는 가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명백히 전주 이씨 일가의 일원이었던 이의방의 조부 이궁진은 호장이었고 부친 이용부는 응양군 대장군(종3품)을 지냈다. 호장은 향리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이들이 대물림하는 직책이니 전주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토호였음이 명백하고 아버지 대에 와선 나름 군맥도 그럴싸하게 갖췄다. 무과도 없는 고려 시대의 무신에게 이게 좋은 뒷배경이 아니면 대체 뭐가 좋은 뒷배경인가? 보현원 사건 당시 이의방과 이고가 역임하던 견룡 행수는 왕을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위치에 있어 '권세가 자제'들이 갈망하던 요직으로 임금이 총애하면서 특진까지 시켜줬던 이의민은 이 보직을 맡지 못했다.
증조부 최주행과 조부 최정현이 관직을 지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우봉 최씨 최충헌은 외가인 유씨가 진주 토호라서 후원을 많이 받았다면서 생몰년대를 알 수 없는 시조 이한의 실존을 의심한다쳐도 고려 초기부터 전주에 뿌리내린 토호 집안 이의방은 별거 아닌 가문이라고 하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전주 이씨가 조선조 때 위상은 아니지만 소위 호족이라 불리는 지방 세력으로서 한미한 가문은 절대 아니었고 천출 이의민이 내려다볼 입지는 더욱 아니었다.
'''의종 시해 이후 이의민의 관직'''
'''직위'''
대장군(大將軍)
종 3품 직위. 무관직 중 2번째로 높다.[9]
1173년 10월 무신들의 정변에 반발한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의종 복위 음모를 막기 위해 산원 박존위[10]와 함께 의종의 유배지인 경주로 직접 내려갔다. 같이 술상에 앉아 기회를 엿보다가 '''의종의 척추를 접었다 펴서[11]''' 시해한 후 시신가마솥에 넣어 연못에 던져버렸다. 그래도 한때는 자신을 총애하던 군주였는데 뒤통수 제대로 갈긴 셈. 고려사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왕을 끌어내서 곤원사의 북쪽 못가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의민이 '''등뼈를 부러뜨리니 손대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박존위가 '''담요로 싸고 2개의 가마솥을 마주 합하여 그 속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티끌과 모래가 날아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흩어졌다. 절의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렸다."

조선 단종처럼 시신을 목숨걸고 수습했다가 아니라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렸다'가 압권이다.
어쨌든 이 공을 세워 대장군으로 승진한다. 하지만 자신을 후대해 준 의종을 직접 시해했기 때문에 이후로 두고두고 반대파에게서 배은망덕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낙인이 찍혀 버렸다. 무신정권 3대 집권자 경대승이 집권한 후 축하연에서 "선왕을 죽인 자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그대들은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것인가!"라고 일갈한 것이 대표적.
'''조위총의 난 제압을 위해 조성된 임시 군단'''
'''원수(元帥)'''
중서시랑평장사 윤인첨
'''부원수(副元帥)'''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기탁성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
상장군(上將軍) 최충렬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진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경진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
상장군(上將軍) 조언
상장군(上將軍) 이제황
'''지병마사(知兵馬使)'''
섭대장군(攝大將軍) 정균
사재경(司宰卿) 하사청
섭대장군(攝大將軍) 문장필
'''기타 지휘관'''
동로가발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 두경승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 지병마사(知兵馬事) 이의민'''
이어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자 정동대장군 - 지병마사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이 난을 진압하고 1177년 5월에 보향산에 모인 김보당의 잔당을 공격하여 300여 명을 참수하는 등 대승을 거두고 개선하였다. 이 난을 진압하던 도중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래도 군사를 이끌고 돌격하여 적들을 개박살냈고 그 다음 벌어진 전투에서는 직접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었다. 하후돈이 화살에 눈을 맞아서 잃고도 적장의 목을 땄다는 것은 소설이지만 이의민은 진짜로 그걸 했다.
여기까지의 행적을 보면 무신정변 당시 가장 많은 문신들을 죽인 일이나 정치적 리스크가 큰 일임에도 불과하고 의종을 시해하고[12] 조위총의 난과 김보당의 난을 진압하는 등 무신정권의 해결사 노릇을 자처하며 무신정권의 중심에 남아있고자 했던 점으로 볼때 꽤나 출세 지향적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의종의 총애를 받은 간신 영의 같은 인물이 무신정변으로 인해 참수된 것과 달리 이의민의 경우 단순히 '의종의 총애를 받았다'라는 기록만 있지 이를 바탕으로 재물을 탐했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으며 의종의 총애를 받았다라는 이유만으로도 살해된 사람들이 있었던 무신정변 당시의 상황에서 특별히 이의민에게 신변의 위협이 가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루어보면 이때까지의 이의민은 처세술과 자기 관리에서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대승 집권 시 이의민의 관직'''
'''직위'''
형부상서(刑部尙書) - 상장군(上將軍)
형부상서는 형부의 장관이다. 상장군은 정 3품 직위. 무관직 중 최고위.[13]
1181년 형부상서 상장군에 임명되었지만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 중방을 무력화시킨 후 무신정권 3대 집권자로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을 죽이겠다며 사병 조직인 도방을 동원해 노골적으로 자신을 위협하자 4월에 병을 핑계대고 개경보다는 나름대로 기반이 있는 고향경주로 낙향했다.[14][15]

2.3. 집권



'''집권 시기 이의민의 관직'''
'''직위'''
공부상서(工部尙書)
판공부상서사의 약칭. 공부의 장관이다.
좌복야(左僕射)
공부상서에서 승진. 복야 계열의 직위. 중서문하성의 정 2품 고문직이다.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 판병부사(判兵部事)
좌복야에서 승진. 동~평장사는 정 2품 재상직, 판병부사는 국방부 장관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
고려사 두경승 열전에만 기록됨.[16]
'''수직'''
수사공(守司空)
좌복야와 같이 받음. 수직은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힌다.[17]
1183년 7월 경대승이 병을 앓다 30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권력에 공백이 생겼다. 그러자 명종은 경주로 낙향해 있던 이의민을 불러들여 1184년 2월에 공부상서 직에 임명했는데 이는 무신정변이라는 비정상적 쿠데타에 의해 옹립된 정통성이 약한 왕의 정권 보위 차원에서 행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경대승의 책임도 분명히 있는데 경대승은 '무신정변 이전으로 나라를 되돌려 놔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고 문신들은 이에 동조하거나 아니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허나 무신정변 이전으로 나라를 되돌려야 한다면 당연히 무신들에 의해 왕위를 올랐기에 정통성에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18] 명종 입장에서는 경대승과 그 주장에 동조하는 문신들을 마냥 신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의민이 다시 수도로 돌아오게 되자 곧 이의민의 천하가 열리게 되었고 벼슬도 수사공 좌복야에 이르었다. 이후에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1190년 동 중서문하 평장사 판병부사에 임명되며 1194년 공신에 임명된다.
그러나 권세를 누리는 것에서 한발 더 나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야심이 생긴 이의민은 십팔자위왕을 퍼뜨리며 반란을 일으킬 궁리를 하게 된다. 이 때부터 집에다 사당을 차려놓고 경주 일대에서 널리 믿던 두두리라는 나무 귀신을 밤낮으로 섬겼다고 한다.
이의민은 자신이 최고 실권자였지만 천민 출신인 탓인지 항상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무신정권 자체가 피바람으로 얼룩진 정권으로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이 죽는 일종의 서바이벌 자체였다. 그 무신정권 속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며 그 자리에까지 올라왔으니 말이다. 사료에 따르면 김사미 · 효심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의민이 직접 식량무기 지원도 했다고 한다. 김사미·효심의 난은 양인들의 농민 전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자신의 신분에 동병상련을 느낀 게 아닌가 추측된다. 자기 고향인 경주와 같은 구 신라 지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들을 이용해 반역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의민이 살해당한 뒤 그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에 실패한 책임을 이의민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한 조작으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의 이의민 정권은 최충헌처럼 이의민 단독으로 정국을 운영할 정도는 아니었고 조원정[19], 두경승[20]과의 연립 정권의 성향을 띄고 있었다. 중간에 조원정이 두경승과 문극겸에게 횡령 혐의로 탄핵당해 군대를 동원했다가 진압되어 처형당했으나 두경승은 이의민이 죽는 순간까지도 서로 견제하며 정국을 운영하는 사이였다.[21]

2.4. 처참한 말로


하지만 이의민은 사소한 문제로 인해 권력을 송두리째 잃게 되는데, 바로 이의민의 아들들이 저지른 만행 때문. 김사미 효심의 난 토벌대에 파견된 장남 이지순은 반군과 내통하여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는데 이를 들킨 탓에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22] 또한 다른 아들 이지영과 이지광도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온갖 나쁜 짓들은 골라 했다. 이 둘을 가리켜 쌍도자(雙刀子), 즉 쌍칼 같이 흉폭한 아들이란 악명으로 불렀을 정도. 그런데 하필이면 이지영이 최충수비둘기를 다짜고짜 강탈해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고려사》에는 워낙 기록이 간략하여 세부적인 정황을 알기 힘들다. 이지영최충수비둘기를 뺏었다는 기록과 더불어 이지영의 집에 최충수가 가서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말투가 무례해서 이지영이 결박했다는 기록 등이 나온다. 참고로 무슨 비둘기였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당시 무신들이 쓰던 연락용 비둘기였다는 추측도 있다.
아무튼 이것이 발단이 되어 최충수와 그의 형 최충헌이 이의민을 처단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결국 미타산의 별장에 있던 이의민은 최충헌 형제의 습격을 받아서 1196년 4월에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만다. 이때 최충수가 말을 타고 있는 이의민을 급습하여 칼을 휘둘렀으나 빗나갔는데 최충헌이 덤벼들어 그를 칼로 베어 말에서 떨어뜨린 다음에 목을 베었다고 한다. 아들인 지광과 지영은 그 자리에서 잠깐 피했지만, 결국 이들도 붙잡혀 비참히 목숨을 잃었다. 이지순과 이지광이 먼저 죽자 이지영은 모든 걸 포기했는지 마지막 죽기 전에 해주로 달아나서 거기서 잔치를 벌이며 즐기다가 그를 추격해온 장군 한휴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이후 이의민의 일가 삼대가 모두 몰살당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을 단순히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죽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꽤 무리가 있다. 당시 우봉 최씨들 역시 음서로 벼슬을 할 만큼 나름 힘 있는 가문이었는데, 그런 최씨 일가의 재산을 이의민 일가가 함부로 뺏어갔다는 점은, 이의민네 가족이 얼마나 앞뒤 안 가리고 다녔는지 짐작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이의민은 본래 천민이었는데, 천민 출신들이 귀족 출신의 무장들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고 다녔으니 불만이 팽배한 상태였던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최충수가 이지영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도 한 가지 시사점으로 비둘기는 이의민과 그 일족을 제거하게 만드는 구실이었다. 《고려사》에 실린 이의민 열전과 최충헌 열전을 보면 이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에 최충수가 최충헌을 찾아가 이의민을 제거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바로 얼마 뒤에 이의민 일파가 제거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최충헌 형제가 일찍부터 이의민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발적인 사고였을 가능성도 꽤 있긴 하다. 최충수 형제가 애초부터 이의민을 죽일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면, 최충수가 이지영에게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찾아간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기 때문. 음모를 꾸미고 있으면 거사일까지 안 들키기 위해 싸매는 게 정상인데 이렇게 대놓고 이의민 일가에게 원한 살 일을 할 리가 없기에, 정말로 그냥 비둘기 빼앗긴 데에 쳐서 질러버린 걸 수도 있다. 혹은 이렇게 당돌하게 찾아오는 놈이 암살 음모를 꾸밀 리가 없다고 이의민이 역으로 생각하게 하기 위한 최충수의 큰 그림이거나, 아니면 그냥 최충수가 생각이 없어서 거사가 발각될 위험은 생각도 않고 돌려달라고 했거나.
상술한 연락용 비둘기였다는 말에서 나온 이야기로, 하필 반란을 모의하기 위해 비둘기로 통신하던 중이었다는 추측도 있다. 혹시라도 그 비둘기가 반란에 대한 서신을 담고 있는 채로 강탈당한 것이 아닌가 싶어 최충수가 앞뒤 안 가리고 비둘기를 서둘러 돌려받으려 했다는 것.

3. 민폐력


"키가 8척이고 힘이 대단한 장사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걸로 봐서 상당한 강골이었던 모양이나 그 힘을 자기 마음대로 써서 심각한 민폐를 끼쳤다.
특히 그 중에서도 최고의 민폐는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두경승과 힘 자랑을 벌였던 사건. 이의민이 기싸움을 하는 도중 기선 제압을 위해 "어떤 자가 힘자랑을 하길래 내가 이렇게 때려 눕혔지."라고 말한 뒤 '''건물 기둥을 주먹으로 후려쳐 기둥을 울리자''' 두경승은 "그래? 나도 일전에 한 번 저잣거리에서 주먹을 썼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더군."이라고 대답하고 '''벽을 주먹으로 한방에 뚫어버렸는데''' 이것이 다름아닌 당시 국가의 중요 회의 기관이었던 '''중서성'''에서 벌인 짓(…). 그 싸움의 정도가 극심하여, 두 사람이 만나 눈을 마주치면 주위 사람들은 무서워서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당시에 이런 시도 나돌았으니 그냥 말 다했다.

나는 이가와 두가가 무섭더라

위풍이 당당해서 진짜 재상 같거든

황각에 앉은 지 삼사 년에

주먹 바람은 '''만 번'''도 넘게 불었네

- 고려사 반역조 이의민 열전에서

하지만 이런 대외적인 호방한 면모와는 달리, 자기보다도 어린 경대승이 집권하자 '''쫄아서 낙향하여 두문불출'''한 것도 모자라 왕이 친히 불렀는데도 사양하기까지 했던 것을 보면 상당히 입지가 불안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대승의 경우 이의민을 척살하겠다고 천명했으므로 어려웠을 것이고, 왕인 명종이 그를 부른 건은 당시 조원정이 경대승 사후에 득세하던 시기라 주저했을 여지가 크다.

4. 평가


고대부터 귀족정의 성격이 짙었던 한국사에서 '''사실상 최초로 천민 출신으로서 자신의 무력적 소양만을 바탕으로 나라의 실권을 거머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런 사례는 이후 집권자 중 김준밖에 없다.[23]
매우 출세지향적인 인물로 보이는데 엄연히 자신의 하급자들이었던 이의방이고가 어느새 자신의 품계를 뛰어넘어 상급자가 되고 이들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 되었지만 초창기 무신정권의 해결사 노릇을 자처하며 다른 무신들이 꺼리는 의종 시해 같은 일과 2차례에 걸친 반란 진압 같은 일을 기꺼이 맡아서 해내는 모습을 보였다.
무신정변 이전 의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재물을 탐했다던가 전횡을 일삼았다는 기록은 없으므로 영의처럼 막 나가는 인물이 아닌 나름 자기절제를 했던 인물로 보이며 훗날 자신의 집권기에도 두경승문하시중에 오르며 자신을 견제하자 이에 서로 주먹질을 일삼을 지언정(;;;) 이전 무신들처럼 툭하면 군대나 사병을 동원하여 칼부림을 벌이지는 않았다. 이는 이의민이 앞대의 경대승 처럼 정적 제거를 위해 사병을 동원할 정도의 재력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되며 특별히 이 점을 보완하여 경대승처럼 이의민만의 사병을 창설하려고 한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경대승의 도방 창설이 얼마나 초월적이고 불법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의민이 누렸던 13년 간의 장기 집권은 선대 집권자 경대승이 마련해 놓은 기반 덕분에 가능했다. 경대승 이전의 무신 집권자들은 고려 무신들의 합좌 기관인 중방에 매여있어서 권한이 축소되어 있는 부분이 있었고 이런 묘한 상황 덕분에 그나마 권력의 견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경대승의 집권 과정에서 벌어진 쿠데타에서 경대승이 첫 타겟으로 삼은 상대가 바로 중방인데다가 경대승의 집권 전후를 기점으로 하여 무신정변에 참여했던 고위 무장들이 줄줄이 자연사하는 바람에 경대승이 사망하자마자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명종이 왕정복고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무신정변을 통해 옹립된 왕이라서 그런지 무장 세력이 아니면 자신을 옹호할 정치 집단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무신정변 참여자 중 한 명이었던 이의민을 복귀시켰다.
이의민의 폭주를 염려해서인지 명종은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는데 이가 바로 두경승이다. 우직한 군인 스타일인 두경승에게 이의민과 맞먹는 권한을 줘서 이의민을 견제코자 한 것인데 이는 나름 적중하여 이의민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간에 장장 '''13년'''에 달하는 동안 두 사람의 연립정권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 판을 제대로 깨버린 것이 바로 최충헌으로 이의민과 두경승을 자신의 손으로 제거한 뒤에는 명종마저 폐위시킴으로써 본인의 철권 통치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한편 이의민의 아내 최씨는 상당히 포악한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이의민이 총애하던 여종을 때려 목숨을 잃게 했고, 남편과의 불화가 극심해지자 남자 종과 간통까지 저질러 격분한 남편한테 쫓겨난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의민은 최씨를 쫓아낸 이후에 많은 양갓집 규수들을 데려다 결혼하고 싫증나면 내쫓아버리는 민폐 짓도 서슴치 않았다. 그 부모를 닮아 아들들도 인성이 다들 개차반이라, 함부로 아무 여자나 겁탈하고 건드리기 일쑤였고 차남 이지영은 명종의 후궁을 겁탈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거기다 자기 딸 또한 어머니를 닮아서 남편인 이현필이 아예 딴 방에서 지낼 정도였으며, 그 아들 이진옥 또한 외가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렸다.
이 때문에 최충헌에게도 제대로 반면교사가 된 인물이다. 훗날 희종최충헌 암살을 주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한 후 유배 보냈을 뿐 해치지는 않았는데, 이는 이의민이 의종을 살해하면서 얻은 수많은 클레임과[24] 악조건을 지켜 본 결과로 설명된다.

5. 베트남의 황손인가?


한편 정선(旌善) 이씨(李氏) 문중에서는 자신들의 시조가 이양곤(李陽焜)이고 이의민은 그의 5대손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양곤은 베트남 이조의 제5대 황제인 신종(神宗)의 동생이며, 송을 거쳐 고려로 귀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먼저 이양곤의 망명 자체를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는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후 송으로 망명했다가 1123년에 금과의 전쟁을 피해 고려로 재차 망명했다고 하는데, 신종이 1116년 생이므로 이양곤은 아무리 일찍 태어났어도 1117년 생이고 이 말은 일곱 살에 불과한 어린이가 두 번이나 망명을 했다는 말이다.
또한 이의민의 생년이 분명하지 않지만 1160년대부터 활동하고 무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 1117년생의 아들이라면 모를까, 5대손씩이나 된다는 것은 실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25] 부자관계라면 그나마 납득이 되지만, 이의민의 아버지는 고려사의 이의민 열전에 떡 하니 기록되어 있는 것이 문제.
마지막으로 베트남 황손 설은 정선 이씨 문중의 족보에만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인데, 정선 이씨의 첫 족보는 조선의 숙종 재위기인 1677년에 가서야 편찬되었다.
따라서 이의민이 베트남의 황손이라는 설은 다소 허황된 이야기로 보인다. 일단 베트남에서는 화산 이씨와 함께 정선 이씨를 이씨 황실의 후예로 인정했다고는 하지만, 정선 이씨 종친회 측에서는 이러한 설에 대해 불쾌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6.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 무신(드라마)에서는 한 세대 이후 시점이므로 극 중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나레이션이나 대사로만 언급되는데 최충헌의 졸기에 잠깐 언급되며 최우가 박송비와 김준에게 도방을 넘겨줄 의논을 하며 잠시 언급된다. 문제는 이때의 대사인데,
>최우: "옛날 아버님 이전에 이의민이라는 자가 있었어."
>박송비: "알고 있사옵니다. 한때 도방을 운영했던 자가 아니옵니까?"[26]
>최우: "그 자 또한 천출이었다네."
>박송비: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달리 암흑의 시대였사옵니다."
사실 박송비가 나중엔 최우를 배신하지만 당시까지는 최우의 측근 인사였기 때문에, 바로 앞에 최우가 있는 장소에서 그것도 옛날에 최우의 아버지에게 망해버린 집권자의 시대를 최우 시대와 동급으로 말할 수는 없으니 이런 대사 자체는 현실성을 따지면 박송비의 입에서 나올 순 있는 대사였다. 다만 실제로는 이의민 때나 최우 때나 역사적으로 보면 '암흑의 시대' 인 것은 비슷했는데, 극중 묘사는 그렇지 않아 문제.

7. 같이보기


[1]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던 사이인 두경승보다 1년 먼저 죽었다.[2] 옛 동경의 영역이었던 경상남도 의령군이라는 설도 있으나 개성 근교의 어느 산이라 보는 게 개연성이 높다.[3] 출생지 때문에 경주 이씨로 오해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실제로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의민의 본관이 경주로 적혀 있다.참조. 정선 이씨는 베트남 왕자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이의민이 몰락한 후 먼 친척의 자손 하나만 살아남아서 정선에 숨어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수가 매우 적다.[4]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진 황룡사 9층 목탑은 이의민이 성장하던 고려 시대에도 한반도 최대의 목탑이자 경주의 상징으로 남아있었다. 이후 이 시대에서 백 년도 지나지 않은 고려-몽골 전쟁 때 소실된다.[5] 척 단위는 23.7cm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6] 지금의 도지사와 비슷한 직위.[7] 상장군 > 대장군 > 장군 > 중랑장 순이다.[8] 이때 이의민도 중랑장으로 진급하여 이들과 품계가 같아진다.[9] 상장군 > 대장군 > 장군 > 중랑장 > 낭장 > 별장 > 산원 > 위 > 대정 순이다.[10] 이 박존위는 훗날 조위총의 난 때, 반란군 세력권인 운중도에서 "내가 왕을 죽였다"고 자랑하며 신나게 어그로를 끌어대다가 지역 주민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11] 단백질칼슘이 교차한 구조라 단단하면서도 어느 정도 탄력이 있고 인대근육으로 지탱되고 있는 인체 중 중심을 이루는 척추는 상당히 단단하다. 사람 허리를 맨손으로 저러는 건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일텐데(그것도 뼈가 약한 노인이나 아이도 아니고 가 굳어서 단단한 성인 남성 상대로) 한 걸 보면 실제로는 둔기 등의 도구를 사용해서 뼈를 부러뜨렸거나 불세출의 괴력의 소유자였거나 둘 중 하나일 듯 하다. 과도하게 꽉 안아 부러뜨렸다는 이야기도 있다.[12] 이 사건은 평생 이의민의 발목을 붙잡게 되었다.[13] 상장군 > 대장군 > 장군 > 중랑장 > 낭장 > 별장 > 산원 > 위 > 대정 순이다.[14] 이때 이의민이 받은 신변의 위협은 꽤나 컸던 모양으로 경대승이 도방을 동원해 자신을 위협하자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자신의 노비들을 무장시켜 대비하기도 했으나 단순 노비들인 자신의 사병들은 전문적으로 전투 훈련을 받은 경대승의 도방 병력에 상대가 될 수 없었기에 무관의 최고직인 상장군 직위마저 내버리고 낙향한다.[15] 이는 당대의 무신들이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많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예이기도 한데 아무리 전투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나 경대승의 100여 명에 지나지 않는 도방 병력에 대해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는 점에서 이의민이 자체적으로 무장시켜 동원할 수 있었던 개인 사병의 숫자는 채 100명도 안되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16] 1193년 쯤에 받은 듯 한데 특이하게 고려사 명종 세가엔 나오지 않는다. 만약 진짜라면 정중부와 더불어 최고위 문무관직을 다 해본 사람이다.[17] 이의민은 정 2품, 사공은 정 1품.[18] 당장 폐위시켜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19] 중방의 수장인 응양군 상장군이었다.[20] 삼한벽상공신 작위를 받았으며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르렀다.[21] 이는 이의민의 폭주를 염려한 명종의 안전 장치로 풀이된다.[22] 물론 이지순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 이의민의 장남이었으므로 따로 처벌은 받지 않았고 정작 총사령관인 전존걸이 이지순을 처벌할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이지순의 아버지가 당대 무인집권자 이의민이었던 것 때문에 자결하고 말았다.[23] 최항최의얼자로 일천즉천의 신분제에 따라 계급을 분명히 따지면 엄연히 천민이다. 물론 이 둘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집권자로 올랐으니 엄연히 따지면 케이스가 다르긴 하지만.[24] 이의민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가장 먼저 내건 슬로건이 '''"왕을 죽인 역적을 처단한다"'''였다.[25] 무슨 리나 메디나도 아니고 5대조와의 활동시기 차이가 너무 적다.[26] 정작 이의민은 도방을 폐지했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