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형(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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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在衡. 1936년 6월 5일~2011년 4월 10일
대한민국의 전 드라마 PD이다.
1936년에 충북 음성군에서 김학묵 전 보사부 차관의 아들로 태어나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1] 하고 1955년에 CBS 1기로 성우 생활을 시작해 성우 활동을 하면서 방송계에 들어갔다.
이후 1957년에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 유치진, 장한기 교수와 선배인 유현목에게 가르침을 받고 연극인이 되려고 했으나, 1961년에 자신의 학교 대선배이자 당시 KBS 국장을 지낸 윤길구[2] 의 권유로 아버지가 공부 차 영국에서 사 온 TV에 관련된 책을 읽고 공부해 KBS 입사 시험에 합격하여 PD로 전향한 뒤 최초의 TV 사극 <국토만리>의 제작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제작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962년에는 어린이 드라마 <영이의 일기>를 제작했다.
이후 1964년에는 동양방송으로 이직해 편성국 제작 과장이 되어 1980년 폐국 때까지 <별당아씨>, <달동네>, <인목대비>, <민며느리>, <상노>, <서울이여 안녕> 등을 제작했다.
이후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KBS로 이직이 된 뒤에 예능국 부국장, 드라마 제작국 제작위원을 거쳐 국장대우로 일했고, 1996년 정년퇴임 시까지 <이화>, <왕도>, <왕조의 세월>, <대춘향전>, <꽃반지>, <전설의 고향> 일부 에피소드, <한명회> 등을, 퇴직 뒤에는 '''용의 눈물''', 여인천하#s-1 등 월탄 박종화의 걸작들을 드라마화해 연출하였다. 현역 시절 그의 까무잡잡한 얼굴색으로 인해 '깜PD', '깜국장'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 외에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개/폐막식 총연출도 맡았다.
그러나, 1996년 8월부터 1998년 5월까지 <용의 눈물> 촬영 당시 조연급 탤런트들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이유 탓인지 1999년 8월 19일 배임수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고# 결국 KBS 1TV 태조 왕건 연출에서 손을 떼야 했으며[3] 1999년 11월 26일 서울지검으로부터 징역 2년, 추징금 1612만원이 구형되었고, 이후 자신의 프로덕션까지 차려가며 타방송사로 처음 옮겨 연출한 SBS <여인천하>로 재기에 성공했다. 다만, 이 사건 이후로 영원히 KBS에 돌아오지 못 했다.
하지만, 2003년 왕의 여자의 실패 이후 하락세를 걸어 2006년 삼청교육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감독을 맡는다고 화제를 모았으나 결국 제작 취소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리고 2007년 마지막 드라마 왕과 나를 연출했는데 이 드라마도 이병훈 PD가 연출한 이산에게 밀렸으며,[4] 결국 지병인 췌장암으로 인해 중도하차하여 드라마 제작에서 손을 떼고 대신 교수로써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 주력하다 2011년에 위 천공 수술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영화감독 겸 제작자 김창만, 차남은 CF 감독 김두만이 있다.
金在衡. 1936년 6월 5일~2011년 4월 10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드라마 PD이다.
2. 일생
1936년에 충북 음성군에서 김학묵 전 보사부 차관의 아들로 태어나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1] 하고 1955년에 CBS 1기로 성우 생활을 시작해 성우 활동을 하면서 방송계에 들어갔다.
이후 1957년에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 유치진, 장한기 교수와 선배인 유현목에게 가르침을 받고 연극인이 되려고 했으나, 1961년에 자신의 학교 대선배이자 당시 KBS 국장을 지낸 윤길구[2] 의 권유로 아버지가 공부 차 영국에서 사 온 TV에 관련된 책을 읽고 공부해 KBS 입사 시험에 합격하여 PD로 전향한 뒤 최초의 TV 사극 <국토만리>의 제작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제작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962년에는 어린이 드라마 <영이의 일기>를 제작했다.
이후 1964년에는 동양방송으로 이직해 편성국 제작 과장이 되어 1980년 폐국 때까지 <별당아씨>, <달동네>, <인목대비>, <민며느리>, <상노>, <서울이여 안녕> 등을 제작했다.
이후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KBS로 이직이 된 뒤에 예능국 부국장, 드라마 제작국 제작위원을 거쳐 국장대우로 일했고, 1996년 정년퇴임 시까지 <이화>, <왕도>, <왕조의 세월>, <대춘향전>, <꽃반지>, <전설의 고향> 일부 에피소드, <한명회> 등을, 퇴직 뒤에는 '''용의 눈물''', 여인천하#s-1 등 월탄 박종화의 걸작들을 드라마화해 연출하였다. 현역 시절 그의 까무잡잡한 얼굴색으로 인해 '깜PD', '깜국장'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 외에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개/폐막식 총연출도 맡았다.
그러나, 1996년 8월부터 1998년 5월까지 <용의 눈물> 촬영 당시 조연급 탤런트들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이유 탓인지 1999년 8월 19일 배임수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고# 결국 KBS 1TV 태조 왕건 연출에서 손을 떼야 했으며[3] 1999년 11월 26일 서울지검으로부터 징역 2년, 추징금 1612만원이 구형되었고, 이후 자신의 프로덕션까지 차려가며 타방송사로 처음 옮겨 연출한 SBS <여인천하>로 재기에 성공했다. 다만, 이 사건 이후로 영원히 KBS에 돌아오지 못 했다.
하지만, 2003년 왕의 여자의 실패 이후 하락세를 걸어 2006년 삼청교육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감독을 맡는다고 화제를 모았으나 결국 제작 취소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리고 2007년 마지막 드라마 왕과 나를 연출했는데 이 드라마도 이병훈 PD가 연출한 이산에게 밀렸으며,[4] 결국 지병인 췌장암으로 인해 중도하차하여 드라마 제작에서 손을 떼고 대신 교수로써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 주력하다 2011년에 위 천공 수술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영화감독 겸 제작자 김창만, 차남은 CF 감독 김두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