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방송

 




[image]
'''동양방송'''
東洋放送
'''T'''ongyang '''B'''roadcasting '''C'''ompany

}}}
'''보다 빨리, 보다 널리, 보다 풍부하게'''
'''국가'''

'''법인명'''
(주)중앙일보·동양방송 방송부문
'''설립'''
1964년 5월 9일
'''개국'''
'''TV'''
1964년 12월 7일
'''라디오'''
1964년 5월 9일
'''폐국'''
1980년 11월 30일
'''본사 소재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대방로 359 (여의도동)[1]
'''채널'''
'''TV'''
[2]
'''라디오'''
동양FM[3]동양라디오[4][8]
'''모기업'''
삼성그룹
1. 개요
2. 상세
4. 역대 사옥
5. 진정한 후신은?
6. 사가 및 로고송
7. 역대 임원
8. 출신 스타들
9. 역대 공채 사원
10. 방송망
12. 관련 어록
13. 박광희의 열정으로 탄생한 TBCi
1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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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 폐국 때 깃발을 내리는 모습
<color=#fff> 고별방송 당시 TBC 여의도 사옥(현 KBS 별관)
<color=#fff> 언론통폐합 다음날의 모습[9]
이 사진은 KBS로 배치될 통폐합 대상 방송인들이 공개홀에서 대기하는 모습이다.

1. 개요


(주)중앙일보·동양방송 방송부문(구 삼성그룹 계열)의 통칭으로 민영 방송의 선두 주자였다. 약칭은 TBC('''T'''ongyang '''B'''roadcasting '''C'''ompany[10]).
1980년 11월 30일 전두환언론통폐합KBS 2TV로 바뀌어 공영방송으로 사라졌다.[11] 70년대 드라마 왕국이었으며, 당시 삼성의 홍보 창구로서 관련 보도에는 약점을 드러냈다. 그래도 박정희,전두환 독재 때 신민당사 경찰 진입 사건, 김대중 기자회견 단독 생중계, 1980년 5.18 때 광주 상황을 보도하려 하는 등 정론으로서 노력은 한 방송사였다.

2. 상세


1964년 개국부터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에 따른 신문-방송 겸영 금지를 이유로 KBS에 넘어갈 때까지 국내 방송계를 주름잡았던 대형 방송사였다. 텔레비전 방송은 서울과 수도권, 부산 및 일부 동남권이 주 시청권역이었으며, 라디오 방송은 제휴를 맺은 지역 민방들을 통해 호남(중파방송 한정) 및 대구·경북 지역(FM방송 한정)에 일부 방송을 송출했었다.
의외로 전국구가 '''아닌''' 방송국이었다. 이는 당시 TBC의 논조가 당대의 명 앵커 봉두완이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방송을 내보냈을 정도로 방송 3사 중에서 상대적으로 정부 비판적인 논조를 띠었고, 이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게 수시로 밉보였기 때문인 것하고 연관이 있다.[12] 덕택에 전국 단위로 방송을 송출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당국에 의해 번번이 퇴짜만 맞았고, 심지어 부산동양방송으로의 TV M/W 송출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산동양방송에서 송출하는 각종 프로그램(특히 드라마)는 서울 본사에서 저장매체(비디오테이프, 릴테이프 등)로 공수해서 방송했고, 서울보다 1주일 늦게 편성되어야 했다. 뉴스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부산지국은 서울과 완전비 별도의 자체제작이었다. 라디오의 경우 부산에 지국이 있었고 호남권의 경우 서해방송(군산), 전일방송(광주)과 제휴하여 커버했다.
결국 동양방송 시절에는 진정한 의미의 전국방송을 할 수 없었고 언론통폐합 이후가 되어서야 KBS 2TV를 통해 전국 방송이 된다.
그래서 당시 (주)문화방송·경향신문5.16 장학회가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친정부 논조를 강하게 띄어서 정권 차원에서 열심히 밀어주었기 때문에 전국 방송화가 신속하게 진행되었던데 반해서, 동양방송은 방송사가 KBS로 흡수될 때까지 TV 방송 권역을 수도권 및 동남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1970년대 중후반에는 전국구로 방송을 송출하게 된 MBC에게 제2의 TV 방송사 자리를 내주었다. TBC가 삼성그룹이 소유했기 때문에 간과하기 쉬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자본력에 있어서 MBC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13] 마찬가지로 당시 DBS 동아방송에서도 서울 이외 지역에서의 송출 및 TV 방송을 하려고 했지만 당대에는 동아일보가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의 일명 야당지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퇴짜만 맞았다는 후문도 있다. 여담으로 삼성그룹 호암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도 대통령에게 새해 인사를 가지 않은 경제인으로도 유명했는데 연령에 있어서 1917년생인 박 대통령보다 7살 연상인 1910년생이었고 경남 의령의 유교 가문에서 자라와서 유교의 전통관습이 몸이 베여서 자신보다 7살 연하인 대통령 앞에서 새해 인사를 하기에는 그렇기 때문이라는 일설이 있었다. 이 때문에 세간에서는 이러한 사유도 있어서 찍힌 것이 아니냐고도 한다.[14][15]
중앙일보와 같이 삼성그룹 계열사였으며 1974년 합병 시부터 1980년 폐국 시까지 중앙일보와 같은 법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라디오 시보 협찬사가 다 삼성그룹 계열사의 광고였다.

광고(여자): ...니콜라이 모던 발레단이 미 국무성[16]

문화 사절단으로 5월 11일, 13일 국립극장에서 역사적인 내한 공연을 갖습니다. 모던 발레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세기의 안무가 알윈 니콜라이가 이끄는 니콜라이 모던 발레단은 빛과 율동의 환상적인 종합 예술로 벌써부터 국내 무용계에 큰 화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니콜라이 모던 발레단의 관람권은 본사 문화사업부, 시내 각 예매처에서 절찬 예매 중입니다.[17]

시보멘션(여자): 89.1MHz, 즐거움과 안식의 샘, 동양FM 방송입니다. HLKC FM.

시보광고: 이코노 이코노 이코노~ 텔레비전은 이코노![18]

시보멘션: 삼성전자 제공시보, 다섯 시를 알려드립니다.(시보음~♪)

방송멘션: (오프닝 음악) 학생들의 노래 경연 학생 콩쿨...

1976년 방송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FM 라디오 시보. 삼성전자 또는 삼성시계[19]가 주로 시보 스폰서를 맡는 형식이었다.

3. 역사




4. 역대 사옥


'''RSB 라디오서울 사옥'''
'''DTV 동양텔레비전 사옥'''
RSB 라디오서울(TBC 라디오의 전신) 사옥. 태평로1가에 있던 옛 동양화재 건물[20]에서 개국했다.
DTV 동양텔레비전이 있던 신세계 백화점. TBC의 사옥은 개국 초기에는 종각과 신세계백화점 본점 4, 5층에 있었다.
'''부산동양방송 사옥'''
'''서소문 중앙 매스컴 센터'''
1966년 중앙일보와 함께 서소문동으로 이사하게 된다. 앞쪽의 조금 낮은 빌딩. 당시 중앙 매스컴 센터라 불렸다. 현재 중앙일보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다.(일명 J 빌딩)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있는 갈색 빛깔의 중앙일보/JTBC 구 사옥에서 시청역 쪽으로 조금만 오면 볼 수 있다. 사진과 달리 지금은 리모델링이 되어 외관이 많이 다르다. 여의도 사옥 이전 후에도, 일부는 계속 사용한듯하다. 그러나 중앙일보와 동거 생활을 하는 관계로, 점점 늘어나고 대형화되는 프로그램을 감당하기는 어려웠고,[21] 이후 타 스튜디오에 셋방살이를 하다가 지은 것이 바로 아래의 운현궁 스튜디오였다.
'''운현궁 제3스튜디오'''
이 외에도 위 사진의 운현궁 근처에 있었던 스튜디오[22] 등 크게 이 두 곳으로(서소문 방송센터, 운현궁 제3스튜디오) 흩어져 있던 방송시설들을 모아 만든 건물이 아래의 여의도 신사옥이었다.[23] 해당 스튜디오 에서는 드라마와 일부 오락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운현궁 제3스튜디오 인근에 지었던 제5스튜디오(공개홀)에서는 주로 공개방송 및 오락프로그램 녹화가 이루어졌다.#
'''여의도 신사옥 (현 KBS 별관)'''
1980년 7월 여의도에 완공된 신사옥으로 완전히 이전[24]했는데, 5개월이 지나서 언론통폐합으로 사옥까지 통째로 KBS에 넘어가버리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 결과 현재 KBS '''별관'''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인터넷에서 지도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25] KBS 본관, 신관이랑 별관의 거리가 먼 이유 중 하나다. KBS 본관 뒤에 붙어있는 IBC라고 쓰여있는 신관[26]과는 다르다. KBS에서 운영하는 방송국 중에서 제2TV, 제2FM(쿨FM), 제3방송[27]이 언론통폐합 이전 동양방송의 채널이었다. 이 안에 있던 스튜디오와 공개홀은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방송 시설이었지만 KBS에 홀라당 넘어갔다.
동양방송은 매년 TV 방송이 개국한 12월 7일 전후로 '프로그램 대행진'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송했었다. 매년 방송된 내용 중에서 재미있었던 방송 장면을 편집해서 보여주거나 동양방송 소속 안무팀의 공연 및 코미디언들의 콩트를 하는 프로그램인데 신사옥이 완공된 1979년 12월엔 'TBC 여의도 대행진'이라는 방송을 신사옥에서 촬영했었다.[28] 이 외에도 '동양 최대의 방송시설'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방송을 편성해 방송하는 등 앞날이 창창한 방송으로 거듭 성장하는 듯했으나... 망했어요.

5. 진정한 후신은?


1990년 11월 20일 중앙일보는 공보처에 동양방송 폐업 신고 철회 통고문을 발송했다. 동양방송을 다시 돌려달라는 취지로, 직접 소송의 전단계로서 통고문을 발송히는 절차를 밟았다. 당시 통고문 발송 사실은 방송 3사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모종의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실제 소송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995년에 삼성그룹은 삼성물산제일기획의 '캐치원'과 'Q채널'로 방송사업에 재진출했으나 98년에 모두 신규법인 중앙방송에 넘겼다. 그리고 99년 중앙방송조차 중앙일보와 함께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된다.
2009년 미디어법 개정에 의한 신문·방송 겸영 허용 덕에, 중앙미디어네트워크(현:중앙그룹/중앙홀딩스(지주회사))는 2011년 12월 1일 31년 만에 종편방송국 JTBC를 개국했다. 명칭은 TBC가 아니었다. 대구방송 때문이다.
JTBC는 개국기념으로 TBC 시절 인기 프로를 일부 방영했다.[29] 전두환의 측근 이원홍 전 KBS 사장이 TBC의 문을 닫은 전두환의 축하 메시지를 전해주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계속 씹히는 중. 2020년 5월 18일5.18 광주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자 당시 TBC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들을 많지는 않지만 공개하기도 했다. 이렇게 봤을 때 TBC를 소유했던 중앙일보가 JTBC로 종편 방송국을 재개국했기 때문에 TBC의 직계 후신을 JTBC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이고, 실제로 JTBC는 자신들이 TBC의 후신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다.[30]
또 다른 의견으로는 인적, 물적 자원을 승계한 KBS 2TV를 후신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소수 있다. 상법 상 인수 합병의 의미도 그렇고, 무엇보다 KBS는 TBC의 모든 저작권까지 갖고 있다. KBS는 자사 예능 프로그램인 불후의 명곡에서 쇼쇼쇼나 해변가요제 관련 특집 등 TBC 자료를 자유롭게 사용중이다. 2019년 5월 KBS 아카이브 유튜브 계정 '옛날티비'에서 TBC 시절 방송 자료를 시청자에게 기증받아 유튜브에 올렸는데, 영상에는 KBS 워터마크가, 썸네일에는 TBC가 표시됐다. KBS는 공영 방송이자 흡수 합병의 주체다. 그러나 인수 과정이 사실상 강제 탈취형식이었다는 점이 큰 흠이다.
한편 중앙일보와는 상관이 없지만 범 삼성가라는 지점에서 CJ E&M과의 연관성을 따져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CJ는 범 삼성계열이라는 점과 오락 중심의 방송전략 노선이 비슷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동양방송과는 뚜렷한 연관이 없다. 애초에 이맹희 등 CJ 쪽 인물들은 언론쪽 경영에 관여한 적도 없기 때문.[31] 다만 2020년 하반기에 JTBC와 CJ E&M이 합작하여 티빙 OTT(가칭) 서비스 런칭이 예정되어 있는데, 뜬금없는 조합이라는 평이 많지만 알고 보면 범삼성가 기업들의 방송사 간 합작 서비스라는 부분과 대부분의 컨텐츠가 기존 방송사들과는 차별화된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채널이라는 점에서 묘하게 동양방송의 정신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6. 사가 및 로고송



작사는 박두진, 작곡은 장일남이 맡았으며 1975년 9월 22일에 제정되었다. 1980년 언론통폐합 이후 후렴의 '''중앙일보 동양방송'''을 '''중앙일보 중앙일보'''로 변경하여 중앙일보의 사가로 쓰고 있다.
(1절) 겨레를 하나의 마음에 묶어 / 뜨겁게 타오르는 우리의 정성
인류의 고동 가슴에 품고 / 자유언론 대도를 우리는 간다
(2절) 참되고 슬기롭게 오늘을 살며 / 드높이 펼쳐가는 우리의 이상
내일의 번영 다지고 다져 / 사회정의 대로를 우리는 간다
(후렴) 아아 푸른깃발 우리의 기상 / 무궁한 내일의 보람을 안고
나가자 약진하자 / 중앙일보 동양방송
하지만, 시청자들의 기억에 더 남은 것은 사가보다도 로고송이다.

TBC 동양방송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FM도 동양방송 동양방송
뉴스도 교양도 오락도
하늘을 전파로 수놓아
해가 지고 달이 떠도 아~ 아~ 아~
사랑해 TBC 동양방송
이 로고송은 TBC의 마지막 정규방송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의 오프닝 무대 배경음악으로도 쓰였다.

7. 역대 임원


<rowcolor=#fff> '''라디오서울'''
'''동양텔레비전방송'''
'''동양방송'''
(통합)
'''(주)중앙일보·동양방송'''
방송부문
* '''회장'''
이재형 (1963)
구인회 (1963~1964)

* '''사장'''
김규환 (1963~1964)
홍진기 (1964~1966)
* '''회장'''
이재형 (1963)
구인회 (1963~1966)

* '''대표이사 사장'''
김용우 (1963~1964)
이흥배 (1964~1965)
* '''회장'''
홍진기 (1971~1975)

* '''대표이사 사장'''
홍진기 (1966/1969~1971)
김종규 (1966~1967)
김동극 (1967~1969)
김덕보 (1971~1975)

* '''대표이사 전무'''
김덕보 (1969~1971)

* '''대표이사'''
홍진기 (1969)
김한기 (1973~1975)
* '''방송부문 대표이사 사장'''
김덕보 (1975~1980)
홍두표 (1980)

* '''부산TV국 대표이사'''
김한기 (1975~1980)

* '''대표이사 전무'''
이현우 (1978~1979)
이종기 (1980)

8. 출신 스타들


대표적인 TBC 출신 탤런트로는 이순재를 비롯해 강부자[32], 선우용녀[33], 윤여정[34] , 김세윤, 김인문, 오현경, 김순철, 여운계, 사미자, 이낙훈[35], 김성원[36], 박용식, 홍성우[37], 김성환, 현석[38], 김종결, 정동남[39], 연규진,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서승현, 서미경, 노주현, 한진희, 김영철[40], 최란, 허참[41], 정소녀[42], 김민희[43], 강수연[44], 김창숙[45], 원미경, 이미숙, 차화연, 이은하, 이승현[46], 혜은이[47], 최화정, 전광렬[48] 등이 있다.
또한 TBC 성우극회 역시 인수 후 합쳐졌기에 KBS 성우극회 일부 인물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배한성이나 양지운, 유강진, 김종성, 장정진이나 박영남, 나수란, 최수민, 차재완[49][50] 같은 성우분들이 대표적. 또한 배우 김주혁의 부친 김무생도 이곳에서 성우로 처음 방송 활동을 시작했었다.[51]
배일집[52], 배연정[53], 김병조, 고영수[54], 김영하[55], 최용순, 방일수[56], 임희춘, 이주일[57] 등의 코미디언들도 동양방송에서 활동했으며, 고전유모어극장을 위해 영입된 송해[58], 서영춘 또한 적을 둔 적이 있다.[59] 1980년 5월에 진행되었던 'TBC 개그콘테스트' 출신으로는 주병진, 장두석, 김형곤, 이성미, 서세원, 이하원[60] 등이 있다.
또한, 5.16 군사정변 당시 '혁명정부'의 공약을 읽어내려갔던 박종세 아나운서[61][62]와 '가로수를 누비며'[63] 등 굵직굵직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고려진 아나운서[64], 국내에서 처음으로 '앵커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봉두완 기자,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진행자로 명DJ였던 황인용 아나운서와 콤비 박초아 아나운서[65] 그리고 맹관영, 원종배 아나운서 등 60~70년대를 대표하는 아나운서 대부분이 TBC 출신이었다.[66] 훗날 지상파에서 앵커나 시사프로 MC로 이름을 날릴 길종섭[67], 김양일[68], 송도균, 신완수[69], 유연채, 조순용, 차만순[70] 등도 TBC에서 배출되었고, 강용식 전 보도국 부국장, 김홍 전 KBS 부사장과 이남기 PD, 오홍근, 류현순 기자 등도 훗날 언론계와 정관계에서 중진으로 자리매김한다.
스포츠중계의 레전드로 꼽히는 유수호 아나운서, 야구해설위원 하일성, 바둑해설의 레전드 노영하 9단과 김수영 7단, <독도는 우리땅>과 <힘내라 힘>을 작사/작곡한 프로듀서 박문영도 이곳 출신.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리랜서 방송인인 왕종근도 방송인 커리어는 여기에서 시작했고,[71] 재미 방송인 홍우창 아나운서도 미국 LA국에서 활동했다.
또한, 용의 눈물, 여인천하등을 연출했던 김재형 PD[72], MBC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집필했던 신봉승 작가, <사랑의 굴레> 등을 만든 염현섭 PD, 제일영상/제일방송 창업주 심현우 PD, 훗날 SBS 사장을 지낸 윤혁기 전 편성국장도 TBC에서 활약한 방송인이다. 그러나 김재형 PD는 JTBC 개국을 몇 개월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
80년대 MBC 뉴스데스크의 일기예보를 담당했던 김동완 위원도 TBC에서 일기예보를 담당했다가[73] 언론통폐합 이후 MBC에서 일기예보를 담당하게 되었다.[74][75] 또 가수 현미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이봉조 작곡가는 TBC 전속 악단장으로 활약했다.[76]
전 KBS 사장인 홍두표TV CHOSUN 회장은 1964년 12월부터 TBC 창립요원으로 활동해왔던 동양방송의 산증인이다. 단, 홍두표 회장은 처음에 KBS의 창립위원으로 시작했었다. 그리고 같은 창립요원인 김덕보도 본사에서 전무, 사장, 대표이사 등을 거쳐 1980년 9월에 TBC를 떠나 1986년까지 제일기획 회장, 한국광고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위와 같이 서술된 동양방송 출신 방송인들의 결속력이 대단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는 동양방송이 전속가수 및 탤런트, 성우들에게 타 방송국 대비 아낌없는 지원을 해줬다는 것이 꼽힌다. 대표적인 예로 1979년 말 완공된 동양방송 여의도 사옥(현 KBS 별관) 안에는 동양방송 전속 배우들의 대기실이 각각 1인실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개인 대기실이 기본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한 대기실을 여러 명의 배우들이 공유했던 게 일반적이었다고 하니 파격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사미자의 증언에 따르면, '전속배우들을 위한 식당을 따로 배치해 무려 등가구를 배치했고, 물감들인 단무지같은 요리는 일절 제공금지' 했다고 하니, 전속배우들에 대한 지원이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31년만의 귀환 TBC' 다큐멘터리에서 이순재는 동양방송 방송인들이 대부분 전속 멤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감히 누군가라도 흔들지 못했던 구조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조연 배우들에 대한 지원이 많았는데, 이는 당시 경영진및 창업주들이 주연배우는 얼굴만 되면 그만이지만, 드라마를 빛내주는것은 결국 조연배우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또 당시 미스롯데 대회 중계를 맡았기 때문에 미스롯데 입상자는 무조건 TBC 특채로 채용되는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이때문에 70년대 미스롯데 출신 연예인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방송활동및 연예활동을 시작했다.

9. 역대 공채 사원


1965년 이후 중앙일보와 공동으로 뽑아왔다.
  • 기자
    • 1964년 RSB 개국요원: 전응덕, 고일환, 윤명중, 한정준, 문찬홍, 이대식, 박상문, 정종진, 박광춘, 이창열, 조광식, 고석주
    • 1964년 DTV 개국요원: 고일환, 김충기, 남정걸, 윤천영, 이창열, 오일룡, 장준우, 김재길
    • 1964년 RSB 1기: 강용식, 김성호, 김우철, 노계원, 박영서, 석종현, 이돈형, 이희준, 임응식
    • 1965년 2기: 김경용, 김옥조, 정성진
    • 1968년 5기: 고성광, 길종섭, 오홍근, 우석호, 이민희, 장영국
    • 1969년 6기: 장종덕
    • 1970년 7기: 김장년, 노기환, 노신영, 송도균
    • 1972년 9기: 김영수, 백낙천, 엄광석
    • 1973년 10기: 류균, 차만순
    • 1974년 11기: 남성우
    • 1975년 12기: 박원훈, 이동근, 이재희
    • 1976년 13기: 진홍순, 황호형
    • 1977년 14기: 김벽수, 김봉규, 김청원, 김충환, 김홍, 민충기, 류현순, 이정봉, 이종학, 정희보, 조봉환, 조순용, 최춘애
    • 1978년 15기: 김관상, 백낙범, 유연채, 주동원
    • 1979년 16기: 강갑출
  • 지방기자
    • 1974년 11기: 이성백
  • 촬영기자
    • 1976년 13기: 이우승
    • 1977년 14기: 민상기, 박종철, 한경렬
    • 1979년 16기: 홍성철
  • 프로듀서
    • 1964년 DTV 개국요원: 고성원, 김재형, 허규, 황은진
    • 1964년 RSB 1기: 공종원, 김경태, 박세록, 손일석, 윤형대, 이증, 임채욱, 임형두, 장두원, 전영수, 조승환, 최주호
    • 1965년 2기: 안승효, 정종운, 최창한, 황주자
    • 1966년 3기: 김주철, 정형기, 한명희, 황동성
    • 1967년 4기: 김광옥, 유길촌, 유수광, 이해근, 임강호, 채경숙, 표재순
    • 1968년 5기: 김인환, 목철수, 박정서, 박준영, 유규만, 윤효석, 이기재, 이상옥, 정병식, 최정웅, 홍황규, 황인태
    • 1969년 6기: 강석기, 김창동, 옥충언, 이정웅, 장정행, 하강일
    • 1970년 7기: 고학찬, 김원택, 김일영, 손태익, 신광철, 정의성
    • 1971년 8기: 곽순범, 김군남, 김도홍, 김종원, 김홍소, 변동현, 송우천, 심현우, 이수담, 임재걸, 정주환
    • 1972년 9기: 고석기, 김상혁, 김영철, 김한승, 정춘수
    • 1973년 10기: 강석흥, 강영수, 김덕배, 김선옥, 김세웅, 김영룡, 김웅래, 남정헌, 윤재걸, 이동현, 이지언, 임재량, 임정훈, 장윤택, 전덕현
    • 1974년 11기: 김인경, 신완수, 이남기, 이명룡, 이수철
    • 1975년 12기: 김성묵, 김영택, 오흥진, 윤영호, 윤흥식, 이문태, 임진택
    • 1976년 13기: 김기욱, 김재순, 김종건, 김창욱, 김태기, 서현숙, 이근용, 이종수, 장동욱, 정훈, 차성모, 최홍철, 홍순창, 홍지일, 허주[77]
    • 1977년 14기: 강관선, 권오규, 김성수, 김우광, 박문영, 송명구, 염현섭, 운군일, 이상흡, 정동천, 정원조, 한정희, 홍성주
    • 1978년 15기: 김종찬, 박태경, 백용철, 윤인섭, 이성연, 이웅모, 홍순호
    • 1979년 16기: 강남준, 김광호, 김종현, 문영진, 배철호, 이병효
  • 아나운서
    • 1964년 RSB 개국요원: 고려진, 길종휘, 김동건, 민창기, 박노설, 박종세, 원종관, 유욱자, 윤미자, 이성화, 이장우, 조봉남, 주수광, 최계환, 하성해
    • 1964년 RSB 1기: 권귀순, 김동만, 구박, 남정우, 박병학, 서기원, 장세덕, 조문자, 최귀정
    • 1964년 DTV 1기: 김경실, 박혜자, 성대석, 이강자
    • 1965년 2기: 신화철, 이부미자, 이시일
    • 1966년 3기: 이정혜, 황인용
    • 1967년 4기: 고경중, 권윤기, 김민자, 김양일, 김영선, 김영애, 나동숙, 맹관영, 박태웅, 원종순, 유경영, 이보길, 임양근, 임철호
    • 1968년 5기: 고은숙, 김기덕, 김경옥, 김성덕, 김동숙, 박지호, 원창묵, 이주, 조천영, 최석희, 허경회
    • 1969년 6기: 백순명, 백윤숙, 유수호, 유영순, 이혜자, 최운기, 홍아영
    • 1970년 7기: 김동숙, 박계옥, 유선준, 윤정근, 이봉희, 최동철, 최봉현
    • 1972년 8기: 김기남, 김미자, 박성옥, 안정희, 이미숙, 이상경, 이현애, 최인실
    • 1973년 10기: 고수웅, 김기혜, 안계상, 양원자, 이재명, 함영미
    • 1974년 11기: 남선현, 류인순, 이영희, 주성혜, 최간
    • 1975년 12기: 공영주, 백상철, 윤여복, 정미호, 채관숙
    • 1976년 13기: 김창매, 안희진, 허주, 홍우창
    • 1977년 14기: 강미정, 김경태, 박성희, 박초아, 안영희, 이영재, 이영혜, 이정애, 이희옥, 하재숙
    • 1978년 15기: 박성명, 안현정, 원종배, 이경숙, 이미령
    • 1979년 16기: 박광호, 이정옥, 지영서, 최희선, 홍인화
  • 미술
    • 1978년 15기: 김득영, 김문경, 서동화, 양회조
  • 성우
1기 (1964)
, 김세원, 김종성, 우소연, 유강진, 이선영, 장유진
2기 (1966)
김병관, 박영남, 배한성, 안정훈, 이민자, 홍금숙, 황원,
3기 (1967)
마혜진[78], 박일, 박춘일[79], 송도순, 이영래, 정기항[80], 차재완[81], 신충식
4기 (1968)
권영희, 김승경, 김정경, 김정희, 남궁윤, 온영삼, 이경자, 임수아, 정영숙, 주희
5기 (1969)
박광남, 박용란, 송두석, 양지운, 오필탁, 유만준, 이정환, 이종임, 최순자, 탁원제, 탁재인, 최수민
6기 (1971)
김도현, 김동희, 김상복, 노민, 이영주,
7기 (1973)
박찬, 서금옥, 성선녀, 송세윤, 유지영, 이향숙
8기 (1975)
김용채, 장미선, 조동희, 최복금, 한혜숙, 한수경
9기 (1977)
김난일, 김성희, 서학, 성병숙, 이명희, 이연수, 이종구, 송찬, 이진화, 장정진, 한명희, 허경림, 현숙희, 황복희
10기 (1979)
강희선, 김관철[82], 박제길, 유영환, 윤기황, 이나진, 임은정, 홍영란, 황정란

10. 방송망


  • 동양텔레비전 (HLKC-TV, CH 7 / 10kW)
현재 KBS 2TV. 서울 남산 송출.
서울 지역은 물론 인천, 수원, 문산, (파주), 고양,의정부, 오산 등 까지를 가시청권으로 잡았다.

  • 부산동양방송 (HLSX, CH 9 / 5kW)
현재 KBS 부산 2TV. 전국 유일의 동양방송 텔레비전 지역국이었으며, 1960년대 당시에는 동남권에서 KBS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1968년까지는 동남권 유일의 TV채널이라는 타이틀도 달고있었다.[83]당시 부산은 물론이고 경상남도 진해시, 마산시(현. 창원시), 밀양시, 울산시(현.울산광역시), 삼천포(현 사천시)가 양시청 지역에 해당되었고, 경상남도 진주시, 경상북도 경주시청도군 남부지역, 전라남도 여수시까지 가시청 지역에 해당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봉래산(부산), 무룡산(울산), 불모산(창원), 망진산(진주) 등지에 중계소를 여럿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같은 프로그램이라도 서울에 비해 1주일 정도 늦게 방송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KBS나 MBC와 달리 마이크로웨이브나 광통신을 이용한 중계를 하지 않고 서울에서 방송한 녹화 테이프를 가지고 와서 방송했기 때문[84] 때문에 스포츠 경기도 부산경남 지역은 일주일 늦게 보아야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항의도 엄청났고, 부산국도 마이크로웨이브 송출 허가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좌절되었다. 고별 뉴스에서 마이크로웨이브 허가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었을 정도이다. 1970년대 초 아침방송을 AFKN의 마이크로웨이브를 이용해 서울과 동시방송한 적이 있긴 하지만, 몇 개월 만에 아침방송 자체가 중단되는 바람에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뉴스의 경우 일주일 후에 방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자체제작해 지역뉴스를 중심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당시 시정과 도정의 문제점을 따끔히 비판하고 지역민들의 목소리를 뉴스에 많이 반영해 나름대로 인기가 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서울 소식이나 해외 소식은 서울 본국에서 필름을 비행기로 수송해와서 방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아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날에는 화면을 어떻게 메울지 고민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1974년 9월 중앙일보 미국지사가 재미동포들에게도 송출하기 위해 세운 방송국. 매주 일요일마다 2시간씩 미국에서 자체 제작한 프로를 방영한다. 폐국 후 'SBC(Seoul Broadcasting Company)'로 변경했다가 1983년 미주한국방송(KTE)[85]합병.(참조.)
  • 동양라디오 (HLKC, 639kHz / 20kW)
KBS 제3방송으로 바뀌었다가 1981년 9월 7일 폐국하였다.[91]
전남일보 계열로 동양라디오 광주지역국. 현재 KBS광주방송총국 제2라디오. 비아송신소 송출
동양라디오 군산지역국. 언론통폐합 이후 KBS군산방송국이 되었다가 2004년에 KBS전주방송총국에 흡수되어 KBS 전주방송총국 제2라디오로 바뀌었고 예전 사옥은 현재 군산문화원 건물로 사용중이다. 대야송신소 송출
  • 동양FM (HLKC-FM, 89.1MHz / 1kW)
현재 KBS 2FM. 남산 송출
  • 대구 한국FM (BBC-FM, HLCB, 89.7MHz / 1kW)
전국 유일의 동양FM 지역국이자 국내 최초로 지방에서 설립된 FM방송국이었으며, 언론통폐합 이후 KBS 대구 FM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92] 대구지역 다른 FM방송사들이 거의 대부분 다 그렇듯 팔공산에 송신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93]

11. 프로그램




12. 관련 어록


"온 국민에게 보다 잘 살 수 있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주고 그를 위해서 스스로 땀 흘려 일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일깨우며, 이 나라에 모든 개인과 가정과 촌락 그리고 국가 사회 구석구석에 맑게 샘솟는 도의심이 충만하도록 하자"

1964년 개국 당시 슬로건

"우리는 전진합니다. 우리는 창조합니다. 우리는 듣고, 우리는 보고, 우리는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증언할 것입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괴로움을 넘어서는 즐거움을, 역경을 극복하는 맑은 웃음의 원천을 마련하고, 우리는 자유의 화신, 우리는 평화의 역군임을 선언합니다."

1964년 개국방송 당시 멘션 중

"이제 비록 저희들은 TBC 브라운관을 떠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과 항상 영원히 같이 있겠습니다."

1980년 11월 30일 고별 프로그램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중 강부자의 작별인사

"끝으로 동양방송의 호출부호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는 639 KHz… HLKC… (울먹이며) 동양방송입니다…"

1980년 11월 30일 '밤을 잊은 그대에게' 중 황인용 아나운서의 멘션

'''TBC는 永遠하리'''[방송화면]

1980년 11월 30일 마지막 TBC 석간 방송과 그 날 정파 직전 나온 문구. 이 문구는 'TBC 복원추진위원회' 슬로건으로도 사용했다.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며, 마지막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80년 11월 30일 정파 순간에 나온 고별 멘트.


13. 박광희의 열정으로 탄생한 TBCi


TBC동양방송국 박물관
1977년 동양방송에서 권투선수 홍수환의 타이틀전을 파나마로부터 중계하던 당시, 대구 앞산 기슭의 동네와 김천 산간지역에서 동양방송이 잡혀 시청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이 때 대구 앞산 기슭 마을 주민들이 당시 500원씩 거두어 모아서 산꼭대기에 안테나와 부스터 동축 케이블 1km를 가설하고 사설중계소를 몇 달간 운용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이 현상은 스포라딕 E층 반사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94] 또 당시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TBC를 시청했다는 증언도 있다.사실 이 이야기는 한국FM방송에서 TBC 방송을 시험방송 송출을 한 것이이었는데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한국FM방송에 TV중계를 막았다 당시에 다른지방총국에서 TV중계를 몰래하다가 관계자들이 끌려가는 일이 흔했다고 전해진다. 아무래도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한국FM방송 TV중계 시험전파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95]
2000년대 초반, TBC 프로듀서 출신 박광희가 '동양방송 사우회(당시 도메인은 www.tbci.co.kr, 이전에는 www.tbcradio.net)'란 이름의 개인 홈피를 만들어 TBC 방송과 관련 자료를 모아 인터넷 박물관을 꾸몄다.[96] 처음 얼마간은 정상적인 운영이 이루어졌으나 익명성을 악용한 정신이상자의 기행(奇行)으로 인해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2011년 12월 JTBC가 개국되면서 JTBC에 바라는 격려와 희망을 담은 인사말을 남긴 채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한동안 페이스북에도 박광희가 만든 TBCi가 있었으나 모든 역할을 JTBC로 넘긴 걸로 보여진다. 한편 이장춘 전 KBS PD가 운영하는 다음 블로그 춘하추동방송에도 잔존하는 TBC 방송 영상과 TBC 관련 비하인드 스토리가 나오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찾아보는게 좋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와 중앙일보 사이트를 통해 당시 프로그램들이 어떠했고, 편성표는 어떠하였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영화 쎄시봉에서 민자영이 오근태에게 동양방송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말했는데, 당시 고향에 내려가 있었던 오근태는 "우리 동네에 TBC 안 나오는데" 라고 했다. [97]
시청자와 청취자를 부르는 호칭이 '''TBC 가족'''이었는데, 방송국 수뇌부부터 전속 탤런트, 코미디언,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가족 같았던 당시 TBC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호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1980년 11월 30일 마지막 고별방송 타이틀도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였다.
동양 라디오 AM, FM의 시보음이 괘종시계가 올리는 시보음인데 시보음 치곤 좀 무섭다. 이 시보음은 1974년부터 1980년 폐국할 때까지 쓰였다.
또한 이 방송국의 프로그램 말미에는 성우가 직접 제공자막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끝을 낸다.

14. 관련 문서



[1] 현 KBS 별관[2] 현재의 KBS2 채널이다.[3] 현재의 KBS 2FM이다.[4] KBS 제3방송으로 바뀌었다가 1981년 9월 7일 폐국되었다.[5] 1981년 9월 7일~2000년 1월 1일[6] 2000년 1월 1일~2010년 1월 1일[7] KBS 제3라디오는 2000년 1월 1일 개국하였다.[8] 이후 주파수 AM 639kHz는 KBS 제2라디오[5]KBS 제3라디오[6]가 사용하다가[7] 2010년 1월 1일부터 방송 송출을 중단하였고, 현재는 호출부호 HLKC만 KBS 제3라디오가 사용하고 있다.[9] 아이러니하게도 고별방송 다음날 KBS 2TV 출범 기념방송인 "KBS 새 가족"에는 송해, 정소녀, 허참, 이은하, 이순재, 강부자 등 고별방송 출연진들이 대부분 다 나왔다. # 이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개국 특집 축하 쇼임에도 출연자들의 표정이 상당히 어둡다.[10] 로고의 공식 컬러. 출처: #[11] 혹자는 JTBC와 소유주가 같다보니 같은 회사로 착각하는데, 엄밀히 말해 TBC와 JTBC는 공중파와 종편으로 엄연히 다를 뿐더러, 동양방송은 통폐합 당시 허가취소 및 폐업한 게 팩트다. 그래서 1990년 폐업 취소 소송을 당시 정부 공보처에 걸려고 했던 적도 있다. 게다가 TBC는 삼성그룹 소속이었고 JTBC는 아니다. 그렇지만 JTBC를 TBC의 후신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밑의 5번 항목, 진정한 후신은 누구인가 참고바람.[12] 물론 정부 비판적이라 해도 대놓고 비판적인 논조를 취한 거냐면 그건 또 아니다. 검열을 상대적으로 덜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안 받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13] 사실 MBC가 전국방송화가 되는 과정에서 주요 대기업들의 지분투자를 받았던데다가 지방MBC의 경우에는 주요 대기업들이 지분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현대그룹, 쌍용그룹, 럭키그룹이 대표적인데 이중에 현대그룹과 럭키그룹은 4대 재벌그룹에 들 정도로 대 재벌그룹이었다. 거기에 정권이 뒷배에 있었으니 당연히 자금력에 있어서 오히려 MBC가 앞서있던 상황이었다.[14] 이병철 vs 정주영, 홍하상 지음 / 한국경제신문사 刊[15] 하지만 자신보다 21살 연하인 전두환의 신군부 앞에서는 박정희보다 공포의 대상이었던지라 1980년 언론통폐합 당시 언론 포기 각서에 서명하게 되었다.[16] 당시에는 해외 뉴스를 일본을 통해서 받았기 때문에 저렇게 불렀다. 이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현재는 국무부로 쓰고 읽는다.[17] 이 공연에 대해서는 중앙일보 웹페이지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해당 자료가 1976년 것임을 알 수 있다.[18] 삼성전자 최초의 순간수상방식 텔레비전 상표명. 삼성전자 문서에 해당 제품에 대한 내용이 있다.[19] 이름처럼 시계를 제조하는 삼성그룹의 과거 계열사. 1988년 2월부터 1997년 8월까지 MBC 뉴스데스크의 시보 스폰서로 맡았으며, 현재는 SWC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였다.[20] 동양화재는 1963~1967년까지 삼성 계열사였는데, 1967년에 한진그룹으로 팔렸다. 그 뒤 1983년부터 여의도로 이전했다. 현재의 메리츠화재. 해당 부지에는 세종로 파이낸스센터가 들어섰다.[21] 스튜디오도 뉴스 전용 스튜디오 1개와 쇼 오락용 스튜디오 1개가 전부였다고 한다.[22] 정확히는 운현궁 앞. 초창기에는 제3스튜디오라고 불렸다. 언론통폐합 이후 중앙일보 문화센터를 거쳐 SBS가 개국하면서 임대, 1993년 12월까지 스튜디오로 사용했다. 스튜디오 내부시설은 서강대학교 방송학부 스튜디오로 이전되어 관리되고 있다. 1999년에스원이 부지를 매입했으며, 이듬해삼성물산 건설부문이 이 자리를 임대해 래미안갤러리를 세워서 운영하다 본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2019년송파구 문정동으로 통합 이전했다. 현재 해당 자리에는 공영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여담으로 조선시대에는 운현궁에 포함되었던 곳으로, 바로 고종이 태어난 집터이다.[23] 참고로 이 스튜디오 바로 건너편이 손석희 JTBC 사장의 모교인 휘문고등학교 자리였다고 한다. 스튜디오에서 쉬는 시간에 탁구를 치던 배우들이 인원수가 부족하자 옆 학교에 있던 남학생을 데려와서 같이 탁구를 쳤는데, 그 남학생이 바로 '''손석희'''라고 한다. 휘문고등학교 교사는 1978년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전했고 현대그룹이 이 땅을 사들여 1980년대 초 현재의 계동 사옥을 지었다.[24] 본디 1979년 완공을 본 건물이지만, 서소문에서 여의도로 완전히 이전하는 데 시간이 소요되었다. 완전히 이전하기 전까지는 특집 프로그램 및 일부 드라마 또는 예능 프로그램을 여의도 신사옥에서 녹화했다고 한다.[25] http://me2.do/xZq1Ej 참고. 붉은 벽돌의 건물이 지금은 흰색 대리석으로 뒤덮여버렸고, 그나마 그 크기도 KBS 본관보다 훨씬 작다. 참고로 사진에 보이는 화단이나 보도블록 등의 앞길은 전부 차도로 변했다. 또한 그 땅 밑에는 서울 지하철 9호선이 지나고 샛강역이 개업하였다.[26] 1988 서울 올림픽 국제방송센터(IBC)로서 건설됨.[27] 1981년 9월 7일 폐국[28] 해당 방송의 대본을 현재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열람할 수 있다.[29] 개국 분위기에 즈음해 시청자들의 향수를 불러 모으는데는 성공했으나 후속타가 이어지지 못했다.[30] 당장 TBC 마지막 사장이었던 홍두표가 한동안 JTBC 총괄회장 및 고문으로 있었고, JTBC 개국때도 상당수의 TBC 출신 인물들이 JTBC를 TBC의 후신임을 인정했다. JTBC는 홈페이지의 회사연혁에 TBC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고, TBC시절 일부 방송 프로그램의 시청도 가능하다. 요즘도 TBC를 언급할때, "JTBC의 전신인 TBC"라고 언급한다. [31] 당시 이맹희는 제일제당 등 그룹 핵심사업에 주로 관여했다. 왜냐하면 장남인 이맹희가 삼성그룹을 물려받고 막내아들인 이건희가 TBC와 중앙일보 등 언론사업을 물려받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언론사업은 이맹희의 것이 아니라고 해도 무방했다.[32] TBC 탤런트 시절에는 한달동안 방송을 30개나 했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당시 모든 연속극에는 거의 등장하다시피했고, 거기에다가 라디오까지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다 언론통폐합 이후에는 <달동네>와 라디오 진행을 제외하고는 일거리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KBS 사옥에 가면 대놓고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본인이 지금 생각하면 고별방송때 우는 장면이 방송에 나간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한다.[33] 동양방송 1기 무용단 출신이다.[34] 1966년 TBC공채3기생[35] 1962년 KBS에서 데뷔하지만, 동양방송 개국 당시 전속배우로 활약한다.[36] 1957년 CBS 성우로 데뷔, 이후 동양방송 개국 당시 전속배우로 활약하게 된다.[37]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 1호라는 타이틀이 있는 배우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38] 1970년 동양방송 성우 6기 출신. 이후 1972년 MBC에서 탤런트 공채에 합격해 배우로 데뷔한다.[39] 1972년 무술사범 특채[40]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궁예', '김두한'을 연기한 배우 맞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41] 본디 MBC에서 라디오 DJ로 데뷔했지만, 쇼쇼쇼를 비롯한 수많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42] 결혼전에 쇼쇼쇼의 진행자로 활동했고, 결혼후에도 언론통폐합전까지 쇼쇼쇼와 가요베스트10의 진행을 맡았다고 한다. 폐국 마지막 방송의 진행자도 정소녀였다.[43] 1980년에 방영된 '달동네'에 그 유명한 '똑순이'로 나온다.[44] 1971년 '똘똘이의 모험'이라는 제목의 어린이드라마에 출연한 뒤 통폐합 때까지 아역배우로써 활동한다.[45] 중간에 KBS로 옮기려고 했으나 불발된 적이 있었다. KBS로 가려고 했던 이유는 고향인 완도에서는 TBC를 볼 수 없지만 KBS는 시청이 가능했기 때문.[46] 1968년에 아역 탤런트로 특채되어 하이틴 배우 시절 <결혼행진곡>, <도토리 7남매>, <언약>, <소년 홍길동> 등지에 출연했다.[47] 2011년 다큐멘터리 '31년만의 귀환 TBC' 인터뷰에선 뮤지컬 활동 사정상 수녀복을 입은 상태로 인터뷰에 응했다.[48] 최화정과 전광렬이 TBC 공채 연기자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49] 차재완과 최수민은 배우 차태현의 부모님이다.[50] 차재완은 언론통폐합 이후 KBS에서 음향감독으로 전업한다.[51] 다만 연기활동은 주로 MBC에서 했다.[52] 1971년 MBC에서 배연정과 함께 공채 코미디언으로 데뷔하지만, 동양방송으로 소속을 바꾸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53] 원래 MBC 출신이지만 배일집과 콤비 연기를 펼치며 동양방송에서 인기를 얻게된다.[54] 라디오 DJ로도 유명했다.[55] 1969년 MBC웃으면 복이와요로 데뷔했으나, 1976년 고전유모어극장이 생긴 이후 동양방송에 스카우트되어 적을 두게 된다.[56]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방수현의 아버지.[57] 1979년 MBC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브라운관에 데뷔했으나, 출연 단 1회만에 시청자의 항의 로 쫒겨난 뒤, 동양방송의 토요일이다 전원출발(당시 일본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던 8시라고, 전원집합!과 포맷이 유사한 프로그램이었다. 원래 여러개로 코미디프로그램이 나누어져있었는데, 당시 정부의 교양강화 및 오락프로제한 정책으로 인해 하나로 통합되었다.)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자세한 사항은 이주일 항목 참조.[58] 가로수를 누비며 DJ와 교양프로그램 <이래서야 되겠읍니까?> 라는 프로그램이라고 전해진다) 진행자로도 활동했다. [59] 동양방송 소속 코미디언들도 정부의 방침에 따라 KBS로 활동무대를 옮기지만, 서영춘, 배일집, 배연정, 김병조, 김영하 등 일부 코미디언은 언론통폐합 이후 MBC로 활동무대를 옮긴다.[60] MBC에서 활동했던 개그맨. 유행어로는 '이 하하하하원입니다.'라는 자기소개가 있다. 2016년 11월 25일 간암으로 별세.[61] 본디 1956년 KBS에 입사했으나, 1962년 DBS로 이적 후 1964년 동양방송 개국과 함께 이적해 언론통폐합때 다시 KBS로 소속을 옮겨 방송주간으로 활동하게 된다. 1983년 은퇴한 뒤 해태그룹으로 이직, 해태 타이거즈 단장과 해태그룹 계열 광고기획사 '코래드' 사장, 아시아컴 회장을 역임한다. 해태 퇴사 이후 간간히 방송에 출연하기도 하였다.[62] 땡전뉴스 문서 첫 이미지에 나온 그 아나운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분은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의 사회를 보았다.[63] 사실 이 프로그램은 송해가 진행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다만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도중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충격을 받아 진행자에서 하차하게 된다.[64] 그 당시 생경했던 미인대회(미스탐라) 출신 아나운서로, 70년대 인기 아나운서였다. 언론통폐합 이후 KBS에서 1987년까지 아나운서로 활동하다가 1995년부터 2002년까지 CJ홈쇼핑의 쇼호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한 이력이 있다.[65] 언론통폐합 이후 KBS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이어갔으며, KBS1 아침간판프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진행하기도 했다.[66] 언론통폐합 이후 TBC 재직중이던 사원 상당수가 KBS로 적을 옮겨 활동하였다. 그래서 KBS 출신으로 알려진 인물들이 많다.[67] TBC 석간을 진행하였다. 나중엔 KBS 뉴스 9도 진행하였으나, 2005년 퇴사.[68] 언론통폐합 후 추적60분의 진행자로 유명해진다. 훗날 1000회 특집 방송 당시 '故 김양일'이라고 오타가 나서 다음날 제작진들이 김양일 본인을 찾아가 사과했다고... 이후 2013년 3월 12일 작고.[69] 언론통폐합 후 <오늘>의 진행자를 맡았다.#[70] 언론통폐합 후 KBS로 넘어가 특파원 등으로 주로 활동한 뒤, 2000년에 KBS1 <일요진단>을 진행하다가 EBS 부사장까지 올랐다.[71] 정확히 말하면 TBC 부산방송국 소속이었다. 언론통폐합으로 KBS 부산방송총국 아나운서로 옮겼다가 1994년 본사로 올라가게 된다.[72] 1955년도에 CBS 성우 1기로 입사하여 성우로 활동하다가 1961년 KBS에 입사했으나, 동양방송 개국 이후 이직하여 '이조여인 500년사'등의 사극을 연출했다.[73] 당시에는 TBC석간 뒤에 방송되는 5분짜리 '일기해설'이라는 독립프로그램을 통해 일기예보를 했다.[74] 80년대 이후에는 방송자막과 CG 등을 통해 일기도를 보여주었지만 70년대엔 그러한 연출 기술이 없어서 직접 지도에 매직으로 일기도를 쓱쓱 그렸다(...).[75] 당시에는 관상대 직원자격이었다. 타 방송사에서 김동완위원을 영입하려 애를 썼지만, 이병철 회장이 백지수표에 종신이사직까지 제안하면서 끝까지 붙잡았다고 한다. 이 인기에 힘입어 청와대에 일주일에 한번씩 가서 날씨 브리핑을 하기도 한다. [76] 언론통폐합 이후에는 KBS에서 악단장 활동을 계속하다가 1987년에 타계했다.[77] 이후 아나운서로 전향해 배구 중계로 이름을 알린다.[78] 본명은 황정아다. KBS 탤런트로 이직했다.[79] 후배폭행으로 제명되었던 아마추어 성우 박조호의 아버지다. 또한 동기인 박일의 매형이기도 한다. [80] 1939년생으로 TBC 성우들중 최연장자였다. [81] 성우 최수민의 남편이자, 배우 차태현의 아버지.[82] 언론통폐합에 반대하여 1980년 11월 30일 탈퇴하고 1983년 MBC로 이적하였다.[83] 물론 비공식적으로 일본의 TV채널이 나오기는 했다.[84] 현재는 극동방송이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쪽은 경영진이 마이크로웨이브망 가설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서 그렇다고(...).[85] KBS의 미주 현지법인으로, 2004년부터 사명을 'KBS LA'로 바꾸었다가 2008년부터 KBS 아메리카에 합병됨.[86] 1981년 9월 7일~2000년 1월 1일[87] 2000년 1월 1일~2010년 1월 1일[88] KBS 제3라디오는 2000년 1월 1일 개국하였다.[89] 호출부호 HLKC-SFM[90] KBS 제3라디오는 2010년 1월 1일 주파수를 AM 1134kHz로 변경하였고, 4월 20일 FM 104.9MHz[89]를 개국하였다.[91] 이후 주파수 AM 639kHz는 KBS 제2라디오[86]KBS 제3라디오[87]가 사용하다가[88] 2010년 1월 1일부터 방송 송출을 중단하였고,[90]2000년 1월 1일부터는 호출부호 HLKC만 KBS 제3라디오가 사용하고 있다.[92] 현재는 KBS 1FM 중계 및 로컬방송만 하고 있지만, 2001년 2FM에서 광고방송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2FM도 중계하기도 했었다.[93] 참고로 대구지역 FM방송들 중 팔공산이 아닌곳에 송신소가 세워진 것은 대구극동방송이 최초다.[방송화면] [94] 비슷한 예로 1991년 일본 대마도에서 KBS청주방송총국화면조정 영상을 잡은 사례가 있다. [95] 다만 안테나를 설치해야 깨끗하게 나와서 관심있는 사람들이나 부자들이나 시청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80년대들어서는 전파가 약해졌는지 자주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96] 부운영자이자 웹디자이너였던 아들 박찬웅이 제작, 박광희는 운영에만 전념 했다.[97] 상술한 바와 같이 진주까지 가시청지역이었고 마산은 양시청지역이었다. 게다가 통영은 부산에서 바다로 뻥 뚫려있기 때문에 거제도만 제외하면 지장물이 사실상 없다. 걍남에서 일본 방송이, 거꾸로 일본 큐슈에서 한국 방송이 가시청거리 이상이더라도 수신이 잘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디지털 전환 이전에는 기타큐슈나 후쿠오카에서 부산 황령산의 KBS1 고출력전파가 그대로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