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묵

 

金學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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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4월 24일 ~ 2001년 5월 15일
1. 개요
2. 생애
3. 일화
4. 가족관계


1. 개요


우리나라에 사회복지란 개념을 첫 도입한 학자이자 공무원. 한국뇌성마비복지회, 중앙장애인복지위원회, 장애인복지단체협의회 등 장애인단체 일을 맡아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SBS의 그것의 알고싶다에 의하면 일제시대때부터 운영되었던 선감학원의 설립과 운영에 관여한 것이 아니냐고 보도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때부터 공무원을 한것은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생애


1916년 4월 24일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김상범(金相範)[1]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휘문고보를 다니고, 1938년 3월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제강점기 경기도 사회과장으로 공직에 들어갔다.
해방 이후 유엔장학생으로 선발돼 영국 런던문화원과 런던 대학교에서 영국 사회보장 제도를 연구했다. 유학 중 경기도 근무시 그를 눈여겨 본 이승만이 직접 전화를 걸어 "이 사람아, 빨리 나와 배운 것 좀 써먹게" 하고 독촉하자 51년 1.4후퇴 때 귀국했다.
1954년 7월 고등고시에 합격하였다. 그 후 미국에 다시 유학하여 1957년 5월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사회사업 석사).
1958년 1월 서울특별시 비서관이 되었고, 1959년 6월 지역사회개발중앙위원회 간사장이 되었다.
1960년 4.19 직후 보성전문학교 선배인 허정의 내각에서 보건사회부 차관을 역임했다. 이때 세계 각국에서 구호물자를 조달해 배분하는 중책을 맡았다.
1960년 10월에는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때부터 무려 12년 동안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으로 일하였고, 서울 시내 여러 대학교에서 사회사업행정을 강의하였다.
1961년 5월에는 브라질에서 열린 국제지역사회개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다가 5.16 군사정변을 맞이했지만, 박정희 정권 때도 계속해서 대한적십자사에서 일하였다.
1965년에는 '사회사업개론'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이 분야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나온 책이었다.
1969년 셋째 아들 재덕이 신경이 썩어들어가는 베세토씨병을 앓기 시작해 연세대 재학 중 시각장애인이 됐다. 재덕은 8년간 투병 끝에 1977년 스물여덟살의 나이로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2]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때는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으로 회담을 진두지휘했다. 1972년 10월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여생을 뇌성마비 장애인들에게 바쳤다.
1973년 10월에는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회장을 지냈고, 1974년 9월에는 국제사회복지협의회(ICSW) 집행위원을 역임했고, 1978년 3월부터 2001년 5월까지 20년이 넘는 동안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회장을 맡았다. 그 외에도 1973~1981년까지 삼부토건에 몸담으며 부사장, 의료보험조합 대표 등을 지냈다.
1981년에는 의료보험조합연합회 회장이 되었고, 1990년 8월에는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를 맡았으며, 1991년 9월부터 중앙장애인복지위원회위원장, 1992년 3월부터 장애인복지단체협의회장을 맡아 2001년까지 계속 연임하였다.
1986년 9월, 제1회 국제사회복지공로상을 받았는데, 이 상은 세계 각국의 추천을 받아 ICSW가 5년에 한번 씩 민간 사회복지 세계적 유공자에 주는 상이다.
2020년 8월 15일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분으로 부터 일제강점기 관료출신으로써 과거 선감학원 관련 추진사업에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또한 방관자 중 한사람이 아니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의 이력에 이와 관련된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한국복지사업의 1세대로써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건 사실이지만 이에 반하는 어두운 측면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3. 일화


  • 평생 나비 넥타이를 즐겨 착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김학묵 하면 나비 넥타이를 먼저 떠올릴 정도였다.
  • SBS의 그것의 알고싶다에 의하면 일제강점기때부터 선감학원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도했다.
  • 젊어서부터 계속 고위공직을 역임하였지만, 평생 전셋집에서 살았을 정도로 청렴했다고 한다.
  • 경성방송국에 아나운서로 몸을 담았으나, 금방 그만두었다. 음악프로그램 진행 중 창(唱)을 부르러 나온 기생을 소개하면서 여사라는 호칭을 썼다는 이유로 논란이 일자 "사람 차별하는 곳에서는 일할 수 없다"며 사표를 쓴 것.
  • '용의 눈물', '여인천하' 등을 감독한 김재형 PD가 그의 장남이었다. 워낙 일찍 결혼을 해서 아들과 약 스무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이 딴따라 계통으로 나갔다 해서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거의 왕래도 없었고 전화 한 통 없이 지냈다. 그런데 어느날 김재형 PD는 느닷없이 아버지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런 무식한 놈, 어떻게 상복을 입은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의 시신이 놓인 병풍 쪽으로 엉덩이를 향하고 절을 올리느냐는 것이었다. PD를 할려면 제대로 공부를 하고 하라는 호통이었다는 것. 김재형 PD는 아버지가 자신의 드라마를 시청해주셨을 뿐 아니라 딴따라가 되었다고 상대도 해주지 않던 자신에게 전화까지 해 주었다고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 그 이야기를 한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들려주었다는 후문.

4. 가족관계


동생 주묵(周默)은 조선일보 정치부장, 경향신문 상무를 지냈다. 둘째 아들 재휘(在徽)는 춘천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넷째 아들 재연(在衍)도 인기 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 '체험 삶의 현장' 등을 연출한 PD다.
[1] 일제시대 민중계몽단체 '자강회'의 발기인이었으며, 위암 장지연(張志淵)선생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과 편집국장을 지낸 인물이다.[2] 이 사연은 KBS에서 '소망' 이란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