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나(드라마)

 


''' SBS 대하사극 '''
'''왕과 나''' (2007~2008)
''The King and I''
'''''' 시청 등급 ''' '''
'''15세 이상 시청가'''
'''방송 시간'''
월요일, 화요일 밤 9:55 ~ 11:05
'''방송 기간'''
2007년 8월 27일 ~ 2008년 4월 1일
'''방송 횟수'''
63부작[1]
'''채널'''

'''제작사'''
올리브나인, SBS 프로덕션
'''연출'''
김재형·손재성 → 이종수·손재성[2]
'''극본'''
유동윤
'''출연'''
오만석, 구혜선, 고주원, 전광렬, 전인화
'''링크'''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2. 특징
3. 등장인물
4. 기타


1. 개요


2007년 8월 27일부터 2008년 4월 1일까지 SBS에서 방영되었던 사극으로 용의 눈물로 유명했던 김재형이 연출한 마지막 드라마로 여인천하에서 김재형 PD와 호흡을 맞추었던 유동윤 작가가 각본을 맡았다. 일단 그나마 왕의 여자보다는 성공한 편이다.[3] 당초 내 남자의 여자 후속으로 기획되었으나 캐스팅 문제로 어려움을 겪어오자 SBS는 미니시리즈 강남엄마 따라잡기를 대체 편성했고 이 때문에 <왕과 나>는 <강남엄마 따라잡기> 후속으로 바뀌었다.
세종대왕부터 연산군까지 7명의 왕을 모신 환관 김처선의 일대기를 그렸지만, 이 드라마의 김처선성종 때부터 내시가 된 것으로 나오니 이미 고증은 날아간 셈. 게다가 극 중 김처선폐비 윤씨와 서로 연모하는 사이지만 성종때문에 플라토닉 러브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설정되었는데, 드라마에서와 달리 실제 김처선성종 치세 때 이미 꽤 나이를 먹은 할아버지였다.

2. 특징


방영 초기엔 내시를 소재로 한 사극 드라마라는 사실에 호기심을 갖고 보기 시작한 사람이 많았으나 이때부터 선정성 논란이 빚어지는 등의 구설수가 있었다. 초반에 내시 역을 맡은 어린애들을 모아서 하체를 지나치게 노출시켜 물의를 일으켰다. 아이들 엉덩이가 그대로 나왔고, 심지어 의녀 역을 맡은 성인 여성 배우가 거세가 제대로 되었나 검사한다고 바지를 벗은 남자 아이의 중요부위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장면까지 나왔다. 실제로는 종이로 가리고 촬영했다고는 하나, 이는 아역 배우나 시청자들에게 심히 불쾌감을 주는 심각한 장면임에도 노출씬을 강했는데, 대상이 여자가 아닌 남자고 어른이 아닌 아이라는 이유로 별문제 없을거라고 제작진이 강행했으니 한국 방송계 병폐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방영된 이산에서도 이랬으니 방송사가 한꺼번에 삽질을 한 셈이다. 또 성교육을 시킨답시고 궁녀들에게 소녀경에 나오는 체위를 시키고 실제 왕에게 보여주게 하는 장면 등이 있었다(...).
아역들이 제 역할을 해주던 초기 시청률은 30%를 육박할 정도로 좋았으나, 성인 연기자들로 바뀌고 난 이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중반의 어우동 에피소드는 뜬금없고 질질 끄는 데다 설득력이 없어서 시청률 하락의 주범이었다. 게다가 작가와 연출진들의 히트작인 여인천하와 별다를게 없는 식상한 궁중암투로 줄거리가 전개되어 내시를 재조명해보겠다는 본래 취지와 거리가 멀어지면서 극 중 이야기가 산으로 가기도 했다. 같은 시간대에 방영된 사극인 MBC의 이산과 비교하면 초반에는 <왕과 나>가 시청률이 더 높았지만 중반부터 역전당해 시청률이 10%대로 떨어졌으나 후반에 연산군 역의 정태우가 출연한뒤 16~18%대로 시청률이 조금이나마 올랐다. [4] 연산군이 간지폭풍의 강력한 왕권주의자로 묘사되는 건 나름 실록을 참조한 티는 보이지만 가면 갈수록 수습 안 되고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면모가 많이 부각되다 보니 연산군 미화 논란이 일어났다. 연산군이 폭정을 휘두르는 장면에선 확실히 잔인한 폭군으로 묘사했기 때문에 무작정 옹호한 것은 아니지만.
김재형 감독으로서는 분했을 것이다. 이병훈이 연출한 대장금에게 참패하던 왕의 여자 이후로 한동안 침체기에 있다가 마지막으로 연출한 이 드라마까지 이병훈이 연출한 이산에게 밀린 것이다. 결국 2008년 1월 췌장염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공식적으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2011년에 그는 사망하여 이 드라마가 유작이 되었다.
보통 악독하고 투기가 심한 여인으로 그려지던 폐비 윤씨를 여기서는 구혜선이 맡아서 청순하고 처연한 여인으로 그려내었다.[5] 또한 다른 사극에서 대립과 증오 일변도로 그렸던 연산군과 정현왕후/인수대비의 관계도 이 드라마에서는 상당히 입체적으로 그린다. 인수대비는 윤씨에게 강한 반감을 가지긴 해도 연산군에게는 기본적인 애정을 갖고, 죽기 직전에도 '어떤 일이 있어도 진성대군을 옹립하자는 말을 듣지 말고 주상을 지켜줘야 한다'라고 정현왕후에게 당부한다. 정현왕후 역시 친아들인 진성대군과 차별하지 않고 연산군을 따뜻하게 대한다. 연산군도 두 대비에게 무작정 반감을 가진다기보다는 조금만 더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달라는 애정 갈구 성향을 보인다.[6]
드라마 제작 당시, 수원시 장안문 동쪽에 부지를 마련하여 촬영하였다.#네이버 항공뷰 본래는 주택가가 있던 부지였지만, 드라마 세트장 마련 직전에 모두 밀어버렸다. 드라마 촬영이 끝난 이후인 2009년에 철거된 후 공터로 방치되어 오다가 주차장 부지로 활용하고 있는 상태. 수원시에 세워진 세트장 이외에 화성행궁경희궁 등에서 촬영이 많이 진행되었고 드라마 초중반부에는 촬영허가를 얻기 엄청 힘들다는 경복궁창덕궁에서도 촬영이 진행되었다! 같은 시간대 경쟁작이었던 이산용인시 드라미아 세트장에서만 촬영이 진행된 것과 많이 대조되는 부분. 그리고 일반 민가같은 경우 한국민속촌에서 주로 촬영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촬영방식은 주로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에 많이 이루어진 사극 촬영방식이었다. 2010년대인 지금은 궁궐같은 경우 문화재보호때문에 서울 고궁에서 촬영되는 경우가 거의 드물고 일반 민가도 경북 문경새재 세트장에서 주로 진행되는 편이다.
해당 작품의 공동 외주제작사인 SBS 프로덕션은 <왕과 나>의 실패 이후 제작부분 쪽에서 극심한 적자를 겪어오다가 SBS Plus(당시 SBS 드라마 플러스)로 나중에 합병됐다. (유통 및 기타사업 부문은 SBSi와 합병하여 SBS콘텐츠허브가 되었다)

3. 등장인물


왕과 나의 동시간대에는 이병훈 감독의 이산이 방영되었고, 과거 이병훈 감독과 같이 작품했던 배우들이 왕과 나에 출연해 이병훈 감독과 대립하게 된다. 전광렬, 양미경, 조정은(어린 장금), 여운계 등이 있다. 그리고 이산에서는 과거 여인천하에서 어린 세자역으로 나온 권오민은 이산에 출연해 김재형 감독과 대립하게 된다.
주인공을 맡은 오만석은 그럭저럭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전반부에서는 내시부 수장 역을 맡은 전광렬의 카리스마 연기에, 후반부에서는 정태우의 후덜덜한 광기 연기에 묻힌 감이 있다. 사실 오만석 사극 연기는 신돈에서 빛을 더 발했다는 평.
본래 자을산군의 사가시절 성종과 정혼 상태였고 성종 즉위 후 왕비 간택에도 참여하였으나 왕실과 조정을 피비린내로 물들게 할 것이란 예언때문에 낙마했다가 공혜왕후가 후사를 보지 못하자 간택후궁으로 입궁하게 된다. 아역 시절 김처선, 자을산군과 삼각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나중에 원자를 생산하면서 공혜왕후 승하 이후 중전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끊임없이 정귀인엄귀인, 인수대비의 모함을 받아 폐위되어 사사당한다. 여담으로 박보영이 이 배역을 연기할 아역 시절에는 시청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나, 구혜선이 연기하면서부터는 발연기 논란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성종 역의 고주원의 발연기가 워낙 심각했던 탓에 다소 묻힌 감이 있다. 농담이 아니라 성종역을 맡은 배우가 내정되었던데로 박상민이나 안재모 같은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였다면 발연기로 탈탈 털렸을 것이다.
당초 박상민이 이 배역에 낙점되었으나 개인사정으로 고사했다. 그리고 정한수 역으로 나온 안재모에게도 이 배역 제의가 갔었으나 안재모 본인이 악역에 더 매력을 느껴서 거절을 하고 정한수 역을 맡은 거라고 한다.[7] 이 드라마에 나온 배역들 중 가장 발연기가 심한 배역으로[8], 오죽하면 왕인 성종보다 내시인 조치겸의 카리스마가 더 강하다고 느낀 시청자가 많았을 정도. 조치겸이 버럭 하면 내시부 땅이라도 우르릉 울리는 느낌이나, 성종의 분노에는 도승지의 수염한올조차 까딱하지 않는 느낌. 역시 사극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또박또박 대사를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이기는 하나, 워낙 착해보이는 외모라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극 중 폐비 윤씨에게 가장 우호적이었던 후궁이며, 그 때문에 폐비 윤씨를 쫓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한 엄귀인과 정귀인이 중전 자리에 욕심을 내고 있을 때 본인은 사양까지 할 정도로 폐비 윤씨가 폐위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왕실의 큰어른인 인수대비정희왕후가 이런 정현왕후의 겸손한 태도를 높이 평가하여 최종적으로 중전으로 낙점된다. 사실 정현왕후는 대왕대비인 정희왕후의 가까운 친척이기도 하여 집안만 따지자면 성종의 후궁들 중 가장 명문가였기 때문에 정현왕후가 다음 중전이 되는 건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중전이 된 이후로도 폐비 윤씨 소생인 연산군을 지극정성으로 키워주기까지 한다. 다만, 오히려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귀하게 키워주다보니 연산군 본인은 정현왕후 더러 자신을 왜 친자식처럼 잘못하면 꾸짖거나 회초리를 때리지 않았냐면서 원망했다.
양반 집안 출신 내시로,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주인공과 대립하는 라이벌이자 주요 악역. 본래 양반이었지만 집안이 크게 몰락해버리자 내시라도 되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양반 출신이였던 만큼 이에 대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때문에 김처선을 비롯한 다른 내시 동료들을 시종일관 깔보는 태도로 대하기도 했다. 김처선의 반대 포지션에 있다보니 사사건건 인수대비한명회를 빽으로 두고 설영과 함께 김처선과 폐비 윤씨모자를 모함해서 결국 폐비 윤씨가 사사까지 당하는데 일조한다. 출세욕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보니 여러모로 악행을 많이 저지르지만[9] 그래도 나름 내시부 안에서는 유능하다고 평가받았는지라 감찰부 수장까지 되기도 한다. 극 중 내내 원수지간인 조치겸도 이러한 정한수의 능력은 인정할 정도. 원래 다음 상선 자리가 보장되어있는 조치겸의 양자로 낙점되었으나, 싹수가 노란 인물이란 것을 간파한 조치겸이 정한수 대신 김처선을 자신의 양자로 맞아들여 후임 상선으로 키워준다. 그래서 극 중 내내 조치겸과 가장 대립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치겸과 가장 닮은 점이 많기도 하는 인물이다. 조치겸의 양자가 비록 되지는 못했지만 조치겸의 양부가 되는 노내시의 마음에 들어 노내시의 양자가 되어 졸지에 조치겸과 양형제(...) 사이가 되버리기도 한다. 마지막까지 원자를 독살하려고 하는 등 악행을 일삼다 몰락까지 하게 되지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김처선과 화해하게 되며[10], 극 중 내내 악행을 일삼으면서도 한편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효성은 계속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막판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긴 했어도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의 피묻은 적삼을 보여줘버리는 대형사고를 쳐버렸고, 결국 조치겸이 보낸 도금표에 의해 자결을 명받게 되면서 생을 마감한다.
한편 정작 안재모는 아이러니하게도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에서 연산군을 연기했던 적이 있어 이로 인해 엄청난 배우개그가 성립되기도 했다. 그래서 극 중 후배 연산군정태우연산군에 대해 이래저래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11] 야인시대 이후 한동안 슬럼프 때문에 브라운관에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오랜만에 컴백을 하여 맡은 배역인데, 배우의 인생배역인 야인시대김두한과 다르게 여기서는 비열하고 악행만 일삼는 악역이라 그동안 안재모김두한으로 많이 기억하고 있던 시청자들로 하여금 여러모로 충공깽을 선사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 작품을 기점으로 안재모는 사극에서 종종 누군가를 막판에 뒷통수치고 배신때리는 역할을 많이 맡게 된다.
여담으로 극중 인물 한정으로 초반부 김처선 역의 오만석이 한겨울에 물고문과 곤장 등 온갖 고초를 겪게 만든 원흉이기도 하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후술 문단 참고.
여인천하 이후 한동안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전인화가 오랜만에 컴백하여 맡은 배역. 워낙에 문정왕후 역할을 맡았을 때 카리스마가 대단하였고, 인수대비도 이에 못지 않게 카리스마가 대단했던 인물이었던지라 사극팬들은 전인화가 인수대비를 연기한다고 들었을 때 환호했었다.[12] 다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후궁들의 이러저러한 모함에 허구한 날 속아넘어가는 팔랑귀 그 이상 이하도 아니어서 극 중 전개를 꽤나 답답하게 만든 배역이었다. 여인천하의 문정왕후보다 훨씬 너프된 배역이었던 셈. 그래도 전인화 특유의 카리스마는 아직 살아있었던지라... 여러모로 사극팬들 입장에서는 전인화의 연기가 아까울 수 밖에 없었을 듯. 게다가 남편 유동근이 촬영장에서 쪽대본 때문에 구타사건을 일으키기까지 하여 전인화 입장에선 여러모로 흑역사가 된 배역이기도 했다. 이러한 흑역사때문에 드라마를 중도하차할 것 같다는 반응이 많았으나 그래도 계약한 분량대로 계속 출연했다.
원래는 인수대비의 시어머니이지만, 양미경전인화는 4살 차이밖에 안나기 때문에 극 중 보다보면 그닥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보여지진 않는다(....).
  • 정윤석 - 정태우[13] : 연산군
웬만한 연기 잘한다는 배우들도 빛을 못 본데다가[14] 몇몇 배우들의 발연기도 지적되었던[15] 이 사극에서 극 후반부를 그나마 살린 공신이라는 평을 듣는다. 사실상 왕과 나 후반부는 그냥 제목이 '연산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산군 역의 정태우와 인수대비 역의 전인화는 여인천하에서도 각각 세자(인종)와 문정왕후 역으로 함께 등장해서 대립 구도가 나온 적이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기존 사극에서의 연산군과 다르게 정윤석 군이 연기했던 꼬꼬마 원자 시절부터 자신의 생모의 얼굴도 알고, 심지어 폐비되어 사사되었다는 사실까지 인지하고 있다는 것. 실제 연산군은 이와 다르게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서 병이 나 밖으로 피접을 나가 봉보부인에 의해 길러졌기 때문에 아예 자신의 생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있었으며, 궁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신의 생모가 폐비가 된 후였기 때문에 계모인 정현왕후의 손에 의해 길러져 정현왕후를 자신의 친모로 여기고 있었다.
작품 외적으로는 연산군 특유의 광기어린 모습을 잘 묘사해서, 단종이 대표하는 정태우의 사극 이미지(나이 어리고 유약한 왕)를 어느 정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실록에서의 묘사대로 온화하고 대인배인 성품으로 나온다.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장녹수에게도 온화하게 대한다. 연산군도 아내인 신씨에게는 조강지처로 후하게 대하며, 장녹수에게 '만약 중궁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할 정도.
한명회의 막내딸이자 성종의 첫번째 왕비. 왕비 간택에서 윤소화를 제치고 성종의 왕비가 되지만 정작 성종 본인은 윤소화에게만 푹 빠져있는 탓에 푸대접만 당하는 안습의 처지. 게다가 자식이 생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남편이 후궁들을 대거 들이는 꼴까지 봐야했다. 그래도 온화하고 대인배적인 성품이라 후궁들을 질투하지 않고 우호적으로 대해준다. 하지만 결국 얼마 못가 병이 들어 어린 나이에 일찍 요절한다.[16]
드라마에서는 성종이 왕이 된 이후 왕비로 간택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성종이 아직 자을산군이었던 시절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천안군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애초에 성종이 선왕인 예종의 직계아들인 제안대군과 자신의 친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한명회의 사위여서였다.
사실상 이 드라마의 진주인공이자 이 드라마를 가장 하드캐리한 배역. 그리고 선악이 모두 공존하는 가장 입체적인 배역이다. 원래 출세욕이 누구보다도 컸던 내시였던지라 예종 독살에 크게 관여하기도 하고, 심지어 친구였던 김처선의 친부까지 살해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죄책감을 많이 느꼈는지 나중에 김처선을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여 상선으로 출세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처선의 친모인 오 상궁도 자신의 정실부인보다 더 많이 챙겨준다. 다만 김처선이 지지하던 폐비 윤씨가 사사될 때는 발을 빼기도 한다. 나중에 상선 자리를 김처선에게 물려주고 물러난 이후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항거하였다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고 관군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결국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비록 내시이긴 하였어도 왕 전문 배우 전광렬이 연기했다보니 카리스마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17] 덕분에 전광렬은 그 해 SBS 연기대상에서 조치겸 역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까지 하였다. 극 중 진주인공답게 무예실력도 출중한 편인데, 특이하게도 주무기가 활이나 칼이 아닌 부채이다.
실존인물이 아닌 가상인물이지만, 세조 때 정난공신으로 활약했던 실존인물인 내시 전균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인물이라고 한다. 다만 많은 왕들을 섬긴 내시라는 점은 실제 역사의 김처선으로부터 모티브를 따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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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짤방의 대부(...) 전광렬답게 많은 짤방들이 생성되기도 하였는데 이 짤방들은 드라마가 종영된 지 한참 지난 지금에도 자주 인터넷에서 활용되고 있다.
조치겸의 충직한 부하. 한 가지 웃긴 사실은 원래 주상욱이 이 배역으로 낙점되었으나, 촬영 3일 전에 제작진 측에서 캐스팅을 엎어버리고 한정수를 대신 캐스팅한 것.
처선의 생모
처선의 양모. 여담으로 윤유선은 왕과 비에서 귀인 엄씨를 연기한 적이 있었는데, 왕과 비에서는 연산군에 의해 골로 가버리는 역할이었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연산군의 마지막 유배 가는 길을 배웅해주기까지 한다.
극중 초반에는 여운계가 맡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김수미로 교체했다. 사설 내시양성 교육기관인 내자원을 이끌며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로, 거세하기 전에 내시로써 겪게 될 고된 길을 일러주면서 "그래도 내시가 될 거냐?"라고 물어본다.
작중에서는 뒤에 벌어질 일들을 예언하는 기믹도 있다.[18] 처선이 거세를 시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처선의 어머니 월화가 쇠귀노파에게 가서 따지는데, 쇠귀노파는 처선은 내시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며 "이는 하늘이 처선에게 내려준 삼능삼무[19]의 운명이니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연산군이 태어나던 날에 벼락이 울리고 폭우가 퍼부었는데, "장차 조선을 암흑천지로 뒤덮을 임금이 탄생하시겠구나."라고 미래를 예언한다.# 또한 처선에게 "태어날 원자에게 그 어미의 피 묻은 적삼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쇠귀노파라는 인물은 고려 말기에 개경에 사는 돈 많고 자식 없는 노파였는데, 사후 우이동에 묻혔기 때문에 쇠귀(牛耳)노파라고 불렸다고 한다. 고려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조짐을 보이자 "분명히 왕조가 바뀌고 나면 내시들 사이에서도 물갈이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고아, 또는 태어날 때부터 혹은 사고로 불임이 된 아이들을 모아 자신의 양손자로 삼고 집에서 궁중에서의 소양이나 법도를 가르쳐서 내시로 들여보내는 일종의 직업양성소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왕과 나 작중에서는 쇠귀노파가 은퇴하고 떠날 때에[20] 수많은 환관들이 은퇴하는 길에 모여서 어머니라 부르며 슬퍼하고 섭섭해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이 사람들한테는 당연한 것이 결혼은커녕 남자 구실도 못하고 사회에서 거의 매장될 뻔했던 자신들을 구원해 주고 직업까지 갖게 해준 부모 못지않은 은인이다.[21] 환관들은 조선 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쇠귀노파의 기일을 잊지 않고 찾아가서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 드라마 안에서 정한수와 더불어 연산군 등장 이전까지 투탑 악역. 이 쪽은 엄귀인을 빽으로 두고 정한수와 같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심지어는 어우동까지 데려와 여러 사단이 나게 만든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던 정한수에 의해 독살당하면서 정말 어이없게 퇴갤. 그리고 투탑 악역이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극 중 전개 상 크게 필요했던 배역은 아니었던지라 시청자들로부터 왜 자꾸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반응이 많았으며, 오죽하면 최후를 맞았을 때 엄청 기뻐했던 시청자들까지도 있었다. 워낙 어우동의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이 쪽도 어우동 못지 않게 왕과 나의 극본이 산으로 가게 만들게 한 배역 중 한명이다. 항상 정한수에게 "우리 둘이 내시부와 내명부를 손에 넣어 쥐락펴락할 것이오"라는 대사를 말하는데 일개 바깥처녀가 무슨 힘이 있다고 궁궐의 내명부의 짱이 될 생각을 하는지....
공교롭게도 전혜빈은 4년 뒤 JTBC 사극 인수대비에서 폐비 윤씨를 연기하게 된다. 인수대비의 폐비 윤씨 역시 고증 따위는 개나 줘버린 역할이라[22] 배우는 동시대극을 두번 연기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리고 전혜빈이 본격적으로 연기자로 커리어를 바꾸고 나서 처음으로 출연한 사극 배역인데, 연기력이 출중한 지금과 달리 이때에는 연기가 어색하기도 했다.[23]
정현왕후의 아버지. 배우 최종환은 여인천하에서 중종을 맡았는데 여기에선 중종의 외조부 윤호를 맡았다.
본래는 성종의 장인이었으나 공혜왕후 승하 이후 끊임없이 성종과 폐비 윤씨를 사사건건 모함한다. 배우 김종결은 왕과 비에서 같은 청주 한씨 집안의 인물이자 인수대비의 사촌오빠인 한치형을 연기한 적이 있었다.[24]

4. 기타


이 드라마가 드라마 매니아들에게 전설로 남은 이유는 작가와 배우들의 대립 때문이다. 인수대비 역의 전인화의 남편 유동근이 대본에 대해 항의하다 스텝을 폭행했다고 해서 구설수에 올랐는데 사과하고 마무리가 되었다고는 한다. 이 일의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점점 산으로 가는 대본 때문에 작가와 배우들간에 발생한 불화가 꼽힌다. 그런가 하면 주연인 오만석이 총대를 메고 작가에게 대본상의 문제점을 말하며 개선을 건의했는데, 작가는 개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한겨울에 뜬금없는 물고문+곤장씬을 넣어서 제대로 보복했다는 이야기가 디시인사이드 드라마 갤러리(드갤)의 전설로 남았다.[25] 게다가 작가의 필력도 이전 작품들[26]에 비해서 여러모로 퇴보했던 터라 사극 팬들로 하여금 격세지감을 많이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뮤지컬 왕과 나와는 달리 태국에서 방영되었다. 단, 제목은 '김처선'으로 바뀌어서 상영.
기존 사극에서 주로 이나 그에 버금가는 권력자, 보스형 주인공 역할을 주로 맡아왔던 전광렬안재모가 특이하게도 이 드라마에서는 내시를 연기하였다. 기존에 맡아왔던 역할과는 다소 생소한 역할이기도 하고 하필이면 맡은 역이 내시인지라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만들기도 했으나 정작 연기했던 본인들은 오히려 수염 분장을 하지 않고 연기할 수 있어 편했다고 한다. 심지어 안재모는 이 드라마에서 처음 제의가 간 배역은 왕인 성종 역이었지만 수염 분장을 너무 하기 싫어 거절하고 일부러 내시 역할을 선택한 거라고. 사실 사극 속 수염 분장은 남자 배우들에게 있어 엄청난 고역인데 분장을 하는 과정에서 알코올석유를 이용하기 때문. 게다가 한번 수염 분장 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가 뭐 먹으면 수염이 같이 음식에 묻어 밥도 제대로 못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퓨전사극같은 경우 극 중 인물들의 나이가 수염이 나고도 넘치는 40대가 되었을 때도 미관상 좋아 보이지도 않고 이러한 고역 때문에 수염 분장을 하지 않는 경우도 꽤 있다. 다만 극 중 나이가 많은 중견배우들은 내시 역을 제외하면 수염분장을 거의 다 하는 편이다.
1화에서 세조가 죽기 직전 본인의 아내인 정희왕후중전이라 칭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고증오류이다. 세조는 죽기 하루 전 이미 아들 예종에게 양위를 해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 정희왕후또한 더이상 중전이 아닌 대비였다. 다만 세조의 경우 양위한 지 하루만에 세상을 떠났기때문에 보통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과 다르게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이를 간과하기도 한다.
2화에서 박지훈거세당하는 내시 역으로 나왔다. 링크
시대적 배경이 15세기 조선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의상들은 죄다 임진왜란 훨씬 이후에 나온 조선 후기형 의상들이다. 여자들이 입는 저고리 길이가 19세기 수준으로 짧거나[27], 궁중 여인들이 당의를 입는다거나...[28] 심지어는 왕비의 대례복마저 '''대한제국'''때나 돼서야 나온 심청색 적의에 대수머리 형태로 나온다.[29] [30] 게다가 궁중 여인들의 가체인 어여머리도 기존 사극에서는 보지 못했던 균형잡히지 않고 삐뚤빼뚤한 퓨전사극에서나 볼법한 가체였기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기괴해보인다는 평도 많이 받았다. 정작 사극팬들로부터 어여머리가 가장 예쁘고 고증도 가장 훌륭했다고 평가되는 여인천하[31]가 같은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란 사실을 생각하면 엄청난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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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에서의 문정왕후
왕과 나에서의 인수대비
참고로 이 왕과 나에서 선보인 어여머리 가체는 몇년 뒤 같은 방송국 사극 뿌리깊은 나무에서 소헌왕후의 가체로 재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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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왕비의 대례복이었던 대삼(大衫)과 칠적관(七翟冠). 명나라에서 직접 하사받은 대례복이었으며 인조 재위시절까지 대례복으로 활용되었다.[32]
왕과 나에 나온 대수머리와 심청색 적의(翟衣). 이렇게 입기 시작한 때는 대한제국 이후이므로 고증에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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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왕 세종.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저고리 길이가 허리까지 닿을만큼 긴 편이었다.
SBS 왕과나. 이 정도 길이의 저고리는 19세기 조선 말기에 나온다.
시대적 배경은 같은 15세기 조선 초기이지만[33] 대왕 세종에서의 저고리 길이가 훨씬 길다.
사극팬들 사이에서는 '''제목도 비슷하고''' 심지어 거의 똑같은 시기를 다루어 '''등장인물도 많이 겹쳤던''' '''왕과 비'''와 자주 비교되었는데, 배우들 연기 면에서나 고증 면에서나 왕과 나보다는 왕과 비 쪽의 평가가 더 월등한 편이다.[34] 다만 각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연산군은 둘 다 사극 만렙이라고 평가받는 안재모정태우가 연기하였는데, 둘 다 사극 만렙답게 연기가 후덜덜했고 극 후반부 시청률이 올라가는 데 큰 역할을 해 주기까지 했다! 만약의 사극팬이라면 이 두 연산군의 연기를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할 듯.[35]
여담으로 이 드라마를 연출한 김재형 PD는 이전에 거의 똑같은 시기를 다룬 사극 한명회를 연출한 적이 있었다.
그동안 김재형 PD가 제작했던 사극들 중 배우들의 연기가 가장 발목 잡혔던 사극이기도 하다. 그 전까지 김재형 PD의 사극에서는 주로 사극 연기에 능한 베테랑 배우들이 섭외되는 경우가 많았는데[36] 왕과 나 같은 경우 주인공 3인방 중 오만석을 제외한 구혜선고주원의 발연기가 드라마가 방영하는 내내 시청자들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든 주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는 외주 제작사의 입김이 셌던 것이 아니냐는 반응도 많았다. 그래도 조연진들의 연기력은 꽤 훌륭한 편이다. 게다가 기존의 김재형 PD의 사극 스타일과는 다르게 훨씬 트렌디하고 퓨전 느낌으로 제작된 사극이라 똑같은 감독의 작품인 용의 눈물여인천하를 생각하면 엄청난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

[1] 본래 50부작이었으나, 사전제작을 목표로 내정됐던 후속작 식객의 제작 일정이 계속 늘어지면서 이 기간을 채우기 위해 16회 연장까지 추진되었다. 하지만 제작 과정에 있었던 여러 잡음과 일련의 내부 사정으로 최종 63회로 마무리되었으며, 〈식객〉의 편성은 결국 연기되어 그 사이에 역시 사전제작 드라마였던 사랑해가 편성되었다.[2] 이종수 PD는 드라마 촬영 초반 김재형 PD가 건강상 이유로 입원했을 때 이미 4주간 김재형 PD 대신 연출을 맡은 바 있었다. 하지만 김재형 PD가 췌장염 투병을 이유로 2008년 1월, 최종 하차를 선언했고 마지막회까지 메인 연출을 맡았다.[3] 작가 유동윤은 당초 <왕의 여자> 집필자였으나 KBS 1TV 무인시대와의 겹치기 집필 문제 때문에 고사했다.[4] 마지막회의 시청률은 19.7%로 경쟁작인 MBC '이산'은 26.3%, KBS 2TV '싱글파파는 열애중'은 4.3%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5] 폐비 윤씨를 정쟁에 희생된 가련한 여인으로 그리는 작품은 지경사에서 발간된 만화 한국사가 있다.[6] 연산군이 인수대왕대비전에 난입하여 패륜을 저질렀을 때만은 정현왕후가 참다 못해 대왕대비에게 사죄하라며 이를 듣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회초리를 들겠다고 단호히 충고했는데 이때 연산군이 심경을 털어놓는다. 술을 퍼마시며 반항적이던 눈빛이 갑자기 울먹이는 눈빛으로 변하고 "대비마마, 어찌 진즉 소자에게 이리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어찌 소자가 잘못하였을 때 질책하고 회초리를 쳐주지 않으셨사옵니까? 소자, 대비마마께오서 귀하게 키워주셨사오나, 친자식이 아니어서 회초리 한 번 맞아보지 못한 것이 더 한스러웠다는 것을 어찌 모르셨사옵니까? '''소자는 진성대군이 참으로 부럽사옵니다.'''" 이에 정현왕후도 차마 더 뭐라 하지는 못하고 연산군을 안쓰럽게 본다.[7] 덤으로 사극에서라면 필수요소인 수염분장을 하기가 너무 싫어서 일부러 수염이 없는 내시 역을 선택한 거라고 한다. 만약 안재모가 성종 역을 맡았으면 재밌는 배우 개그가 나올뻔했다. 그는 이미 왕과 비에서 연산군을 맡았는데, 이번에는 전에 맡은 배역의 아버지 역을 맡게 되는 것이다. 훗날 안재모는 자신이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맡은 세종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을 드라마 정도전에서 맡게 된다. [8] 연기도 심각하지만 입을 열때마다 갓 미백이라도 한듯한 하얀 이가 발연기와 함께 몰입을 더 방해하였다.[9] 초반 아역시절에는 양반 출신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빼고는 이렇다 할 악행을 저지르진 않았다. 그러다 내시 업무를 보던 와중 김처선이 성종을 대신해 임금행세를 하고 있던 것을 인수대비에게 고발해버리자 임금의 행방을 함부로 고발해버려 내시의 책무를 져버렸다는 이유로 조치겸에게 벌을 받게 되면서 조치겸과 원수지간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내시인 정한수 입장에서 외간남자가 궁궐 안에서 임금행세를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긴 하다. 그리고 신참이란 이유로 송만득이라는 내시에 의해 지독한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는데 결국 내탕고에 있던 보물을 빼돌려 송만득에 방에 놓아 송만득이 보물을 훔쳤다는 누명을 씌워 송만득이 손이 잘려지는 벌을 받게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그 싹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10] 자신이 누구보다도 증오하고 괴롭혔음에도 정작 김처선은 상선이 된 이후 정한수의 어머니 무덤에 제사를 지내주고 있었다.[11] 게다가 극 중 연산군을 연기한 정태우는 같은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단종을 연기했었다!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켜 정난공신파를 몰살시킨 역사를 생각하면, 단종이 연산군으로 환생하여 자신의 몰락에 일조한 정난공신파에 복수했다는 배우 개그도 가능하다![12] 게다가 이 드라마의 연출진과 작가 모두 여인천하 담당 연출진과 작가이다보니 사극팬들은 당연히 기대를 더 품을 수 밖에.[13] 왕과 비에서 단종 역을 맡았다. 덕분에 단종이 연산군으로 환생하여 정난공신파에게 복수했다는 배우개그가 성립된다.[14] 이들 중 전광렬, 전인화, 안재모는 사극 및 시대극으로 지상파 연기대상까지 수상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사극에서만큼은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다. 전광렬허준, 전인화여인천하, 안재모야인시대로 각각 연기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안재모는 야인시대로 대상을 타기 전에 왕과 비에서의 연산군 연기로 사극연기 만렙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놈의 대본이 산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었다. 안습[15] 특히 고주원의 발연기가 심각했었다.[16] 공혜왕후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기존의 한명회왕과 비같은 사극에서는 아역 배우가 혼자 다 연기하고 바로 하차하는 걸로 묘사되었지만 특이하게도 이 드라마에서는 아역과 성인역 배우 모두가 연기했다.[17] 바로 전작에서의 역할이 MBC 주몽에서의 금와왕이었다![18] 여느 역사극이 다 그렇지만 작중에서 쇠귀노파의 발언들은 모두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일들이라, 작중에서 보면 예언이 맞는데, 시청자들 중에는 "극의 스토리를 미리 알리는 훼방꾼"이라며 비난하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쇠귀노파의 예견은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긴장감을 돋우는, 마치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눈먼 점술가가 하는 예언과 같은 역할과 같은 역할을 하며 맞아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 운명을 피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은 노력과 그 과정이 더욱 구미를 당기게 하기 때문이다는 긍정적 해석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스포일러라고 비난을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일단 어느 정도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어떤 식으로 전개될 지는 이미 다 알고 있어서 스포일러라고 말하기도 뭐하다.# [19] 三能三無. 세 가지를 능히 할 수 있지만 세 가지를 할 수 없다. 즉 "힘과 기개가 명장처럼 웅대하지만 사내 구실을 할 수 없고, 현모양처와 1백 자손들의 존경을 받겠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한 점의 혈육도 남기지 못할 것이며, 만고의 충신으로 존경받지만 정작 조정에 출사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20] 여운계에 이어 배역을 맡은 김수미가 스케줄이 맞지 않아 불가피하게 하차하게 되었다.[21] 다만 재산 상속 과정에서 관동에 살던 내시들에게 자하동에 사는 내시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바람에 그 이후로 내시들은 관동파와 자하동파로 갈라지고 반목을 계속 했다고...# [22] 그래도 실록의 묘사대로 구혜선 폐비 윤씨보다는 훨씬 투기도 심하고 악독하게 묘사되는 편이다.[23] 전혜빈이 본격적으로 사극연기로 호평을 받은 것은 2011년 JTBC 사극 인수대비에서 폐비 윤씨를 연기했을 때부터였다.[24] 여담으로 한치형도 나중에 한명회와 더불어 갑자사화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한다.[25] 곤장씬을 찍을 때 바지속에 충격을 완화해주는 보호대를 착용한다고 해도 만만치않은 고통을 느낀다. 중견배우 김진태가 90년대 드라마 '먼동'에서 곤장씬을 찍고 엉덩이에 피멍이 들어 한동안 고생했을 정도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추운 겨울에 엉덩이 부분에 물을 뿌리고 찍는 물곤장이었으니 살이 얼어서 고통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26] 이 드라마의 집필을 맡았던 유동윤 작가의 전작이 무려 지금까지도 사극 팬들에게 희대의 명작으로 칭송받는 '''무인시대'''다! 다른 전작인 '''여인천하'''도 지나친 연장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초반도 수작인 편이다.[27]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한 건 임진왜란 이후이며 그 전까지는 주로 허리까지 다 감싸매는 장저고리를 많이 입었다. 게다가 17~18세기 때만 하더라도 지금의 저고리보다는 꽤 긴 편이었다.[28] 조선시대 때 당의를 입기 시작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시기로 대략 추정되며 그 전까지는 궁중에서 장저고리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29] 이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조선 전기때는 명나라에서 직접 하사했던 칠적관(七翟冠)과 대삼(大衫)을 주로 대례복으로 입었다.[30] 이 당시 복식의 형태를 잘 재현한 사극으로는 왕과 비용의 눈물, 대왕세종이 있다.[31] 다만 이쪽도 왕비의 대례복이 조선 후기식으로 나오는 고증오류가 있었다.[32] 사진 속 자료는 중국 명나라 복식사 자료집인 <대명의관(大明衣冠>[33] 다만 같은 15세기여도 대왕 세종왕과 나보다는 좀 앞서 있다. 그래도 바로 후대이므로 크게 차이는 나지 않는 편이다.[34] 세조에 대한 묘사는 제외. 세조는 왕과 비에서 심하게 미화되었으며, 왕과 나에서는 세조가 왕과 비에서마냥 심하게 미화되지는 않았다. 그나마 이에 대해 변명(...)을 좀 하자면 왕과 비는 왕과 나와 다르게 단종실록세조실록에 엄청 충실하여 실록 속 세세한 기록까지 묘사를 잘 해낸 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단종실록 자체가 조선시대 당대에도 까였을 정도로 왜곡으로 점철된 실록이라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한 사료라는 것이다. 애초에 단종실록 자체가 세조를 굉장히 영웅시하고 미화시킨 사료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폐위된 왕에 대한 폄하 목적으로 편찬된 '''노산군일기'''라는 이름으로 편찬된 실록이라는 점에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정도이다.''' 단종이 훗날 단종이란 묘호를 받아 왕으로 추대받은 건 사후 무려 약 300년이 지난 숙종 때이고 그 전에는 연산군, 광해군처럼 폐위된 군주로 취급받았었다. 하지만 훗날 JTBC에서 방영된 인수대비를 보면 그냥 왕과 비의 작가인 정하연이 단순히 세조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35] 배우개그가 있는데 안재모가 맡았던 이방원 역은 정태우가 맡았던 방번을 1차 왕자의 난에서 살해한 바 있다. 연산군이 연산군을 죽인 셈.[36] 용의 눈물의 '''유동근, 최명길''', 여인천하의 '''강수연, 전인화''' 등등 단순히 사극에서 연기가 능할 뿐만 아니라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우들'''이 대부분이었고, 비교적 연기 경력이 짧은 젊은 배우들도 지금까지 '''사극 만렙'''이라고 칭송되는 이민우, 안재모, 정태우 같은 배우들로 많이 기용되었다. 심지어 망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왕의 여자의 배우들마저도 연기력만큼은 까이지 않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