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호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서병호는 1885년 7월 7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한국 장로회 최초의 7인 목사 중 한 명인 서경조(徐景祚)[2] 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유아세례(幼兒洗禮)를 받았으며, 큰아버지 서상륜(徐相崙)이 아들이 없어서 그가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1905년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아버지 서경조가 세운 해서제일학교(海西第一學敎)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모교인 경신학교 등에서 교사를 역임했다.
1911년 105인 사건 후 기독교 선교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서병호는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해 난징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했다. 1919년 초, 그는 신규식, 김규식, 여운형, 선우혁, 한진교, 장덕수, 조동호 등과 함께 상하이 영국 조계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또한 신석우, 여운형, 선우혁, 조동호, 조소앙 등과 함께 동제사의 이사로서도 활동했다.
1919년 2월 선우혁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 민중의 독립의지를 조사한 그는 상하이로 돌아와서 3월 하순경부터 여운형, 선우혁, 이광수, 김철, 현순, 최창식(崔昌植), 여운홍 등과 함게 프랑스 조계의 보창로 329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 조직에 착수했다. 그해 4월 25일, 그는 이춘숙(李春塾), 남형우(南亨祐), 장도(張濤)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 심사위원이 되어 임시의정원법 전문 13장 57조를 가결, 체택했다.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황해도 지역구 의원에 발탁된 서병호는 이어 제헌의정원 내무위원을 맡아 동지 연락과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1919년 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한편 임시정부 산하에 대한적십자회를 창설해 독립운동자 가족들의 살림을 돕고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 구호 활동에도 전념했다.
1920년 미국 의회에서 극동지역 시찰단이 파견되어 중국과 한국의 여러 곳을 시찰한다는 소식을 접한 임시정부는 6월 28일에 미국의원시찰단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안창호를 선임했다. 이때 서병호는 위원으로 선임되어 시찰단이 8월 5일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진정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시찰단은 한국의 독립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1922년엔 1923년 초에 개최될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었고 국민대표회의에서는 김규식과 함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최고 기구 설치를 촉구하는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국민대표회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료된 뒤, 서병호는 창조파가 설립한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에 가담했지만 조선공화국이 운영난으로 인해 별다른 활동을 못하고 조기 해산되자 1923년 9월부터 김규식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 자녀 및 상하이, 난징 거주 한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남화학원(南華學院)을 설립했으며, 1925년 2월 21일에 상하이에서 신한청년회가 개최될 때 여기에 가담하여 여운형, 한진교, 김철, 정광호(鄭光好), 박진(朴震)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후 교육 활동에 전념하던 서병호는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연이은 의거에 분노한 일제가 1차 상하이 사변을 단행하면서 상하이 대한적십자회가 해체되자 이를 제건하고자 노력했으며, 1933년 상하이 인성학교 이사장, 상해한인기독교청년회 이사장, 한교협회 이사장 등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인성학교에 일장기를 계양할 것을 강요하자 학교를 폐교시켰고, 이후에는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8.15 해방을 맞이했다.
서병호는 해방 후 1947년에 귀국해 서울에 정착하여 새문안교회 장로로 부임했다. 이후 경신학교 재단 이사, 서울 YMCA 기독청년회 이사, YMCA 중앙기독청년회 이사, 경신학교 재단 이사 등에 피선되었다. 6.25 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전시대책위원회위원장, 맹인협회·농아협회이사장으로 활약했고,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기독교학교연합회를 조직했으며, 1953년 경신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또 기독교아동복지회재단이사 및 안양기독보육원재단이사 등을 맡아 전쟁 후의 재난, 기근 구호 사업에 참여했다.
1960년 경신학교에서 정년퇴직한 서병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 부회장에 피선되었고, 1968년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그 후 노년을 조용히 보내던 그는 1972년 6월 7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망우리 공원에 매장되었다가 2008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서병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가족관계
- 김규식(1881~1950): 서병호의 동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 김순애(1889~1976): 서병호의 처제, 김규식의 아내. 김규식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약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서재현(徐載賢, 1906~1999): 서병호의 아들. 상해 인성학교의 교내조직 소년회 회장을 역임하며 배외운동에 가담했고, 1932년 상해한인청년당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1944년에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으로 활동했다.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 서경석(1948~): 서병호의 손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 경제정의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서울 조선족 교회 목사를 맡고 있다. 젊을 때는 군사정권에 맞선 시민운동을 지원했지만,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비롯된 촛불집회에 맞붙집회를 주도하며 "종북좌파가 주도한 촛불시위에 국민들이 멋도 모르고 춤추고 있다"고 주장해 빈축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