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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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 역사박물관 건물.
1. 역사
2. 출신인물
3. 배재학당 산하 학교
3.1. 배재중학교
3.2. 배재고등학교
3.3. 배재대학교
4. 학교 노래
4.1. 배재교가
4.2. 배재찬가
4.3. 배재전송가
4.4. 기타 응원가
5. 학교의 이전
6. 배재와 이승만
7. 일제강점기
8. 관련 문서

培材學堂
Pai Chai School[1]

1. 역사


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2]가 1885년 서울시 중구 정동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증등교육기관.[3] 아펜젤러는 1885년 6월 21일 인천에 2번째 입국하여 7월 19일 서울에 들어와서 1개월 먼저 와 있던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Scranton,W.B)[4]의 집 1채를 산 다음 방 2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 해 8월 3일에 이겸라(李謙羅)·고영필(高永弼)이라는 2명의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하였다.[5] 1기 입학생은 겨우 2명이었다고.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은 고종 황제가 직접 내린 이름으로,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초기 학생들은 출세를 위해 영어를 배우러 학교에 등록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펜젤러 교장은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라는 마태복음 20장을 교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1895년 배재학당 내에 보통부, 중등부, 대학부를 설치하였다. 이를 두고 대학부가 대학기관이라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학부는 자체적으로 설치한 학기과정일 뿐 당시 조선에 대학기관은 없었다. 이와 비슷한 이화학당도 그렇고 자체적으로 보통부, 중등부(고등보통부), 대학부를 설치했을 뿐이지 이와 같은 교육기관을 대체했던 것이 아니다. 차이점이라면 대학부를 졸업하면 보통부나 중등부의 교사를 할 수 있었던 것뿐이지, 대학의 학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대학에 들어가거나 추천서를 가지고 1~2학년으로 편입해야 했다.[6] 초기 시작은 국한문학과, 영문학과, 신학과로 시작하였지만 이후 의학원[7]을 신설하고 사범학교[8]도 신설했다. 지금의 배재대학교에는 의과대학이나 사범대학이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안습하다. 배재대학교는 배재학당 대학부를 직계승한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서 정부 위탁 교육생들을 교육시키며 안정화됐고, 중등부나 고등보통부가 분리되어 교육기관으로 인가되면서 배재중학교[9], 배재고등보통학교 등으로 개편해 가면서 제도권 교육의 한축을 이루었다. 당시 서구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이다 보니 일제강점기 반일 투쟁의 산실 역할을 하게 된다. 배재중고등학교 연혁에서는, 이걸 일제가 배재학당의 기를 누르기 위해 이리저리 뒤흔든 일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졸업생 중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도 있다.
광복 이후, 배재학당은 배재중학교배재고등학교로 그 명맥을 이어나갔지만 배재학당 대학부는 폐지되었고[10] 1970년대 들어서야 경영난에 처한 대전보육학원을 인수해 대전시에 있던 보육초급대학을 4년제로 승격시켜 배재대학교를 설립하면서 대학 부활 숙원사업은 이루어졌다.
재단인수합병이 약점이 되어 배재대학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나마 마크라도 같은 마크를 쓰고 공식 설립시기가 1885년으로 나오는 배재대는 그나마 양반. 배화학당에서 비롯된 배화여자중학교배화여자고등학교배화여자대학교의 경우, 배화학당은 배재학당과 같은 중등교육기관이었지만 대학부를 설치했던 역사는 없었기 때문에 배화여대의 설립시기는 1970년대로 나온다. 마크도 다르다. 재단도 같은데[11]. 이거에 비하면 배재대는 취급이 양반인 셈. 한국 최초의 사립학교인 만큼 한국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 관여한 무수히 많은 인물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연세대학교에선 자기들이 한국 최초라고 주장하는데, 그 한국 최초라고 주장하는 연도가 배재학당보다 1년이 늦다. 근데 뭐,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랑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는 어차피 같은 팀이었다. 연세대학교에서 밝히는 설립연도는 1885년은 제중원의 설립연도이고, 연희전문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교학교의 설립 연도는 훨씬 후대이다. 그러나 조선기독교학교는 감리회장로회의 대표 학교인 배재학당과 경신학교의 대학부를 따로 분리해 세웠다.
배재고등학교 정문을 올라가면 아펜젤러 동상이 있는데 그 동상의 손가락을 3번 만지면 수능에서 고득점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아펜젤러 동상을 감싸고 있는 방패 모양 풀밭에 들어가면 삼수를 하게 된다는 전설도 있는 걸 보면, 진실은...
문서를 쭉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여러 사학들 중에서도 문화 정체성이 대단히 선명한 편이고, 때로는 조금 배타적이고 막무가내인 모습까지도 종종 보인다. 게다가 근처에 객관적으로 더 잘 나가는 한영외국어고등학교가 있기 때문에 지역에서 콩라인의 이미지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지역 내에서는 선배 출신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앞으로 끌고 가려는 분위기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 편이고, 근처에 명성교회가 있어 기독교의 영향력이 큰 지역이라 그런지 다수의 학생들이 배재 특유의 미션스쿨 문화를 곧잘 체화한다. 때문에 사회 전반에서 학교 선후배 문화가 굉장히 약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단결력이 강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2. 출신인물


배재중학교&배재고등학교
갈홍기
강상주
권영세 - 전 주중한국대사. 현 국회의원.
권인하 - 가수
김기방 - 배우
김기진
김계원
김도엽 - 축구선수
김동근
김상헌 - (주)네이버 대표이사 사장.
김석수 - 법조인
김성환 - 의사, 전 국회의원
김소월 [12] - 시인. 소월은 호이다. 본명은 김정식.
김영기 - 전 농구선수, KBL 3대 & 8대 총재.
김인식 - 작곡가, 음악교사
김종익(1918) - 전 국회의원
김진구
김진호(군인)
김창현
김하나 [13] - 목사
김학민(1948)
나도향 [14] - 소설가.
노우진 - KBS 공채 20기 개그맨
노일환
노주현 - 배우
박대승 - KBS 공채 32기 개그맨
박문덕 - (주)하이트진로 회장. [15]
박세영(시인)
박영희
박용철
박진섭 - 전 축구선수, 현 광주 FC 감독
박찬법 - 금호아시아나 고문.
박태현(1886)
박호산 - 배우
배용준 [16] - 배우
백건우 - (배재중) 피아니스트
서병조 - 전 한국정보화진흥원장, 방송통신위원회 실장
서용길
서재필 - (세계사 교사로서) 구한말 개혁가/사상가. 한국최초의 서양식 의사(MD). 영문명 필립 제이슨.
손동운 - (배재중) 비스트 멤버
손병석 - 현 한국철도공사 사장
송락현 - (배재중) 애니메이션 평론가
송방용
송종국 - 전 축구선수, 2002 한일 월드컵에 출전.
안기영 - 음악가
안재환 - 탤런트, 배재고 1학년 중퇴, 중퇴 후 재수하여 대원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 본명은 안광성.
여운형 [17] - 독립운동가
염따 [18] - 가수, 랩퍼
오긍선 - 계몽사상가, 의사, 사회사업가. 호는 해관.
원철희 - 전 국회의원
이규봉 - KBS 아나운서(공채 26기)
이길용 - 기자, 일장기 말소사건 항목 참조.
이서영 前 육군 소장.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국방무관
이상묵
이승만 [19]-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 호는 우남.
이유선
이재형
이종수
이치우
이창욱 - 배우.
임호 - 배우
장경석
장경순
전성
정덕구 - 전 국회의원
정재철 - 전 국회의원
정재형 - KBS 공채 29기 개그맨, 유튜브 피식대학 멤버
조원희 - 축구선수
조인성 [20] - 배우
주시경 [21] - 국어학자. 호는 한힌샘.
지청천 [22] -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 호는 백산.
차두리 - 전 축구선수
천호진 - 배우
최수종 - 배우, 배재중학교 출신
캐러멜 - 만화가
홍길선 - 정치인
배재대학교 [23]
갓성은 [24]
류근지 - 코미디언
박무직
수현(유키스)
은혁
이민우 - 가수
이준영(1997) - 가수
이웅희 - 축구선수
정해명 - 물리학과 84학번. 모교에서 석사까지 마친 뒤 맥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지구환경과학부 교수가 되었다.(배재대 석사와 맥길대 박사는 확인되지 않고, 오리건대학교 석사와 미네소타대학교 박사로 확인됩니다. 확인부탁)
청동 - 이 인물의 경우에는 나쁜 의미로 유명하다.
하현우 [25] - 락밴드 동아리인 오선회에서 활동했었다. 같은 국카스텐 멤버 이정길 역시 같은 동아리였고 자퇴도 같이 했다. 복면가왕 최장수 가왕.


3. 배재학당 산하 학교




3.1. 배재중학교


배재중문서참고

3.2. 배재고등학교




3.3. 배재대학교



배재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배재대학교는 배재학당을 계승한 대학교이며, 배재 재단 및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이를 명목상으로는 인정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사진 및 학생들은 배재대학교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배재학당 총동창회[26]와 배재대학교 총동창회[27]는 아예 다른 동문회로 운영되고 있다. 배재학당 총동창회의 경우 자체 기수가 존재하여 배재중고를 중심으로 매년 행사를 개최하는 등 체계적인 운영을 하는 한편, 배재대학교 총동창회는 일부 총학생회 및 교직원 출신 중심으로만 운영돼 사실상 동문회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 즉, 명목상 같은 재단일 뿐 공식적으로도 동문이라 인정받지 못하며, 배재고등학교에선 우스갯소리로 '배재고등학교부속대학교'라는 말도 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배재학당이 근래에 들어 역사만큼의 명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배재중 및 배재고는 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뭉쳐 있는 단결력 있는 집단이다. 게다가 교사진의 상당수가 서울 소재 사범대학 또는 교육대학원를 졸업한 배재중 또는 배재고 출신이다 보니, 학생 시절의 자부심이 교사가 된 이후까지 그대로 옮겨 가면서 계속해서 순환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대전권의 전문대학을 사들여서 배재의 이름을 붙인 배재대학교를 굴러온 돌로 보는 동문들이 대부분이다. "정말 대학교를 하려면 배재의 이름에 맞게 좋은 기반을 가지고 제대로 시작했어야지 그게 뭐냐"고 보는 식이다. 자존심의 문제를 둘째치고서라도 현실적인 이유도 있는데, 배재 재단이 사학 재단 중에서는 상당히 돈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투자하는 돈은 그리 많지 않다. 재단이 오래 전부터 대학교에 집착을 해온 만큼 배재대학교에 많은 돈을 쏟아부으면서 좋은 학교가 되도록 투자를 하고 있는데, 이게 그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보이기 때문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상대적으로 반감을 느끼는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에 배재중 및 배재고에서 잘 돌아다니던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었는데, 배재중 - 배재고 - 배재대 트리를 타면 마티즈를 1대 뽑아 준다는 것이었다. 당시 배재중 학생들은 "배재고까지야 괜찮은데 배재대는 외제차를 줘도 안 되는 거 아니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고, 그 이야기가 워낙에 컬트적인 인기를 끈 탓에 자기도 사실인지 정말 궁금하다는 선생님들도 계셨다. 한 선생님께서는 배재초등학교가 있었고, 배재대학교에 부설유치원이 있기때문에 배재유치원 - 배재초등학교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 트리를 모두 타면 준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믿거나 말거나.
더욱이 2011년부터 입학한 배재고 학생들은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의 학생으로,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통해 입학하였으므로 하위권인 학생도 중학교 내신 20~30%인 사람이고, 모의고사에서는 학년 내 하위권 학생일지라도, 보통 3등급 이상의 성적을 보인다. 반면 배재대 학생들은 평균 과성적이 4~6등급이고[28] 그나마 유아교육과간호학과만 2~3등급이어서 성적만 비교해 보면 배재고 학생들이 월등히 높다.

4. 학교 노래


아래의 3곡 모두 화음이 존재한다. 배양전 연습 땐 정식으로 파트를 나누어 가르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멜로디만 부르고 화음은 넣고 싶은 사람이 넣는다 (...) 이렇게 해도 배재중고등학교 내에 성가대 역할을 하는 동아리가 3개는 있는 데다가 바로 옆 명성교회에서 성가대를 하는 애들까지 해서 합창 경력 있는 애들이 한 반에 한 명이라도 없으면 이상한 수준이기 때문에 화음이 그럭저럭 잘 맞는다.

4.1. 배재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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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롸롸롸롸[30]

씨스뿜빠[31]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배재학당 교가는 그 간결함강렬함 덕분에 악마의 중독성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교가는 학교를 졸업하면 그런 게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하지만, 배재학당 교가는 졸업하고 10년, 20년이 지나도 바로 다시 부를 수 있다. 처음에는 뭐 이런 교가가 다 있나(...) 싶지만 2년차 들어가서 숱한 조회와 2번의 배양전을 거치고 나면 이미 입에 착 달라붙어 있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2번 반복하는 교가를 기분 타고 무한 반복하는 경우까지 생길 정도다.
심지어 강동구 지역의 다른 학교 학생들도 자기 학교 교가보다 배재 교가를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수능 응원에서 배재고 응원단과 다른 응원단이 같이 응원을 하는 상황이 오면 배재 교가를 다른 학교 응원단도 따라부를 정도다. 아들 아펜젤러[32]가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교의 응원가에서 멜로디를 따왔다고 한다. 학교 교표도 묘하게 비슷하다. 당연히 연세대학교는 배재나 프린스턴 대학교 교표를 따라한 것이고. 최근에는 배재대학교에서 전국적으로 하는 라디오 방송 광고에도 이 교가를 넣으면서, 배재학당 교가의 인지도가 더 높아졌다.

4.2. 배재찬가


설립 9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학교 노래이다. 다른 학교의 교가에서 느껴지는 엄숙함이 느껴지는 노래이다.
빛나라 배재학당 흘러간 저 한세기
신문화 요람터다 근세사의 여명이다
욕위대자 당위인역 배양영재 높으신 뜻
선구자의 모태로다 대한의 자랑이다
맹호의 기백은 배재의 기상
인류의 태양되라 자손 만대로
빛나라 배재학당 흘러간 저 한세기
신교육 발상터다 현대사의 광명이다
기독정신 희생봉사 개척정신 높으신 뜻
애국자의 모태로다 민족의 자랑이다
맹호의 기백은 배재의 기상
인류의 태양돼라 자손 만대로
당연히 최초 녹음시의 가사는 "흘러간 저 90년"이었으나, 개교 100주년을 전후하여 위의 가사로 바뀌었다.

4.3. 배재전송가


Battle Hymn of the Republic의 곡조로 부른다.[33] 개신교 신자라면 영광 영광 할렐루야 라면 알 그 노래.
하늘같이 높고 푸른 우리 배재 젊은이
바다같이 넓고 깊은 우리들의 이마음
우리들은 주의 자녀 부름받은 한 형제
주 뜻만 따르리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승리의 우리 주
Glory Glory Hallelujah Glory Glory Hallelujah
Glory Glory Hallelujah Glory Glory Hallelujah
His truth is marching on
화산같이 타오르자 우리 배재 젊은이
폭포같이 줄기차자 우리들의 이마음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우리 태어났으니
힘차게 일하자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승리의 우리 주
Glory Glory Hallelujah Glory Glory Hallelujah
Glory Glory Hallelujah Glory Glory Hallelujah
His truth is marching on

4.4. 기타 응원가


에이맨, 달려간다, 성난 독수리[34],마징가Z[35] 나가신다, 배재 자이언트, 화이팅, 새야 등 배양전 때 나눠주는 유인물엔 양측 교가까지 합쳐 대략 20곡 가량이 수록되어 있다.
배재고-양정고 간 정기 럭비전인 배양전 때문에 학교 응원가가 체계적으로 전수되고 있다. 이는 졸업 후 동문회에 가면 나이 많은 선배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연결고리가 되준다. 유투브에 찾아보면,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과 중년들이 함께 모여 교가를 열창하는 동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상대편 학교에 대한 존중의 의미에서 두 학교 모두 상대편 학교의 교가를 연습하는데, 배재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여기서 양정중고등학교의 교가에서 "양정! 양정! 양저엉 양정!" 하는 부분을 "양정! 양정! 양저엉 양정!" 라는 기괴한 코러스를 넣는 전통이 있다. 원래는 "우우~" 하는 야유의 의미라지만[36] 억양이 매우 적절하기 때문에 사정을 모르면 기합 넣어주는 걸로 들리며 양정중고등학교 학생 및 양정 측 선수들도 기합인 줄 알고 따라 한다. 다만 양정에서도 다들 그렇게 속아넘어가는 건 아니라서 양정에서 배재중고 교가의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 부분을 "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로 돌려주기도 한다. 이 전통(?)의 유래는 재학생들이 학교를 다닌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크게는 양정욱 또는 양정우라는 배재중학교 재학생을 놀리려고 시작된 것이라는 틀을 따른다. DC 강동구 갤러리의 글에 따르면 1995년에 시작된 일이라고 하는데, 이후 전승되는 이야기에서 연도 표기는 다 다른 걸 보면 아무래도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게 워낙에 찰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적어도 2012년 이후로는 양정고에서도 응원가 목적으로 교가를 제창할 때에는 "양정! 양정! 양저엉 양정!" 대신 "양정허이! 양정허이! 양저엉 양정''으로 불러 코러스가 완전히 편입된 상황이다 . 사실 이렇게 부르는 게 원래 교가보다 훨씬 힘차다.

5. 학교의 이전


원래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었으나, 80년대 정부의 강남개발 정책으로 배재중학교와 배재고등학교는 서울시 강동구로 이사하게 되었다. 80년대에도 학교부지가 팔리지 않아, 운동장만 팔아서 중고등학교 부지를 구입/신축 경비로 사용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그때 남은 돈으로 배재대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6. 배재와 이승만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각각 초대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대통령이 한말에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다. 이승만은 여기서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이승만은 개신교 선교사들과 서재필의 영향 아래 자유, 평등, 민권 등 근대적 정치사상을 배우면서 미국의 민주공화주의 제도에 대해서 동경하게 된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협성회(協成會)라는 토론회를 통하여 활발한 토론활동을 하였고, 또 『협성회회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창간사와 논설을 기고하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신식 교육을 통해서 유학자, 정부관료의 길을 꿈꾸던 유자(儒者)의 길에서 서구 지향의 급진적 민주주의 개혁가로 변신하게 된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에는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만민공동회 총대위원으로 활약했으며 언론, 강연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배재학당 학생 몇명과 협성회회보매일신문이라는 순한글 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이승만의 일대기를 그린 책을 학생들에게 전부 배포하기도 했으며, 배재고등학교의 기숙사 이름도 그의 호를 따서 우남학사라고 지었고, 이승만 동상이 배재중고등학교 내의 배재동산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가 하면, 이승만과 배재의 연결 관계에 대해서 나이 든 선생님들 뿐만이 아니라 꽤 젊은 선생님들도 많은 이야기를 한다.
배재를 나와서 배재에서 선생을 하고 있는 고등학교 국사/한국근현대사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배재에서 수학하고 졸업한 이승만이 배재대학교를 서울에 세우려다가 4.19로 하야하며 무산되었다고 한다. 중학교에 있는 역사 선생님들도 비슷한 말을 꺼낸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 건립할 계획이었다고.

7.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37](...) 조선총독부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다른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는 교장을 지낸 윤치호김활란이 친일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38]

8. 관련 문서


[1] 구한말 미국 감리회에서 펴낸 The Korea Review에 실린 영문 명칭이다.[2] 2009.01.11에 배재고등학교 교내에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졌다. [3] 신학만 한정하면 그보다 30년 정도 앞서서 천주교가 현 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인 성요셉신학교를 세웠다. 자세한 건 가톨릭대학교 문서 참조.[4]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튼 부인의 아들. 어머니와 함께 선교하러 조선에 왔다.[5]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 부인도 초기에는 좀처럼 학생을 모으지 못해, 학교 일을 하던 일꾼 김씨의 딸을 학생으로 삼기도 했다. 그 학생이 바로 한국 최초의 근대 여의사박에스더.[6] 학기과정만 봐도 현재의 중등교육기관(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대체하기엔 매우 짧은 과정이었다. 당시도 그렇고 해방 이전까지 조선에서 학사를 수여하는 곳은 경성제국대학 하나뿐이었다. 그외의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하는 교육기관들은 정식과정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다가, 조선인의 반발로 전문학교급 대우를 받게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 그래서 당시 조선출신 지식인들을 보면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대학에 편입하거나 입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7] 의학과정을 배우는 곳이지만 당시 조선에는 대학기관이 없었으며,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면 대학시설 인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별도로 일본의 대학 의학부에 들어가야만 했다.[8] 당시 사범학교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가는 중등교육기관이었다.[9]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배재중학교와는 다르다.[10] 본래는 한국전쟁 후 1959년에 동문이기도 한 당시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불하받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월곡동의 땅에 정규 대학으로 재설립을 추진, 기공식을 마치고 건축물까지 착공하였으나 정권이 바뀐 후 토지 불하 과정이 위법했다는 이유로 월곡동 부지를 다시 몰수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배재학당 대학부는 부활하지 못한 채 한동안 명맥이 끊기고 만다.[11] 반면 같은 감리회 계열의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1886년에 세운 이화학당일제강점기이던 1943년에 이미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재단(이화학원)과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재단(이화학당)을 분리하여, 이화여고보는 중구 정동, 이화여전은 서대문구 대현동에서 각자의 길을 갔다. 때문에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대학교는 현재 각각 138년의 역사를 내세운다. 즉, 중ㆍ고등부와 대학부가 하나이던 공통의 설립 초기 시기를 각자가 모두 자기네 역사에 포함시킨 것이다.[12] 다만, 김소월 본인은 배재학당보다 중간에 중퇴하게 되었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더 많은 애착을 두었다고 한다. 오산에서 스승 김억을 만났던 점이나 활발한 작품 활동을 진행하였던 점, 결정적으로 배재학당은 거의 졸업 직전의 학년에 들어와서 조금 거치듯이 지나갔다는 점 때문인 듯. 배재고에서는 내신, 모의고사, 학력경시대회의 성적들을 반영하여 상위 50명을 모아 소월반이라는 방과 후 학급을 편성해 운영하고 있다.[13] 교회 세습으로 유명해진 명성교회의 바로 그 김하나 목사. 김삼환 목사의 아들.[14] 배재고등학교 1층의 소강의실을 나도향실이라고 한다.[15] 매년 모교인 배재고등학교에 수억을 전달하면서 하이트진로 장학금도 수여하고 있다.[16] 배재중학교 출신이고, 고등학교는 한영고등학교를 나왔다. 대학교는 성균관대학교를 다니다 중간에 자퇴. 배재중 고참 선생님들의 평가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하는 선생님들이 반 정도 있고, 나머지의 반은 "나는 잘 모른다"고 함구하고, 나머지는 도시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를 가끔 흘린다. 판단은 알아서.[17] 중간에 자퇴했다[18] 2019년도 배재고 축제에 공연도 하러왔다.[19] 배재대학교에 우남관이 있다.[20] 여긴 배용준과는 달리, 한없이 수수한 에피소드들밖엔 없다. 선생님들은 별 기억이 없는듯 하고, 지역에서 나오는 소문도 명일동 모처에서 목욕하고 나오는데 앞에 조인성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도(...)[21] 세종대왕훈민정음에서 현대 우리가 쓰는 한글로 언어를 체계적으로 다듬고 통일한 대단한 사람이다. 국어만 가르쳤을 거 같지만 의외로 지리, 주산교사이기도 했다. 배재고등학교에 주시경관이라는 건물이 있다.[22] 배재고등학교에서는 하위권 학생들의 성적향상반으로 백산반을 운영 중이다.[23] 배재대학교 총동창회는 명목상 같은 '재단'일 뿐 배재학당 총동창회와 별개로 분류돼 사실상 동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제중원·조선기독교학교의 전신인 연세대와 이화학당 전신의 이화여대와 비교하면 굉장히 안습인 사례다.[24] 중간에 자퇴했다[25] 중간에 자퇴했다[26] 배재학당 총동창회 공식 홈페이지[27] 배재대학교 총동창회 [28] 배재대학교 2018학년도 입시결과[29] 현재는 6/8박자 버전이 아니라 2/4박자 버전을 쓰긴 하지만 노래 자체는 똑같다.[30] "라라라라"는 남성미(?)가 없어서 바꿨다고 한다(...).[31] 아닐 것 같지만 영어단어다! sisboombah. 미식 축구 등을 보면서 외치는 '이겨라!'는 뜻의 응원 구호라고 한다. 경기장에서 폭죽이 날아가 터지는 장면을 묘사했다고 한다.[32] 역시 배재학당에서 교직을 맡고, 교장까지 했다.[33] 롯데 자이언츠 응원가 '승리의 롯데(롯데 롯데 롯데 롯데~)'의 근간이 된 곡.[34]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중학교에 근무하시는 김모 선생님의 이름을 구령으로 넣기도 한다. 이 관습이 정착된 건 2007년으로, 당시 지도부장이셨던 김 선생님이 응원연습 참여율이 저조하자 열심히 부르면 빨리끝내주겠다고 해서 감사에 의미로 넣어졌다고 전해진다. 고등학교에서는 '슛돌이'란 별명이 있는 박모 선생님의 별명을 구령으로 넣는다.[35] 여기에는 음악선생님인 전문배 선생님의 이름을 넣는다. (대체로 '무쇠로 만든 사람' 뒤의 가사에 넣는다.)[36] 그래서 연습할 때 선생님들이 를 넣는 사람들을 잡아내는 경우도 있다.[37] 위에서 배재중고등학교가 일제 시절의 잦은 학사제도 변경을 "항일운동을 하는 배재학당을 일제가 훼방을 놓기 위해서"라고 해석했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38] 윤치호와 김활란의 친일 행위는 달리 논의되어야겠지만, 최소한 항일 운동에 기여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