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군도

 





1. 개요
2. 세이버 군도가 된 이유
3. 구군도의 이모저모
3.1. 계급의 구분
4. 관련 문서


1. 개요


구군도(旧軍刀)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쇼와 9년(1934) 신군도 제정 때까지 일본군에서 쓰인, 세이버 외장을 가진 군도의 총칭.
8식, 19식, 25식, 32식의 제식으로 크게 나뉘며, 19식에서 지휘도, 겸용도, 양손세이버가 파생되었다. 8식이 최초로 제정된 세이버 군도이며, 육해군 장교용과 하사관병용, 기병용이 따로 있었다. 19식은 장교용으로써 각자 육해군과 기병용 제식이 따로 있으며, 구군도에서 가장 유명한 종류이다. 19식에서 양손세이버와 지휘도, 겸용도가 파생되었다. 부사관용으로는 전통적인 황동 도장구를 사용한 25식에서 철제 도장구를 사용한 32식이 부사관용으로 따로 제정된다. 32식 이후로 세이버 군도는 제식에서 해제되고, 신군도로 넘어가게 된다.

2. 세이버 군도가 된 이유


일본은 유신 이후 탈아입구로 통칭되는 서구화를 시작했으며, 특히 군사제도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내전기에는 네덜란드영국, 프랑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유신 이후에는 해군은 영국 해군, 육군은 당대의 육군국이었던 프랑스 육군에 유학을 보내어 유럽군대를 모방하려는 데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기존의 일본도는 '''시대에 뒤떨어진 야만 구시대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군도도 유럽의 제식과 개념을 그대로 수입하였다.

3. 구군도의 이모저모


메이지 8년(1875년) 채용된 8식은 배금(背金:Backplate)가 없으며 패용 고리가 2개 달린 프랑스 m1822세이버의 양식을 모방한 물건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스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일본 육군은 이후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프로이센 유학파들의 귀국과 함께 독일 색채를 강하게 띠는 군대로 변모하게 되며, 이러한 풍조 안에서 독일식을 모방한 19식을 메이지 19년(1886년) 채용하게 된다. 19식은 배금(背金:Backplate)이 있고 패용 고리가 1개밖에 없으며 1점식 세이버 행어를 사용하여 착용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8식과는 뚜렷이 구분되었다. 이 방식이 1945년 패망때까지 일본 육군도의 패용 방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8식과 19식의 칼날은 유럽식 세이버의 길이에 맞춰 만들었으며 기존 일본도에서는 엄청나게 큰 길이에 속하는 80cm의 날길이를 지니고 있었다. 더불어 칼날의 폭도 길고 좁은 편이라서 기존 일본도에 익숙했던 메이지 시대의 사무라이 출신 장교, 경찰 등에게는 도저히 맞지 않았으며, 양손세이버라는 독특한 장르가 출현하는 계기가 된다. 칼날의 모양새는 기존 일본도에 비해 길고 폭이 좁아졌으나 전체적으로 일본도 형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형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라인더로 가짜 하몬까지 그려넣는 등 일본적인 색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보병장교를 중심으로 세이버가 도저히 맞지 않는다는 불평이 제기되면서 19식의 제식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손잡이를 길게 늘여 기존 일본 검술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양손세이버가 등장한다.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바로 티가 나지만, 암암리에 허용되었다. 사실 군도 패용 규정상 평시에는 칼날을 세우지 않은 지휘도, 전시에는 칼날이 선 실전군도를 패용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실전군도로써 허용될 수 있었던 것. 행사, 예식, 평시에 착용하는 지휘도의 경우 얄짤없이 19식의 기본제식을 칼같이 지켜야만 했다. 즉 장교라면 한손세이버와 양손세이버를 둘 다 소지하게 되었던 셈.
그러나 돈이 없는 초급장교에게 이는 큰 부담이 되었고, 이에 따라 지휘도의 제식을 지키면서 칼날은 시퍼렇게 세워놓아 실전에서도, 평시에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겸용도라는 물건이 등장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서 부담이 된다는 이유는 장교들이 자신의 군도를 자비로 구입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유럽 군대에서부터 비롯된 전통이었다.[1] 그에 비해 부사관과 병사[2]는 군도를 지급받았다.
기병대는 독자적인 제식을 사용하였는데 8식이나 19식 모두 일반 육군장교용과 기병용의 디자인이 달랐으며, 특히 소드벨트 즉 도대(刀帶)의 디자인도 달랐다. 특히 벨트에서 늘어트리는 행어는 일반 장교들이 가죽제를 쓴 데 비해 기병은 쇠사슬 가멧(Garmet)을 사용하였다. 말을 타고 달리면 자루가 격렬하게 요동치므로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는데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멋지다는 이유로 다른 병과의 장교들도 모두들 쓰기 시작하였다. 기병대는 보병장교들과는 달리 기병전투의 특성 때문에 실전군도조차 한손으로 사용하는 세이버를 사용하였다.
하사병졸의 경우 군도 패용자는 한정되어 있었는데 기병, 치중병, 헌병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기병과 치중병은 실질적인 전투호신용으로, 헌병은 권위를 위해서였다. 곧 사라지지만 유럽식 군도 전통에 따라 포병이 포병도를 사용하기도 했다. 25식과 32식은 부사관과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군도였는데 디자인이 단순하고 실전적인 측면만 강조한 도검이었으며 이는 권위를 보이기 위한 장교준사관(장교~조장)의 도검과는 의미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32식은 19세기말~20세기초의 경향에 따라 25식의 황동제 부품 대신 철제 부품으로 도검의 금속부품을 만들었다. 32식이 마지막으로 제정된 구군도로써, 장교용은 19식과 양손세이버가 계속 유지되다가 1934년 신군도의 제정에 따라 세이버 군도는 일본군에서 퇴출되고, 지휘도와 실전군도의 구분도 사라진다.[3]


3.1. 계급의 구분


육군 구군도의 경우 칼자루의 등을 덮는 보강판, 즉 배금(背金)에 벚꽃무늬가 얼마만큼 차지하는가와, 칼자루를 무엇으로 감았느냐, 그리고 도소(刀緒)의 형태로 구분했다. 가령 배금에 벚꽃무늬가 끝부분에만 조금 있으면 위관급, 전체를 다 덮고 있으면 좌(령)관급, 그리고 배금에 벛꽃이 다 덮여 있으면서 자루가 거북이 등껍질로 싸여 있으면 장관용이라는 식이었다. 위-좌관용 손잡이는 물소뿔 껍데기나 수지로 싸여 있었다. 개중에는 배금에 자기 집안의 문장을 새기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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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관용. 가문 있음
일본 제국 해군용은 딱히 그런 것은 없고 도소(刀緒)의 형태로만 구분했는데, 해군이 딱히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은 아니고 평상시에는 해군단검만 차고 다녔으므로 그다지 의미는 없었다.

4. 관련 문서


일본군도(日本軍刀)
구군도(旧軍刀)
신군도(新軍刀)

  • 육군부사관도(陸軍下士官刀)

공업도/실용군도(工業刀/室用軍刀)
  • 무라타도(村田刀) - 총기설계자 무라타 소장이 제조한 칼날
  • 만철도/흥아일심도(満鉄刀/興亜一心刀) - 남만주철도공사에서 제조한 칼날
  • 미카사도(三笠刀) - 전함 미카사의 파괴된 포신으로 만든 칼날
  • 조병도(造兵刀) - 육군조병창에서 생산된 칼날
  • 진무도(振武刀) - 금속공학을 통한 타바드강(鋼)으로 만들어진 칼날
  • 군수도(群水刀) - 군마수전사의 사장인 미야구치 타케히데가 만든 칼날
  • 스테인리스도(耐錆鋼刀) -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든 칼날
일본군도를 사용하는 검술

[1] 유럽 군대에서 장교란 곧 귀족이었으며 당연히 군도를 장만할 능력이 있었다. 사실 군도만이 아니라 군복을 비롯해서 모든 장비를 돈을 내고 사야만 했다. 일본군에서 장교가 군도를 돈 내고 사는 것은 이런 유럽 전통까지 그대로 들어왔던 것에 기인한다. 당시 유럽군에서도 장교조차 이러한 장비 구입은 많은 부담이었다고 한다. 더불어 부사관과 병사는 무기를 지급받는 것도 유럽식 전통이었는데, 17세기까지는 병사들도 무기를 자비로 마련해야만 했었다. 물론 병사는 돈이 없으니 받는 월급에서 공제하든지, 여러 세대를 하나로 묶어서 그중 한 세대가 징병되면 나머지 세대는 무기값을 부담하는 식이었다.[2] 일본군 표현으로는 하사병졸(下士兵卒)[3] 94식 전도의 경우 실전용과 예례용의 요소를 둘다 갖추고 있었으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확전으로 예식제례가 정지됨에 따라 실전군도로써의 측면만이 요구되어 94식을 대신한 98식 전도가 채택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