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군도
이종군도(異種軍刀)
일본군의 장교나 부사관, 군속들이 사용한, 제식을 벗어난 사제군도.
본래 일본군도는 그 제식이 규정되어 있었으며, 원칙상으로는 제식 군도만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 중일전쟁과 같은 전시체제의 돌입과 함께 기존의 군도 생산량으로써는 도저히 급격히 늘어나는 장교와 부사관의 숫자에 맞출 수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육군조병창에서 제조하는 조병도가 원래 부사관의 관급품 군도를 위해 존재했으나 장교용 군도의 부족으로 생산라인을 장교용 군도로 돌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부사관용 군도의 공급이 크게 부족해져, 군 내부에서 부사관들이 관급품 대신 개인적으로 집에서 들고 온 일본도를 사용하는 것을 묵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제식 사제칼을 통틀어 이종군도라고 부른다. 당연히 외장과 형태도 가지각색이었으며, 하나의 스타일로 규격화할 수가 없다. 대체적으로 에도시대의 전통 일본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일본군에 민간인 신분으로 종군하는 군무원, 즉 군속(軍屬)들이 개인적으로 칼을 들고와 쓰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러한 도검들도 이종군도에 포함된다.
본디 일본육군 규정에는 군도의 패용이 허가된 자는 장교와, 상사(曹長:조장)까지였지만, 실제로는 중사(군조:軍曹), 하사&병장에 해당되는 오장(伍長)들까지 칼을 차고 다녔다. 이것은 보통 중국전선에서 허용된 일로, 중국군이 일본군에 연전연패하여 군수공장이 밀집된 황해연안과 무한3진을 빼앗긴 이후로 항일대도의 비중을 늘리고 우회 기습이나 야간 백병전을 거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이에 대해 원래는 군도를 패용해서는 안되었던 하사관병에게도 일본도의 패용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들의 경우 당연히 관급품인 95식 부사관도를 지급받을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이종군도를 쓰는 일이 흔했다. 이러한 이종군도의 패용률은 생각보다 높아서, 나루세 군도수리반의 군도수리실시중에 있어서의 관찰연구의 개요(軍刀修理実施中に於ける観察考究の概要) 에 의하면
로 상당히 높은 편이며, 그중에서도 고전양식, 즉 이종군도의 사용률은 장교 26.4%, 준사관 9.6%, 부사관 46.8%, 병 17.2%로 부사관의 사용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에 비해 신제식의 부사관 패용률은 16.5%, 구제식은 13.6%였으니, 실질적으로 정규 군도보다는 이종군도의 패용이 부사관들 사이에서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원래 군도 패용이 불허되었던 군조나 오장들까지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이 묵인되는 상황 하에서, 관급품 군도를 얻을 수 없었던 군조나 오장들이 사제 일본도를 차고 다니던 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즉 실질적으로는 정규 군도뿐만이 아니라 카타나까지 일본군들이 흔하게 차고 다녔다는 것으로써, 이종군도는 조그마한 일탈이 아니라 하나의 경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보통 카타나처럼 허리춤에 끼우고 다니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일반 군도와 마찬가지로 복식규정에 맞추어 패용해야만 했다. 따라서 보통 군도들처럼 칼집에 야전용가죽덮개를 실시하고, 패용 고리를 달아놓아 겉보기에는 군도와 큰 차이가 나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고전 카타나인 이종군들에 잠금장치가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똑딱이 단추나 끈으로 묶는 식으로 간이 잠금장치를 달아놓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칼집의 야전용가죽덮개 색깔로 육군용인가 해군용인가를 구분하는데, 흙색이면 육군용, 흑색이나 군청색이라면 해군용이다.
일본군도(日本軍刀)
구군도(旧軍刀)
신군도(新軍刀)
일본군의 장교나 부사관, 군속들이 사용한, 제식을 벗어난 사제군도.
1. 개요
본래 일본군도는 그 제식이 규정되어 있었으며, 원칙상으로는 제식 군도만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 중일전쟁과 같은 전시체제의 돌입과 함께 기존의 군도 생산량으로써는 도저히 급격히 늘어나는 장교와 부사관의 숫자에 맞출 수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육군조병창에서 제조하는 조병도가 원래 부사관의 관급품 군도를 위해 존재했으나 장교용 군도의 부족으로 생산라인을 장교용 군도로 돌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부사관용 군도의 공급이 크게 부족해져, 군 내부에서 부사관들이 관급품 대신 개인적으로 집에서 들고 온 일본도를 사용하는 것을 묵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제식 사제칼을 통틀어 이종군도라고 부른다. 당연히 외장과 형태도 가지각색이었으며, 하나의 스타일로 규격화할 수가 없다. 대체적으로 에도시대의 전통 일본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일본군에 민간인 신분으로 종군하는 군무원, 즉 군속(軍屬)들이 개인적으로 칼을 들고와 쓰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러한 도검들도 이종군도에 포함된다.
본디 일본육군 규정에는 군도의 패용이 허가된 자는 장교와, 상사(曹長:조장)까지였지만, 실제로는 중사(군조:軍曹), 하사&병장에 해당되는 오장(伍長)들까지 칼을 차고 다녔다. 이것은 보통 중국전선에서 허용된 일로, 중국군이 일본군에 연전연패하여 군수공장이 밀집된 황해연안과 무한3진을 빼앗긴 이후로 항일대도의 비중을 늘리고 우회 기습이나 야간 백병전을 거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이에 대해 원래는 군도를 패용해서는 안되었던 하사관병에게도 일본도의 패용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들의 경우 당연히 관급품인 95식 부사관도를 지급받을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이종군도를 쓰는 일이 흔했다. 이러한 이종군도의 패용률은 생각보다 높아서, 나루세 군도수리반의 군도수리실시중에 있어서의 관찰연구의 개요(軍刀修理実施中に於ける観察考究の概要) 에 의하면
로 상당히 높은 편이며, 그중에서도 고전양식, 즉 이종군도의 사용률은 장교 26.4%, 준사관 9.6%, 부사관 46.8%, 병 17.2%로 부사관의 사용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에 비해 신제식의 부사관 패용률은 16.5%, 구제식은 13.6%였으니, 실질적으로 정규 군도보다는 이종군도의 패용이 부사관들 사이에서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원래 군도 패용이 불허되었던 군조나 오장들까지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이 묵인되는 상황 하에서, 관급품 군도를 얻을 수 없었던 군조나 오장들이 사제 일본도를 차고 다니던 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즉 실질적으로는 정규 군도뿐만이 아니라 카타나까지 일본군들이 흔하게 차고 다녔다는 것으로써, 이종군도는 조그마한 일탈이 아니라 하나의 경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특징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보통 카타나처럼 허리춤에 끼우고 다니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일반 군도와 마찬가지로 복식규정에 맞추어 패용해야만 했다. 따라서 보통 군도들처럼 칼집에 야전용가죽덮개를 실시하고, 패용 고리를 달아놓아 겉보기에는 군도와 큰 차이가 나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고전 카타나인 이종군들에 잠금장치가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똑딱이 단추나 끈으로 묶는 식으로 간이 잠금장치를 달아놓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칼집의 야전용가죽덮개 색깔로 육군용인가 해군용인가를 구분하는데, 흙색이면 육군용, 흑색이나 군청색이라면 해군용이다.
3. 관련 항목
일본군도(日本軍刀)
구군도(旧軍刀)
신군도(新軍刀)
- 육군부사관도(陸軍下士官刀)
- 95식 군도(九五式下士官刀)
- 일본군도의 라이벌 항일대도(抗日大刀)
- 무라타도(村田刀) - 총기설계자 무라타 소장이 제조한 칼날
- 만철도/흥아일심도(滿鐵刀/興亞一心刀) - 남만주철도공사에서 제조한 칼날
- 미카사도(三笠刀) - 전함 미카사의 파괴된 포신으로 만든 칼날
- 조병도(造兵刀) - 육군조병창에서 생산된 칼날
- 진무도(振武刀) - 금속공학을 통한 타바드강(鋼)으로 만들어진 칼날
- 군수도(群水刀) - 군마수전사의 사장인 미야구치 타케히데가 만든 칼날
- 스테인리스도(耐錆鋼刀) -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든 칼날
일본군도를 사용하는 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