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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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部麒次郎 / 1869.4.2 ~ 1949.5.1
일본의 총기 개발자로서 제국주의 시대 일본군의 대부분의 일본군 총이 이 사람의 손을 거쳤다. 최종계급은 중장. 지금의 사가현 출신.
수 없이 많은 화기 개발에 관여해온 행보 덕에, 일본의 존 브라우닝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물론 존 브라우닝의 작품이 수십, 혹은 백년이 넘게도 세계 군대의 제식 병기에 깊게 관여하고 있으며 총기 개발사에 막대한 영향을 준 반면, 이 사람의 결과물이 현대 총기 개발사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일본 내에서도 그의 발명품들은 전부 퇴역한 지 오래다. 다만 열강에 비교해서 '뭐 우리 형편에 서양 최신 기술 트렌드를 따라가면서 이 정도면 훌륭하지' 식의 총기를 만들어 내 일본의 무기국산화를 지도한 데 있어서는 과연 일본 '만'의 존 브라우닝 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자살권총으로 악명높은 남부 권총(제식명은 14년식 권총.)과 94식 권총, 3년식 기관총, 남부 기관단총, 11년식 경기관총 등을 만들었다. 다만 본인으로서는 억울할 것이 남부 권총에 남부 키지로는 기본 설계에만 참여하였고 그외 다른 총들도 당시 일본 공업력이 남부 키지로의 설계를 따라오지 못하거나 높으신 분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주다가 이상해진 경우가 많다.
특히 11년식 경기관총이 가관인데, 탄띠 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운 기술이었기에 처음 개발 당시 키지로는 무난하게 탈착식 탄창으로 만들려고 했더니 높으신 분들이 돈이 없다고 탄 클립을 쓰라고 요청했던 것. 탄 클립을 기관총에 어쩔 수 없이 적용해야했기 때문에 결국 탄 클립을 층층이 쌓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했다. 물론 당시 탄띠가 당시로서는 어려운 방식이었고 온갖 해괴한 방식이 총이 막 튀어나던 시기인지라 좀 감안을 하긴 해야겠지만 어찌되던 11년식의 클립 적재 방식은 명품 대공포 오리콘에도 사례가 있었듯이 설계대로만 제대로 만들었다면 괜찮았다. 그러나 구조 특성상 기름칠을 꼭해줘야만 제대로 동작했기에 기름통을 설치해 발사 때 기름칠이 되도록 만들었어야했지만, 오히려 기름 때문에 이물질이 덕지적지 달라붙으면서 총체적 난국에 빠진다. 결국 96/99식 경기관총을 도입하게 되는데, 이놈은 탄창 방식이다. 일본 공업력이 받쳐주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지만, 애초부터 탄띠나 탄창방식을 도입하면 그만인 문제를 일본 군부의 결정 하나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던 것. 11년식 사례만 봐도 알겠지만 키지로 본인의 문제보다는 외적인 문제가 더 컸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회사는 새로운 무기 생산이 금지되었고 회사도 폐쇄 위기에 몰렸지만 1946년 일본방위를 위해 새로 창설된 일본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 대원들의 무장의 신속한 필요성을 절감한 GHQ의 허락 하에 新中央工業(신츄오 공업)으로 재탄생하여 경찰 예비대,미군의 군용기 기총, 기관포 정비 등을 주요 업무로 사업을 다시 열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훗날 미네베아사에 합병된다.
南部麒次郎 / 1869.4.2 ~ 1949.5.1
일본의 총기 개발자로서 제국주의 시대 일본군의 대부분의 일본군 총이 이 사람의 손을 거쳤다. 최종계급은 중장. 지금의 사가현 출신.
수 없이 많은 화기 개발에 관여해온 행보 덕에, 일본의 존 브라우닝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물론 존 브라우닝의 작품이 수십, 혹은 백년이 넘게도 세계 군대의 제식 병기에 깊게 관여하고 있으며 총기 개발사에 막대한 영향을 준 반면, 이 사람의 결과물이 현대 총기 개발사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일본 내에서도 그의 발명품들은 전부 퇴역한 지 오래다. 다만 열강에 비교해서 '뭐 우리 형편에 서양 최신 기술 트렌드를 따라가면서 이 정도면 훌륭하지' 식의 총기를 만들어 내 일본의 무기국산화를 지도한 데 있어서는 과연 일본 '만'의 존 브라우닝 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자살권총으로 악명높은 남부 권총(제식명은 14년식 권총.)과 94식 권총, 3년식 기관총, 남부 기관단총, 11년식 경기관총 등을 만들었다. 다만 본인으로서는 억울할 것이 남부 권총에 남부 키지로는 기본 설계에만 참여하였고 그외 다른 총들도 당시 일본 공업력이 남부 키지로의 설계를 따라오지 못하거나 높으신 분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주다가 이상해진 경우가 많다.
특히 11년식 경기관총이 가관인데, 탄띠 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운 기술이었기에 처음 개발 당시 키지로는 무난하게 탈착식 탄창으로 만들려고 했더니 높으신 분들이 돈이 없다고 탄 클립을 쓰라고 요청했던 것. 탄 클립을 기관총에 어쩔 수 없이 적용해야했기 때문에 결국 탄 클립을 층층이 쌓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했다. 물론 당시 탄띠가 당시로서는 어려운 방식이었고 온갖 해괴한 방식이 총이 막 튀어나던 시기인지라 좀 감안을 하긴 해야겠지만 어찌되던 11년식의 클립 적재 방식은 명품 대공포 오리콘에도 사례가 있었듯이 설계대로만 제대로 만들었다면 괜찮았다. 그러나 구조 특성상 기름칠을 꼭해줘야만 제대로 동작했기에 기름통을 설치해 발사 때 기름칠이 되도록 만들었어야했지만, 오히려 기름 때문에 이물질이 덕지적지 달라붙으면서 총체적 난국에 빠진다. 결국 96/99식 경기관총을 도입하게 되는데, 이놈은 탄창 방식이다. 일본 공업력이 받쳐주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지만, 애초부터 탄띠나 탄창방식을 도입하면 그만인 문제를 일본 군부의 결정 하나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던 것. 11년식 사례만 봐도 알겠지만 키지로 본인의 문제보다는 외적인 문제가 더 컸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회사는 새로운 무기 생산이 금지되었고 회사도 폐쇄 위기에 몰렸지만 1946년 일본방위를 위해 새로 창설된 일본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 대원들의 무장의 신속한 필요성을 절감한 GHQ의 허락 하에 新中央工業(신츄오 공업)으로 재탄생하여 경찰 예비대,미군의 군용기 기총, 기관포 정비 등을 주요 업무로 사업을 다시 열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훗날 미네베아사에 합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