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식 경기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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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年式軽機関銃 (じゅういちねんしきけいきかんじゅう)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본군이 사용했던 '''클립 사용식 경기관총.''' 30/38식 아리사카 소총에 사용된 6.5x50mm SR탄을 사용한다. 원활한 윤활유 공급을 위한 윤활유 탱크가 총몸 상단에 내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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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경기관총, 호치키스 M1909, 마드센 경기관총, 쇼샤 경기관총, MG15nA 등의 경기관총이나 자동소총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을 본 일본은 자신들도 경기관총이 하나쯤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11식 경기관총을 개발하게 된다.
이 기관총을 개발한 사람은 일본 자동화기의 아버지인 남부 키지로로, 이 사람이 처음에 설계한 경기관총은 그냥 무난한 상자형 착탈식 탄창을 사용하는 급탄방식을 채용했다.
그 이유는 기존의 기관총인 3년식 기관총의 급탄방식은 보탄판이라고 하는 철판을 이용한 방식으로 30발 클립 또는 이를 다수 연결(최대 150발까지)한 것을 사용하는 방식이며, 프랑스의 호치키스 기관총이 사용하던 급탄구조다. 어떤 의미로 이 방식은 일본군이 사용한 기관총 급탄구조 중 '''가장 신뢰성이 높았다.'''
그러나 보탄판을 이용한 클립 방식은 당시 기준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탄띠 방식을 채용 했다가는 기관총이 크고 무거워져 일본의 기술력으론 죽어도 '경'기관총에 적용 할수 없었기에 채택한 방식으로 장시간 사격시 탄띠만 계속 물리면 되는 탄띠 방식에 비해 숙련된 부사수가 없으면 지속 사격이 힘들 뿐 아니라, 보탄판을 일정 길이 이상 이으면 급탄이 안되는 것은 물론, 무겁고 한쪽 방향으로 보탄판이 크게 돌출하기 때문에 심하면 거치한 기관총이 넘어지는 사고까지 일어난다.
그래서 보탄판을 이용한 클립식 급탄은 일본의 현실을 감안해볼 때 중기관총에는 그럭저럭 괜찮을지 몰라도, 야전에서 들고 돌격을 해야 하는 경기관총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높으신 분들은 탄창이 비싸니[2] 더 저렴한 걸 쓰라며 딴지를 걸었고, 난부 소장은 어쩔 수 없이 '''아리사카 소총 클립을 차곡차곡 포개어 놓는 방식'''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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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에서와 같이 발사된 총탄 화약의 가스 압력으로 노리쇠 뭉치가 후퇴 전진하면서, 여기에 걸쳐 있는 급탄기 하단의 부품이 좌우 운동하면서 다음 탄을 한발 한발 끌어오는 방식이다.
이 기관총의 의의는 '''세계 최초로 보병용 소총 클립으로 장전하는 기관총'''이라는 것에 있다. 전대미문이라고 볼 수 있는 이 방식은 소총 클립을 쓰기 때문에 기관총 전용 클립을 만들 필요가 없었고, 소총용 탄약을 그대로 쓸 수 있으며, 나름대로 괜찮은 연사능력을 갖고 있다는 장점은 있었다.
비슷한 것으로는 구형의 수동 개틀링 기관총이나 오리콘 대공포 등에서 사용하는 중력급탄식이 있는데, 탄을 한 발씩 수직으로 일렬로 세워서 급탄기에 끼워놓으면 중력에 따라 수직으로 내려가 총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11식 경기관총은 5발 탄클립을 수평으로 여러 개를 쌓아올려놓았으니 총알이 수직과 수평방향 둘 다로 움직여야 하는 상당히 복잡한 구조다.
또한 이런 중력급탄식은 사격하는 중에도 계속 탄을 넣어서 자유롭게 장전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11년식 경기관총의 경우는 중력만으로는 급탄이 완벽히 되지 않아 급탄기 뚜껑이 탄클립을 아래로 눌러주는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격 중에 이를 열어놓고 자유롭게 재장전하기는 어려웠다. 아예 뚜껑 자체에 누르는 힘을 주기 위해 스프링이 달려 있었다.
11년식 경기관총은 1922년부터 1941년까지 29,000정이 생산되었으며, 일본 국내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기관총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래서 일본은 용기백배했고, 중국에도 이 총을 들고 갔다. 물론 태평양 전쟁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복잡한 구조를 가진 급탄기는 이물질 유입이 쉬운 구조인 데다 간단한 가죽으로 된 탄창 덮개마저도 개발과 보급이 안 된 덕분에 탄창 내부에 파편이나 먼지, 진흙등이 달라붙기 쉬웠다. 게다가 일본의 낮은 공업능력으로 인해 노리쇠와 약실의 공차가 커서 탄피에 기름을 칠하는 윤활유 통을 장착해야 했는데, 문제는 일본군의 주 전장이었던 만주 등지에서는 흙먼지가 휘날리는 게 일상이어서 이물질이 유입되기 더 쉬웠고, 유입된 이물질이 윤활유에 달라붙는 바람에 고장이 속출했다.
반면 국민당군은 탄창을 사용하는 데다 신속한 총열 교환이 가능한 선진적인 Vz.26을 사용했고, 이로 인해 일본군 기관총 사수들은 국민당군의 Vz.26을 '무고장 기관총'이라고 부르며 노획한 후에 요긴하게 써먹었다. 이후 11년식을 기반으로 Vz.26을 많이 참고해 개발한 96/99식 경기관총을 도입하게 된다. 하지만 11년식의 공차 문제는 96식까지 이어져셔 여전히 윤활유를 칠해야 했고, 이 문제는 99식에 와서야 해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공업 생산 능력은 미약하기 그지 없었기 때문에 11식 경기관총은 96식, 99식 경기관총이 등장하던 시점에서도 퇴역하지 못하고 태평양 전쟁이 종전될 때까지 계속 사용되게 된다. 이후 한반도에 남겨진 물자들은 6.25 전쟁에서 인민군이 사용했다.
한편 문제점이 다소 와전된 부분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1년식 경기관총이 약장 탄환을 사용했다는 오해인데, 이는 탄약 포장지에 적힌 G를 ''''G'''ensou(減少)'로 착각한 맥아더 장군의 정보 부대의 오인 때문이다. 실제로는 탄매와 총구화염 및 총성을 줄이기 위해[3] 글리세린 용액이나 흑연 등이 쓰였고, 이에 따라 글리세린('''G'''lycerin)의 앞글자를 딴 G를 붙인 것이다.[4] 화약 성분의 변화로 1.5g 가량의 화약이 줄어들었으나 기초적 탄속과 위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11년식 경기관총에는 가스조절기가 장착되어 있어서 탄약의 가스압이 다르더라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소총수용 탄을 기관총에 그대로 사용하겠다는 컨셉이 나온 이유를 생각해보면 문제가 되는 일이다.
애초에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군수보급 능력을 가진 일본군 이었기에 이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 하고자 내놓은 생각이 소총수용 클립탄을 바로 기관총에 사용할수 있게 하는 거였다. 한마디로 같은탄을 보탄판에 넣어 보급하는것 마져도 힘들어 했다는 것.
상황이 이런데 총문제 때문에 기관총탄 생산라인을 따로 만들어 탄을 생산한다니....환장할 노릇이다.
천조국 소리듣는 미국이 보급 단일화를 위해 사용유류를 비싼 항공유로 통일한게 돈지랄 하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다.
1차대전때 사용된 기관총에는 도유장치가 달린 기관총이 꽤 있었다.
당시의 공업능력으론 당연한 일일수 있으나 이총이 주로 사용된 장소가 만주였다는걸 생각하면 심각한 얘기다.
모래바람 이라도 분다면 모래나 이물질이 탄에 칠해진 기름에 엉겨붙게 되고 이는 기능고장으로 이어진다.
베트남전때 미보병이(주둔지가 아닌 정찰이나 공격에 나선 부대) 사용하는 M60이 헬기장착 M60에 비해 기능고장이 많이 발생한게 괜히 그런게 아니다.
정글 이동시 기관총탄을 탄통에 넣고 들고다니기 보다 주로 어깨에 대각선으로 걸치고 다녓는데(쇠로된 네모난 탄통은 무겁고 휴대가 불편한지라)
당연이 탄에 이물질이 많이 묻었고 기능고장 발생율 또한 늘어났다.
파생형으로는 91식 차재 경기관총과 항공용 89식 선회 기관총이 있다.
91식은 후기형부터 채용한 방탄 장치와 1.5배율 조준경을 달아서 차량용 기관총으로 사용되었는데, 굳이 차량용으로 사용하지 않아도 차량에서 방탄 장치와 조준경을 함께 분리해서 양각대와 개머리판을 달아 보병용으로 사용하거나, 대공 기구에 실어서 대공 기관총으로도 활용이 가능했다. 1932년부터 1936년까지 2,000정이 생산되었으며, 전차 및 장갑차에 탑재되어 운용되었으나 이후 Vz.26 계열인 97식 차재 중기관총이 등장하면서 교체되었다.
89식은 7.7x58mmSR를 사용하며, 11식의 탄창을 옆으로 돌려놓은 쟁반 탄창으로 장전한다. 또한 발사 속도도 분당 1,400발(테4의 경우 730발)로 늘었다.
참고로 11식 경기관총에선 총검을 달 수 없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은 96/99식 경기관총에선 총검을 달 수 있기 때문이다. 11식이 개발될 때는 중대장 직할의 독립 경기관총 분대를 두고 운영하고 있었는지라 기관총 사수가 보병과 같이 돌격할 일이 없었기에 그런 장치가 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에 의해 일본군이 무장해제되면서 11식 경기관총은 미국 민간에 흘러 들어갔는데, 장전 방식과 총소리가 특이하여 클래식 건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전설급 무기 취급 받는다. 돈주고 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정작 생산국이었던 일본에서는 총이 남아있지가 않다.
소련군이 노획한 11년식의 구조를 참고하여 DP-28 큐비노프 기관총을 만든적 있는데 정식 채용되지는 않았다.[5]
96/99식 경기관총에 비해 등장 비중이 매우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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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링의 13소녀에서 일본군이 사용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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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도 등장. 후반 주인공들을 추격하는 일본군이 92식 중기관총과 함께 트럭에서 마적들을 사살하는데 사용한다.
배틀필드 V에서 보급병의 주무기로 등장. 타이드 오브 워: 챕터 6 업데이트를 통해 추가되었다. 실총과 다르게 탄통을 탄창 취급하며 교체 하는 것으로 장전한다.[7]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본군이 사용했던 '''클립 사용식 경기관총.''' 30/38식 아리사카 소총에 사용된 6.5x50mm SR탄을 사용한다. 원활한 윤활유 공급을 위한 윤활유 탱크가 총몸 상단에 내장되어 있다.
2.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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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경기관총, 호치키스 M1909, 마드센 경기관총, 쇼샤 경기관총, MG15nA 등의 경기관총이나 자동소총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을 본 일본은 자신들도 경기관총이 하나쯤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11식 경기관총을 개발하게 된다.
이 기관총을 개발한 사람은 일본 자동화기의 아버지인 남부 키지로로, 이 사람이 처음에 설계한 경기관총은 그냥 무난한 상자형 착탈식 탄창을 사용하는 급탄방식을 채용했다.
그 이유는 기존의 기관총인 3년식 기관총의 급탄방식은 보탄판이라고 하는 철판을 이용한 방식으로 30발 클립 또는 이를 다수 연결(최대 150발까지)한 것을 사용하는 방식이며, 프랑스의 호치키스 기관총이 사용하던 급탄구조다. 어떤 의미로 이 방식은 일본군이 사용한 기관총 급탄구조 중 '''가장 신뢰성이 높았다.'''
그러나 보탄판을 이용한 클립 방식은 당시 기준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탄띠 방식을 채용 했다가는 기관총이 크고 무거워져 일본의 기술력으론 죽어도 '경'기관총에 적용 할수 없었기에 채택한 방식으로 장시간 사격시 탄띠만 계속 물리면 되는 탄띠 방식에 비해 숙련된 부사수가 없으면 지속 사격이 힘들 뿐 아니라, 보탄판을 일정 길이 이상 이으면 급탄이 안되는 것은 물론, 무겁고 한쪽 방향으로 보탄판이 크게 돌출하기 때문에 심하면 거치한 기관총이 넘어지는 사고까지 일어난다.
그래서 보탄판을 이용한 클립식 급탄은 일본의 현실을 감안해볼 때 중기관총에는 그럭저럭 괜찮을지 몰라도, 야전에서 들고 돌격을 해야 하는 경기관총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높으신 분들은 탄창이 비싸니[2] 더 저렴한 걸 쓰라며 딴지를 걸었고, 난부 소장은 어쩔 수 없이 '''아리사카 소총 클립을 차곡차곡 포개어 놓는 방식'''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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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에서와 같이 발사된 총탄 화약의 가스 압력으로 노리쇠 뭉치가 후퇴 전진하면서, 여기에 걸쳐 있는 급탄기 하단의 부품이 좌우 운동하면서 다음 탄을 한발 한발 끌어오는 방식이다.
이 기관총의 의의는 '''세계 최초로 보병용 소총 클립으로 장전하는 기관총'''이라는 것에 있다. 전대미문이라고 볼 수 있는 이 방식은 소총 클립을 쓰기 때문에 기관총 전용 클립을 만들 필요가 없었고, 소총용 탄약을 그대로 쓸 수 있으며, 나름대로 괜찮은 연사능력을 갖고 있다는 장점은 있었다.
비슷한 것으로는 구형의 수동 개틀링 기관총이나 오리콘 대공포 등에서 사용하는 중력급탄식이 있는데, 탄을 한 발씩 수직으로 일렬로 세워서 급탄기에 끼워놓으면 중력에 따라 수직으로 내려가 총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11식 경기관총은 5발 탄클립을 수평으로 여러 개를 쌓아올려놓았으니 총알이 수직과 수평방향 둘 다로 움직여야 하는 상당히 복잡한 구조다.
또한 이런 중력급탄식은 사격하는 중에도 계속 탄을 넣어서 자유롭게 장전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11년식 경기관총의 경우는 중력만으로는 급탄이 완벽히 되지 않아 급탄기 뚜껑이 탄클립을 아래로 눌러주는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격 중에 이를 열어놓고 자유롭게 재장전하기는 어려웠다. 아예 뚜껑 자체에 누르는 힘을 주기 위해 스프링이 달려 있었다.
3. 문제점
11년식 경기관총은 1922년부터 1941년까지 29,000정이 생산되었으며, 일본 국내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기관총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래서 일본은 용기백배했고, 중국에도 이 총을 들고 갔다. 물론 태평양 전쟁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복잡한 구조를 가진 급탄기는 이물질 유입이 쉬운 구조인 데다 간단한 가죽으로 된 탄창 덮개마저도 개발과 보급이 안 된 덕분에 탄창 내부에 파편이나 먼지, 진흙등이 달라붙기 쉬웠다. 게다가 일본의 낮은 공업능력으로 인해 노리쇠와 약실의 공차가 커서 탄피에 기름을 칠하는 윤활유 통을 장착해야 했는데, 문제는 일본군의 주 전장이었던 만주 등지에서는 흙먼지가 휘날리는 게 일상이어서 이물질이 유입되기 더 쉬웠고, 유입된 이물질이 윤활유에 달라붙는 바람에 고장이 속출했다.
반면 국민당군은 탄창을 사용하는 데다 신속한 총열 교환이 가능한 선진적인 Vz.26을 사용했고, 이로 인해 일본군 기관총 사수들은 국민당군의 Vz.26을 '무고장 기관총'이라고 부르며 노획한 후에 요긴하게 써먹었다. 이후 11년식을 기반으로 Vz.26을 많이 참고해 개발한 96/99식 경기관총을 도입하게 된다. 하지만 11년식의 공차 문제는 96식까지 이어져셔 여전히 윤활유를 칠해야 했고, 이 문제는 99식에 와서야 해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공업 생산 능력은 미약하기 그지 없었기 때문에 11식 경기관총은 96식, 99식 경기관총이 등장하던 시점에서도 퇴역하지 못하고 태평양 전쟁이 종전될 때까지 계속 사용되게 된다. 이후 한반도에 남겨진 물자들은 6.25 전쟁에서 인민군이 사용했다.
4. 전용 약장탄 루머
한편 문제점이 다소 와전된 부분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1년식 경기관총이 약장 탄환을 사용했다는 오해인데, 이는 탄약 포장지에 적힌 G를 ''''G'''ensou(減少)'로 착각한 맥아더 장군의 정보 부대의 오인 때문이다. 실제로는 탄매와 총구화염 및 총성을 줄이기 위해[3] 글리세린 용액이나 흑연 등이 쓰였고, 이에 따라 글리세린('''G'''lycerin)의 앞글자를 딴 G를 붙인 것이다.[4] 화약 성분의 변화로 1.5g 가량의 화약이 줄어들었으나 기초적 탄속과 위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11년식 경기관총에는 가스조절기가 장착되어 있어서 탄약의 가스압이 다르더라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소총수용 탄을 기관총에 그대로 사용하겠다는 컨셉이 나온 이유를 생각해보면 문제가 되는 일이다.
애초에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군수보급 능력을 가진 일본군 이었기에 이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 하고자 내놓은 생각이 소총수용 클립탄을 바로 기관총에 사용할수 있게 하는 거였다. 한마디로 같은탄을 보탄판에 넣어 보급하는것 마져도 힘들어 했다는 것.
상황이 이런데 총문제 때문에 기관총탄 생산라인을 따로 만들어 탄을 생산한다니....환장할 노릇이다.
천조국 소리듣는 미국이 보급 단일화를 위해 사용유류를 비싼 항공유로 통일한게 돈지랄 하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다.
1차대전때 사용된 기관총에는 도유장치가 달린 기관총이 꽤 있었다.
당시의 공업능력으론 당연한 일일수 있으나 이총이 주로 사용된 장소가 만주였다는걸 생각하면 심각한 얘기다.
모래바람 이라도 분다면 모래나 이물질이 탄에 칠해진 기름에 엉겨붙게 되고 이는 기능고장으로 이어진다.
베트남전때 미보병이(주둔지가 아닌 정찰이나 공격에 나선 부대) 사용하는 M60이 헬기장착 M60에 비해 기능고장이 많이 발생한게 괜히 그런게 아니다.
정글 이동시 기관총탄을 탄통에 넣고 들고다니기 보다 주로 어깨에 대각선으로 걸치고 다녓는데(쇠로된 네모난 탄통은 무겁고 휴대가 불편한지라)
당연이 탄에 이물질이 많이 묻었고 기능고장 발생율 또한 늘어났다.
5. 파생형
파생형으로는 91식 차재 경기관총과 항공용 89식 선회 기관총이 있다.
91식은 후기형부터 채용한 방탄 장치와 1.5배율 조준경을 달아서 차량용 기관총으로 사용되었는데, 굳이 차량용으로 사용하지 않아도 차량에서 방탄 장치와 조준경을 함께 분리해서 양각대와 개머리판을 달아 보병용으로 사용하거나, 대공 기구에 실어서 대공 기관총으로도 활용이 가능했다. 1932년부터 1936년까지 2,000정이 생산되었으며, 전차 및 장갑차에 탑재되어 운용되었으나 이후 Vz.26 계열인 97식 차재 중기관총이 등장하면서 교체되었다.
89식은 7.7x58mmSR를 사용하며, 11식의 탄창을 옆으로 돌려놓은 쟁반 탄창으로 장전한다. 또한 발사 속도도 분당 1,400발(테4의 경우 730발)로 늘었다.
6. 기타
참고로 11식 경기관총에선 총검을 달 수 없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은 96/99식 경기관총에선 총검을 달 수 있기 때문이다. 11식이 개발될 때는 중대장 직할의 독립 경기관총 분대를 두고 운영하고 있었는지라 기관총 사수가 보병과 같이 돌격할 일이 없었기에 그런 장치가 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에 의해 일본군이 무장해제되면서 11식 경기관총은 미국 민간에 흘러 들어갔는데, 장전 방식과 총소리가 특이하여 클래식 건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전설급 무기 취급 받는다. 돈주고 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정작 생산국이었던 일본에서는 총이 남아있지가 않다.
소련군이 노획한 11년식의 구조를 참고하여 DP-28 큐비노프 기관총을 만든적 있는데 정식 채용되지는 않았다.[5]
7. 미디어에서의 등장
96/99식 경기관총에 비해 등장 비중이 매우 낮다.
7.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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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링의 13소녀에서 일본군이 사용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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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도 등장. 후반 주인공들을 추격하는 일본군이 92식 중기관총과 함께 트럭에서 마적들을 사살하는데 사용한다.
7.2. 게임
배틀필드 V에서 보급병의 주무기로 등장. 타이드 오브 워: 챕터 6 업데이트를 통해 추가되었다. 실총과 다르게 탄통을 탄창 취급하며 교체 하는 것으로 장전한다.[7]
8. 둘러보기
[1] 91식의 경우 9개가 들어가 총 45발을 장전할 수 있다.[2] 탄창 껍데기야 철판을 프레스로 찍은 다음 대충 접으면 되지만, 문제는 스프링. 당시에는 탄성 좋고 잘 망가지지 않는 스프링은 제조비용이 꽤 높게 들어갔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어떻게든 분리식 탄창을 쓰지 않으려고 머리를 굴렸던 이유가 있는 것.[3] 38식 소총에 비해 짧은 총열 탓에 장약이 다 타기도 전에 탄환이 총열을 빠져나갔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이 때문에 더 빨리 연소하는 별도의 화약이 필요했던 것.[4] 총구화염과 총성이 감소했다는 장점 덕에 97식 저격총을 사용하는 저격수들에게 기관총용 탄약이 지급되었고, 97식 저격총의 긴 총열과 뛰어난 위장ㆍ은폐술 및 일본군 특유의 실패를 치욕스러워하는 분위기로 인해 미군이 저격수를 탐지하는 것이 어려워졌다.[5] 시제품 공개 당시 한 연구원이 장전부에 연필을 올려놓고 닫았더니 클립을 누르는 철판의 스프링이 강력해서 연필이 단번에 동강났다는 이야기가 있다.[6] 무슨 이유인지 기관총이 살짝 기울어져 있는데, 실전에서는 이렇게 쏘아서는 안 된다. 총열과 가늠자-가늠쇠는 수직을 축선으로 얕은 각도를 그리며 교차하도록 만들어지기 때문. 이 축이 틀어지면 총알은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다.(실제로 클림을 넣는 곳이 왼쪽에 있고 개머리판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정조준이 힘들었다고 한다.)[7] 특성화 트리의 3단계를 찍으면 잔탄이 남은 탄통을 새 걸로 교체하는 모션 대신 덮개를 열고 탄클립을 넣는 본래 실총의 고증대로 장전하는 모션으로 바뀌어 재장전 속도가 확연하게 줄어든다. 다만 이 특성화 모션은 잔탄이 5의 배수일 때만 발동하며 그 외의 잔탄이 남았을 때 장전하면 기존의 탄통 자체를 교체하는 모션이 나오므로 주의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