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민
來敏
(? ~ ?)[1]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자는 경달(敬達). 내염의 아들. '''97세'''에 죽은 매우 장수한 인물.
의양군 신야현 사람으로 내흡의 후손이다. 매부 황완이 유장의 당숙[2] 이라 함께 형주로 피난한 내민의 누이를 유장이 불러들였고, 내민도 누이를 따라 유장의 빈객으로 들어간다.
독서폭이 상당히 넓었는데, 특히 춘추좌씨전에 뛰어나 창힐편과 이아에 정통하면서 문자 교정하는 일을 좋아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민에 대한 참소가 있어, 유비에게 홀대받는다.[3] 하지만 차별하거나 불이익을 준 것은 아니고 달리 예우하지 않는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인정받아 전학교위가 되었고 유선이 태자로 정해질 무렵에는 가령으로 임명되었다. 유선이 즉위할 때 호분중랑장이 되었다가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할 때는 군좨주, 보군장군이 될 것을 요청받았는데,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을 떠나게 되었다.
제갈량집에 따르면 내민은 입을 함부로 놀려 여러번 면직되었다고 한다. 대개는 노골적으로 동윤 등 신입상관의 공이나 덕행을 폄하하였고, 이에 주변인들에게서 미움을 받자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었으며, 끝내는 나이를 앞세우는 등 추태를 부렸다고 한다. 그래서 제갈량은 내민을 공융보다 더한 혼란을 불러올거라고 하며 그를 파직시켰다.
제갈량이 사망한 후 성도로 돌아와 대장추가 되었다가[4] 다시 면직되고, 후에 여러 차례 승진해 광록대부가 되었지만 또 다시 잘못을 범해 쫓겨났다. 이런 식으로 파직과 재등용을 반복하다가 집신장군에 오른 후 경요 연간[5] 에 '''97세'''로 사망했다.
나이가 많고 박학한 학자라 제법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그가 여러 번 면직되거나 강등된 것을 보면 학문적 능력과 별개로 사회성이 몹시 떨어졌던 것으로 내민이 앞뒤로 여러 번 면직되거나 강등된 것은 모두 말에 절도가 없고 행동이 일상적인 규범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맹광(孟光) 또한 중대한 일에 있어서 신중한 태도가 없이 시정(時政: 그 때의 정사政事)에 간여하는 의론(議論)을 발표하는데, 내민보다 더 심했다.
그들은 모두 나이가 많고 박학한 학자로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내민은 형초(荊楚)의 명가(名家)이며 태자의 노신(老臣)이었으므로 특별히 우대를 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면직된 후에 또 기용되었다.
아들 내충(來忠) 역시 유가경전을 광범위하게 읽었고, 내민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으며, 상서(尙書: 천자와 조신 사이에 왕래하는 문서를 맡아보던 관직) 상충(尙充) 등과 함께 대장군(大將軍) 강유(姜維)를 보좌했다. 강유는 그를 평가하여 참군(參軍)으로 임명했다.
2. 창작물에서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4부터 등장하고 능력치는 통솔 38, 무력 34, 지력 66, 정치 60, 매력 31이며 일러스트는 찡그린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다. 개성은 인맥, 학자, 오만, 주의는 명리, 정책은 본초학 Lv 2, 진형은 충차, 전법 역시 충차, 친애무장은 비의, 유선,[6] 혐오무장은 맹광이다. 생년은 164년, 몰년은 260년까지 되어있다.
[1] 단 경요 연간에 내민이 97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것이 적혀있다. 162년과 167년 사이에 태어나, 258년과 263년 사이에 죽었다. 즉, '''관우, 장비랑 동갑일지도 모르는데 고작 촉한 멸망 수 년전에 죽었다.'''[2] 할머니의 조카다.[3] 유비의 안목을 고려했을 때 단지 참소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홀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기한 내용을 보면 유비는 이 당시에 내민이란 사람을 꿰뚫어 본 것으로 보인다.[4] 제갈량 생전에는 면직된 채 복귀하지 못했다가 제갈량 사후에나 복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재가 워낙 부족해 웬만하면 안고 가는 제갈량이었지만, 내민은 내정이나 군무에 그다지 소질이 없는 단순 학자였기 때문에 문제만 일으키는 놈이라고 생각해서 내각에 배제했던 것으로 보인다.[5] 258 ~ 263년이다.[6] 유표의 막료인 유선, 왕귀인 소생의 유선이 아닌 유비의 아들이자 경애황후의 남편인 후주 유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