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종교
1. 개요
2016년 통계 기준으로 무종교인이 50.1%에 달하며, 종교인구는 가톨릭이 23.1%, 개신교가 15.5%를 차지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 무종교율은 공산주의 체제를 겪지 않은 서유럽 국가로서 매우 높은 수치이다.[1] 종교적인 면에서는 독일과 비슷한 면이 많은데, 1. (현대에는 그렇지 않으나) 과거에 개신교 다수 지역이었다는 점 2. 교세가 지역에 따라서 확연하게 다르다는 점 등에서 그렇다.
전통적으로 네덜란드는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특성상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며, 이로 인해 1950년대까지는 개신교, 가톨릭, 사회주의, 우파 세속주의가 각자 학교, 언론사, 정당 등을 조직하여 공존과 합의를 추구하는 '기둥화'(verzuiling) 사회가 성립되었다.[2]
종교개혁 이후 17~20세기 초까지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로 일컬어지는 칼뱅파 개신교가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아브라함 카이퍼 등 목사 출신 총리가 배출되는 등 정치 분야에도 큰 영향력을 떨쳤으나 2차대전 이후 개신교는 급격한 감소세를 탔고 무종교인이 늘면서 현대에는 사실상 소수종교로 전락했다.# 과거의 흔적은 왕실과 바이블벨트에만 남아있다고 봐야 할 수준.
가톨릭도 정당이나 방송국 활동으로 맞불을 놓으며 2차대전을 지나고도 1980년대까지는 개신교보다 좀 더 오래 버텼지만, 역시 현대에는 급격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으며 그나마 적극적으로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도 얼마 없고 대다수는 냉담자들인 경우가 많아 통계상으로만 제1 종교집단 지위를 유지하는 수준에서 체면 치례 중이다. 사실 벨기에의 가톨릭 비중이 40%대란 것과 비교하면 네덜란드의 가톨릭이 메이저라 보기도 어렵다.
이러한 1960년대 이후의 탈종교화 현상을 탈기둥화(ontzuiling)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는 아직도 기독교의 영향이 꽤 남아있다.
최근에는 여느 유럽 국가들처럼 난민과 이민자들을 통한 무슬림 인구가 증가하면서 반이슬람 감정이 높아지는 추세이다. 2019년에 네덜란드에서는 직업훈련서 면도를 거부한 무슬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지 말라는 판결이 나왔다.#
유럽계 식민제국들이 식민지의 종교에 영향을 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에게 별다른 종교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이는 상업적인 이윤만 남기면 OK를 외치는 네덜란드 항해자들 특유의 마인드도 한몫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상업적인 마인드가 충만하다고 한들, 원주민 중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서구화 비중이 높은게 당연한지라, 점점 보이지 않는 차별이 형성되게 된다.[3]
또한 다른 제국주의 나라와 같이 엄청나게 약탈하고 뜯어가긴 매한가지라 인도네시아에선 네덜란드에 대한 반감이 반기독교 감정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건 거의 수마트라 섬/자바 섬에 주로 있는 무슬림들 이야기이고(이들이 인니 인구의 90% 가까이) 이리안자야나 말루쿠, 그리고 화교 같은 소수민족들은 오히려 네덜란드 선교사가 전해준 개혁교회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였기에''' 결국 민족 및 지역 간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인도네시아의 종교 문단과 기독교공포증 문서를 참조하자.
2. 가톨릭
명목상 네덜란드 최대의 종교집단. 하지만 실질 출석률은 여느 서유럽 국가들처럼 낮은 편에 속한다. 또한 대다수가 노르트브라반트와 림뷔르흐, 그리고 동부 네이메헌 및 엔스헤더 근교 지역을 중심으로 몰려있다.
16세기에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한 이래 국법으로 가톨릭을 금지한 적도 있었으며, 이 조치는 무려 185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로 교계 제도가 회복되자 가톨릭국민당(KVP), 가톨릭 라디오 방송(KRO), Volkskrant 신문사 등을 조직하여 개신교 세력을 견제했다. 20세기에 진입하던 때 이미 개신교 비율이 감소 추세였던 반면, 가톨릭은 20세기 중반때까지 꾸준히 비율을 높여 1960년대 쯤에 약 40%로 정점을 찍었다. 다만 가톨릭의 비율 역시도 천천히 줄기 시작하여 2010년대에는 상기했듯 20%대로 감소했다.
3. 개신교
역사적으로 인문주의가 발달하여 개신교가 문화적으로 쉽게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 대다수 개신교에서 성만찬을 해석하는 방법도 츠빙글리 이전에 코르넬리스 훈(Cornelis Hoen)이라는 네덜란드 인문주의자의 공이 컸다. 그는 성경을 몇 페이지씩 뒤적이지 않아도 단 한 큐에 가톨릭 화체설이 잘못되었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끔 정리했고, 이를 츠빙글리가 받아들여 기념설로 발전시킨 것이다.
네덜란드 국교회의 먼 전신은 1571년 독일 엠덴에서 칼뱅주의자들이 모여 총회를 연 것이 시초로, 이때는 아직 스페인의 가혹한 박해로 개신교 신앙을 지켜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다 네덜란드가 공화국으로 독립하고 한참 지난 1618년에 도르드레흐트에서 예정설에 대한 논란을 두고 총회가 열렸으며, 2년간의 토론 끝에 고마루스라는 한 위그노 출신[4] 신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총회가 마무리되고, 패배한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공적인 예배 활동을 전면금지시켰다.
18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는 화란개혁주의로 일컬어지는 개신교 교세가 60%에 달해 베네룩스 3국 중 유일하게 개신교 위주의 문화를 갖고 있던 나라로 알려지기도 했다.(1849년의 종교 분포도) 사실 종교개혁 초기만 해도 가톨릭의 비중이 더 높았다지만[5] 스페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전쟁 와중에 현 네덜란드의 도시들 대다수가 개신교 진영으로 들어가면서 남부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들에서 개신교가 퍼지기 시작했고, 성당의 성상을 철거하고 교회로 개조하는 사례도 이때에 생겨났다.[6] 그 뒤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남부 브라반트와 동부 트벤터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에 개신교가 퍼졌고, 2차대전 전인 1930년대까지는 다수 종교로 유지되었다.[7] 이 시대까지만 해도 프리슬란트, 드렌터, 흐로닝언 최북단 3개주에 신자가 가장 많았으나 2차대전 이후로는 역설적으로 개신교세가 가장 먼저 쇠퇴한 지역이 되어버렸다.
밑의 NCRV(Nederlandse '''Christelijke''' Radio Vereniging) 방송국 명칭에서도 알 수 있지만 개신교가 한참 끗발 날리던 시절에는 현대 대한민국처럼 기독교=개신교로 통하기도 했었다. 벨기에와 달리 가톨릭은 스스로도 'Katholiek'으로 칭했다.
칼뱅파에 의해 종교개혁이 주도된 관계로 독일 등 루터교 국가에 비하면 장식적인 면에서 매우 절제된 인테리어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설명한 것처럼 간단한 형태의 건물도 있긴 하지만, 델프트같은 큰 도시의 교회들은 나름대로 장식적 요소가 상당한 편이다. 또한 인테리어가 심플하다는 것도 1980년대까지나 그랬지, 에큐메니컬 분위기가 대세가 된 현대에는 대체로 십자가와 성화를 걸어놓고 부활초까지 들여놓는 교회가 더 많아졌다. 먼나라 이웃나라에 묘사된 심플한 교회들은 바이블벨트로 분류된 지역들(킨더다이크, 레르담 등)에서나 원형이 보존된 수준.
또한 타 유럽 국가에 비하면 '전통 문화'라 할 수 있는 요소가 상당히 빈약한데,[8] 이것도 종교개혁때 비성경적, 미신적이라고 상당수를 폐지해버렸기 때문이다. 지역에 따라선 신터클라스 축제를 가톨릭의 잔재라 하여 한동안 금지했다가 1990년대 이후에야 다시 받아들인 사례도 있었다.
영미권, 한국처럼 칼뱅주의가 대세이긴 했으나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직분 명칭이나 예배의식, 관습적, 외형적인 부분에서 소소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를 책임지는 직분을 목사(pastor)가 아닌 다른 명칭으로 부르거나,[9] 상대적으로 의식적인 요소가 중시되고 목사와 장로들이 행진한 후 악수하여 예배 시작을 알리는 것이 눈에 띄는 특징이며 찬송가를 부를 때 끝절까지 다 부르지 않고 주제에 맞다고 생각되는 1~2절 정도만 추려서 부른다. 성만찬 횟수도 1분기당 1~2회 정도로 꽤 자주 하는 편이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도 입장에서는 상당히 황당해할만한 요소들도 있는데 십자가는 안 건다면서 ☧표시를 걸어놓는다던가, 'doophek'이라고 해서 가끔 가톨릭의 장궤틀마냥 강대상과 회중석 사이에 울타리를 쳐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2~3부제로 예배를 진행할 경우 1부와 2부 사이의 텀이 길다. 1부가 10시에 있으면 2부는 저녁 5시에 있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처럼 교회 안에서 점심을 먹는 문화가 없고, 집에서 점심 먹고 놀다가 저녁 되면 다시 교회 가는 식으로 일요일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국에 비하면 주일학교나 유년부 청년부 개념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되어 있다.
개신교의 전성기였던 19세기 중반~20세기 초[10] 에는 아브라함 카이퍼[11] 가 활동했던 '''반혁명당(ARP)'''[12] 등 기독교 정당이 세력을 떨치기도 했으며 과거에 비해 종교적 영향력이 약화된 현대에도 반혁명당의 후신인 네덜란드 기민애원당(CDA), 기독교연합당(CU), 개혁당(SGP)[13] 등이 어느 정도 네덜란드 정계에 세를 확보하고 있다.
역사적, 신학적 이유로 교단이 상당히 분열되어 있었으나[14] 2차대전 이후 개신교 교세의 위축과 함께 상당수가 도태되었고, 2016년 기준으로 네덜란드에서 존재감이 있는 교단들은 아래와 같다.
- 네덜란드 개신교회(PKN, 영어로는 PCN) - 2004년 네덜란드 국가개혁교회(NHK), 화란개혁교회 총회파(GKN), 화란 루터교회(ELKN)이 1960년대부터 '함께 가는 길'(samen op weg)이란 모토 아래 재통합을 추진한 결과물로써, 여느 유럽 대륙의 주류 개신교단처럼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다.
- 화란개혁교회연합 해방파(GKv) - 1944년 개혁교회연합에서 교권 및 신학적 분쟁으로 분리된 교파이다. 한국 보수 개신교계, 특히 예장고신에서는 자매관계 등의 이유로 그냥 '화란개혁교회'라고만 해도 이 교단을 가리킬 정도로 은근히 유명한 편.
- 기독개혁교회(CGK) - 1834년에 국가교회에서 분리된 최초의 개혁교단. 위의 네덜란드 개신교회처럼 진보파와 보수파가 공존하고 있으며, 보수파는 'Bewaar het Pand'란 별칭으로 불린다.
전통적으로 영어권의 KJV에 해당하는 국역성경(Statenvertaling)을 써 왔지만[17] 현대에는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이 새번역 성경(NBV)을 쓰고 있으며 보수 성향 교파에서만 국역성경을 고수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현대 네덜란드에서 개신교는 소수가 되어버렸고, 미국처럼 바이블벨트로 칭해지는 지역들에서 명맥이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유명 관광지 교회들 중에는 암스테르담 서교회(Westerkerk),[18] 와 북교회(Noorderkerk) 델프트 구교회와 하우다 신트얀스 교회[19] 정도에서 일요일에 현지 스타일 예배를 체험할 수 있다.
과거에는 지상파 방송에서 예배 실황중계를 한 적도 있었으나 2016년 이후 NPO의 편성 방침이 바뀌면서 모두 종영되었다. 현재는 NPO5 라디오에서 'Zin, zout en Zegen'이라는 음성 중계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3.1. 한국 개신교와의 관계
루터교가 주류인 여타 북서부 유럽과 달리 개혁교회의 세력이 강했던 역사 때문인지 한국에서도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간간히 있다. 아예 예장고신, 예장합동의 사례처럼 교류하는 분위기도 존재하며,[* 고신대의 경우 교환학생까지 오고 갈 정도였다.(#)] 영미권이나 독일 못지 않게 유학 갔다온 목사 및 신학자들도 존재한다. 교류까지는 안 가도 대다수의 한국 장로교 교파들이 웨스트민스터 문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함께 '''벨직 신앙고백'''과 '''도르트 신조'''를 인정하고 있다.
또한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과 그 후예들까지 확대하면 헤르만 훅세마와 코넬리우스 반 틸이 한국 신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며 캄펀에 있는 신학교[20] 는 부산과 천안 고신대학교와 자매관계이기까지 하다. 비록 근대에 영미권과 같은 선교사 파송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장로교와 같은 칼뱅주의로써 신학적, 교리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통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언어적인 장벽만 극복하면 공감하기 쉬운 부분도 꽤 있는 편이다.
하지만 영미식 장로교와 비교했을때 형식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고, 2차대전 직후 주류 교단이 영미권처럼 에큐메니컬 성향으로 선회한 데다 정서 자체가 한국이나 영미권과는 분명 다른 점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네덜란드 '해방파' 교회(GKv)에서 2017년 6월 여성목사 안수 허용을 결의하자, 예장고신 측에서 매우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한국의 개신교 주류가 기독교 우파가 되는데 네덜란드 개신교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1] 이미 1960년대부터 30%대를 기록한 바 있다. 스웨덴조차 1990년대 초까지는 통계상으로나마 현상유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네덜란드의 연간 개신교 감소폭은 놀라울 정도로 크게 나타났다고 봐야 한다.[2] 출처.[3] 사실 스페인이고 영국이고간에, 무슨 싸구려 교양책에 나오는 것 마냥 총칼들고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 설명하고 있는 네덜란드와 같은 테크트리를 탔다고 보는게 정확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이 종교적 열정이 끝내주는 것은 맞지만, 이들 역시도 당연히 총칼들고 종교를 강요하지는 않았고, 의료나 교육 등이 주력이었다.[4] 왈롱계로 본명은 프랑수아 고메르(François Gomaer)[5] 반대로 현 벨기에 지역에 개신교 비중이 높았다.[6] 간혹 오래된 개신교 교회들 중 가톨릭 수호성인의 이름으로 불리는 건물들은 종교개혁 이전에 성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도르드레흐트의 대교회당은 가끔 마리아 교회(Onze-Lieve-Vrouwekerk)로도 불린다. 흠좀무[7] 네덜란드 통계청(CBS) 조사 표본[8] 메이폴 축제나 카니발 등은 죄다 가톨릭 지역인 남부나 동부에 남아있고 개신교 다수였던 서부와 북부에는 없다.[9] 주로 '교역자'란 뜻의 'dominee' 혹은 설교자란 뜻의 'predikant'로 부르는데 전자가 더 격식 있는 뉘앙스이다.[10]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대강 빌헬미나 치세였던 1930년대까지라고 보면 된다. 그 이후로는 점점 세가 줄기 시작해서 2차대전이 끝나고 율리아나 치세가 시작될 무렵에는 급격한 감소세를 타기 시작했다.[11] 네덜란드 제20대 총리직을 맡기도 했으며,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의 창립자이기도 했다.[12] 종교사상가 겸 국회의원인 흐룬 판 프린스터러가 창당했으며, 프랑스식 세속주의와 혁명주의를 반대한다는 뜻으로 지은 당명이다.[13] 유럽에서 매우 드물게 기독교 우파와 유사한 색채를 띄는 정당이다.[14] 이것도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애들 눈높이에 맞게 묘사한 것과 달리 같은 칼뱅주의 교파들끼리 분열한 거지 아예 다른 성격의 교파들로 변해버린 건 아니다.[15] 일반적으로 네덜란드 개신교회에 속한 목사들은 국공립 대학교 내 신학부에서 배출되는데, 개혁주의 연맹은 그 안에서 보수파 목사들을 양성할 수 있는 석좌교수를 따로 두고 있다.[16] 위의 개혁동맹에서 2004년에 교단 통합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국가개혁교회를 탈퇴한 뒤 설립한 교단이다.[17] 나온 시기는 네덜란드 국역성경이 킹 제임스보다 늦다.[18] 완전 진보 성향으로 근처에 LGBT 관련 기념물까지 있다.[19] 암스테르담 북교회와 델프트, 하우다는 의외로 보수에 가깝고, 오후예배도 있다.[20] 정확히는 원래 두 곳이 존재했으나 먼저 설립되었던 총회파 아우더스트라트 신학교는 본문에 상술한 교단 통폐합의 영향으로 2012년 폐교되었고, 현재는 보통 브루데르베흐 15번에 위치한 해방파 신학교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