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구치 지로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초창기에 활약했던 투수이다. 철완(鉄腕)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이닝을 소화한 당대 최고의 이닝 이터였으며, 동시에 타자로서도 활약한 원조 투타겸업 선수이기도 하다.
2. 학창 시절
나고야 시에서 염색 가게를 하던 부부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노구치가 다닌 야구마(八熊) 소학교는 당시 야구 실력이 좋은 학교였으며, 3살 위인 형 노구치 아키라가 학교에서 포수를 하는 것을 보고 야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이후 당대의 야구 명문 주쿄 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원래 3루수였지만 에이스 투수가 부상을 당한 것을 계기로 투수로 전향해 팀의 1937년 여름 고시엔과 1938년 봄 고시엔의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1938년 선발대회에서는 노히트노런 1회를 포함하여 4경기 4완봉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거두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3. 프로 경력
주쿄 상업학교를 졸업한 노구치 지로는 형인 노구치 아키라가 소속된 도쿄 세네터스에 입단하여 데뷔 첫 시즌인 1939년에 투수로서 69경기, 459이닝, 평균자책점 2.04, 38완투, 8완봉, 33승, 19패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뒀고, 타자로서도 48경기 출장하여 384타석, 타율 0.251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프로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별로 안 준수해 보일 수 있는데 1939년의 리그 전체 평균 타율이 0.224였고, 팀 타율 2할 5푼 이상인 팀은 9개 팀 중 도쿄 교진군이 유일했다. 그리고 이때 기록한 단일 시즌 개인 459이닝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4위 기록이다.
이후로도 꾸준히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리그를 압도하는 성적을 찍었다. 주요 기록은 1940년 387이닝/33승/29완투/평균자책점 0.930(역대 7위)/WHIP 0.801(역대 8위), 1941년 338이닝/25승/25완투/평균자책점 0.879(역대 4위), 1942년 527.1이닝(역대 2위)/40승(역대 3위)/41완투/19완봉(역대 공동 1위)[1] /평균자책점 1.193/264탈삼진/WHIP 0.772(역대 6위) 등으로, 빅토르 스타루힌, 후지모토 히데오, 와카바야시 다다시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투수로 불리기에 충분한 성적을 거뒀다. 특히 1942년 기록한 527.1이닝은 당해 팀 전체 소화 이닝인 990.2이닝의 절반을 넘는 수치로 문자 그대로 혼자서 팀을 지탱했다. 타자로서도 주로 1루수나 외야수로 출장하며 타격 쪽에서 부진했던 1941 시즌을 제외하고 꾸준히 리그 평균을 상회하는 성적을 남겼으며 1941년을 제외하고 팀내 타율 3위 밑으로 내려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강타자의 상징인 4번 타자로 출장한 경기도 제법 있어서 투수 겸 4번 타자를 실제로 볼 수 있었다.
노구치 지로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일화는 1942년 기록한 28이닝 완투 기록일 것이다. 1942년 5월 23일에 9회 1사까지 노히트노런을 이어가다 상대 투수인 하야시 야스오[2] 에게 안타를 맞아 아쉽게 무산되고 9이닝 1피안타 완봉승을 거뒀는데, '''하루 뒤'''인 5월 24일에 펼쳐진 더블헤더 2차전에서 '''28이닝 344구 4실점(2자책점) 완투'''를 기록한 것이다. 심지어 스포츠호치 소속 야구 전문 기자가 운영하는 블로그 게시물에 따르면 노구치는 전날 노히트를 놓친 것이 속상하여 과음한 상태였고, 술이 덜 깬 상태로 등판한 것이라 한다. 오시타 히로시가 떠오르는 대목.
여담으로 상대 투수인 니시자와 미치오도 똑같이 '''28이닝 311구 4실점(3자책점) 완투'''였는데, 경기가 끝나지 않아 결국 일몰로 무승부 처리되었다. 이 시합은 일본프로야구는 물론 메이저리그 기록까지 포함해도 최장 이닝 경기로 남아있다.[3] 여담으로 시합 시간은 고작 3시간 47분이었다고 한다. 이 연장 28이닝 완투 기록은 노구치 지로를 대표하는 일화로, 실제로 일본 야구 전당의 간단한 선수 소개에도 ''연장 28회를 던진 철완 투수'라고 쓰여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저 1경기 344구 기록은 역대 최다 단일 경기 투구수 기록이기도 하다.
1943년 시즌에도 385이닝, 25승, 37완투, 평균자책점 1.45 등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으나 전황이 나빠지며 2년간 군 복무를 했고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전한 후인 1946년에 야구계에 복귀하여 여전히 투타 양쪽에서 팀의 에이스 노릇을 했으며, 이 해에 당시 최고 기록인 31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달성했다.[4] 1947년에도 382.0이닝, 평균자책점 2.26, 33완투를 기록하며 건재함을 알렸으며, 1948년에는 빅토르 스타루힌, 와카바야시 다다시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200승 고지에 올랐다. 또한 이 시즌 기록한 무사사구 완투 경기 13회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단독 1위 기록이다. 그러나 군 복무와 오랜 기간 누적된 혹사의 영향으로 점점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1950년 181.2이닝으로 아슬아슬하게 규정이닝(180이닝)을 채웠으나 1951년에는 단 75.1이닝밖에 던지지 못하는 등 하락세가 완연해졌고, 이듬해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은퇴한다. 1951년 10월 5일에는 계투로 등판해 이이지마 시게야에게 한 이닝에 쓰리런 홈런과 만루 홈런을 모두 허용하는 준 한만두 급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마지막 시즌인 1953년에는 선수 겸 코치였으나 선수로서는 거의 대타로만 단 8경기 출장하는 데 그쳤다.
투수로서의 통산 성적은 517경기 등판, 3447.1이닝(12위), 평균자책점 1.963(2위), 237승(11위), 139패, 1395탈삼진, 647볼넷, 259완투(9위), 65완봉(6위), WHIP 0.964(2위) 등이다. 타자로서의 통산 성적은 1098경기, 3594타석, 3348타수, 830안타, 9홈런, 101삼진, 타율 0.248, OPS 0.594 등으로 투수 성적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지만 당시의 엄청난 투고타저 경향을 감안하면 순수히 타자로서만 평가해도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니며, 특히 피삼진율이 매우 낮았다. 심지어 주자로서도 수준급이었는지 통산 94도루를 기록했는데 도루 실패는 고작 13개로, 통산 도루 성공률은 무려 87.9%나 된다. 규정이닝과 규정타수[5] 를 모두 만족한 시즌만 6시즌(1939년, 1940년, 1941년, 1942년, 1946년, 1949년)이고 1940년과 1946년에는 리그 타율 10위 이내에 들었다. 그러나 소속팀인 한큐 브레이브스가 당시 약팀이었기 때문에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기록상 9이닝당 탈삼진 수는 3.64로 꽤 낮은 편이지만 9이닝당 볼넷 수가 1.69개밖에 되지 않고 몸에 맞는 공은 통산 18개로 제구력이 대단히 좋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정확한 구속은 알 수 없으나 빅토르 스타루힌, 사와무라 에이지, 후지모토 히데오 등과 비견되는 당대의 강속구 투수로 유명했다. 여기에 투구폼이 간결하고 투구 템포도 빨라 상대 타자들이 상대하기 매우 힘들어 했다고 전해진다.
4. 현역 은퇴 후
은퇴 후에는 한큐 브레이브스, 마이니치 오리온즈, 긴테쓰 버팔로즈 등의 팀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1969년과 1971년은 한큐 브레이브스의 코치로서 팀의 리그 우승을 지켜봤으나 두 번 모두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패했고, 1979년과 1980년은 긴테쓰 버팔로즈의 코치로서 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리그 우승에 공험했으나 이번에도 두 번 모두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4:3의 전적으로 패하며 우승을 놓치며 코치로도 끝내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1984년~1985년 긴테쓰 버팔로즈 2군 감독을 맡은 것을 끝으로 야구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다이쇼 출생이어서 명구회에는 들지 못했지만 1989년에 일본 야구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7년 5월 21일 지병인 폐렴으로 사망했다.
5. 여담
본인을 포함해 형제 네 명이 모두 프로야구선수가 되었는데, 형인 노구치 아키라는 원래 투수였으나 군 복무 중 어깨를 다쳐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가 주니치로 이적한 1949년부터는 완전히 포수로 전업했다. 프로에서 동생과 배터리를 이룬 적은 거의 없지만 베스트나인에 포수 포지션으로 두 번 뽑히고 1954년에는 선수 겸 코치로 팀의 우승을 이끄는 등 동생만큼은 아니지만 야구선수로서 성공하고, 주니치 감독이 되어 1956년 리그 3위의 성적을 찍고 완전히 은퇴한다. 3남 노보루는 2차대전 중 전사했고 4남 와타루는 야구선수로서는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않고 샐러리맨이 되었다.
자서전으로 '나의 쇼와 격동의 나날(私の昭和激動の日々)'이 있다. 2017년 NHK 나고야 방송국에서는 이 인물을 소재로 한 '1942년의 플레이 볼(1942年のプレイボール)'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제목의 1942년은 노구치 지로가 전설의 28이닝 완투를 기록한 시즌이다.
[1] 1943년 후지모토 히데오(39완투/19완봉)와 타이 기록.[2] 1942시즌 노구치보다 많은 541.1이닝을 소화하며 역대 단일 시즌 이닝 소화 1위를 기록한 투수이다. 그러나 군 복무 중 전사하여 프로 기록은 단 2년에 불과하다.[3] 마이너리그 기록까지 포함하면 33이닝 경기가 있다.[4] 이 기록은 25년 후인 1971년 나가이케 도쿠지에 의해 32경기로 경신되며, 1979년 다카하시 요시히코가 33경기로 다시 경신한다. 그리고 2015년 아키야마 쇼고가 타이 기록을 세워 2019년 현재는 공동 3위 기록이다.[5] 일본프로야구에서는 1956년까지 규정타석이 아닌 규정타수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