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타겸업
1. 개요
투타겸업은 야구에서 한 선수가 동일 시즌에 투수와 타자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 이는 투수로서 출장하지 않는 날이라도 야수(지명타자 포함)로 출장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1] 언론에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이도류[2] 라는 용어가 자주 쓰인다. 영어로는 투 웨이(Two-way)라고 한다.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뛰어난 선수가 팀내 에이스와 4번 타자를 겸하는 경우가 흔하고, 프로야구에서도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리그(내셔널 리그나 센트럴 리그)에서는 투수라도 타석에 들어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단순히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거나, 대타로만 몇번 출장한다고 해서 투타겸업으로는 볼 수 없다. 투수를 제외한 타 수비 포지션을 맡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대타로서는 1경기에 1타석 이상 나올 수가 없어서 타석수가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야구가 발전하면서 투수와 타자가 분화되며 투타겸업이란 개념은 아마추어 리그에서나 가능한, 베이브 루스 시대의 흘러간 낭만 취급받았으나, 오타니 쇼헤이의 등장으로 다시 언론, 팬들에게서 투타겸업이 논의되고 있다.
2. 역사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지명타자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투수도 타격에 참여하므로, 투수가 타자도 한다는 원론적 입장에서 보면 투타겸업이란 당연시되던 존재이다. 하지만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봤자 안타를 뽑아낼 확률은 거의 없기에 정확히 투타겸업이라 부를 수는 없고, 투수가 야수로 출장하는 경우 또한 경기 극후반에 대타나 대수비로 낼 야수가 부족할 때만 해당되기에 희소해진 건 매우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메이저리그가 처음 등장한 19세기 중순만 해도 선수가 적었고 야구가 그렇게 발전되지는 않았기에 투타겸업은 당연시되었으나, 19세기 말 들어 투수와 야수가 분업화되면서 투타겸업은 차츰 사장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럼에도 투타겸업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선수가 없어서였고, 또 투수와 야수가 분업화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그 차이가 극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투수가 야수로 투입되거나, 이를 겸업하는 일이 잦았다. 반대로 야수가 투수로 등판하는 일도 꽤 많았다. 그러나 메이저리그가 나날이 규모와 위상이 높아져 가고 마이너리그가 확대되면서 자연스럽게 선수 부족 문제가 해결, 투타겸업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후 1970년대 들어 AL에서 지명타자 제도가 도입되면서 투타겸업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계속된 포지션 분업화와 전문화로 인해 투타겸업은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거의 통하지 않을 단계까지 도달했다.
KBO 리그에서는 투타겸업에 도전한[3] 선수는 몇 있지만 그중 제대로 소화해낸 선수는 1982년 김성한 한 명 뿐이다. 김성한이 투수로 야구를 시작했던지라 경험도 꽤 있었고, 투타 양면에 재능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당시 6개 구단 중 해태의 선수층이 가장 얇았고 원년 KBO가 4할 타자가 나올 정도로 경기수가 적으며 리그수준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김성한도 1983년에는 투수 출장 횟수가 눈에 뜨이게 줄었으며, 선동열 입단 후에는 투수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김성한은 프로 통산 15승을 올렸는데 그 중 10승이 1982년 기록이다.
일본프로야구에서도 투타겸업 사례가 몇 있으나, 대부분은 선수가 부족했던 양대리그 출범 이전이나 양대리그 초창기 시절에 집중되어 있으며, 당시 투타겸업을 했던 선수들도 어느 정도 리그의 기틀이 잡힌 후에는 투수나 타자 중 한쪽으로 자리잡은 경우가 많다.
3. 투타겸업의 문제와 희소성
고교야구에서는 매우 뛰어난 선수가 팀내 에이스와 4번 타자를 겸하는 경우가 흔하나 대개 프로에 데뷔하기 전까지 투수와 타자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며, 늦어도 입단후 첫 스프링 캠프때에는 반드시 투수와 타자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4] 김대우처럼 양쪽 모두 어느정도 재능이 있는 선수는 프로 데뷔 후에도 여러 번 선택을 바꿔보는 일도 종종 있지만 둘을 동시에 하는 투타겸업은 매우 드물다.
투타겸업을 하게 된다면 투수 훈련과 타자 훈련, 지명타자 전담으로 나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야수 수비 훈련까지 다 소화해야 하는데, 이는 먼저 양쪽 모두 재능이 있어야 하고 훈련량이 받쳐주어야 하며 체력이 엄청나야 한다. 재능이 있어야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투수와 타자 출장 모두 실전을 위한 전술숙지와 훈련을 남들 두배로 해야된다. 체력 면에서는 일단 투수로 한 번 등판하는 것부터가 엄청난 체력이 소모되며, 주전 타자로 출장하는 것도 체력이 많이 받쳐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현대 야구에서 투타겸업을 하는 선수는 엄청난 체력과 야구 센스를 가진 완전체 선수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양쪽에 재능이 있다고 해도, 프로 레벨에서는 체력 문제로 투타겸업을 시도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선수라도 투수의 팔꿈치가 소모품처럼 인식되듯 어깨도 마찬가지고 팔도 마찬가지다. 남들보다 두배는 넘게 팔을 휘두르며 운동하기 때문에 신체의 피로도와 부상위험성은 남들의 두배 이상은 높다. 사실상 하나의 몸에 두 사람이 들어있는 것처럼 남들의 두배 이상 재능을 가지고 이를 반반 나눠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쓰는 근육이 달라 양쪽에 나쁜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프로레벨에서라면 투타 어느쪽이든 극단적으로 신체능력을 끌어내야하기 때문에 이런 것조차 민감할 수 밖에 없다. 투타겸업의 대표적 사례인 김성한은 1982년 시즌 후 인터뷰에서 "너무 힘들어서 자청해서 마운드에 올라 죽도록 던지고 다시는 투수를 할 수 없도록 팔이 영영 고장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라고 털어놓았다. 박노준 역시 고교에 이어 대학에서도 투타겸업을 하느라 어깨가 거의 망가지기 직전까지 갔고 결국 투수를 완전히 포기했다.
투수가 타격을 하면 투구 리듬이 흐트러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지명타자 제도가 사용되는 KBO 리그에서는 지명타자 소멸로 투수가 타석에 들어설 때가 종종 있는데, 대부분 벤치에서 스윙도 하지말고 그냥 서서 삼진을 당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물론 주자가 있을때는 병살의 위험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스윙을 해서 투구 리듬을 흐트러뜨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등판했을 때 난타를 당할 수 있어서이다.
현 시대 야구에서 투타겸업 선수가 나온다면 대부분 그 리그의 수준이 한참 낮거나, 아니면 팀의 선수층이 매우 얇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인 야구야 뭐 말할 것도 없고, 고교야구나 대학야구 또한 만성적인 선수 부족 문제 때문에 선수들이 야수와 투수, 혹은 포수 등을 돌아가면서 보거나 아예 투타겸업을 하는 경우 또한 자주 나온다. 그러나 한국고교야구에서는 2003년에 지명타자 제도가 도입된 뒤로는 위에서 언급한 선수 층이 얇은 경우가 아닌 이상 투타겸업을 하는 경우가 크게 줄었다. KBO 퓨처스리그에서도 투수가 야수를 보거나, 지명타자 없이 투수가 타격하는 경우가 있다. 이도류로 유명한 오타니는 본인의 재능과 투타겸업 의지, 그런 부분에 관대한 구단 분위기 등이 겹쳐 프로에서도 투타겸업을 할 수 있던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이다.
다만 2군 리그나 학생야구의 투타겸업은 교육의 측면도 가지는데, 상식적으로 학생야구면 모를까 40명이 넘는 프로 2군에서 선수가 없어 투타겸업을 할 리는 없고 교육의 목적이 강하다. 투수는 타자를, 타자는 투수를 직접 해보고 해당 플레이가 이루어지는 원리와 상대의 심리를 경험하고 파악하는 것이 큰 공부가 되기 때문. 어차피 상무 피닉스를 제외하고는 팀 성적은 전혀 의미가 없기도 하다. 드물게 김대우나 나종덕처럼 2군에서 시험해보고 소질까지 있어보이면 본격적으로 전향하기도 한다.
4. 부활의 가능성?
2012년 일본프로야구에서 초신성 유망주 오타니 쇼헤이를 잡기위해 니혼햄 파이터스가 제시한 플랜인 일명 이도류, 투타겸업이 대성공을 거두며 2016년 일본시리즈 우승과 오타니 본인의 퍼시픽리그 MVP수상으로 투타겸업으로도 리그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면서 투타겸업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그리고 오타니는 메이저리그 LA 에인절스와 계약해 미국무대에 진출, 그리고 때마침 탄생한 오프너 전략에 맞물려 투타겸업[5] 논의와 시도가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오타니 본인은 부상문제로 풀시즌을 투타겸업하지 못했지만 2018년 투수, 타자 모두 합격점을 받았고 오타니의 선례를 통해 몇몇 팀들이 팀내 가능성 있는 유망주의 투타겸업을 시도중이다. 불펜투수들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는데도 로스터는 25인으로 빡빡하게 제한된 압박 속에서 운용의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의 연장선으로 주목받고 있다.
오타니 외에도 완전한 투타겸업까진 아니지만 투 웨이 플레이어로 가능성을 보이는 선수는 신시내티 레즈의 마이클 로렌젠이 있다. 로렌젠은 롱 릴리프 투수와 외야수 대타로 투타겸업을 실험한다. 참고로 로렌젠은 2018년까지 통산 6홈런(!)을 친 불펜 투수이다.
템파베이 레이스의 2017년 1라운드 지명자 브렌던 맥케이가 마이너리그에서 투타겸업 선수로 육성되다가 2019년 6월에 콜업되어 6월 29일 선발투수, 7월 1일 지명타자 선발로 첫 출전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투타겸업을 내세운 오타니는 2018 시즌에 토미 존 수술을 받았으며, 2019 시즌에는 투수로서는 재활에 집중한다며 지명타자로만 나오면서도 풀타임 소화를 못하며 무릎 수술로 시즌 아웃되고 후유증이 20시즌까지 이어져 타석에서도 아예 망해버려 내구성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투타겸업의 한계를 실감케 하고 있다.
5. 사례
- 베이브 루스: MLB에서 풀타임으로 투수로 모두 6시즌[6] 을 뛰었는데, 1918년과 1919년 두 시즌은 투수와 코너 외야수를 병행하여 풀타임으로 투타겸업을 했다. 다만 규정타석과 규정이닝을 동시에 달성한 적은 없다.[7] 투타겸업 기간이 2년으로 짧긴 했지만 MLB 역사상 유일하게 투타겸업으로 성공한 사례.
- 후지무라 후미오: NPB 원년 멤버로, 전쟁 전까지 매 시즌 투수, 2루수, 외야수를 오가며 투타겸업을 했고, 전후인 1946년에는 투수로서 23경기 등판해 107이닝 소화, 13승 2패, 평균자책점 2.44에 야수로서는 주로 3루수로 91경기 출장해 424타석, 타율 .323이라는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1946년 당시 일본프로야구의 규정이닝이 150이닝이어서 규정이닝에는 미달했지만(현대 기준으로는 105이닝이 되므로 규정이닝을 넘긴다) 규정타수[8] 는 넘겼다. 심지어 1946시즌은 감독도 겸임한 시즌이었다. 1946년 이후로는 3루수로 완전히 전업했고, 6년 연속 베스트나인을 수상하며 오사카 타이거즈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자리매김했다.
- 노구치 지로: 강철 어깨로 유명한 선수로, NPB 역사상 가장 꾸준히 투타겸업을 지속한 선수이다. 데뷔 시즌인 1939년에 투수로 69경기 등판, 야수로 48경기 출장해 459이닝[9] 과 384타석을 소화한 것을 시작으로 단 8경기만 출장한 은퇴 시즌과 군 복무로 출장 기록이 없는 1944, 1945 시즌을 제외하고 1939년부터 은퇴 직전 시즌인 1952년까지 무려 12시즌 동안이나 투타겸업을 지속했다. 커리어 내내 여섯 차례나 규정이닝[10] 과 규정타수를 동시에 달성했다. 1943년에는 딱 3타수 모자라서 규정타수를 달성하지 못했다.[11] 통산 성적은 3447.1이닝, 259완투, 평균자책점 1.96, 3594타석, 타율 .248이다. 타율이 낮아 보일 수도 있는데, 노구치 지로의 전성기였던 1940년대는 극심한 투고타저 시기로, 특히 투고타저가 심했던 1942년은 아예 리그 타율 10위였던 타자의 타율이 .216밖에 안 되었다. 더군다나 주자로서도 뛰어났는지 통산 94도루, 13도루자로 무려 87.9에 달하는 도루 성공률을 기록했다.
- 김성한: KBO에서 투수로서는 모두 4시즌을 뛰었지만 풀타임으로 투수와 1루수로 투타겸업을 한 시즌은 1982년과 1985년으로 2시즌이다. 프로 원년인 1982년 시즌에는 규정타석과 규정이닝을 모두 넘기면서[12] 10승(리그 7위)과 2점대 평균자책점(리그 6위), 타점왕, 타율 3할(리그 10위)을 모두 달성했다. KBO 역사상 유일하게 투타겸업으로 성공한 사례.
- 오타니 쇼헤이: NPB에서 2014년, 2016년 2년간 규정타석과 규정이닝의 50%를 넘었다.[13] 데뷔 초기에는 투수로 출장하지 않는 날에는 외야수(주로 우익수)로 출장한 적도 있으며 2013년 시즌에는 외야수로 54경기, 2014년 시즌에는 외야수로 10경기에 출장했다. 2016년 시즌에는 NPB 역사 최초로 규정이닝 미만, 규정타석 미만으로 MVP를 수상했다.
MLB에서는 웨스 페럴(1929~1941)과 밥 레몬(1941~1958)도 한시즌에 최고 150개 타석을 달성하긴 했지만 이들도 본격적으로 야수 포지션이 아닌 거의 대타로만 출장한 기록이라 본격적인 투타겸업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2000년 이후에는 2003년 브룩시 키시닉, 2007년 마이카 오윙스, 2010년 댄 해런, 2015년 마이클 로렌젠 등이 투타겸업을 시도하긴 했지만 모두 타자로서는 100타석 미만으로 출장했던 기록이라 큰 의미부여는 하기 힘들다. 참고로 2018년 4월 기준 MLB 역사에서 한 시즌에 100이닝 & 200타석 이상을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베이브 루스가 유일하다.
NPB의 야쿠르트 아톰즈 소속 투수였던 도야마 요시아키는 입단 2년차인 1971년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권유로 투타겸업에 도전해 투수로서 33경기(119.1이닝), 외야수로서 21경기(107타석) 출장한 적이 있으나 팔꿈치 부상으로 이후 뚜렷한 활약 없이 은퇴했다. 다만 해당 시즌에 투수이면서 1번 타자로 출장한 진기록이 남아 있다.
6. 기타
- 준 명전급 커리어의 1루수이자 박찬호 시대를 본 팬들에게 '헬멧 쓴 1루수'로 인지도가 있던 존 올러루드는 대학 시절 투타겸업으로 매우 유명했는데, 커리어 하이인 2학년 때 타석에서는 .464 23홈런, 마운드에서는 15승 무패를 기록했다. 미국 대학 리그(NCAA)에서 2010년부터 그 해 투타겸업을 가장 잘 한 선수에게 존 올러루드 상[14] 을 주고 있다. 이 상을 3년 연속 수상하고 2017년 1라운드 4순위에 드래프트된 브렌던 맥케이는 마이너에서도 투타겸업을 할 것을 선언했다.
- 투타겸업은 아니지만, 프로리그에도 투수가 타자를 보거나 야수가 투수로 등판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투수가 타자로 나오는 경우는 보통 지명타자가 소멸했는데 대타 자원이 없어 투수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는 일이 대부분이며, 잘 던지는 투수의 경우 다음 이닝에도 던지게 하기 위해 타석에 세우기도 한다. 지명타자/소멸사례 문서에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 경기 시작시 야수로 등록된 선수가 마운드에 등판했던 경우는 KBO 리그에서 딱 5번 있었는데, 이중 세 번의 사례는 내보낼 투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기록된 사례들로, 1985년 MBC 청룡의 김재박이 처음 기록했다. 2009년 5월 12일에는 LG 트윈스의 지명타자였던 최동수가, 6월 25일에는 SK 와이번스의 3루수였던 최정이 투수로 등판하는 일이 있었다. 2015년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우익수 나성범이 투수로 이벤트성 등판을 했다. 나성범의 경우 미리 이런 상황이 가능하다고 언급하고 나온 것. 2019년 강백호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1루수였다가 투수로 등판하여 1이닝을 소화했다. 나성범의 경우처럼 이벤트 성격이 강하다.
- 승패보다 재미를 중시하는 KBO 올스타전에서도 투타겸업 사례가 나온 바 있다. 특히 2018년 올스타전에서는 '한국판 오타니'라 불리던 강백호가 고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마운드에 올라 1이닝동안 삼진 2개를 잡았다.[15] 그리고 지명타자 자리가 소멸된 후[16] 박치국이 타석에 나서 안타를 쳤다. . 이후에 장필준과 함덕주도 타석에 들어섰지만 범타에 그쳤다.
- 야수의 마운드 등판은 12회 연장후 무승부인 KBO에서는 자주 없는 일이지만 경기수가 더 많고 끝장승부를 보는 MLB에서는 자주까진 아니어도 가끔 있는 편이다. 2010년 이후로는 승부가 완전히 기울어진 상황(예를 들면 8~9회말에 10점 차 이상으로 지고 있다던가)에서 가비지 이닝을 야수로 때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갈수록 이런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원래 야수였던 선수가 투수로 출전한 건 총 36번이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1946) 이후 최다 기록이었습니다. 올해 이 숫자는 74번으로 2배 넘게 늘었습니다. 투수와 타자를 겸하는 '니도류(二刀流)' 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24·LA 에인절스)가 마운드에 오른 10번을 빼도 64번입니다. 바야흐로 '야수 등판' 전성시대가 막을 올린 겁니다.
>
>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베이스볼 비키니] 야수가 마운드에 섰다고 놀라지 말아요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선발투수의 평균 이닝이 짧아지고 불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굳이 기울어진 승부에 실낱같은 희망을 보고 전력을 다하느니 차라리 불펜을 아끼는 게 더 낫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평소에는 보기 힘든 야수의 투구를 통해 즐거움을 주기 위한 팬서비스의 목적도 있다. 정말로 연장 15회를 넘긴다던가 해서 벤치의 투수나 야수들마저 모조리 소진되는 경우 다음 경기 등판을 준비하던 선발투수가 대타나 대수비로 나온다거나 하는 광경도 가끔 볼 수 있다.
>
>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베이스볼 비키니] 야수가 마운드에 섰다고 놀라지 말아요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선발투수의 평균 이닝이 짧아지고 불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굳이 기울어진 승부에 실낱같은 희망을 보고 전력을 다하느니 차라리 불펜을 아끼는 게 더 낫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평소에는 보기 힘든 야수의 투구를 통해 즐거움을 주기 위한 팬서비스의 목적도 있다. 정말로 연장 15회를 넘긴다던가 해서 벤치의 투수나 야수들마저 모조리 소진되는 경우 다음 경기 등판을 준비하던 선발투수가 대타나 대수비로 나온다거나 하는 광경도 가끔 볼 수 있다.
[1] 당연한게 지명타자가 없다면 투수들도 선발출장하는 날은 타격을 해야되니까... 실제로 박찬호는 내셔널 리그에서 뛸 때 투수로선 상당히 뛰어난 타격을 선보였다.[2]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오타니 쇼헤이와 계약하기 위해 제안했던 투타겸업을 포장하기 위한 말이었는데, 어느새 오타니의 브랜드처럼 되었다.[3] 사실 도전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인것이 당시 해태는 선수단 인원이 총 14명 뿐이었다.[4] 즉 훗날 한 쪽으로 대성한 선수들도 고교 시절에는 둘 다 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류현진도 동산고 4번타자였고, 이대호나 추신수도 원래 투수가 메인이었는데 프로구단 입단 후 타자로 전향한 케이스이다.[5] 미국에서는 이걸 투 웨이(Two Way)라고 표현한다.[6] 실제로는 1914년부터 1921년 시즌까지 8시즌동안 투수로 뛰었다. 하지만 1920년부터는 사실상 타자로 전향했다고 보는 편.[7] 1918 시즌은 382타석/166.1이닝, 1919 시즌은 543타석/133.1이닝으로 각각 규정타석(434타석)과 규정이닝(140이닝)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못했다. 단, 당시 메이저리그에는 규정타석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 1918 시즌은 타격 개인 타이틀 수상 자격을 만족한 시즌이었다.[8] 일본프로야구는 1956년까지 규정타수 제도였다.[9] 일본프로야구 역대 단일 시즌 이닝 소화 4위 기록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2위 기록(1942년 527.1이닝)도 노구치 지로.[10] 엄밀히 말하면 규정이닝이 아니라 투수 개인 타이틀 자격이 되는 기록 기준이다. 일본프로야구 초창기는 이 기준이 일정하지 않아 어느 해는 이닝 기준이었다가 어느 해는 등판 수 기준이었다가 하는 식으로 자주 바뀌었다. 전후에 이닝으로 통일되었지만 그나마도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 규정이 해마다 많이 달랐다. 여하튼 노구치 지로는 당시 기준으로 9번, 현대 기준으로는 10번 자격을 만족했다. 1949년 166.1이닝은 당시 규정이닝(180이닝) 미달이었다.[11] 여담으로 당시 노구치는 단 2피삼진만을 당했는데, 남은 3타수 모두 삼진으로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일본프로야구 단일 시즌 최소 피삼진 기록(6개)이 바뀌게 된다. 실제로 노구치는 현역 시절 3594타석에 서서 단 101삼진만을 당하는 등 동 시기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도 삼진율이 극히 낮았다.[12] 1982년 340타석/106.1이닝. 규정타석 248타석, 규정이닝 80이닝 기준.[13] 2014년 234타석/155.1이닝, 2016년 382타석/140이닝. 규정타석 443타석, 규정이닝 143이닝 기준.[14] 풀네임은 The John Olerud Two-Way Player of the Year Award[15] 탈삼진의 희생양은 이용규와 오지환.[16] 좌익수였던 강백호가 투수로 들어오면서 지명타자가 소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