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스타루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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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빅토르 콘스탄티노비치 표도로비치 스타루힌[1]
ヴィクトル コンスタンチノヴィッチ フョードロヴィッチ スタルヒン
Викто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Фëдорович Старухин
'''생년월일'''
1916년 5월 1일
'''사망일'''
1957년 1월 12일
'''출신지'''
러시아 제국 페름 주 니즈니타길
'''국적'''
무국적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34년
'''소속팀'''
대일본동경야구클럽-도쿄 교진군(1934~1944)
퍼시픽/타이요 로빈스(1946~1947)
긴세이 스타즈/다이에이 스타즈(1948~1953)[2]
다카하시 유니온즈/돈보 유니온즈(1954~1955)[3]
'''지도자 경력'''
없음
1. 개요
2. 유년 시절
3. 학창 시절
4. 프로 시절
5. 은퇴 이후
6. 관련 문서


1. 개요


러시아 출신의 일본프로야구 선수. 사와무라 에이지, 후지모토 히데오, 노구치 지로 등과 함께 일본 프로야구의 초창기를 빛낸 인물이며, NPB 사상 최초의 외국인 선수이자 통산 300승 투수이다.

2. 유년 시절


1916년 러시아 제국의 니즈니타길 에서 제정 러시아군 장교인 '''콘스탄틴 스타루힌'''의 아들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 당시 왕당파에 속했던 아버지는 새로이 수립된 공산주의 정부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고, 결국 1925년 가족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홋카이도 아사히카와 시에 정착하면서 스타루힌은 제 2의 고향 아사히카와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3. 학창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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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카와 중학에 진학한 스타루힌은 야구부에 들어가 강속구를 자랑하는 장신의 에이스로 자리잡았고, 1933~1934년 연속으로 학교를 고시엔 대회 지역 결승까지 진출시켰지만 번번히 수비수들의 실책에 발목이 잡히며 분패하는 바람에 고시엔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한편으로 아버지가 자신이 운영하는 찻집의 여종업원을 살해한 혐의로 징역 8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하는 사건으로 인해 '''살인자의 자식'''이란 오명을 쓰기도 했지만 스타루힌은 자신의 야구 실력으로 이름을 높이며 스스로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급격히 기운 가세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34년 11월, 일본에 초청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단과의 친선 경기를 위해 결성한 전일본 팀의 투수로 선발되었다. 전년도 미국 팀과의 경기에서 17전 전패라는 기록을 남겼고[4], 그 해 시합에서도 5경기 내리 패배를 맛본 전일본 팀은 미국에 대항할 만한 좋은 투수를 찾기 위해 전국을 탐색했고, 그 결과 홋카이도의 스타루힌이 포착된 것이었다. 당시 전일본 팀 감독 '''이치오카 타다오'''가 직접 스타루힌을 만나 '''"입단하지 않으면 러시아로 강제송환 시킬 수도 있다"'''며 협박을 섞어 설득한 끝에, 학교의 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타루힌은 학교를 중퇴한 후 어머니와 함께 거의 야반도주 형식으로 도쿄 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29일, 미국 팀과의 마지막 경기인 17번째 경기 8회에 패전처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그것이 스타루힌의 사실상 첫 프로 데뷔 무대였다.

4. 프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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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의 경기가 끝난 후 전일본 팀을 모체로 대일본 도쿄 야구구락부가 결성되었고, 1936년 대일본 도쿄 야구구락부의 후신인 도쿄 교진군의 창단 멤버로 프로야구에 발을 들였다. 처음엔 벽안의 러시아 사람이라는 이유로 팀 동료들에게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지만, 감독이던 후지모토 사다요시가 '''"다 똑같은 사람이고 동료이다. 한번만 더 스타루힌을 못살게 굴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으며 선수들이 그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막아주었고 스타루힌을 제자로서 사심없이 돌봐준 덕분에 스타루힌은 교진군의 일원으로 온전히 흡수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스타루힌은 후지모토를 아버지같은 스승님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1936년 7월 3일 다이도쿄와의 경기에 구원등판한 스타루힌은 3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5] 거인의 공식전 첫 승리를 이끌었고, 이듬해인 1937년 시즌부터는 사와무라 에이지를 대신하여 거인의 에이스 자리를 꿰차고 교진군이 1938~1943년 6시즌 연속 우승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1937년 7월 3일에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으며, 1939년엔 일본 기록인 '''시즌 42승'''으로 다승 1위와 MVP를 수상함과 동시에 통산 100승을 거두며 생의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6] 스타루힌은 1940년에도 MVP에 선정되었으며, 1937년 추계리그 부터 1940년 까지 5차례의 다승왕을 수상하고 1938년 추계리그 평균자책 1위(1.05)를 기록했다.
그런데 스타루힌의 1939년 시즌 42승은 한때 기록상의 실수가 있었다는 이유로 2승이 줄어든 40승으로 수정되었지만, 스타루힌이 죽은 이후 1961년 이나오 카즈히사가 42승(24선발승)을 거두자 "스타루힌의 기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라는 목소리가 나왔고, 논의 끝에 결국 '''"그 당시 공식 기록원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커미셔너의 결정으로 다시 42승으로 환원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즉 스타루힌은 이나오는 공동으로 일본의 시즌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7].
1939년 할힌골 전투가 일어나 일본 내 반 러시아 감정이 확대되기 시작했고, 위기감을 느낀 스타루힌은 1940년 스다 히로시(須田 博)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지만 언제 일본에서 쫓겨날 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살아야 했다. 특히 스타루힌은 항상 길가에 늘어선 헌병들이 자신의 뒷덜미를 잡아챌까 두려워 했고, 어느 날 고라쿠엔 구장으로 출근하는 도중 다리 앞에 헌병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강을 헤엄쳐 건너서 야구장으로 갔다고 한다(...). 그래도 스타루힌은 1941~1944년 시즌까지 총 85경기에 등판하여 57승 16패의 준수한 성적을 보였지만 1944년을 끝으로 프로야구는 중단되었고, 스타루힌은 외국인 수용지역에 연금되어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프로야구가 재개된 1946년, 스타루힌은 교진군 시절 스승이었던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의 부름을 받고 퍼시픽[8]에 입단하면서 프로 무대에 복귀했고, 그 해 일본 프로야구 최초로 통산 200승을 기록하였다. 1948년 후지모토가 긴세이 스타즈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자 스타루힌도 그를 따라서 긴세이로 이적했고, 이듬해인 1949년 52경기에 등판하여 27승 17패, 평균자책 2.61의 성적으로 개인통산 6번째 다승왕이자 생애 마지막 타이틀을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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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지 못한 스타루힌은 1954년 다카하시 유니온즈로 유니폼을 갈아입었고,[9] 구단명이 돈보 유니온즈로 바뀐 1955년 9월 4일 다이에이 스타즈 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일본 야구사상 최초로 '''통산 300승''' 이라는 전인 미답의 기록을 세웠다. 마침 그가 300승을 거둔 곳은 21년 전 미국 올스타를 상대로 처음 마운드에 올랐던 니시쿄고쿠(西京極) 구장이었고 공교롭게도 그 당시 전일본 팀 선발 투수였던 '''하마자키 신지'''는 돈보의 감독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1939년의 42승 기록이 40승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원상복귀 되면서, 스타루힌의 공식적인 300승은 같은 해 7월 30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킨테츠 펄스로부터 거둔 승리로 변경되었다.
스타루힌은 그 해를 끝으로 19시즌 동안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586경기 등판, 303승 176패, 1960탈삼진, 평균자책 2.09''' 의 통산 성적을 남겼고, 통산 최다 완봉승(83완봉승) 기록을 갖고 있다. 더불어 최고승률 2회, 최저 평균자책 1회, 최다승 6회, 최다탈삼진 2회, MVP 2회,베스트나인 1회를 수상했다.

5. 은퇴 이후


평소 상냥하고 유쾌한 성격의 스타루힌이었지만 외국인, 더구나 무국적자 였던 그의 쾌활한 웃음 이면에는 무언가 쓸쓸함이 묻어났다는 주변 사람들의 평도 있었다. 야구계를 떠난 스타루힌은 1956년 부터 라디오 방송 패널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MC를 맡아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듯 했다.
1957년 1월 12일, 스타루힌은 도쿄 도내에서 열린 아사히카와 중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신의 자동차로 이동하던 중, 밤 10시 40분 경 시부야역으로 가던 열차와 정면 충돌하여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다.[10] 향년 41세.
스타루힌은 1960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1984년 개장한 아사히카와 시영 구장의 애칭을 '''스타루힌 구장'''으로 명명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11]
생전에 남긴 자식은 장녀 나타샤 스타르핀, 차녀 엘리자베타 스타르핀, 장남 게오르기 스타르핀이 있다. 장녀 나타샤 스타르핀이 5살 때 아버지를 잃었는데 5년간 3명이나 낳은 것을 보니 금슬은 좋았던 듯. 자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나타샤 스타르핀. 지금은 일본 전역에 흔한 선탠 살롱을 81년 처음으로 개업한 인물로, 선탠을 유행시켜 구릿빛 피부쇼난 해변가, 서핑으로 대중매체에서 대표되는 80년대 일본 매력남의 이미지를 만든 인물이다. 본인이 최북단 홋카이도 태생의 백인이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이후로도 다이어트나 몸매관리, 미용에 관한 책을 여럿 저술하고 2010년대 현재에도 다양한 미용관련 사업을 전개하고 저술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 뷰티 업계의 대모뻘 되는 인물이다. 글솜씨를 살려서 아버지의 전기 '러시아에서 온 에이스' 를 저술하기도 했다. 위키백과나 나무위키의 이 항목도 그렇고 인터넷의 스타루힌에 대한 정보는 거의 이 책에서 나온 것. 나머지 두 자식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그냥 일반인으로 살고 있는 듯.
아버지가 야구 레전드이고 나타샤 본인도 유명인인지라 구계에서도 종종 시구 요청이 오는데, 08년에는 아버지의 친정팀인 교진군에서 시구를 했고 2016년 6월 7일 스타루힌 구장에서 개최된 고향팀 닛폰햄 vs 히로시마 경기에서 시구를 했다. 이 경기는 아버지 스타루힌의 탄생 100주년 기념 경기로 치뤄졌다.#

6. 관련 문서


[1] 과거 매체에서는 영문식으로 표시해서 빅터 스타르핀이라고도 표기했다.[2] 1957년을 끝으로 해체. 일본프로야구에서 캐삭빵 걸었다가 져서 해체된 구단 중 하나다.[3] 1956년을 끝으로 해체. 권리는 다이에이 스타즈가 가져갔다.[4] 당시 '''베이브 루스''', '''루 게릭''' 같은 위대한 선수들이 참석했다고 알려져있다.[5] 지금 기준으로 따지면 세이브가 주어질 상황이었다.[6] 스타루힌은 165경기만에 100승에 도달하였고, 이 최단경기 100승 기록은 당연히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7] 역대 최다 선발승은 1939년 스타루힌, 1943년 후지모토 히데오가 기록한 32선발승이 타이 기록이다[8] 이듬해인 1947년 팀명이 타이요 로빈스로 바뀌었다.[9] 스타루힌은 아버지같은 존재이던 후지모토 감독과 계속 같이 뛰고싶어 했지만, 후지모토가 "자네가 앞으로 선수생활을 하면 얼마나 오래 하겠는가. 다카하시 에서는 계약금을 준다고 하니 그곳으로 옮기게" 라고 권유하여 이적에 동의했다고 한다. 스타루힌은 그때 받은 계약금으로 은퇴 후 미용실과 약국을 차렸다고 한다.[10] 음주운전이 사고의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다.[11] 아사히카와 스타루힌 구장은 일본 최북단의 야간 경기가 가능한 야구장이며, 홋카이도 유일의 야간 경기가 가능한 야외구장이다. 예전에는 경기가 열리다 말다 했으나 2006년부터 2020년까지는 매년 1~2경기씩 경기가 잡혀있다. 2013년에는 무려 4경기나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