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color=#000>'''淸日戰爭
청일전쟁'''

[image]}}}{{{-2 일본 제국 보병의 일제 사격
'''명칭'''
일본어: 日清戦争(にっしんせんそう
중국어: 甲午战争(簡)[1] / 甲午戰爭(正)
영어 : (The) First Sino-Japanese War
'''날짜'''
1894년 8월 1일 ~ 1895년 4월 17일
'''장소'''
조선, 만주
'''결과'''
''' 일본 제국의 승리. '''
일본의 요동대만, 팽호 제도 차지
청나라의 조선에서의 영향력 상실
<color=#000>'''교전국'''
[image] 청나라
[image] 일본 제국
<color=#000>'''지휘관'''
[image] 광서제
[image] 이홍장
[image] 정여창
[image] 등세창
[image] 엽지초
[image] 메이지 덴노
[image] 야마가타 아리토모
[image] 이토 스케유키
[image] 오야마 이와오
<color=#000>'''병력'''
63만 명
북양군
북양함대
24만 명
일본 육군
일본 해군
<color=#000>'''피해 규모'''
전사자: 3만 5천 명
전사자: 1132명
부상자: 3758명
부상 치사자: 285명
병사자: 11,894명
당대의 만평. 조선이라는 물고기를 낚으려는 일본의 낚시 경쟁, 이를 지켜보는 러시아.
1. 개요
2. 발단
3.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4. 개전
4.1. 조선에서의 전투
4.1.1. 풍도 해전, 성환 전투
4.1.2. 평양성 전투
4.2. 중국에서의 전투
4.2.1. 요동 전투
4.2.2. 위해위(웨이하이웨이)전투 : 북양 함대의 궤멸
5. 정전 회담
6. 결과
6.1. 영향
6.2. 조선에 미친 영향
8. 관련 문서
8.1. 인물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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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4년 7월 25일 ~ 1895년 4월 17일까지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조선과 요동에서 싸운 청나라일본 제국의 전쟁.
명칭 그대로 청나라일본이 싸운 전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쟁터는 조선이었던 전쟁이다.
이 전쟁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이 완전히 상실되고 조선은 러시아 제국이 개입하기 전까지 일본 제국의 영향력에 넘어간다.
일본은 조선 정벌에 회의적인 소수 세력까지 메이지 유신 정권에 흡수되어 전체주의, 제국주의적 확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승전 후 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이용해서 군비를 확충해 러일전쟁 승리의 기틀을 닦았다.

2. 발단


한마디로 요약하면 서로 부흥/재기를 노리려는 청나라와 일본의 야심이 마침 비슷한 순간에 발생하고 여기에 조선에 동학농민운동까지 겹치자 서로의 명분을 걸고 조선이라는 땅에서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먼저 청나라의 경우 서구 열강과 본격적으로 대립이 시작되며 승승장구 하기는 커녕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며 야금야금 땅이 먹히고 있었고 심지어 아편전쟁을 통해 내외적으로 치명상을 입어버리고 과거 조공국중 하나인 베트남프랑스 제3공화국에게 넘겨주면서 체면을 구겨도 제대로 구겨버리게 된다. 이후 청나라는 재기를 위해서 양무운동을 통해 힘을 모아 동아시아 패권국의 위치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외국의 영향력을 더이상 잃을수 없었고 이를 위해서라도 조선은 다른나라, 특히 비슷하게 성장하는 일본에게는 절대 넘겨줄수 없는 땅이었다.
일본 또한 메이지 유신 이후로 급격히 발전이 이루어졌고 조선 침략에 회의적인 인물들도 대부분 그 의견을 접게 되면서 식민지에 대한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일본에게 제일 중요한 땅은 역시나 조선과 대만이었다. 조선을 얻게 되면 그 육로를 통해 러시아, 중국을 넘어 유럽으로 까지 길이 닿게 되고 대만을 얻게되면 그 곳을 통해 마찬가지로 유럽까지 이어질 해로를 개통할 기회가 생기고 덤으로 이 두곳을 통해 각각 육/해로로 내부적으로 무너진 청나라를 일부나마 먹어볼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 당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을 통해 갑신정변 이후 약 10년정도 청나라가 크게 힘을 떨치고 있던 상황이며 일본의 영향력은 상당히 감소된 상황이었다. 아무 이유없이 침략하기엔 명분도 없던 상황에서 일본에게는 운이 좋게도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벌어진다. 농민 운동의 기세가 거세져 조선의 자체적인 군대로는 막지 못하게 되자 조선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아산만'''을 통해 2,800명의 병사를 파병하고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에게 파병사실을 알렸으며, 일본은 일본 거류민과 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 정도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다는 제물포 조약 조항에 의거하여 8,000명의 병력을 '''인천만'''으로 파병한다.[2]
정작 양국의 파병 명분으로 쓰였던 동학 농민운동군은 외국 군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외세에 빌미를 주게 될 것과 그로 인한 궐기 목적의 변질을 두려워해 바로 전주 화약을 맺고 해산해버려 청나라와 일본 양측 군대 모두 그대로 붕뜨게 '''되었어야 했다.'''

3.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조선 조정은 일본 제국청나라에게 "이제 다 끝났으니 집에 돌아가라"라고 요구했으나 6월 12일 일본군 혼성 제9여단 선발대[3], 6월 16일 혼성 제9여단 4000명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이들은 6월 23일 한양으로 진군해 일부는 용산에 주둔하고 일부는 한양 시내를 진군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갑오개혁을 요구하는 등 점점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급기야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해 버렸다.[4]
당시 조선군 경군(京軍) 중 상당수가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위해 한양을 비웠던터라 경복궁을 경비하던 병력은 장위영(壯衛營)과 통위영(統衛營) 병력 일부, 평양기영(平壤箕營)[5] 병력 일부에 불과하였다. 한편 인근 북한산성에는 경리청(經理廳)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경복궁까지 거리가 있는터라 일본군이 고종을 사로잡을즈음에서야 경복궁 주변 지역에 전개된 상태였다.[6] 서울에 주둔한 오시마 혼성 여단의 병력은 절반인 4천 명이었고, 이 중 1천여 명이 경복궁 전투에 동원되었다.
7월 23일 0시30분 용산에서 밤을 새우며 대기하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오오토리 케이스케 공사의 전보가 도착하면서 경복궁 점령 작전이 실행된다. 새벽 04시경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은 영추문을 통해 궐내로 진입하려 하였으나[7], 일본군 공병대가 영추문 폭파에 실패하고 돌파가 지연되면서 영추문을 경비하던 평양 기영병(箕營兵)과 일본군 간 교전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던 첩보에 의하면 한양의 조선군은 대부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내려가 있어 경복궁을 지키는 병력은 얼마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장위영 및 평양에서 온 기영병 군사들이 궁내에서 일부 야영하고 있었고 상당수가 서울 각지에 주둔해 있었다.
같은 시간 반대편인 건춘문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장위영(壯衛營)이 지키는 광화문 일대에서도 일본군과 장위영(壯衛營) 군사들 사이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다. 새벽 5시가 되자 영추문 인근 평양 기영병(箕營兵)이 제압당하고 일본군이 영추문을 폭파시키면서 궐내로 일본군이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광화문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병사들 역시 일본군에게 돌파당하고 만다. 이 때 첩자를 투입해 조선군을 속이는 등 공작을 통해 진입한 일본군 병력이 경복궁 안에서 함성을 지르면서 조선군이 겁을 먹어 스스로 붕괴되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제 조선군은 경복궁 안팎에서 아침까지 만만찮게 저항했다.''' 허나,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가 지휘하는 2대대 병력 일부가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와 함께 입궁한 2대대장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는 칼을 빼들고 고종을 위협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고종이 붙잡히고도 전투가 끊이질 않고 오히려 외곽에 있던 경리청과 기영병 군사들은 야포까지 끌고와 궁궐을 포위하면서 오히려 일본군은 위기를 맞이한다. 이에 김가진안경수가 고종의 가짜 명령서를 만들고 홍계훈을 협박해서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킨다. ‘일청전사 초안’은 그때 조선군의 발포가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격렬했던 조선군의 저항을 기록하고 있다.#
'무기를 버리라.'는 김가진의 가짜 왕명이 전달되자 이들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며 해산하였다. 일부 병사들은 스스로 자신의 소총을 파괴하고 군복을 찢을 정도였다. 평양 기영병(箕營兵)들은 일본의 압박에 평양으로 돌아갔고, 한양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통위영(統衛營), 경리청(經理廳) 병력은 모두 무장해제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소총 3천 정과 야포 20문, 개틀링 기관총 8정을 압수했다.[8]
일본군은 효창원 일대(효창공원)를 숙영지로 삼아 기지를 두고,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둔 뒤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에서의 독립 선언을 하라는 등 갑오개혁을 하도록 요구하였다.[9]
그리고 8월 26일 조선의 김홍집 내각을 통하여 서양의 내정 간섭 및 청나라의 무력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과 동시에 그를 일본에 돕고 조선은 일본에 협력한다는 조일 양국 맹약을 맺게 된다. 이는 조선 내 일본군의 활동이 매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기반으로 작용한다.
1894년 일본의 외무 대신 무츠 무네미츠와 주청, 주한 전권 공사 오오토리 케이스케, 외무성 참사관 혼노 이치로는 청나라와의 개전을 위해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동시에 병력을 증원하였다. 이에 청나라도 위여귀가 이끄는 성군 6천을 평양에 마옥곤의 의군 2천을 의주에 각각 진출시켰다. 이홍장은 러 - 청 비밀 조약에 의거해 러시아에게 일본군 철병 권유를 부탁하였고 러시아는 2회에 걸쳐 철병을 권고하였으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영국은 청나라의 부탁을 받기는 했으나 일본과 비밀 조약을 맺고 전쟁이 양자강 유역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을 약속받는다.

4. 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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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조선에서의 전투



4.1.1. 풍도 해전, 성환 전투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 중에서
7월 25일 아산 앞바다 풍도(현 지명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에서 일본해군이 청 해군을 기습 선제공격한다. 당시 청은 군함 2척(제원, 광을)은 텐진항을 출발하여 아산만으로 이동 중이었고 이 경로를 파악한 일본 군함 3척(요시노, 나니와, 아키츠시마)은 풍도에서 매복해 청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청은 일본과 전운이 감돌고는 있었지만 전쟁중은 아니었고, 선전포고 없이 수송선을 침몰시키는 미친 짓을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병력을 수송했다. 그리고 일본은 그렇게 했다.) 일본해군의 포격을 받은 광을호는 도망가다 화약고가 폭발하여 좌초되고 제원호만 빠져나간다. 뒤이어 또 다른 군함 1척(조강)과 수송선(영국상선 고승)이 나타나 고승호는 격침되었고 조강호는 나포된다. 여기서 고승호 격침이 국제적 논란을 불렀다. 동학군과 싸우러 조선에 가는 제3국 선박을 공격해 침몰시킨 행위에 영국을 비롯한 각국이 항의하고 나섰다. 도고 헤이하치로 대좌가 '만국공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반박하면서 이 사건은 국제 해사 분쟁의 오랜 논쟁거리로 남았다. 고승호에 동승했던 독일인 교관 한네켄 콘스탄틴 폰은 '고승호 격침 직후 탈출한 청국 수병들을 일본군이 구조하기는커녕 사살했다.'고 증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풍도 해전을 시작으로 7월 28일에는 성환에서 대기 중인 청군 3500명을 오시마 요시마사가 이끄는 일본 육군 4천 명이 공격하여 청군은 5백 명이 죽고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8월 1일에야 양국은 동시에 선전포고 하였으며 곧이어 평양에서 격돌했다.

4.1.2. 평양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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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당시 평양의 모습[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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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 의하여 점령된 평양객사의 모습.
노즈 미치쓰라 중장과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평안감영과 선화당[11]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장위영을 수색대로 삼아 평양성 전투에 동원하였고, 평양감사는 "청군과 연합하라"는 흥선대원군의 밀지를 받고 청군의 편에서 싸운다.
9월 15일 새벽 일본군 1만 7천 명은 평양성에 주둔한 청군 1만 4천 명을 공격했다. 3방향에서 평양성을 공격했고 북부와 남동쪽 지역을 돌파해 모란봉을 점령했으며, 후면에서 예기치 않은 공격으로 청군은 당황하였다.
무엇보다 사전에 이홍장은 자신의 기반인 군사력을 잃을까봐 군대에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일본군을 맞아 싸우던 청의 장수 좌보귀가 패사하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섭지초는 일본군에 항복 제의를 하면서 도주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일본군도 상황이 썩 좋지는 못해 잠시 퇴각해 전열을 정비하려고 했는데 청군 대가리라는 작자가 저러고 있으니 바로 밀어붙였고, 24시간의 일방적인 교전 끝에 청군은 을밀대에서 항복하고 일본군이 평양성에 입성한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180여 명에 불과했지만 청군은 2천여 명이 전사하고 4천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2천 명은 압록강변으로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 평양 주민들은 청과 일본군 양측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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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황해 해전


9월 17일 황해(압록강 근해)에서 청, 일 양국의 해군이 다시 전투를 벌였다. 정여창의 기함 정원을 선두로 군함 11척이 출전하였고, 이토의 기함 마츠시마를 선두로 군함 10척으로 맞섰다.[12] 양측의 군함 숫자는 비슷했으나 일본 연합 함대가 전체적으로 3천 톤 이상 견실한 순양함들인 반면, 청국은 전함인 정원과 진원을 제외하면 2천 톤 내외 작은 순양함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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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일본 제국 측은 기함 마츠시마마저 4천 톤대 순양함급이었던 반면에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던 정원과 진원은 7천 톤이 넘었기 때문에 개함 전투 능력은 청나라가 좀 더 유리했다. 하지만 6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청나라의 북양함대는 패퇴하였다. 청나라 함대는 5척이 침몰하였고 3척은 1개월 이상 취역할 수 없을 만큼 파손되었다.[13] 반면에 일본 연합 함대는 4척이 손상을 입는데 그쳤다.[14] 전쟁 발발 3개월 전 영국은 청나라에게 순양함 2척을 사라고 권유하였으나, 청나라는 그 돈을 서태후의 생일 축하 비용으로 써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한다.[15] 이 2척은 일본이 구입하였고 그 중 1척이 요시노. 그래서 정여창은 전투 후 이홍장을 직접 찾아가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이홍장은 거부하면서 단지 위해만 수비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청군은 일본군에게 패전을 거듭했다. 청군의 가장 큰 문제는 전쟁을 이홍장의 회군에 전적으로 일임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홍장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잃을까 우려하여 일본군과의 전쟁엔 소극적으로 나섰다. 육군의 경우에는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무조건 퇴각, 해군의 경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잃지 말아야 하며 대양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이 때문에 청군은 이홍장 휘하의 지휘관들이 소극적으로 전투를 벌이다 퇴각하기 일쑤였다. 여기에 청나라 말기에 들어서면서 청군의 부패가 심화되어 장교와 병사들의 훈련도와 사기가 낮은 것까지 더해졌다. 그 때문에 일본군은 진격하며 아무 거칠 것이 없었다. 일본은 먼저 발해만 방면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위해(웨이하이)와 여순(뤼순)을 공격, 점령하기로 결정한다.

4.2. 중국에서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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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요동 전투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제1군은 의주,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어 안동(단둥)으로 진격해 요동반도에 교두보를 구축하였고, 이는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 노토부락을 친 이래 두 번째 일본의 대륙 침공이었다. '''오야마 이와오의 제2군은 화원구(화위안커우)에 상륙하여 금주, 대련(다롄)을 공격하였고, 다시 여순(뤼순)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개평과 영구까지 일본군이 점령하며 요동 반도는 완전히 제압당한다. 이때 일본군이 벌인 학살로 여순에선 군인과 시민 2만여 명이 죽고 단지 36명만 살아남았다고 영국의 타임즈지가 보도하였다.

4.2.2. 위해위(웨이하이웨이)전투 : 북양 함대의 궤멸


1895년 1월 19일 일본군은 위해 공격에 나선다. 청국의 북양함대는 육군과 호응하여 해상에서 육지의 일본군에 포격하였으나 일본군이 만의 입구를 봉쇄하자 안에 갇혔고, 결국 일본군에게 궤멸당했다. 정여창은 휘하 외국인 장병들이 항복을 촉구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해산시키고 음독 자살한다. 정여창 휘하의 장교인 유보섬, 황응양도 이때 자결하였다. 일본군은 청국 함대 12척을 나포했는데, 이중 1척은 정여창의 군인 정신에 대해 예를 표하며 그의 유체를 수송하는 데 사용하도록 돌려주었다.

5. 정전 회담


청나라는 회군이 신나게 털리자 상군을 투입하였으나 이미 엎지러진 물로 상군도 신나게 털렸고 결국 주화파 공친왕 혁흔이 총리가 되면서 화친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화친을 맺기 위해 호부 시랑 장음환과 호남 순무 소우렴을 히로시마에 파견한다. 그러나 장음환은 청나라의 전권 대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무츠 무네미츠는 거부하였고 혁흔이나 이홍장이 직접 와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 동안에 일본은 대만과 팽호 열도까지 점령하며 청나라의 목을 더욱 조여들었고 더 나아가 수도 북경을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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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3월 30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이홍장이토 히로부미 사이에서 정전 회담이 벌어졌다. 이때 일본은 아래의 사항을 요구하였다.
  • 대고(大沽, 다구), 천진(톈진), 산해관의 성지와 보루는 모두 일본군이 점령하고 청군의 군수품 일체는 일본군이 관리한다.
  • 천진, 산해관간의 철도는 일본군이 관리한다.
  • 정전 기간 내의 일본 군비는 청국 측이 부담한다.
  • 정전 일시 및 양군의 경계선 등 세부 사항은 중국이 전기 3항에 동의했을 때 다시 논의한다.
얼핏 살펴만 봐도 막대한 재정 부담은 물론이거니와 청나라의 수도 코앞에 진지를 구축하겠다는 심산까지 나타났으므로 이홍장은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가혹! 가혹!"이라는 말을 연발하였다. 몇 차례 회담이 벌어지던 중 이홍장이 고야마 도요타로라는 일본인에게 저격당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일본은 이홍장에게 사죄하며 무조건 정전하겠다며 태도를 바꾼다. 이홍장은 참의 이경방을 대리로 내세워 회담을 이어갔고 1895년 3월 30일에 먼저 6개 조항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후 휴전 기간 동안 강화 협상을 진행하여 4월 17일 전문(全文) 11개 조항의 강화 조약, 각 3조항의 의정서(議政書) 및 별약(別約), 2조항의 추가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이 바로 시모노세키 조약.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또한 요동 반도, 대만과 그 부속 도서, 팽호 열도를 할양하였고 고평은 2억 냥을 7년 이내에 배상하기로 했다. 이를 당시 일본 화폐로 환산하면 3억 6천만 엔으로 일본 정부 4년치 세입이다. 또한 일본은 서구 열강과 같은 최혜국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러시아의 재무 장관 비테는 일본이 요동 반도를 점령하는 것은 러시아의 이익에 해를 끼치며 극동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프랑스, 독일 제국과 연합하여 일본에 삼국간섭을 벌이며 압력을 가했다. 당황한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반응이 없자 결국 압력에 굴복하고 만다. 그래도 요동 반도를 돌려주는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하이난도 할양을 요구하려다 너무 멀어서 대신 은 3천만 냥을 추가로 뜯어냈다. 그리고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요동 반도 반환에 대한 대가로 각종 이권을 차지하였다.

6.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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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그려진 승전 기념화.

6.1. 영향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하였다는 징후로 받아들였고 열강으로 진입하면서 5년 후 의화단 운동에 개입하였다. 정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본격적으로 팽창주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돈 사고방식도 이때 정립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삼국간섭을 벌인 러시아와 서구 열강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러시아도 부동항을 얻기 위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면서 훗날 러일전쟁이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청은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양무운동에 대한 회의론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단지 서구의 기술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일본의 유신처럼 체제 자체를 뒤엎자는 변법자강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변법 자강 운동의 경험이 나중에 신해혁명으로 어느 정도 결실을 얻으니, 사실상 청을 멸망으로 몰고 간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아편전쟁 등 서양 세력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배하던 것에 '''재수없게 지나가던 미친 개에게 물린 일'''[16] 정도로 여기던 중국인들에게 청일전쟁은 큰 충격이었다. 자기네 문화권에서 별 볼일 없었던 변방의 섬나라, 속된 말로 한낱 따까리로 생각했던 작은 종자들에게 어처구니없이 털리고 앞마당 조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하는 개망신을 당하자, 비로소 중국이 천하의 중심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17]
뒤이은 변법 자강 운동의 실패와 뒤이은 의화단 운동으로 외세의 열강들이 아편전쟁 때보다 더 확실하게 중국 대륙을 짓밟아버리자, 중국 지식인들은 그제야 비로소 일본을 모델로 한 입헌군주제 개혁이 아닌,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하는 혁명 운동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6.2. 조선에 미친 영향


아산에 상륙한 청군과 달리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한양에 주둔하였고 전주화약으로 동학농민운동은 진정되었으나 청의 내정간섭을 막는다는 구실로 갑오개혁을 요구하였다. 뜻대로 되지않자 경복궁을 점령하여 고종명성황후를 감금하고 김홍집 내각을 들어서게 하였다. 평양감사는 흥선대원군의 명령을 받아 청군의 편에서, 김홍집 내각의 명령을 받은 장위영은 일본군의 편에서 싸웠다. 양군의 물자약탈과 노동 징발로 평양주민의 피해가 극심했다. 일본에 반기를 든 2차 동학농민운동은 일본 지휘하의 조선 관군들이 소탕하였다. 삼국 간섭으로 러시아 제국이 일본 세력을 몰아내자 친러내각도 들어섰고 이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고종은 아관파천을 한다. 러시아와 일본이 대립한 가운데 대한제국이 수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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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전력 비교만 봐도 무기에서만 청군이 우월했지, 청군은 인적 자원부터 시작해서 훈련도와 조직 그리고 전술 및 군기가 매우 부적절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특히나 군기 문제는 심각해서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을 상습적으로 자행하여 당시 청군을 조선인들은 이를 갈 정도였지만, 일본군은 무기에서는 질이 청군보다 떨어지긴 했으나, 군기가 매우 엄격하였고 훈련도와 조직력에서 서구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구 체제를 타파한 형태였다. 특히나 군기 문제는 청군과 매우 비교가 되었는데, 일본군도 현지 징발을 통해서 인력을 차출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그래도 조선인들을 고용하는 방식을 택했고, 황현매천야록에서는 '군기가 엄정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청군과 근본적으로 자질 면에서 달랐다. 다만 일본도 보급 따위 때려치고 전투병력만 조선에 때려박았는데, 이는 정부가 제대로 보급 못해주니 알아서 삥뜯어 먹고 살라는 소리였다.[18] 이로 인해 보급을 받지 못한 일본군은 약탈에 가까울 정도로 징발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무엇보다 그동안 이어져왔던 한반도계 국가와 중국 왕조의 조공관계가 청일전쟁의 결과로 조선과 청나라의 군신관계가 끝나면서 완전히 막을 내렸다. 병자호란이 한족 왕조와의 조공관계에 마침표를 찍은 전쟁이었다면 청일전쟁은 한족 왕조와 이민족의 정복왕조를 막론하고 중원을 다스리는 왕조가 한반도계 국가를 조공국으로 거느리던 기존의 국제적 전통을 아예 끝장낸 전쟁이다. 아편전쟁으로 금이 간 중화사상이 청일전쟁으로 완전히 박살나버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황제 중심의 전제군주제와 중앙집권제를 종식시킨 이들은 중국의 주류 민족인 한족이었지만, 한민족 국가로부터 조공을 받던 전근대적 동아시아 대제국으로서의 중국을 무너뜨린 이들은 사실상 일본인들이었던 셈이다. 덤으로 중국의 지배민족이 한족이든 이민족이든, 중국 영토에 있던 국가가 크든 작든 수천년 동안이나 한반도에 영향력을 미쳤는데, 중국이 이러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7. 청일전쟁 당시 양국의 참전 해군 비교


'''청일전쟁에 참전한 양국 해군 비교'''
<rowcolor=#000> '''청나라 북양함대'''
'''일본 제국 해군'''
철갑함
정원(定遠), 진원(鎮遠) : 총 2척
철갑함
후소(扶桑) : 총 1척
장갑순양함
경원(經遠), 내원(來遠) :
총 2척


방호순양함
치원(致遠), 정원(靖遠) :
총 2척
방호 순양함
마츠시마(松島), 이츠쿠시마(厳島), 하시다테(橋立),
나니와(浪速), 타카치호(高千穂), 야에야마(八重山),
아키츠시마(秋津洲), 요시노(吉野), 이즈미(和泉) :
총 9척
어뢰순양함
제원(濟遠), 초용(超勇), 양위(揚威) :
총 3척
순양함
치요다(千代田) : 총 1척
해양전투함
평원(平遠) : 총 1척


콜벳
광갑(廣甲) : 총 1척
장갑 콜벳함
히에이(比叡), 콘고(金剛) : 총 1척



8. 관련 문서



8.1. 인물



9. 여담


  • 대만에서 이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도조' 라는 안경 쓴 인물이 등장한다. 후에 내각총리대신을 지내는 전범 도조 히데키는 청일전쟁 당시에는 어직 어린애였으므로 성씨만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20]

[1] 혹은 第一次中日戰爭(第一次中日战争)라고도 한다[2] 여기서 청과 일본의 착륙지점을 보면 서로 목적이 확연한데, 동학 농민 운동은 한반도 남부에서 발생했으며 아산은 청나라의 위치를 고려할때 반란 진압이라는 목적이 확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일본이 부산이나 그런 곳이 아닌 '''서울 바로 아래'''인 인천에 정박했다는 것은 애초에 농민운동이고 다른 조약이고 다 명분이고 조선을 먹을 생각으로 왔다는 것을 드러낸 것.[3] 제9 혼성여단장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으로 아베 신조일본 총리의 외고조부다.[4] 이 사건에 대해서는 흥미롭게도 을미사변이나 다른 것들과 달리 분명한 명칭이 없어서 "경복궁 전투", "경복궁 쿠데타"나 "경복궁의 변"과 같은 불명확한 용어를 쓰고 있다. 민영환은 1900년에 세운 장충단비에 ''''갑오사변''''(甲午事變)이라 하였고,# 1983년 김경창은 '甲午倭亂 : 甲午,こ未,こ巳,경성의 궁중왜란'이란 책에서 ''''갑오왜란''''(甲午倭亂)을 # 1988년 김상기는 〈甲午義兵의 歷史的 展開와 性格〉이란 논문에서 ''''갑오변란''''(甲午變亂)이라 칭하였다.# 황태연은 2017년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갑오왜란''''이 벌어졌고 이에 반발해 일어난 2차 동학농민운동도 포함한 항일운동이라 저술하였다.# 중앙일보는 2017년 기사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갑오왜란''''이 시작되었다고 하였고,# [5] 장위영(壯衛營)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 중앙군이였던 친군영 중 전영과 좌영을 통합한 부대로 한양의 방위를 맡았고, 통위영(統衛營)은 친군후영과 우영, 그리고 기연해방영을 통합한 부대로 한양 및 수도권을 위수지역으로 하였으며, 경리청(經理廳)은 통위영에서 구 총융청 병력이 분리되어 창설된 부대로 북한산성 일대에 주둔하였다. 기영(箕營)은 평안 감영을 지칭하는 것인데,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경군이 이동하자 정예인 평양 군대가 임시로 한양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6] 결국 경리청(經理廳) 병사들은 일본군과 교전도 하지 못하고 무장해제 당한다.[7] 정문인 광화문에서 진입이 시도되었다면 경복궁의 배치도 상 약간 북쪽에 위치하는 침전의 왕이 도망갈 시간을 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8] 일부 무기는 조선군이 무장해제 당하기 전 자기 손으로 파괴하고 일본군이 압수한 조선군 무기는 연못에 던져버려 고장나게 만든다. 시위대는 이 총기를 건져다가 다시 무장했는데, 이 때문에 다음해 을미사변 때 또 경복궁에 처들어온 일본군과 전투할 때 궁궐을 호위하던 상당수의 시위대의 무기가 격발이 안되는 등 전투력 저하의 원인이 된다.[9] 임오군란 이후 청은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했었다. 이는 나중에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나온 조선의 독립국 문제에 대한 명시에서의 목적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게다가 독립을 한 이유도 조선에서의 청나라의 종주권을 박탈하기 위한 것일 뿐 실제로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독립 협회를 비롯한 많은 수의 조선 지식인들이 이 말에 속아 러일전쟁 때까지 일본을 응원했고,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10] 오른쪽 사진은 조선군과 청군 포로들을 찍은 것이다. 뒤쪽에 일본군도 보인다. 조선군은 장위영 소속의 병사들이다.[11] 평안도와 평양의 중심인 평안감영이 점령 당했다는 것은 이미 조선조정의 힘이 무너졌다는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12] 어뢰정같이 배수량 1천 톤도 안되는 함선이나 전투 능력이 없는 수송선은 제외한 숫자[13] 다만, 제일 중요한 정원과 진원은 정원이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무사했다. 이때 정원의 포술장으로 탑승하고 있던 리위안훙이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14] 이는 오합지졸에 가까웠던 청군의 훈련 상태도 한몫하였고, 청군의 중소 구경 속사포 부족도 커다란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지휘관부터 아편 중독자에 청나라 순양함 '제원'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적전 도주하였고 무장에서도 청군은 대구경 주포에서는 앞서있었지만 중소 구경 속사포에서는 일방적인 열세였다. 그 결과로 초전부터 일본군의 명중률 높은 속사포 사격에 제대로 난타당하였다.[15] 이때 청나라는 순양함보다 훨씬 큰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2척 보유했으니 안 사도 충분히 자국 함대가 강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중화적인 자신감은 청일전쟁에서 그 동안 깔봐왔던 일본에게 제대로 박살이 나면서 산산조각나지만.[16] 이런 국제 사회 인식은 중국의 보편적 인식이었다. 중국 역사에 보면 타국에게 힘의 우위에 있지 못할 경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서 시간을 버는 대신, 중국이 가진 막대한 인구와 농업 생산력, 문화력이라는 사기적인 역량을 발휘해 장기적으로 재탈환하는 경향이 있다. 초기 한나라나 송나라는 주변국에게 세폐를 바치더라도 이것을 크게 자존심 상해한다기 보다는 하나의 전략으로 생각하고 꺼릴 게 없어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중국은 유목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때로는 나라가 통째로 점령당했지만 결국에는 압도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유목 민족들을 동화시켜나갔다. 그러나 산업 혁명을 통한 서구의 능력은 상당히 강했기에 청은 이 당시 양무운동으로 서구식 문물을 흡수하는 중이었고 여전히 전투 중 교환비에서는 밀렸지만 과거와는 달리 서양 군대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도 옛날 아편전쟁에서만큼 밀리지는 않는 성장은 하고 있었다. 다만 청의 수뇌부는 여전이 이런 시대의 변화를 읽는 눈이 어두웠기에 야쿱 칸과의 전쟁을 유리하거나 비등하게 이끌고도 러시아 제국에게 중앙아시아 일대의 영토를 상당 수 내주고 청불전쟁에서도 전황을 자신들 쪽으로 어느 정도 이끌고도 프랑스 제3공화국만 좋은 조약만 맺고 끝낸 한심한 지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는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이전과는 달리 제대로 된 전투력을 보이지 못하고 패전하는 추태로 이어졌다.[17] 한반도 국가는 중원 왕조들에게 상징성이 매우 컸다. 고조선 ~ 삼국 시대에 투닥거릴 때부터 중국 동북방의 안보와 직접 연계되었고, 통일 신라 이후 조공 체제가 확립되고 중원의 중심이 동쪽 해안가로 옮겨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앞마당으로 인식되었다. 만리장성의 개축과 한나라 이후 지속적인 토벌로 서북방 지역의 유목민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반대 급부로 만주 일대의 중국 동북부 유목민들이 중원을 가장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고, 이 지역을 중국 왕조들이 평정하려면 한반도 국가의 협조가 필수였기 떄문이다.[18] 왜냐면 이 당시 일본은 정부의 재정 상태가 좋지 못하였다.[19] 대만 전선에 나간 일본군이 현지인(본성인?대만 원주민?)의 약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한다. 상세는 항목 참조. 근대 전쟁에서 파생된 일제의 약재라는 점에서는 정로환과 일맥상통한다.[20] 다만 10년후에 벌어진 러일전쟁때 도조 히데키가 참전한 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