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공

 


'''노(魯)나라 16대 국군
장공
莊公
'''
''''''
희(姬)
''''''
노(魯)
''''''
동(同)
'''아버지'''
노환공(魯桓公) 희윤(姬允), 희궤(姬軌)
'''어머니'''
문강(文姜)
'''아내'''
맹녀(孟女)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706년 ~ 기원전 662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93년 ~ 기원전 662년
1. 개요
2. 치세

[clearfix]


1. 개요


노나라의 16대 군주. 노환공의 아들. 노군반, 노민공, 노희공의 아버지. 노환공이 제양공의 사주를 받은 공자 팽생의 손에 죽은 뒤 노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노장공은 외가인 제나라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2. 치세


노장공 5년(기원전 689년), 위(衛)나라를 쳤다.
노장공 8년(기원전 686년), 노장공에게 기쁜 소식이 있었다. 제나라의 공자 규는 관중의 조언을 들어 노나라로 망명한다. 노장공은 당연히 그를 이용해 제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받아들였다.[1]
노장공 9년(기원전 685년), 제양공공손무지가 죽어 제나라의 후작 자리가 비자 노장공은 공자 규를 지원했다. 그러나 공자 소백(小白)[2]이 기지로 화살에 맞아 죽은 것처럼 꾸민 뒤 소백은 제나라로 먼저 돌아가 제환공이 된다. 제환공은 공자 규를 죽이라고 노장공에게 말하니, 노장공은 그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어 공자 규를 죽였다. 그러자 소홀(召忽)은 자결하고, 관중은 제나라로 죄수로 끌려갔다. 그 전에 모사 시백(施伯)이 제환공이 그를 중히 쓰면 노나라에 위협이 될 거라면서 말렸으나 노장공은 그 말을 듣지 않고 함거[3]에 실었다. 그러나 제환공은 관중을 죽이기는 커녕 오히려 상국이 되었다.
노장공 10년(기원전 684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혼내주기 위해 노나라로 쳐들어갔다. 당시 제나라가 노나라보다 강한 것을 믿은 것이다. 그리고 장작 땅에서 만나 노장공은 조말(曹沫) 즉 조귀(曹劌)[4] 건의대로 함부로 싸우지 않고 3번째 북을 칠 때 제나라 군사가 기세가 꺾일 때[5] 노군이 그 틈을 타서 덮치니 노군은 크게 이겼다.
노장공 13년(기원전 681년), 노장공은 가(柯)나라에서 제나라와 회맹했는데, 조말이 빼앗은 땅을 내놓으라면서 단검으로 제환공을 협박했다. 그러자 제환공은 들어주겠다고 하다가 후회했으나 관중은 들어줄 것을 권해 결국 제환공은 노나라에 땅을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제환공의 명성이 천하에 진동했다. 같은 해 여름 노나라와 제나라가 성(郕)나라를 치자 성나라는 제나라에 투항했다. 아우인 중손경보[6]가제나라를 치라 했으나 노장공은 듣지 않고 가을에 회군했다. 그리하여 군자는 노장공을 추앙했다.
노장공 23년(기원전 671년), 노장공은 제나라에서 토지신 제사에 참여했다.
노장공 32년(기원전 662년), 노장공은 맹녀를 사랑해 아들 희반을 낳았다. 그리고 희반이 자라서 양씨의 딸을 사랑했는데, 그녀가 사육사인 낙과 함께 살자 희반은 채찍으로 그를 때렸다. 그러자 노장공은 그를 죽이라고 했으나 희반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노장공은 그 해 병이 들어 죽었다. 그리고 아들 희반(姬班)을 노나라의 군주로 옹립했으나 공손경보가 낙을 시켜 그를 죽이고 희계(姬啓)를 노나라 군주로 모시니 그가 바로 노민공이다.
[1] 제나라는 당시 제양공의 폭정으로 기울어가던 터라 노장공이 그를 받아들여 원수를 갚고, 그를 세우면 노나라에게 세워준 공자 규는 노나라의 말을 참고라도 해야해서 제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2] 훗날의 제환공[3] 죄수를 싣는 수레.[4] 열국지에서는 두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나온다.[5] 설명을 약간 덧붙이자면, 당시 군법에 북을 한번에 333번 칠 때 진격하고, 두 번째는 333번을 더해서 666번을 칠 때 진격하고, 세 번째는 334번을 더해서 1000번이 될 때까지 진격하라는 규정이 있는데, 이때쯤 되면 3번이나 출격 명령을 내렸으니 기세가 꺾이게 되는데, 조말 즉 조귀는 그것을 노린 것이다.[6] 중손씨 즉 맹손씨의 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