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환공

 




'''춘추오패(春秋五覇)
제(齊)나라 16대 국군
환공
桓公
'''
[image]
<colbgcolor=#bf2f7b> ''''''
강(姜)
''''''
여(女(汝))((呂))
''''''
소백(小白)
'''아버지'''
제희공(齊僖公) 강녹보(姜祿甫)[1]
'''사망 장소'''
제나라 궁
'''생몰 기간'''
음력
? ~ 기원전 643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 (43년)
1. 소개
2. 생애
2.1. 권좌에 오르다
2.2. 최초의 패자가 되다
2.3. 관중의 사후에 일어난 일
3. 재위 기간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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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16대 군주이자, 최초의 춘추오패다.
'''춘추오패 중 최초의 패자(覇者).'''[2]

2. 생애



2.1. 권좌에 오르다


제나라의 13대 군주 희공(僖公)의 셋째 아들로, 포숙아를 스승으로 모셨다. 희공이 죽고 형인 제양공이 즉위 했는데 정치를 막장으로 해서 사촌 형제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살해당했고 무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해 제나라의 군주가 없게 되었다.
이때 형인 규(糾)는 노나라에, 소백(제환공)은 거(莒)나라에 있었는데 거나라가 제나라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소백이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규의 스승인 관중은 규를 제위에 앉히기 위해 지름길로 가서 소백의 진영에 도착하여 화살을 쐈고 화살은 소백에게 명중했다. 그래서 규와 관중은 소백이 죽은줄 알고 천천히 제나라로 갔지만.. 사실 관중의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의 쇠고리를 맞춰 튕겨 나갔지만, 소백은 관중의 짓임을 알고 일부러 죽은 척 하여 관중 일행을 방심시켰던 것. 이렇게 소백은 규보다 먼저 제나라에 도착해 즉위하여 환공이 되었고, 규의 편을 들고 쳐들어온 노나라의 군대를 포숙아를 시켜 무찔렀다. 그리고 노나라에 압력을 넣어 규와 그 일당을 죽이도록 했다. 관중도 처치하려고 했지만, 관중의 절친 포숙아가 말리며 말하기를 "제나라 하나만을 다스리려면 이 포숙아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천하를 다스리려면 관중이 필요합니다." 환공은 관중을 용서하고 재상으로 임명했다. 이후 환공은 관중의 추천으로 습붕, 영척, 빈서무, 동곽아, 공자 성보를 등용하여 각각 맡은 분야를 책임지게 하였다.

2.2. 최초의 패자가 되다


환공은 관중의 말이라면 그대로 따랐고, 관중의 정치에 의해 제나라는 강성해졌다. 환공 5년에 노나라를 쳐서 땅을 빼앗고 이에 노나라 군주 장공은 화친을 청했다. 환공이 노 장공과 회장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데, 조말(曹沫)이라는 사람이 회장으로 올라와서 환공의 목에 칼을 겨누고 "빼앗은 노나라 땅을 모두 돌려주시오!"라며 협박했다. 환공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크게 화를 내며 조말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관중이 그를 말리며 대인군자다운 모습을 보이라고 하자 환공은 빼앗은 땅을 모두 노나라에 돌려주었고 이로써 제후들에게 패자로 추대되었다.
23년에 연나라가 산융족의 침략을 받자 환공은 연나라를 구원하러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물리쳤다.[3] 연나라 군주 연 장공이 환공을 배웅하려고 같이 가다가 그만 제나라 국경을 넘고 말았는데, 환공은 "연나라 군주는 연나라 국경선까지만 배웅해야 한다."며 연 장공이 밟은 제나라 땅을 모두 연나라에 주었다.
이와 같이 제가 대가 끊어질 위기의 나라를 구해 준 것은 '''연'''뿐이 아닌데, '''노'''의 대가 끊기자 노 희공을 세웠으며[4] '''위'''가 도성을 잃고 망하기 직전까지 몰리자 초구에 성을 세워주고 나라를 안정시켜 준 것이다. 이는 혼란스러웠던 당시에 파격적인 행보였고 이를 제안한 관중이나, 욕심을 갖지 않고 그에 따른 제 환공이나 대단한 위인들이다. 제 환공이 춘추오패 중 으뜸으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29년에는 부인인 채희(蔡姬)[5]와 함께 뱃놀이를 했는데 채희가 장난으로 배를 잡고 흔들었고, 겁이 난 환공이 그만하라고 했는데도 계속 흔들자 이에 빡친 환공은 채희를 채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채나라 군주가 화가 나서 채희를 다른 나라로 시집 보냈고 환공은 진노하여 채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때 관중은 채나라 공격이 사적인 감정으로 발발한 거라 명분이 부족하다며 옆의 초나라도 치라고 하였고, 환공은 "초나라가 주나라에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핑계로 초나라로 쳐들어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나라로 돌아갔다. 사실 제가 초로 쳐들어 간 계기는 물론 채희의 일도 있겠지만 정(鄭)으로 세 번에 걸쳐 쳐들어온 초국에 대한 견제가 밑바탕이 되었으며, 채를 거쳐 공격하자는 계책 또한 관중으로부터 나온 계책이다. 즉 '''중원 진출을 노리고 있던 초를 잠재움으로써 패공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 했던 의도'''였지, 사적인 감정에 의한 침략이라고는 보기 힘들다.[6] 또한 위의 내용과 같이 허장성세의 식으로 쳐들어간 것이 아닌, 실제 각 나라의 군대를 모아 쳐들어갔으며 주 왕조에 대한 공물을 약속 받은 것은 아직 주 왕조의 권위가 남아 있던 당시로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일은 매우 가치있는 일로써 수년, 수대째 주 왕조에 공물을 바치지 않던 초를 군사적 마찰 없이 공물을 바치게 했다. '''단순히 황하 지역에만 영향력을 끼친 것이 아닌, 이남 지역 또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패공으로써 위치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제가 초를 제압 아닌 제압을 하자 언제나 제를 떠받들던 주 왕조는 '''제를 견제하기 시작한다.'''[7][8]
사실 환공이 패자가 된 것은 '''환공 본인의 능력보다는 관중의 힘이 매우 컸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그런 관중을 큰 자리에 기용한 제 환공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은 확실하다.
환공은 대인군자다운 포부로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관중을 용서해 줌으로써 패자가 되려면 군주의 그릇이 커야 함을 보여 준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도 총애했던 역아나 수초가 옆에서 관중을 모함할 때도 관중을 계속 믿고 신뢰했던 것은 '''환공의 성군으로서 자질'''을 가감없이 보여 준다. 실제로 뛰어난 수하가 있었지만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 하거나 주위의 말에 현혹되어 패망의 길로 접어든 군주가 한둘이었던가.
그러나...

2.3. 관중의 사후에 일어난 일


이후 환공은 점점 자만심에 빠져 봉선제[9]를 거행하려고 하였고 관중이 극구 말린다. 41년에 관중이 쓰러지자 환공은 병문안을 와서 관중의 후임을 물어봤다. 환공은 역아[10], 수초[11], 개방[12]을 추천했지만 관중은 모두 안 된다고 하며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관중이 죽자 환공은 노망이 났는지 세 사람을 재상으로 임명하였고,[13] 세 사람은 권력 다툼을 하며 환공을 밀실에 감금해 버렸다. 환공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굶어 죽었고, 그 후 67일 동안 권력 다툼이 계속되어 환공의 시신을 수습할 때에는 구더기가 들끓었다고 한다. 최초의 패자로서 실로 비참한 최후다.[14][15]
여자를 좋아해서 부인이 셋, 첩이 여섯이나 있었는데, 정작 적자는 없고 어머니가 다 다른 서자 여섯 명, 곧 공자 무궤, 원(제 혜공), 소(제 효공), 반(제 소공), 상인(제 의공), 옹을 두어 세자를 두지 못 했다. 관중 생전에 나중에 효공이 되는 공자 소를 세자로 세웠으나, 관중이 죽은 후 역아와 가까운 사이인 무궤를 세자로 세울 것을 역아 일당에게 약속했다. 결국은 환공 사후 여섯 서자가 서로 권력 다툼을 하며 돌아가면서 다섯 서자가 군주를 해먹었고 이런 혼란기 때문에 제나라는 패자의 지위를 놓치고 만다.

3. 재위 기간의 사건


위의 내용이 일화로 되어 있어 그것을 정리하기 위한 역사 기록이다.
  • 제 환공 2년(기원전 684년), 제 환공이 노나라를 쳤으나 장작에서 조말이 이끄는 노나라 군대에 패했다. 겨울, 제 환공은 담#s-2(譚)나라[16]로 달아난 적이 있었는데, 담나라에서 무례하게 굴었으므로, 제 환공은 그것을 잊지 않고 담나라를 쳐서 멸했다. 담나라 군주는 거(莒)나라로 달아났다.[17]
  • 제 환공 3년(기원전 683년), 주나라의 왕녀가 제 환공에게 시집왔다.
  • 제 환공 5년(기원전 681년), 제, 송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주나라(邾) 5개국 군주와 제나라의 북행 땅에서 회맹하니 이것을 북행의 회맹이라고 한다. 이 회맹이 열린 이유는 송나라 내부에서 일어난 변란을 바로잡고 회맹에 참가하지 않은 수(遂)나라를 치기 위함도 있다. 제 환공은 수나라를 멸하고, 노나라를 쳐서 노나라를 이겼다. 이에 노장공은 제나라에 회맹을 요청하니 노나라의 가 땅에서 회맹하니 이 회맹을 가지(柯地)회맹이라고 한다. 회맹 중에 노 장공의 신하인 조말(曹沫)이 보검을 빼 들어 제 환공을 위협했다. 그리고 제나라가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문양 땅을 돌려달라고 했다. 제 환공은 협박에 못 이겨 결국 그러마고 했다. 그러나 돌아오자 조말이 괘씸해 조말을 불러 죽여 버리려 했다. 그러나 관중이 간했다.
"비록 협박에 굴해 마지못해 문양 땅을 주겠다고 하셨어도 그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제 환공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문양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천하 제후들이 제나라를 따르게 되었다.
  • 제 환공 6년(기원전 680년), 북행 회맹에 참여한 송나라가 회맹을 배신하는 사건이 터졌다.[18] 제 환공은 진(陳)나라, 채나라에게 송나라를 치게 했다. 그리고 제 환공이 사람을 보내 주 천자에게 공물을 바쳤다. 그러면서 송나라가 천자를 존중하지 않아 군주를 폐해 그 죄를 묻겠다고 했다. 주나라 천자 또한 제 환공의 위세를 빌어 천자의 위엄을 키우려 했으므로 제 환공의 요구를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대부 선백에게 병력을 주어 따르게 했다. 제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3개국이 송나라를 쳤다. 이것을 안 송나라는 제나라가 천자를 등에 업어 명분상 불리하고, 실력 또한 제나라에게 미치지 못 했으므로, 제후들 앞에서 그 일을 사죄했다.
  • 제 환공 7년(기원전 679년), 송나라의 견 땅에서 위(衛)나라, 정나라, 송나라와 회맹하니 이것을 견 땅의 회맹이라 한다. 여기서 제 환공이 맹주가 되어 패자로서의 지위를 다졌다.
  • 제 환공 8년(기원전 678년), 제나라는 다시 노나라, 송나라, 진(陳)나라, 위나라, 정나라, 허나라, 활나라, 등(滕)나라와 유 땅에서 회맹했다. 당연히 여기서도 제 환공이 맹주가 되어 제 환공은 명실상부한 패자가 되었다.
  • 제 환공 11년(기원전 675년), 노나라 공자 결이 진(陳)나라로 시집가는 공녀를 호송하던 중 견 땅에서 열린 제나라와 송나라의 회맹에 억지로 참가했다. 이 때문에 겨울에 제나라, 송나라, 진나라가 노나라를 쳤다.
  • 제 환공 12년(기원전 674년), 제나라가 융족을 쳤다.
  • 제 환공 14년(기원전 672년), 진(陳)나라 선공이 태자 어구를 죽이니 공자 완이 두려워 제나라로 망명했다. 제환공이 공자 완을 경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공자 완이 사양하자 기술자를 관장하는 공정 벼슬에 임명했다.[19]
  • 제 환공 15년(기원전 671년), 제나라가 노나라와 두 차례 회맹했다.
  • 제 환공 16년(기원전 670년), 노장공이 제나라에서 부인을 맞이했다.
  • 제 환공 19년(기원전 667년), 제나라가 노나라와 성복 땅에서 회맹했다.[20]
  • 제 환공 22년(기원전 664년), 제나라가 장(鄣)나라를 쳐서 굴복시켰다.
  • 제 환공 23년(기원전 663년), 산융족이 연(燕)나라를 침입하자 연나라가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제 환공은 산융을 쳐서 연나라를 구해 주었다. 그리고 고죽국에 이르러 회군했다. 연장공은 그것에 고마워해 제 환공을 배웅하다가 국경을 넘고 말았다.[21] 그러자 제 환공이 쿨하게 말했다.
"국경을 넘은 만큼 그 땅을 연나라에 주어 연나라가 무례한 나라가 되지 않게 하겠소."
그리고 그 땅을 연나라에 진짜 내주었다. 그 땅을 연류(燕留)라 한다. 그리하여 제나라의 신망이 더욱 두터워져 제후들이 제나라를 우러르게 되었다.
  • 제 환공 27년(기원전 659년) 봄, 제나라, 송나라, 조(曹)나라, 3개국은 병력을 거느리고 형나라를 구하려 했으나 이미 북적에게 멸망당한 뒤였다. 북적은 곧 위나라#s-3.1로 쳐들어가 위나라도 멸망시켜 버렸다. 이에 제 환공은 형나라와 위나라를 재건시켰다.[22]
  • 제 환공 29년(기원전 657년), 제 환공과 채희가 뱃놀이를 하다가 물장구를 치자 제 환공이 제지했으나 채희가 듣지 않았다. 제 환공은 채희를 내쳤다. 채나라에서 그 일로 제 환공을 원망해 채희를 새로 시집 보내자 제 환공이 크게 노해 채나라를 치려 했다. 가을에 정나라초나라의 공격을 받자 제 환공은 제후들을 소집해 정나라를 구하려 하니 이것을 양곡 회맹이라고 한다.
  • 제 환공 30년(기원전 656년) 봄, 제 환공은 제나라, 노나라, 진(陳)나라, 위나라, 정나라, 조나라와 초나라에 빌붙은 채나라를 치기로 했다. 당연히 국력이 약한 채나라를 쳐부순 뒤 초나라로 가자 초나라가 굴완을 보내 주 왕실에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바로 소릉의 회맹이라고 한다.
  • 제 환공 31년(기원전 655년), 주 왕실에서 세자를 교체하려고 했다. 바로 태자 정 대신 왕자 대로 바꾸려 한 것이다. 주혜왕이 죽자 제 환공은 노나라, 송나라, 허나라, 조나라, 진(陳)나라와 도에서 회맹했다. 그리고 태자 정을 주나라의 천자로 세우니 그가 바로 주양왕이다.
  • 제 환공 33년(기원전 653년), 제 환공이 정나라를 치고 노나라, 송나라, 진(陳)나라, 정나라와 영모 땅에서 회맹했다. 이때 관중의 조언에 따라 환공이 제후들을 예우하니 제후들이 제나라를 더욱 공경하여 공물을 바쳤다.
  • 제 환공 35년(기원전 651년), 제 환공은 각 제후국과 규구에서 주 양왕을 모시고 회맹했다. 이것을 규구의 회맹이라 한다. 주 양왕이 제 환공의 패자 지위를 승인했다.[23] 이 해 진헌공이 죽고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제환공이 진나라로 가 진(秦)목공과 함께 진혜공을 옹립했다.
  • 제 환공 38년(기원전 648년), 주나라 왕자 대가 왕이 될려고 융족을 끌어들여 주나라를 쳤다가 패하자 주양왕이 왕자 대를 추방하니 왕자 대가 제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제환공이 관중을 보내 주양왕과 왕자 대를 중재했다.
  • 제 환공 41년(기원전 645년), 관중이 중병에 들자 제 환공이 그를 문병하면서 물었다.
> "여러 신하 중 누가 경을 이을 만하오?"
>
>
> 관중이 대답했다.
> "신하는 군주가 잘 아는 법입니다."
>
>
> 제 환공이 대답했다.
> "역아는 어떠하오?"
>
>
> 관중이 대답했다.(* 이하 대화로만 표기)
> "역아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군주를 따랐으니[24], 인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자입니다."
>
>
> "개방은 어떠하오?"
>
>
> "자기 나라를 버리고 군주를 따랐으니 역시 사람답지 못 합니다."
>
>
> "수초는 어떠하오?"
>
>
> "자신을 거세해 군주를 따르는데, 이것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니 이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관중이 죽자 제 환공은 관중의 유언대로 습붕에게 뒤를 잇게 했으나 그 습붕이 금방 죽고 포숙아가 뒤를 이었다. 제 환공은 역아, 수초, 개방을 모두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중용했다. (포숙아는) 그 충격으로 분사했다. 그 3명을 중용했다.
  • 제 환공 42년(기원전 644년), 융족이 주나라를 치니 제나라의 병력이 주나라를 구했다.
  • 제 환공 43년(기원전 643년), 제 환공이 병이 들어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5명의 공자가 다투었다. 겨울 10월 7일 제 환공이 죽자 5명의 공자가 다투어 제나라가 혼란에 빠졌고, 제 환공의 시신이 67일 간 방치되었다. 그리하여 제 환공의 시신에 구더기가 들끓었다. 12월 14일 공자 무휴가 제 환공의 장례를 치렀다.
[1] '父'또는 '部'를 쓰기도 한다.[2] 춘추오패에서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논란이 많다. '''제 환공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패자로 평가받는다. 그것도 최초로.''' 넓게 보자면 정장공도 있긴 하지만 이 사람에 비할 바는 못 된다.[3] 사마천의 사기에는 "제(劑)는 북으로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고죽국(孤竹國) 지역까지 갔다가 융숙(戎菽)을 얻어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융숙'이라는 것이 바로 콩(대두)을 의미한다.[4] 이를 계절(繼絶)이라 한다.[5] 채나라의 공주[6] 실제로 채를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못 했다. 채에 대한 거짓 공격으로 수초#s-2가 나서지만 뇌물 한 방에 공격도 하지 않고 초를 공격하기로 한 군사 기밀도 불어 버린다.[7] 정 문공에게 밀사를 보내 초와 함께 제를 견제하기를 지시했다.[8] 표면적인 이유는 제 환공이 세자를 감싼 것에 의한 것이지만, 제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9] 주나라 왕만 시행할 수 있는 제사로, 제후 신분인 환공은 지낼 수 없었다.[10] 환공의 요리사. 요리 실력이 뛰어나서 환공의 총애를 받았는데, 어느 날 환공이 장난으로 "다른 고기는 다 먹어 봤지만 인육만 못 먹어봤다."라고 말하자 자기의 어린 아들을 죽여 고깃국을 만들어 환공에게 바쳤다. 또 미각이 뛰어나서 서로 만나 섞이는 치수(淄水)와 민수(澠水)를 물맛을 보고 어느 곳인지 알아 맞혔다. 이후 송나라로 달아나 살아남았지만 그 후 기록은 없다.[11] 환공이 총애하던 미소년으로 환공에게 붙어 있기 위하여 스스로 거세하고 내시가 되었다. 수초는 나중에 인과응보로 잡혀 산 채로 몸이 찢겨져 끔살당한다[12] 위(衛) 의공(懿公)의 아들로 환공에게 가서 출세하기 위해 부모님을 버렸다. 하지만 역아와 수초와 달리 무궤가 아닌 다른 공자를 공왕으로 추천하여 목숨을 구했으며 이후 대신으로 여러 공로를 거둬들여서 용서받게 된다.[13] 초기에는 습붕과 포숙아를 등용하면서 그래도 관중의 유언에 따라 행동했지만, 습붕은 얼마 안 되어 병사하고 포숙아는 제 환공이 이 세 사람을 다시 가까이하는 것을 보고 실망해서 분통이 터져 죽는다.[14] 초한지에서 항우가 서초의 패왕을 칭하려 할 때 패의 부정적인 의미와 위의 사례를 들며 범증이 말리자 초장왕의 예를 들며 애써 무시했다는 사례도 있다. 물론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항우는 제 환공 못지 않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15] 제환공이랑 아주 비슷한 케이스가 중국사에 또 있는데 바로 촉한유선이다.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둘은 각각 신들이 보좌할 때는 명군이였으나 그들이 없어지자 급격히 암군화된 인물들이다.[16] 담(郯)나라와는 다른 나라다.[17] 재밌는 사실은 상술한 글에서도 나오지만 제 환공이 거나라에 머무른 적이 있기 때문이다.[18] 아마 공작국인 송나라가 후작국인 제나라에게 굽히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듯하다. 물론 이건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제나라가 더 강했다.[19] 공자 완의 후손이 바로 뒷날 제나라를 찬탈하는 전씨 가문이다.[20] 후일 성복대전이 일어나는 그곳 맞다.[21] 당시에 국경을 넘는 것은 제후국 간의 예의를 져 버린 행위였다.[22] 물론 똑같이 재건된 나라라고 해도 국력은 형나라가 훨씬 약했으므로 금방 위나라에게 멸망하고 만다.[23] 재밌는 것은, 진헌공이 규구회맹에 참여하려 했으나 끝내 회맹에 참여하지 못 했다는 떡밥이 있다. 다만 사기(史記)에만 들어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설을 부정하는 사람도 많다. 아무튼 사기에서는 이 회맹에 참여하지 못 한 게 한이 되어 그것이 병으로 이어져 죽었다고 전해진다. 또는 주나라에서 제나라가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진헌공이 회맹에 참석하지 않게 했다고도 한다.[24] 인육 진상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