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양공

 


'''{{{#ece5b6 제(齊)나라 14대 국군
양공
襄公}}}'''
''''''
강(姜)
''''''
여(呂)
''''''
제아(諸兒)
'''아버지'''
제희공(齊僖公) 강녹보(姜祿父)[1]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86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86년
1. 개요
2. 가계와 치세
3. 한군두가 부른 제 양공의 최후
4. 즉위 후 일대기[2]
5. 평가


1. 개요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14대 군주로 이름은 제아(諸兒). 춘추시대에서 손꼽히는 막장 군주였다.

2. 가계와 치세


제나라 제13대 군주 희공(僖公)의 맏아들이다. 희공의 둘째 아들은 규(糾)로 관이오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고, 셋째 아들이 바로 나중에 패자가 되는 환공(桓公) 소백(小白)으로 포숙아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희공에게는 또한 이중년(夷仲年) 이라는 동생과 첩 사이에서 얻은 문강(文姜)이라는 딸이 있었다.
희공은 평소 동생인 이중년을 몹시 아꼈는데, 이중년이 죽자 희공은 슬퍼하며 그의 아들 공손무지(公孫無知)를 제아와 동등하게 대우했고, 제아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희공이 죽자 제아는 뒤를 이어 양공이 되었고 무지를 쫓아냈는데, 무지는 이에 복수를 결심한다.
그런데 이 양공은 간통하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이복 여동생 문강'''이었다. 기원전 709년, 문강은 노(魯)나라 환공에게 시집을 갔는데, 15년 후인 기원전 694년 노 환공과 문강이 제나라로 오게 되자 오빠와 여동생은 오랫동안 쌓인 게 많아서 침실에서 붕가붕가를 한다. 근데 이걸 노 환공에게 들키고 화가 난 노 환공은 근친상간을 한 짐승 같은 양공과 문강을 처치하기 위해 노나라로 돌아가서 병거를 끌고와서 머리통을 날려버리려고 했다.
이에 겁을 먹은 양공은 노 환공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자기 아들인 공자 팽생(彭生)을 시켜서 그를 부축하는 척하며 갈비뼈를 부러뜨려 죽여버렸다. 그러자 노 환공과 문강의 아들인 노 장공이 아버지의 죽음을 양공에게 따졌고, 양공은 자기가 시킨게 아니라 팽생이 멋대로 그런거라고 하며 팽생을 죽여버린다.[3]

3. 한군두가 부른 제 양공의 최후


제 양공 11년(기원전 687년) 7월, 제 양공은 대부 연칭(連稱)과 관지보(管至父)를 국경 지대인 규구(葵丘)에 파견했다. 당시 복무 기간은 1년이었는데, 양공이 1년이 지나도 교체를 안시켜주자 한군두에 분노한 연칭과 관지보는 무지를 꼬드겨서 반란을 도모한다.[4]
그해 12월, 양공은 사냥을 나가서 멧돼지를 발견했는데 부하가 가까이 가서 보니 멧돼지가 아니라 죽은 아들 팽생이었다.[5] 화가 난 양공이 팽생을 쏘자 그가 발광하며 양공을 덮쳐왔다. 양공은 놀라서 궁궐로 도망가다가 신발 한 짝을 잃어 버렸고, 신발 관리자인 도인비(徒人費)를 불러서 매 300대를 쳤다. 바로 그 때, 무지의 반란군이 궁궐을 습격했고 양공을 죽이려고 하자 도인비는 자기가 양공이 있는데를 안다고 무지에게 말했다. 무지는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만 관리자가 매 맞은 자리를 보여주자 그제야 믿고 그를 따라갔는데...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알고 보니 도인비는 양공을 옷장에다 숨겨두고 반란군을 엉뚱한 곳으로 끌고가서 군대를 이끌고 무지를 습격한 것.
무지는 관리자와 군인을 모두 죽여버리고 양공을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양공이 숨어있는 옷장 앞에까지 눈길이 닿았는데, '''잃어버렸던 신발 한 짝이 거기 떨어져 있었다.''' 결국 양공은 끔살. 이후 무지가 즉위했으나 얼마 뒤에 살해당하고 소백이 즉위하여 제환공이 되었다.

4. 즉위 후 일대기[6]


제 양공 원년(기원전 697년) 4월 기해일, 제 양공은 아버지 제희공을 안장했다. 6월, 허숙이 허나라 도성에 진입하자 제 양공이 노환공이 애 땅에서 회맹했다. 그 이유는 허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제 양공 2년(기원전 696년) 5월 병오일, 제나라 군대가 노나라의 해 땅에서 전투를 벌였다. 11월, 위나라의 좌공자와 우공자는 위혜공에게 원한을 품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제자인 세자 급자와 공자 수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좌공자와 우공자는 위혜공을 폐위하고 공자 검모를 세우니 그가 바로 위후검모다. 이에 위 혜공은 제나라로 달아났는데, 그 이유는 그 어머니 선강이 제나라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제 양공 3년(기원전 695년) 정월 병진일, 제 양공과 노 환공은 기(紀)나라의 황 땅에서 결맹했다. 그 이유는 제나라와 노나라의 화의 주선을 위해서였다. 그 해 5월,제나라와 노나라의 국경에서 두 나라 군대가 서로 충돌했다.
제 양공 4년(기원전 694년) 정월, 노 환공과 제 양공이 낙 땅에서 회견을 가졌다. 그리하여 문강이 노 환공과 함께 제나라에 도착했다. 문강은 제 양공과 이복 남매다. 문강은 시집가기 전 당시 태자였던 제 양공과 사통했다. 이후 문강이 노 환공에게 시집 가는 바람에 제 양공을 보지 못했다가 이 때에서 만나 사통을 자행한 것이다. 그런데, 노 환공이 그 사실을 알고 문강을 질책하자 문강이 그 사실을 제 양공에게 그 사실을 알리니 제 양공은 노 환공에게 주연에 초대해 취하게 만든 뒤 공자 팽생을 시켜 갈비뼈를 부러뜨려 죽였다. 이에 노나라 사람들이 항의하자 제 양공이 변명을 했다.
"내가 노후를 잘 대접했는데, 팽생이가 이 짓거리를 한거다."
그리고는 공자 팽성을 죽여버렸다.[7] 7월, 제 양공은 노나라의 수지 땅에서 정나라 군주 공자 미를 불러들여 회맹하고자 하니 공자 미는 제나라의 국력이 두려워 채중의 간언을 무시하고 고거미와 함께 제 양공을 만나러 갔다.[8] 제 양공은 전의 원한을 갑자기 들춰내더니 제 양공은 공자 미를 참수하고, 고거미는 거열형에 처했다. 제족이 그 틈을 타 공자 영에게 뒤를 잇게했다.
제 양공 5년(기원전 693년), 제 양공은 기(紀)나라, 병나라, 자(鄑)나라, 오(郚)나라를 쳤다. 이 해 주나라의 왕녀가 제 양공에게 시집왔다.
제 양공 6년(기원전 692년) 12월, 제 양공은 문강과 작 땅에서 밀회했다.
제 양공 7년(기원전 691년) 봄, 제 양공은 노나라의 공자 익과 함께 위(衛)나라를 쳤다. 가을, 기나라 군주 강계가 제나라에 휴 땅을 바쳐 기나라가 분열되기 시작했다.
제 양공 8년(기원전 690년) 2월 ,제 양공이 문강과 축구 땅에서 밀회했다. 기나라가 제나라에 할양 만하고 굴복하지 않자 제 양공이 기나라를 쳤다. 이에 강계는 항복해 기나라를 바쳤다. 여름, 기후는 기나라에서 달아났다. 그 이유는 제나라의 원한을 피하기 위함이다.
제 양공 9년(기원전 689년), 제 양공은 노나라, 송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4국과 함께 위나라를 쳐 위후 검모를 몰아내고 위 혜공을 복위시키려 했다. 이 해 여름에 제 양공이 문강과 군중에서 밀회했다.
제 양공 10년(기원전 688년), 제 양공은 주장왕의 명이라는 핑계로 위나라를 쳐서 좌공자와 우공자를 주살하고, 위후 검모를 몰아내고 위 혜공을 복위시켰다.
제 양공 11년(기원전 687년) 봄, 제 양공은 문강과 방 땅에서 밀회했다. 이때 관지보와 연칭은 규구 땅에 수자리 서게했다. 겨울에 제 양공이 다시 문강과 곡 땅에서 밀회했다.
제 양공 12년(기원전 686년), 제 양공이 노나라와 함께 담나라를 포위하여 담나라의 항복을 받았다. 겨울 11월, 제 양공이 관지보와 연칭을 교대시키지 않자 그들이 한을 품고 공손무지와 함께 반역하여 제 양공을 살해했다.

5. 평가


제 양공은 자신의 이복 동생 문강과 사통하고 그것을 따지려는 남편 노 환공을 살해했으며, 정나라 군주 공자 미와 고거미를 불러 살해했다. 당시 제나라의 국력이 날로 강해져 위나라의 군주 위 혜공을 복귀 시키는 등 군사적 실적은 좋았다. 그러나 관칭과 연지보를 한군두 시키고, 공손무지를 후대하는 제 희공의 유언을 무시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사마천의 평가는 이러했다.
"제 양공은 노 환공이 취한 틈을 타 살해하고 그 부인과 간통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고, 자신의 처첩과 음탕하고 난잡한 행실을 저지르며, 대신들을 자주 속였다."
[1] 달리 '父'또는 '甫'를 쓰기도 한다.[2] 이 문서가 일화 별로 이뤄진 관계로 딱딱한 역사 기록 위주로 기록될 것이다.[3] 비슷한 사례가 바로 서기 260년 사마소조모를 죽인 가충 대신 성쉬, 성제 형제를 죽인 사건이다.[4] 양공이 이 둘을 임지로 보내면서 다음 해 오이(혹은 참외)가 익을 무렵인 7월에는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했는데 그 시기가 지나도 아무 명령이 없자 둘은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 이에 유래된 말이 과시(瓜時).[5] 이것은 팽생이 아닌 팽생의 원수를 갚으려는 일족의 누군가가 멧돼지 가죽을 둘러쓰고 제 양공에게 덤빈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공원국의 춘추 전국 이야기 1권에 나오는 이야기. 따지고 보면 이쪽이 더 현실적이다.[6] 이 문서가 일화 별로 이뤄진 관계로 딱딱한 역사 기록 위주로 기록될 것이다.[7] 같은 사례로 삼국지에서 사마소조모를 시해하는 데 앞장선 가충 대신 시해를 직접 행한 성쉬성제 형제를 죽인 일이 있다.[8] 공자 미는 젊을 때의 원한으로 제 양공의 미움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