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이오

 



''' 관자(管子)
관이오
管夷吾'''

''''''
(姬)
''''''
(管)
''''''
이오(夷吾)
''''''
(仲)
''' 고향'''
허난성(河南省) 영상(潁上)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725년 ~ 기원전 645년
1. 개요
2. 일생
2.1. 불우한 성장기
2.2. 명재상이 되다
2.3. 제환공의 신임
2.4. 그의 유언, 그리고 몰락하는 제나라
2.5. 그가 시행한 정책들
3. 관포지교(管鮑之交)
4. 평가
5. 저서
6. 후손
7.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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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1]영상(潁上) 출신. 춘추시대춘추오패 중 첫 패자제환공을 보필한 1등 공신. 관자라고도 한다. 절정의 우정을 일컫는 사자성어 관포지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 일생



2.1. 불우한 성장기


일찍 홀로 된 노모를 모시고 사느라 가난하였다. 젊어서는 장사를 했으나 결국 말아먹어 친구인 포숙에게 의지해야 했고 - 곤궁함을 해결하기 위해 관리가 되었으나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군주에게 욕만 먹고 세 번이나 관직에서 쫓겨났다. 전쟁터에도 세 번이나 출정했으나 세 번 모두 대패하고 전장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단 이때의 관중은 낮은 하급관이었던 만큼 패배가 관중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다)
이렇게 실패를 연달아 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인정을 못 받고 관중 본인도 마음고생까지 많이 했다. 그의 먼치킨스런 능력은 처음부터 타고 난 것이 아니라 이처럼 온갖 실패를 겪으며 얻은 뼈 아픈 교훈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 희공 역시 상당히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이었던지 제희공이 명성이 있던 포숙에게 셋째 아들인 소백(小白)을 맡기고[2] 둘째 아들인 규(糾)의 보필은 관중과 소홀에게 맡긴다. 제양공이 즉위를 하자 좌전에 따르면 포숙은 무능하고 절제력없는 제양공이 정치를 하면 반드시 난이 일어날 것이라며 소백을 데리고서 동남쪽의 가까운 소국이었던 거나라로 피신하였다.
과연 포숙의 예측대로 제양공은 근친상간 + 근친상간으로 인한 질투로 동맹인 노나라 군주(노환공) 살해, 공족인 공손 무지(公孫 無知) 등에게 원한을 사는 등등의 어마어마한 삽질을 거듭하다가 최전방에서 근무하고 있는 국경수비를 하던 장군인 연칭에게 1년만 국경수비를 하면 교대 병사를 보내주겠다고 하다가 보내주지 않으면서 큰 원한을 사서 결국 공손무지를 옹립한 연칭의 부하들에게 살해된다. 난이 일어나자 관중은 규를 데리고 포숙이 도피한 거나라에 비해 대국이었던 노나라로 달아난다. 노나라도 대국인 제나라를 도와 제나라 군후를 세운다면 자신들에게도 큰 이득이 될 테니까 크게 환대받는다.
난을 틈타 무리를 해서 권좌에 올랐던 공손 무지(公孫 無知) 역시 얼마 못 가 살해당하니 제 나라의 명문 가문이었던 고씨와 국씨들이 주도하여 소백을 군주로 세우고자 포숙과 소백을 불러들인다. 이에 관중은 거리도 멀고 + 소백은 고씨와 국씨 + 포씨라는 제나라 최고 명문가들 전부의 비호까지 받고 있으니 달리기 싸움에서는 패배할 것이라는 걸 느끼고 자신이 모시는 규(糾)를 군후에 올리기 위해 홀로 먼저 말을 달려 포숙이 모시던 소백(小白), 즉 훗날의 제환공을 활로 쏴서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관중이 쏜 화살이 소백에게 맞긴 했는데, 허리띠의 쇠고리에 맞아서 목숨을 구했다. 관중은 소백이 쓰러지자 소백이 죽은 줄 알고 공자 규를 모시러 왔으나 일부러 죽은 척한 소백은 잽싸게 수도로 가서 공위에 올랐다.[3]
그러나 관중은 포기하지 않았고, 노나라의 장공을 부추겨 노나라의 병사를 동원하여 제나라를 침공한다. 그러나 대국인 제나라를 상대로 춘추시대 동네북인 노나라가 이길 리가 없었고 노나라 군대는 전멸. 노나라의 장공은 심지어 타던 수레도 잃어버리면서 도주하였다. 그렇게 제환공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노나라로 도망친 공자 규 및 관중과 소홀도 잡아죽이려 하나 이때 포숙이 '''관중과 소홀을 얻어야 사직을 안정시킬 수 있다며.''' 관중과 소홀을 등용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포숙은 직접 군대를 끌고 노나라로 가서 공자 규는 장공이 직접 죽이고, 관중과 소홀은 제환공을 죽이려던 암살자니까 직접 죽여야 성이 풀릴 것 같으니 내놓아라! 라며 노나라를 협박한다. 이에 노나라의 시백이라는 예리한 자가 관중은 천하의 기재라며 그를 노나라에서 쓰거나, 쓸 수 없다면 죽여서 보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포숙이 이를 알고 막은 끝에 결국 공자 규는 장공에 의해 죽고 관중과 소홀은 포로로서 제나라로 끌려간다.
그러나 끌려가기 전, 소홀과 관중의 대화가 관자에 기록되어 있는데, 관중은 소홀에게 두려운가 하고 물으나, 소홀은 자신들이 제나라로 간다면 제환공은 관중에게는 재상을 맡길거고 자신은 그 옆에서 보필하게 할 텐데, 이미 주인을 죽게 한 자가 또 다시 다른 주인을 섬긴다면 자신을 두 번 욕보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죽어서 죽은 주군을 보필할 테니, 관중 너는 살아서 이름을 날리라"고 말하고 자결한다. 이후 관중은 관자에서, "공자 규가 죽자 소홀은 따라 죽었는데 자신은 살자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치욕도 모르는 자라고 욕했으나 포숙만은 자신을 욕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절개를 위해 죽는 것 보다 공명을 밝히지 못한것을 아쉬워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나라로 도착한 관중. 제환공은 정적이자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었던 관중을 죽이려고 하나 포숙이 이를 만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나라만 다스리시려면 저나 습붕[4]

[5] 정도로 충분하지만 패자가 되어 여러 제후를 통솔하는 우두머리가 되고 싶다면 관중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러니 지난 원한은 잊어버리고 관중을 과감하게 발탁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제환공은 과거 자신을 화살로 맞혀 죽이려 했던 일을 잊고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한다. 이로써 관중은 죽음의 문턱에서 전전하다가 거의 하루아침에 일국의 재상으로 변신하는 막장드라마 수준의 변신을 하게 된다.

2.2. 명재상이 되다


그러나 일껏 죽일 목숨을 살려주고 등용했지만 관중은 별다른 의견 개진이 없었다. 환공이 이상해서 캐묻자 "낮은 지위로 높은 지위를 다스릴 수가 없어 자중하고 있습니다"하고 답했다. 환공은 아차 싶어서 관중에게 가장 높은 상경(上卿) 벼슬을 내렸다. 그런데 관중은 여전히 침묵 모드였다. 환공이 다시 캐묻자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를 다스릴 수가 없어 자중하고 있습니다"하고 답했다. 환공은 또 아차 싶어서 관중에게 엄청난 재물을 내려줬다. 그래도 관중은 여전히 침묵 모드. 환공이 또다시 캐묻자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도 공족은 다스릴 수가 없어 자중하고 있습니다"하고 했다. 그러자 환공은 관중에게 '''중보(仲父)'''[6][7] 호칭을 내렸다. 쉽게 말해 임금도 관중을 보면 어른이라 부르니 나머지 사람들이야 관중 앞에서 알아서 기라는 거(…) 이 정도로 실권을 요구한 관중이나, 그걸 선뜻 내준 환공이나 정말 징한 사람들.[8]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관중은 제환공을 도와 상비군 조직, 상공업 육성 및 법규 제정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동방이나 중원(中原)의 제후(諸侯)와 9번 회맹(會盟)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하였으며,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초(楚)나라를 누르려고 하였다. 결국 관중의 활약으로 인해 제나라는 압도적인 국력 뿐 아니라 제후 열국의 존경을 받는 - 춘추시대 최초의 전국패자로 부상한다
그에 대해 논어에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다.

子貢曰

자공이 말하길,

管仲 非仁者與。桓公 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관중은 어진 이가 아니잖습니까? 환공이 (본래 주인인) 공자 규를 죽였는데, 능히 죽지 않고 또 (환공을) 도왔습니다.

子曰

공자가 말하길,

管仲相桓公覇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 受其賜。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후를 제패하고, 천하를 한 번에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 그 도움을 입고 있다.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관중이 아니면 우리는 (오랑캐처럼) 머리를 헤치고 왼편으로 옷을 매었으리니, 어찌 필부필부(평범한 사람)같이 알량한 절개를 위해서 도랑에서 스스로 목 매어 알아주는 이 없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9]

[10]

논어(論語) 헌문(憲問)편

팔일편에서 공자는 관중이 아내를 셋이나 두고, 개혁 정치를 하면서 세금을 엄청나게 걷고, 임금이나 할 수 있는 것을 자기 집안에 두는 사치를 부리는 등 그릇이 작은 사람이긴 하지만, 천하를 바로 세울 만큼 능력은 있다면서 - 즉, 법도를 벗어난 것은 비판하지만 그의 업적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듯하다.[11][12]

2.3. 제환공의 신임


관중은 아래 서술한 포숙과 우정 못지 않게, 주군인 환공의 신임으로도 유명하다. 흔히 용인술(用人術)에서 말하는 의인물용용인무의(疑人勿用, 用人無疑)-'''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고,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라'''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제환공과 관중. 거의 정무를 관중이 했다고 할 정도로 제환공은 간섭하지 않았다. 심지어 총애하던 간신배 역아수초[13]가 관중을 모함했지만, 제환공은 결코 귀담아듣지 않았다. 제환공이 아홉차례 회맹을 가진 이야기 못지 않게, 이 대목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한번은 관중은 환공에게 평소 품고 있던 여러가지 포부를 설파했고, 환공은 이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다 환공이 물었다.

제환공: "내가 워낙 여자와 사냥을 좋아하는데 장차 패업을 이루는 데 해롭지 않을까?"

관중: "해롭지 않습니다."[14]

제환공: "그럼 무엇이 해로운가?"

관중: '''"어진 이를 쓰지 않으면 해롭고, 어진 이를 알면서도 쓰지 않으면 해롭고, 어진 이를 쓰되 신임하지 않으면 해롭고, 어진 이를 쓰면서도 소인배를 함께 끼워두면 해롭습니다."'''


'''그러나''' 제환공이 관중의 말을 유일하게 듣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간신배인 '''역아''', '''수초''', '''개방'''을 중용한 것. 이들을 중용하는 것을 보고 관중은 그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아에 관해서는 '''친자식을 아끼는 것보다 더한 인정이 어디 있습니까? 친자식까지 죽이는 지독한 인간이 주공을 진심으로 섬기겠습니까?'''[15], 수초에 관해서는 '''제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인간의 당연한 정리가 아닙니까? 제 몸까지 서슴지 않고 불구로 만든 사람이 주공에게 무슨 깊은 정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위나라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환공의 신하로 들어온 개방에 대해서는 '''부모에 대한 효성보다 더 중한 인정이 어디 있습니까? 위나라는 천승지국[16]이요, 천승지국의 임금 자리를 버리고 주공의 신하가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천승지국의 임금보다도 큰 야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를 가까이하면 나라에 변란이 생깁니다'''라고 평가하고 말렸다. 그러나 제환공은 관중의 이 간언만은 무시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중은 간신배인 역아, 개방, 수초와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열국지 등에서는 역아와 수초 등이 관중을 두려워하며 궁에서 관중을 만날 때마다 배하하며 하례했다고 할 정도. 애초에 관중은 본인도 삼귀(三歸)와 반점(反坫)[17]을 누릴 정도로 엄청난 사치도 부렸고 설령 간신배들이라도 적당히 권력도 주면서 견제도 하면서 자기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실리적인 사람이었기에 간신배들이라고 해도 제어가 가능했다. 문제는 관중 사후 벌어지는데...

2.4. 그의 유언, 그리고 몰락하는 제나라


관중이 병석에 눕자 제환공은 다음 대의 재상을 할 만한 인물을 관중에게 물어보며 관중에게 '''역아, 수초, 개방''' 등을 재상으로 임명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 이에 관중은 깜짝 놀라며 자신의 후임으로 포숙과 습붕을 추천하고 간신배들을 제거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포숙은 정직하고 청렴결백하여 나라를 잘 다스릴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그 청렴결백과 정직이 때로는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포숙은 너무 곧아서 모든 간신의 무리를 내치고 말 것입니다. 너무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주공께서는 포숙을 재상에 앉히신다면 역아, 개방, 수초 등의 무리는 포숙과 상극이오니 나라를 위해서는 그들을 멀리하셔야 합니다'''

융통성 있는 관중 자신은 그들을 다룰 수 있었으나 다음 대의 재상인 포숙은 성격상 절대 못 다루니까 제거하라는 것. 그러나 제환공은 이 유언을 무시하고 간신배들을 중용했고[18] 포숙은 제환공을 볼 때마다 관중의 유언대로 이들을 내칠 것을 간언하다가 '''화병으로 사망한다''' 습붕 역시 포숙보다 일찍 병사하면서 결국 제환공은 '''자신의 원대로 이 세 사람을 재상으로 임명한다. 관중과 포숙의 예언대로 세 사람은 권력 다툼을 하며 환공을 밀실에 감금해버렸다. 환공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굶어 죽었고,''' 그 후 67일 동안 권력 다툼이 계속되어 환공의 시신을 수습할 때에는 구더기가 들끓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일들 덕분에 '''사기에 기록됐을 정도로 크게 사치를 부린 일'''과 함께 관중이 포숙보다 인품이 뛰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인배이고 문제가 생길 걸 알았다면 관중이 집권하고 있을 때 알아서 처리를 해놓을 것이지, 문제의 불씨를 그대로 놔둔 채로 전부 포숙에게 다 넘겨버렸으니 제환공의 비극 역시 관중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말. 다만 관중 사후에 그의 유언대로 제환공이 일단 간신들을 내쳤으니 포숙에게 전부 넘겼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 저 간신들은 나름대로 잡다한 특기가 있어 제환공에게 총애받던 신하들이다. 제나라 2인자인 관중으로서도 중앙권력에서 거리를 두게 하는 정도가 한계였을 것이다. 또한 유언인 너무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말 역시 지금까지도 '''부패하면 어떠냐 능력만 있으면 되지'''라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관용구가 되어버렸으니 이 점에서 관중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이 해석과는 별개로 포숙은 확실히 관중보다 소인배들을 잘 다루진 못했다. 이 말은 능력이 인격에 우선한다는 뜻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맥락을 따져보면 포숙의 성품으로는 사심을 품은 자들을 제어하는 것이 버겁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로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본인의 말도 맥락을 짚어보면 포숙의 깐깐함을 디스하는게 아니라 나라를 위해선 포숙을 써야 하고 포숙을 쓰기 위해선 역아, 수초, 개방을 내쳐야 한다며 그 이유를 말한 것에 가깝다.
후에 제나라는 공자들의 난이 벌어졌으며 결국 소가 뒤를 이으니 그가 제효공이다. 효공은 환공의 무덤을 관중의 무덤 옆에 만들었는데 도굴을 막기 위해 봉분 3개를 만들고 후하게 장사를 지냈지만 나중에 서진 말기에 촌사람들이 도굴한다. 관중의 후손은 제나라 의공 연간에 초나라로 이주하게 된다. 내력은 다음과 같은데 효공이 죽자 환공의 아들 반은 개방의 도움을 받아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니 소공이 된다. 소공이 죽자 이번에는 환공의 또다른 아들 상인이 소공의 아들 사를 죽이고 임금이 되니 그가 의공이다. 의공이 공자 시절 대부 병촉과 땅 문제로 싸웠는데 관중은 병촉의 손을 들어 주었고 나중에 의공이 임금이 되자 관중의 후손들의 땅을 뺏어 버렸다. 이에 관중의 후손들인 관씨 일족은 초나라로 이주하고 의공은 죽은 병촉의 무덤을 파헤쳐 병촉의 발을 끊어 버린다. 또 신하였던 염직의 아내를 뺏었는데 병촉의 아들 병원과 염직은 이에 앙심을 품었지만 의공은 그들을 심복으로 데리고 있다가 결국 신지라는 연못에서 시해당하고 만다. 의공의 두 아들을 죽이고 환공의 또다른 아들 원이 뒤를 이으니 그가 제 혜공이다.

2.5. 그가 시행한 정책들


관중은 '''국가의 경제력'''을 중시했다. 경제력이 곧 국가의 힘이 된다고 판단하고 국가 경제를 끌어올리는 데 주력하였고, 상공업을 농업보다 중요시 생각했다. 바다와 가까이 있는 제나라는 제염업(製鹽業 소금 생산), 어업, 무역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당시 일반적으로 중시했던 농업보다 상공업과 어업의 집중적인 육성을 꾀했다. 관자를 보면 경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편목이 많으며, 남긴 말들 중에서도 경제에 관련된 발언들이 많다. 이 때문에 현재 중국에서는 관중의 경제사상을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많다고 한다.

凡有地牧民者, 務在四時, 守在倉廩. 國多財, 則遠者來, 地辟擧, 則民留處, 倉廩實, 則知禮節, 衣食足, 則知榮辱, 上服度, 則六親固.

무릇 땅을 가진 목민(牧民)은 (백성들에게) 힘씀은 사시(四時)[19]

에 달려있고, (나라를) 지킴은 창고에 달려있다. 나라에 재물이 많으면 멀리 있는 자가 오고, 땅을 개척하면 백성들이 그곳에 머물고, 창고가 가득 차면 (사람들이) 예절을 알고,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면 영욕(榮辱)[20]을 알고, 복도(服度)[21] [22]를 숭상하면 육친(六親, 가정)이 공고해진다.

관자(管子) 목민(牧民)편


3. 관포지교(管鮑之交)


[image]
관중은 포숙아와의 우정으로도 유명하다.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가 이들의 우정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두 사람의 출신부터가 좀 특이한데, 관중은 당시 제나라 반역자의 일족이라는 말이 있기도 했을 정도로 비루한 가문 출신이었고, 포숙의 경우 기나라 공족 출신으로 제나라에서 포 땅을 받아 벼슬을 살고 포씨성을 자처한 이전/이후 제나라 최고의 명문가인 포씨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23] 물론 둘째 아들인 이상 포씨 집안의 후계자는 첫째 아들인 포숙의 형이 이어받기로 되어있었지만,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다보니 교육 수준이나 대우 및 주변의 다른 친구들의 숫자 등이 관중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으나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고 관포지교를 맺게 된다.
즉 “내가 예전에 곤궁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내가 더 많이 차지하곤 했다. 그럼에도 포숙이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벌이다가 (실패해 그를) 더욱 곤궁하게 했건만,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시운이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섰다가 세 번 모두 군주에게 내쫓기고 말았으나, 포숙이 나를 못났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세 번 싸움에 나가 세 번 모두 도망쳤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겁쟁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나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군후위를 놓고 다투다가) 패하자, 소홀(召忽)은 죽고 나는 붙잡혀 굴욕을 당했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수치도 모르는 자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사소한 일에는 수치를 느끼지 않으나 천하에 공명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라며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라는 말로부터 관포지교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이에 세상사람들은 관중은 물론 관중의 재능을 알아본 포숙의 사람보는 눈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두보가 쓴 빈교행(貧交行)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君不見管鮑貧時交
>그대 관중과 포숙아의 가난했을 때의 우정을 보지 못했는가
다만 관포지교 같은 경우에도 특히 서로 실제 행적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24] 그 말을 한 경위나 유명해진 이유들에 대해서 이론들이 좀 있는 편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관중에 비해서 업적이 부족했던 포숙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퍼트렸다는 말도 있다. 다만 실제로 포숙이 관중에게 엄청나게 너그러웠던 건 역사적 사실이고, 관중 같은 경우 그 능력이 제나라, 노나라 전역에 퍼져있던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포숙이 소인배에게는 엄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잘대해주는 스타일이었을 수도 있으니 뭐...

4. 평가


유구한 중국사를 통틀어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 전설적인 명재상. 부국강병을 통해 제나라를 일약 중원의 패권국으로 길러냈고, 존왕양이로 요약되는 외교정책을 펼쳐 춘추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설계했다. 비록 그가 일군 제나라는 그와 제환공의 죽음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막장화 되면서 패권을 놓치고 말지만 진문공이 패권을 잡으며 강대해진 진나라 역시 관중이 설계한 질서를 그대로 따라갔다. 또한 제나라 역시 워낙 관중이 다져놓은 유산이 탄탄했던 탓에 패권을 놓쳤을 뿐 진시황에게 멸망 당할 때까지 3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번도 강대국으로써의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정치철학과 부국강병책은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서 많은 국가들에게 국가경영의 기본 철학으로 받아 들여졌으며, 존왕양이 역시 역사적 격변기에 군사를 일으키는 명분론으로 자리잡았으니 그가 중국의 역사에 미친 영향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를 단순한 정치가가 아닌 성현의 반열에 올려 관자(管子)라고도 불렀을 정도. 다만 사기를 지은 사마천은 공자가 이 사람을 안좋게 여겼다고 했다고 썼다. 이유는 '''군주를 이 아닌 힘으로만 천하를 다스리게 해서'''.
자신의 나라를 당대 초강대국으로 일으켜 세운 업적 뿐 아니라 법가 정치철학의 토대를 다져 사후에도 계속해서 그 영향력을 남겼다는 점 - 그리고 제환공과 아름답기까지 한 완벽한 군신 간 팀워크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자공이 "관이오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는 인물이다. 그는 백씨에게서 병읍 삼백을 빼앗았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직접 설명을 듣고 이해했기에) 백씨는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평생 원망하지 아니하였다."

(자공이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을 때 소홀은 주군을 따라 죽었으나 관중은 따라죽지 않았으니 인(仁)하지 못한 사람아닙니까?"고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제환공은 제후들을 아홉번이나 자기 아래에 뭉치게 할때도 무력을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관이오의 노력이 컸다.''' 그 정도면 어진 사람(仁)이다."

(자공이 "관이오는 자기 주군을 버리지 않고 죽은 소홀과 달리 자기 주군을 배신하고 그를 죽인 제환공을 도와 재상이 되었으니 어질지 못한 사람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관중은 제환공의 재상으로써 그를 도와 제후들의 패자로 만들었고 천하를 바로 세웠다. 그래서 백성들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오랑캐의 풍습[25]

을 따랐을 것이다.''' 그것을 필부필부가 별것도 아닌 신의를 지키기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죽음을 하는 것과 비교하는 것이냐."

'''《논어》 제14편 헌문(憲問) 中'''

2,000년도 더 지난 옛날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을 꼽으라면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이다.[26] 당대의 인물인 공자 마저도 "관이오가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라며 높은 평가를 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음악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이 귀와 눈에서 떠나지 않았고, 한(漢)나라 소열(昭烈)은 군중(軍中)에 분주하여 넓적다리 살이 말안장 위에서 닳았으니, 만약 어질고 재주 있는 신하가 보좌하지 않았더라면, 환공은 어진 임금이 될 수 없었을 것이요, 소열이 조그마한 땅도 소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환공은 관중을 등용하고 소열은 제갈량을 등용하였기 때문에 제후를 규합(糾合)하여 천하를 한 번 바로잡는 공(功)을 이루기도 하였고, 한중과 서천을 점유하여 한나라의 국운을 연장시키기도 했다.

이이, 《동호문답(東湖問答)》

이후에도 뛰어난 명재상을 비교할때 관이오가 항상 비교되었는데 제갈량융중의 초야에 있던 시절 자신의 재능이 관중과 악의에 비할 만한 재능이라고 말했다. 이게 어떤 소리였냐면 아직 알려지지도 않은 음대 신입생이 나의 음악적 재능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수준이라고 떠들고 다닌 것이라고 보면 된다...당연히 다들 어이없는 큰 소리라고 비웃었으나 제갈량의 주변 지인들은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인정했다고 하니 과연 제갈량도 대단한 사람이다. 그리고 결국엔 젊은 시절의 호언에 걸맞은 업적을 이루게 되는데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경우 제갈량을 높게 평가하며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았다.

옛날에 소하한신을 천거하고, 관중왕자 성보를 추천한 것은 모두 자신의 장점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의 정치 감각은 관중, 소하와 비견될 만합니다. (그가 군사적인 능력에서 재능을 보이지 못한 것은) 촉한의 이름난 장수 중에 왕자 성보나 한신과 같이 뛰어난 장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촉한 제갈량전 中 진수의 각주.


5. 저서


관이오가 저술한 저서로는 《관자(管子)》가 있다. 편찬 시기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한비자의 기록에 의하면 "지금 경내의 백성들이 모두 다스림을 말하면서 상앙과 관자의 법을 집에 가지고 있다"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전국시대 말기에 관자의 다양한 판본들이 민간에 널리 전파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현존하는 《관자(管子)》의 경우 그가 저술했는지 여부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데, 관중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 후대의 문인들이 기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 이에 따르면《관자》가 편찬된 시기는 전국시대~전한 시기 어딘가로 추정하고 있다.[27][28]
참고로 《관자》는 현재 소나무 출판사에서 2006년에 '''유일'''하게 번역되었는데, 그 후 일부 오류와 번역을 수정하여 개정판을 2015년에 내었다.

6. 후손


일단 관중과 포숙의 후손 모두 이후 제나라에서 벼슬을 산다.
먼저 포숙의 후손은 제나라(강제) 최강 세력이던 두 고씨,[29] 국씨, 난씨, 제 환공 때에 망명하여 치고 올라온 진 = 전씨(원래는 진씨였으나 제나라에서 전씨로 바꾸면서 진/전씨 혼용) 등과 함께 제나라의 5대 씨족이 되어 제나라의 권력의 중심을 쥐면서 열심히 삽질들을 한다. 특히 후손인 포국이 포씨 가문의 당주일때 그 사마양저를 고씨와 국씨 등과 함께 모함하여 쫓아내고, '''진무우의 진씨와 연합하여 고씨·난씨와 사적으로 전쟁을 한다 !''' 심지어 고씨·난씨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당시 군주였던 궁궐안의 제 경공을 사로잡으려 하였으나 안영이 전쟁터 한 가운데에서 고씨든 난씨든 포씨든 진씨든 다 똑같은 놈들이라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다며, 그렇다면 물러나라는 말에는, '''지금 군주가 공격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물러나냐!'''라며 목숨을 걸고 막아낸다.
이후 심지어 수도인 임치성 내에서 싸움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포씨와 진/전씨의 연합군이 고씨와 난씨를 상대로 대승! 난씨의 수장인 난시와 고씨의 수장인 고강을 외국으로 도주시키며 난씨와 고씨를 상대로 승리한다. 심지어 난씨와 고씨의 재산까지 모두 빼앗아 가지려고 하였으나 다만 안영이 진 무우에게 군주에게 재산을 돌려줄 것을 권고하자 진/전씨는 군주에게 빼았은 재산을 바치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워 주며 백성들의 신망을 얻는다. 이에 안영은 진/전씨가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있으니, 후에 제경공에게 전씨가 제나라의 궁전을 차지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을 정도.
그리고 제경공 다음 대에 진/전씨. 이제는 전씨의 전상이 백성들에게 더더욱 잘해주며 백성들의 신망을 얻으면서 재상이 되어 군주를 시해하고서 자신의 편인 도공으로 갈아치우고, 도공은 포숙아의 현손 포목이 자신에게 반대했으므로 살해했다. 그러나 전상은 나중에 필요가 없어지자 도공을 버리고자 포목의 아들 포식을 부추겼고, '''포숙아의 자손 포식은 제나라 군주 도공을 시해한다.''' 그리고 이후 전상의 세력이 더더욱 강해지자 전상은 제나라의 모든 요직을 독점하고 모든 봉읍을 해체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았으며, 포씨를 비롯하여 감씨, 고씨, 국씨, 포씨 등 제나라의 유력 씨족들의 인사들을 모두 죽이거나 몰아내어 세력을 굳히고 마침내 제나라를 손에 넣어 제나라(전제)를 세운다.
반면에 관중의 후손은 제나라에서 어느 정도 근근이 벼슬을 하면서 씨족을 유지하다가, 강씨가 멸망할 때 강씨의 편을 들다가 전상에게 밉보여 역시 가문이 멸망할 위기에 처하여 타국인 노나라/초나라로 이주한다. 이후 한나라가 세워지자 한나라에서 관소경이 연령벼슬을 받자(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받으니까 장비가 화냈던 현령의 상위 직급.) 관씨 일족이 모두 주허현으로 모여살기 시작한다.
관소경의 후손 모두 절개와 명예를 중시했다고 하며, 그렇게 모여 살던 관중의 후손들 중 삼국지의 지조있던 은자이자 조예로부터 태중대부 벼슬을 받았던 관녕이 있다. 오히려 너무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관중의 길을 따랐다기보다는 포숙의 길을 따른 듯한 모습이다.

7.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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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14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정치가 '''100'''에 달한 무장이고, 지력이 90대에 통솔이 80대 ~ 90대이고, 무력이 60대인 '''고대무장 중 총합 4위'''의 만능형 무장으로 등장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1/무력 69/지력 95/정치력 100. 기사, 연노, 정란, 조영, 교사, 혼란, 배반, 고무를 가지고 있는 무장으로 나온다. 통솔력과 무력이 아쉽지만, 육성 포인트, 템빨으로 극복 할 수 있다. 유일하게 11까지 우려먹은 고대무장 중에서 9탄에서 정면을 보는 일러스트로 나온다. 10편부터 오른쪽으로 보는 일러스트로 나온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8/무력 68/지력 98/정치력 100/매력 83에 특기가 23개이다. 당연히 내정 특기를 다 가지고 있고 군사 특기도 있다. 주호도 있어서 인재 등용도 편하지만 설전 특기가 면박 빼고 다 가지면서 명사 특기가 없다. 그래서 특급 난이도에서 도적에게 털리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무력 68이라 아이템을 사고, 기합으로 통해 풀 게이지 질풍, 신속을 날려서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정치력이 100이라 주유제갈량, 사마의 같은 통솔력이 높은 군사들이 오면 전방의 태수로 보내 어느 정도 활약시킬 수 있다.
삼국지 11에서는 통솔력 90/무력 65/지력 98/정치력 100/매력 82으로 나온다. 특히 무력이 65로 조금 내려가나, 통솔력은 명장급에 가는 90이 되었다. 친애무장은 포숙아제갈량. 특기는 능리. 병종적성은 노병적성만 S이고 병기 A를 제외한 병과들은 B이다. 물론 이 정도의 능력치로 능리셔틀로 굴려가느니 묘를 발견하거나 PK의 능력치 개발을 통해 신산#s-2, 화신, 귀문#s-2 같은 계략형 특기를 주는 게 아주 좋다.
삼국지 12에서도 등장하나, 포숙아와 같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못 얻고, 강제로 데이터를 열어서 쓸 수 있다. 통솔을 제외한 능력치는 전작과 동일하나, 유독 통솔만 84로 삼국지 11에 비해 6이나 너프되었다. 게다가 삼국지 10에서는 특기 40개 중에 무력 24개나 있었으나, 본작에서는 특기가 20개 중에서 8개인 상재, 경작, 인맥, 감시, 보수, 변설, 군사밖에 없다. 전투 특기는 특기가 군사밖에 없다. 이는 아무래도 고대무장 간 밸런스를 맞추기 위함인 것 같다. 그래도 나름대로 전투용이나, 참모, 내정용으로는 매우 훌륭하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4/무력 65/지력 98/정치력 100으로 삼국지 12와 같다. 중신특성은 합리철저. 내정특화형 무장. 전수특기는 귀모에 특기는 상업6 / 농업6 / 문화8 / 순찰7 / 교섭7 / 공성5 / 견수6 / 귀모8. 전법은 순욱과 같은 왕좌로 부상병을 회복시키고 방어와 사기를 상승시킨다. 사용 채배는 6. 병과는 B/B/S로 궁병 특화. 무력은 떨어지지만 통솔은 80대고 귀모까지 갖추고 있어서 전투용으로도 쓸 만하다. 다만 언변 특기가 없어서 설전이 힘들다.
삼국지 14에서 13에 비해 지력 1이 떨어진 것 빼고는 똑같다. 부여된 개성은 내정쪽에 강한 왕좌와 주석이 있고, 전법 또한 괜찮은 전법을 갖고 있다. 고대무장 중 가장 많은 빈도로 독립하는 무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예전에 주인을 바꾼 전력 때문인지 업데이트 전에는 태수만 되었다 하면 독립하기 일쑤여서 유저들에게 군주급 인물들과 함께 요주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업데이트 후에는 다행히 그런 일이 현저히 줄어 들었지만 태수의 지위에 있으면 감시대상이 되는 건 여전하다.

[1] 세간에는 관이오보다 관중으로 유명하다. 오자서와 비슷한 경우. 사실 제일 유명한 사례는 항우이다. 아예 문서 이름이 항우로 되어있을 정도.[2] 일본인 작가의 관이오라는 책에서는 포숙의 가문빨+이후 포숙의 발언권 등을 보았을 때 스승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3] 열국기 등에 따르면 소백이 순간 기지를 발휘해서 입술을 씹어 피를 흘렸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화살 맞고 피를 토하는 걸로 보였으니 죽은 걸로 생각했던 것.[4] 포숙 본인도 그렇지만 사실 대부였던 습붕도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다. 고죽국 정벌 당시 개미집을 이용해서 병사들 먹일 물을 찾기도 하였고 관중이 사망 이후 재상 1순위였던 인물이나 관중이 죽자마자 얼마 안 돼 사망해버린다. 열국지에서는 제환공이 관중 사후의 재상 직에 습붕이 어떠냐고 묻자 관중이 습붕은 하늘이 저를 위해 낸 인물이라 제가 죽은 후에는 습붕이 살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한다.[5] 일설에는 습붕 대신 제나라의 고위 관료인 고혜가 들어간다. 대표적으로 공원국 교수의 춘추전국이야기.[6] 사람 이름이나 존경을 담아 부르는 호칭으로 쓸 때는 아비 부가 아니라 어른 보로 읽는다. 한대에 상보(上父)라고 하는 호칭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7] 저 글자는 ‘버금 중’으로, 아버지에 버금가는 분이라는 뜻이니 엄청난 경칭이다. 이후, 관이오는 본명 대신에 관'중'이라는 호칭으로 흔히 부른다.[8] 그리고 후대에 제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일화가 하나 생기는데 바로 맹상군풍환의 일화. 후대에 고구려에서 을파소도 이 비슷한 이야기를 만든다.[9] 공자 규를 같이 모시던 대부 소홀이 자신은 절개를 지키겠노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에 빗댄 이야기다.[10] 그런데 공자는 관중이 자기가 모시던 주군하고 맞먹으려고 들었다면서 '관중이 예를 안다면 또 누가 예를 알지 못하겠느냐?'고 까기도 했다.[11] 그리고 사기에 따르면 제나라 사람들은 관중이 저렇게 사치스럽게 살아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능력이 있으니 사치 좀 부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제나라가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국가들 중 가장 실리를 따지는 국가였음을 생각해보면 제나라 답다고 해야 할지도[12] 관중의 변명에 따르면 일부러 사치를 부렸다고도 한다. 제나라 환공이 사치를 부리고 여자랑 남자를 좀 밝혔는데.(최소한 여색을 밝힌 건 제환공 스스로가 관중에게 말한 거다.) 관중이 말하길 군주가 사치로 욕 먹는 것보단 자기가 대신 욕먹는 게 낫다면서 오히려 자기도 제환공만큼 사치를 하려고 집도 궁궐처럼 크게 짓고 처도 3명이나 두었다고 한다.[13] 결국 관중 사후 이들 간신배 때문에 제환공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14] 사실 우리나라에도 여색과 사냥을 즐기고도 나름 명군 소리 듣는 왕이 있다. 그리고 딱히 여색을 밝히는 게 왕의 흠이 되진 않아서 1만 후궁 하렘을 차리거나 음탕한 거(가령 황후의 시신에 검열삭제한 모용희, 모후의 제삿날에 검열삭제한 연산군 막장 끝판왕 해릉양왕 유송의 암군라인 등등) 아닌 그냥저냥하게 많이 밝히는 정도는 보통은 "자손은 많이 낳으려고 하나보다" 라고 신경쓰지 않았다.[15] 실제로 제환공이 어느 날 역아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다른 건 다 먹어봤는데 사람 고기는 못 먹어봤다." 라는 망언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역아가 자기 아들을 죽여 제환공에게 바쳤는데 제환공도 사람인지라 처음엔 불쾌해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중엔 이 점이 충심으로 여겨 호감을 가진 것[16] 전시에 전차 1천 승을 징발할 수 있는 국가. 당시 강대국의 지표로 사용되었다.[17] 삼귀(三歸)는 한어대사전에 따르면 3명의 여성에게 장가를 간다는 뜻으로 되어있다. 반점(反坫)은 논어주소(論語集注)에 따르면 양국의 임금이 정상회담을 가질 때 술을 마신 뒤 회담이 끝나면 술잔을 올려놓는 반상을 뜻한다.(坫, 在兩楹之間, 獻酬飲畢, 則反爵於其上. / 점은 두 기둥의 사이에 있어 술잔을 드리고 마시기를 마치면 그 위에 잔을 되돌려놓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오직 한 국가의 임금만이 할 수 있는데 관중은 일개 신하임에도 이런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공자에게 비판을 받았다.[18] 사실 유언을 듣고 한 번 내친 후에 이후 적적하다고 다시 불러들였다.[19] 백성들을 요역에 부릴 때에도 농사철에는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뜻이다.[20] 영예와 부끄러움[21] 이 복도(服度)라는 뜻에는 여러 해석이 있다. 당나라 때의 윤지장(尹知章)의 주석에는 이렇게 설명한다. "복(服)이란 행실이다. 예와 법도를 높이고 행하면 육친(六親, 가정)이 각기 그 살 곳을 찾으니, 그러므로 (그들이) 은덕을 느끼고 (가족의 관계가) 공고해지는 것이다.(服, 行也. 上行禮度, 則六親各得其所,故能感恩而結固之.)"[22] 동시기의 장수절(張守節)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해석했다. "행실과 어물(御物, 임금이 사용하는 물건)을 숭상함에 제도와 법도가 있으면 육친이 견고해진다.(上之服御物有制度,則六親堅固也)"[23] 포씨 가문은 이후 제나라 멸망까지 이어진다.[24] 특히 포숙 같은 경우 관포지교를 다루는 만화나 그림책 등에서는 무슨 순딩이로 묘사되는데 실제 역사 속에서는 엄청나게 깐깐한 사람.[25] 원문에는 左衽으로 완쪽으로(左) 옷깃을 여민다(衽)라는 뜻이다. 한족은 오른쪽으로 옷깃을 여몄기 때문에 나온 말로 여진족의 야만스런 풍습을 일컬어 좌임이라 부른다. 먼 훗날 고려 현종강감찬을 평가하며 "공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좌임을 했을 것이요."라며 이때의 고사를 언급한다.[26] 이외에 빠지지 않고 꼽히는 후보로는 초한전쟁에서 항우에게 번번히 밀리던 유방을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보좌해 끝내 전한 건국을 달성해 내고, 이후 상국의 자리에 오른 명재상 소하, 유비를 따라 촉한을 세우고 유비 사후 무능력한 군주를 보필하며 삼국통일을 노렸던 명재상 제갈량, 부견을 도와 오호십육국 시대를 종식시킬뻔 한 전진의 명재상 왕맹, 당나라 태종을 보좌하며 정관지치를 일궈낸 명재상 위징,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의 개국을 이끌어낸 개국 공신이자 청백리였던 명재상 이선장, 명나라의 뛰어난 교육자이자 만력중흥을 이끌었던 재상 장거정 정도.[27] 이와 비슷한 책으로 《춘추》가 있다. 《춘추》 또한 공자가 쓴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그의 사후 후대의 제자들이 쓴 책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28] 공자를 이야기할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책인 《논어》와 비교되는 경우가 있는데 《논어》는 공자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모아서 기록한 것이지만 논어는 "공자님 말씀을 기록해두었다가 제자들인 우리가 그걸 옮겨놓은 겁니다!"라고 밝히고 있기때문에 위서가 아니며 공자의 저술로 간주된다. 또 다른 예로 불경은 석가모니의 말을 다른 제자들 특히 아난다가 기억해뒀다가 쓴 글이지만, 그 내용은 공자의 논어와 같은 의미에서 석가모니의 생각을 알 수 있게 해준다.[29] 당시 제나라에는 고씨가 두 집안 있었는데, 하나는 제 문공의 아들 공자 고의 자손, 다른 하나는 제 혜공의 아들 공자 고의 자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