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림삼가
1. 개요
풍종호의 무협소설 『녹림대제전(綠林大帝傳)』과 『검신무(劍神舞)』에 녹림의 주요한 세력으로 등장하는 세 가문이 '''녹림삼가(綠林三家)'''이다. 버젓이 산채를 가진 산적이면서도 제각각 혈족 중심인 가문의 이름을 내세워 앞 얼굴과 뒤 얼굴이 전혀 다른 녹림세력이다. 그래서 녹림에서 힘의 상징인 머릿 수를 늘리기 위해 열심히 자손을 '증식(增殖)'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각기 가문의 인원을 확대하느라 항시 바쁘다고 한다. 연원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는 없는데, 『녹림대제전』에서는 이미 각 가문마다 관리하는 영역이 있으며, 정예화된 전력까지 갖추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꽤 오래전부터 세력을 다져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뭉뚱그려 '삼가'로 불려도 독가채와 유가채는 질적으로 당가채와 다르다. 녹림왕(綠林王)의 호위였기에 크게 일어선 당가채는 피로 이어진 가문의 결속만 있었을 뿐, 제대로 된 가전절기(家傳絶技)를 보유하지 못했다. 반면에 독가채와 유가채는 아무도 기억 못 하는 까마득한 과거에 신주십삼파(神州十三派)에서 갈려 나왔다는 절기를 전승하고 있다. 『검신무』에서 당가채가 몰락한 것도 그 승리를 바탕으로 녹림제일세가 된 방무한이 감히 독가채와 유가채를 도발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2. 구성
2.1. 당가채(唐家寨)
두 편의 소설에서 가장 변화가 극심한 가문이다. 『녹림대제전』에서 가주의 자식들인 당무란과 당수란은 납치를 당한 일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 섭혼검마(攝魂劍魔)와 왕삼구에게 구해지면서 인연을 쌓는다. 특히나 애늙이인 당무란은 왕삼구의 특별함을 알아봐 한동안 왕가채의 여행에 달라붙기도 한다. 그리하여 나중에 당대의 녹림왕으로 위세를 구축한 왕삼구의 이름을 빌려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가문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독가채와 유가채의 또래를 끌어들이는 등 제 이득을 챙기기도 한다.
당연히 당가의 위세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녹림왕의 신물이라는 녹림삼보(綠林三寶)마저 모조리 당가에 전해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그런 당가는 『검신무』에 들어와 몰락한다. 인재가 없었던 것인지 가문의 휘하였던 방무한에게 역으로 밀려 본거지까지 잃고 만다. 삼보 중 녹림의 보검인 창랑(蒼狼)과 녹림의 신표(信標)라는 낭아(狼牙)까지 빼앗긴다. 그나마 산채를 버리고 도망친 당유원이 간신히 빼돌린 단철(丹鐵)을 빌미로 청성파(靑城派)의 비호를 받아 청성산에 빌붙게 된다.
2.1.1. 구성원
-
당중효 ☜
- 당무란
- 당수란
-
당유원 ☜
2.2. 독가채(獨家寨)
『녹림대제전』에서는 녹림의 방대한 세력을 하나로 모아 휘하에 둘 목적으로 전 지역에 퍼진 많은 산채를 백팔채로 통합하려는 녹림백팔두(綠林百八頭)가 간을 볼 겸 독가채의 영역인 서진(西津)이라는 나루터 마을을 노려 충돌이 발생한다. 주력 간의 부딪침이 아니므로 작은 싸움으로 끝날 것을, 괜히 화포를 사용하는 바람에 그 소리를 들은 왕삼구가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난장판을 쳐 쑥대밭으로 만든다. 이 때문에 독가채는 왕삼구를 잡기 위하여 인상착의를 뿌리며 수소문한다.
『검신무』의 방무한은 당가채와의 협상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고 각지의 녹림도를 충동질해 3,000여 명에 이르는 대인원을 모아 청성파로 향한다. 실로 멋 모르는 정신 나간 전략으로, 청성파에서 마음만 먹으면 모조리 도륙할 수도 있는 위급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일찍이 청우자(靑牛子)가 다녀가기도 했고, 불해도인이 열풍검(烈風劍) 위강을 시켜 보낸 서한까지 받은 독가채는 나서지 않을 수가 없어서 독정한을 파견한다.
2.2.1. 구성원
- 독군하
-
독정한 ☜
2.3. 유가채(劉家寨)[2]
실질적인 등장은 없다. 다만 독가채처럼 불해도인의 부탁을 받아들여 유금화를 파견, 청성산에 몰려가는 녹림도를 막아선다.
2.3.1. 구성원
- 유정휘
-
유금화 ☜
[1] 참고로 『검신무』에는 유가채가 겉과 속이 다른 얼굴을 수백 년이 넘도록 유지하고 있는 것에 질려서 나온 사람이 다른 곳에 몸담았다 세가를 이룬 일까지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가전절기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언월도(偃月刀)와 같은 대도(大刀)를 사용한다는 유사점까지 더불어 고려하면 『호접몽(胡蝶夢)』의 유마구절도(劉魔九絶刀)를 사용하는 유씨 가문의 이야기로 추정된다.[2] 참고로 『검신무』에는 유가채가 겉과 속이 다른 얼굴을 수백 년이 넘도록 유지하고 있는 것에 질려서 나온 사람이 다른 곳에 몸담았다 세가를 이룬 일까지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가전절기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언월도(偃月刀)와 같은 대도(大刀)를 사용한다는 유사점까지 더불어 고려하면 『호접몽(胡蝶夢)』의 유마구절도(劉魔九絶刀)를 사용하는 유씨 가문의 이야기로 추정된다.[3] 『녹림대제전』에서 밝혀진 실상은 장강(長江)에서 왕삼구가 주변에 굴러다니는 것을 잠깐 주워서 사용했던 거도(巨刀)였다. 그것이 유가채로 넘어갔다가 당무란을 거쳐 왕오생에게로, 그리고 다시 유가채로 전해져 녹림도에게는 큰 의미를 가진 녹림왕의 병기라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