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
1. 유래
재앙이 오히려 복이 되어 돌아오다.
전국 시대 합종책으로 6국(國)(한, 위, 조, 연, 제, 초)의 임금을 돕는 일을 겸임했던 종횡가 소진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강인한 의지로 힘쓰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옛날에 일을 잘 처리했던 사람은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했고\' '''실패한 것을 바꾸어 공이 되게 했다.
2. 유의어
- 반화위복(反禍爲福)
- 새옹득실(塞翁得失)
- 새옹위복(塞翁爲福)
- 새옹지마: 비슷한 내용이다.
- 화전위복(禍轉爲福)
- : 원래는 전혀 다른 뜻인데 전화위복의 유의어로 오용하는 사례.
3. 반의어
- 방향이 반대
- 호사다마(好事多魔): 복이 재앙으로 돌아올 수 있음. 변수가 많아 예측이 어렵다는 맥락에서는 전화위복과 뜻을 같이 한다.
- 방향이 일직선
-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이 오면 또 다른 재앙이 뒤따름.
4. 예시
4.1. 역사적 사례
- 80년대 초반, 전남의 어느 대입 장수생 일화
3수까지 연이어 낙방하자, 부모님께서 걱정이 태산이었다고 한다. 어머님이 전국의 유명 암자, 사찰을 찾아다니며 기도하시고 "무엇이 좋을지 모른다."는 식의 '''덕담 듣는게 일과'''였을 정도. 다행히 4수에서 연세대 정외과에 합격했는데, 그곳에서 다른 학부생들이 특별한 이유없이 데면데면 대하는 학생이랑 친해졌다고 한다. 나중에는 그 학생 집까지 놀러갈 정도로 사이가 좋았는데, 알고 보니 그 집이 보통 집이 아니였고 결국 졸업 후 청와대 외교부서에 특채되었다고 한다.
- 충정로 도끼 사건으로 동대문패와 전투를 벌이는 중 경무대의 경찰의 개입과 유지광의 계락과 함정에 걸리는 바람에 조직전원이 경찰에 체포되어 주먹계 최후를 맞이했던 이화룡과 명동파는 주먹인생을 종지부 찍게되면서 어이없게 감옥에 들어가는 고초를 겪게되었다. 훗날 5.16 군사정변으로 세상이 바뀌고 군사정권에 의해 그들을 괴롭혔던 이정재를 비롯한 자유당 정치깡패들이 박살나면서 자동으로 출소하는 이변이 생겼다. 애시당초 명동파는 정통건달이자, 신사파이터에다 건달과 협객의 선을 긋고 제 값하며 살았었기에. 같은 주먹패라도 걸릴 게 없을정도로 깨끗하고, 애초에 이화룡은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으니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주먹은 정치랑 어울리면 나중에 윗선으로 부터 토사구팽 당하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다는 증거. 결국 이화룡은 다른분야에 진출하여 호탕하고 성공한 삶을 살다가 갔다.
셔먼 전차의 가장 큰 약점은 높은 무게중심이었다. 선회하는 도중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옆으로 넘어지는 일이 잦았다. 1944년 12월 헝가리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다. 내가 소대를 이끌고 진격하는 동안 운전병이 커브길에 걸려 전차가 넘어졌고, 우리는 전차 안에서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소대의 나머지 전차들은 계속 진격하다가 기습에 걸려 전멸했기 때문이었다.
-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는 카밀라 파커 보울스에게 푹 빠져 있던 남편 찰스 왕세자에게 외면당했으나 시선을 밖으로 돌려 봉사활동에 일념한 결과 모두에게 좋은 이미지의 왕세자비로 기억되었다.
- 러저 실바리스(Ludger Sylbaris)라는 마르티니크 제도의 흑인은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감옥에서도 죄수들을 폭행한 죄로 반지하 독방에 수감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가 살던 생피에르 근처의 몽펠레 화산이 유래없는 대폭발을 하면서 섭씨 1000도 가까이 되는 온도의 화산쇄설류가 엄청 몰려와서 1분만에 생피에르를 덮쳐 주민 30,000명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타거나 녹아 숨졌다. 그런데 실바리스가 갇혀 있던 반지하 감옥은 생피에르를 통틀어 가장 튼튼한 건물이고 창문이 화산 반대쪽으로 나 있어서 깊은 화상을 입긴 했지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 일로 화제가 되어 나중에 그는 유명 서커스 단원이 되었고 화상 상처를 보여주고 그 날의 참사를 회고하는 일로 돈을 벌며 연예인처럼 살았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내며 말했고 화산 폭발로 교도소의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어떤 범죄로 수감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파리바게뜨의 한 지점은 어느 날 경쟁 업체 지점으로부터 밤식빵에 쥐를 넣었다는 악성 루머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되레 그쪽에서 초등학생까지 동원해 거짓말을 했음이 드러나 그 업체가 되레 망해버렸다. 이후, 이 지점은 그쪽 고객들까지 흡수해 더 잘 되고 있다.
- F-15는 원래 MiG-25 '폭스배트'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생겨난 공포감에 의해서 생겨난 전투기이다. 그런데, MiG-25는 정작 미국의 XB-70 발키리 폭격기를 보고 기겁하여 XB-70을 잡기 위해 만들었다.[1] 그러기 위해 넓은 소련의 영토 곳곳에 배치된 방공레이더와 방공관제소에서 식별하자마자 곧바로 출격해 고고도에서 XB-70을 고속으로 따라잡아 미사일로 후두려 패고, 그래도 살아남은 놈들을 도그파이트 식으로 잡는 방식이었다.[2] 문제는 정작 잡아야할 대상인 XB-70이 결국 나가리 크리를 먹었고, MiG-25라는 놈이 이런 전술에 특화되기 위해 오로지 속도에만 몰빵하고 기타 성능들은 다 엉망이었다는 점이다.[3] 이는 1976년 빅토르 벨렌코 중위가 MiG-25를 몰고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전부 드러나버렸고, 결국 둘 다 서로 낚인 셈이 되는 것이지만… 둘 다 낚였다고만 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F-15의 경우, F-15는 모두 아시다시피 F-22 랩터를 필두로 한 5세대 스텔스 전투기 세대가 열리기 이전까지 공대공에서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전투기였다. MiG-25나 거기서 파생된 MiG-31은 제치고서라도 현대 러시아 공군의 뼈대를 이루는 Su-27 패밀리와 MiG-29도 함부로 우세라 칭하기 힘든, 만만찮은 존재이다. 오죽하면 5세대 전투기를 넘어 6세대 전투기까지 거론되는 2019년 현재에도 나름 한 성능을 인정받는 전투기이니... MiG-25 또한 명성이나 소련 군부의 기대치보다는 많이 변변찮았지만, 그래도 미국의 폭격기나 토마호크 미사일을 막는 요격기로서는 나름 인정하고 계속 써먹을 만한 성능을 가진 놈이었고, 현재도 러시아 항공우주군은 이 녀석을 개량한 MiG-31 '폭스하운드'를 자국의 현역 방공요격기로 잘 써먹고 있다. 결론적으로 둘 다 나름 전화위복으로 볼 만 하다.[4]
-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 해군 태평양 함대는 대다수의 전함을 잃어 울며 겨자먹기에 가깝게 항공모함의 운영비율이 높아졌다. 사실 항공모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그 잠재성을 인정받았지만 아직 거함거포주의가 강하게 남아있었는데 항공모함을 필사적으로 활용한 덕분에 항공모함의 가능성을 완전히 일깨운 것은 물론 해전의 양상을 뒤바꿨다. 아이러니하게도 항공모함의 위력을 확실하게 보여준 일본 제국은 도리어 항공모함 운영에 타격을 받으며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에 당하고 만다.
- 신격호는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중 1944년에 밥솥 공장이 미군의 폭격을 받아 파괴되었다.[5] 죽고싶은 상황이었으나 투자자에게 빌린 돈으로 껌을 개발했는데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어 대박하면서 롯데그룹의 시초가 된다.
- 문용형은 일제강점기 때 흥남시청 농업과장이었고 광복 이후 북한 치하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공산당에 탄압받아 흥남 철수작전 때 미군 상륙함인 LST를 타고 거제로 월남하였다. 월남 이후 가난하게 생활했지만 나중에 남한과 북한이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천만다행인 일이고 여기서 태어난 자녀 중 한명이 바로 훗날 19대 대통령이 된 문재인이다.
- 노무현은 고등학교 졸업 즈음 농협 입사시험을 쳐서 떨어졌지만 10년 뒤인 1975년 60명만 뽑는 사법시험(17회)에 합격하였다. 만약 그때 노무현이 농협 입사시험을 합격했다면 변호사가 안되었을 것이고 대통령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 박근혜 정권은 임기 초반에 친중 정책을 실컷 펼쳤으나, 이후 주한미군의 THAAD 배치 계획을 받아들여 한국 영토 내에 무기를 들여놓는 것을 승인하는 바람에 한중관계의 악화를 자초하고야 말았다. 중국 정부의 배신감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기업의 중국 내 사업에도 지장을 초래했다. 특히나 롯데그룹이 이와 관련해 운영 중이던 성주 골프장을 내주기로 국방부와 합의를 한 터라 중국 내에서 가장 타격이 컸다. 중국 정부가 은연중에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대상으로 제재를 가하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리하여 많은 한국 기업들이 슬슬 중국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고, 문재인 정권 들어 신남방정책이라고, 동남아시아 지역과 인도로 집중 진출하는 전략을 펼쳤다. 이후 2019년 들어 홍콩의 시위대를 대하는 중국 중앙 정부의 태도가 부각되어 미국 등의 많은 다국적 기업과 대형 단체 등이 골머리를 앓고 있고, '거대한 중국 시장의 단물을 빨아먹자고 언제까지 공산당의 입장에 맞장구만 치고 있을 텐가?'라는 회의론까지 나오고 있는 지경이라, 수많은 한국 기업이 (원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중국 시장을 일찍 빠져나온 셈이 됐다.
- 시메이펑 할머니의 사연은 사실 이 전화위복에 가깝다. 만일 시메이펑 할머니가 저쪽 집 무너진 것을 구경하러 가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기 때문.
- 원나라의 멸망으로 몽골족은 중원을 잃고 고향인 몽골 초원으로 돌아왔는데, 이들이 중원을 차지한 기간이 청나라의 만주족보다 훨씬 짧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원나라가 빨리 멸망한 덕분에 후대의 만주족과는 반대로 현대에도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독립국가로 이어질 수 있게 된 셈이다.
- 한족이 세운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고 그 틈을 타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만주족은 몽골족에 비해 관대한 통치와 오랜 지배기간으로 한족에 동화되었고 1912년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인해 중화민국이 건국되면서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고 살던 땅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반면, 만주족에 296년간 지배당했던 한족은 청나라 시절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결과적으로 더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태평양 전쟁으로 전력을 상실한 일본 제국은 원자폭탄 투하를 계기로 항복을 선언하였다.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연합국의 몰락 작전으로 일본을 분할할 계획이었는데 항복하면서 일본 대신 한반도가 분단되었다. 그리고 맥아더의 계획에 의해 농업국가가 될 계획이었던 일본은 한반도 분단으로 일어난 한국 전쟁을 계기로 떼돈을 벌면서 고도의 산업화를 이룩하였다.
- 서울 지하철 2호선은 설계 당시 현재의 선형에서 영등포역, 고속터미널역, 서울역을 추가로 경유하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이게 왜 전화위복의 사례라면 이미 지금 2호선도 미친듯이 터져나가기에...
- 핀란드는 전 세계 휴대전화 점유율 1위였던 노키아가 몰락하면서 2012년부터 경기침체에 빠졌다. 하지만 혁신 창업으로 부활하고 스타트업 강국으로 거듭나며 '노키아 몰락은 핀란드의 축복'이라는 평가도 나오게 되었다.#
- 부산광역시는 2020년 올림픽을 유치하려고 했으나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치르는 입장에서 같은 나라에서 2연속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이 명분에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도쿄에 밀려서 실패했다. 그러나 2020년 초 전세계에 코로나19가 터졌고, 도쿄 올림픽 개최가 무산될까봐 대비나 방역을 제대로 하지 않은 일본은 그 후폭풍을 제대로 얻어맞았고 평창에 대해 대회 준비가 안됐다고 비아냥을 일삼던 그들은 1년 연기는 기본이고 아예 대회 취소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 2020년 중국 폭우 사태로 인해 서해상에 장강에서 쏟아져 나온 담수는 밀도차로 해수와 대류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 문제가 있어 수온이 상승하여 태풍 바비가 서해상으로 올라올 당시, 세력이 줄어들지 않고 힘을 받은 상태 그대로 올라오게 되었다. 하지만 태풍이 저염분수를 헤집어놔서 수온이 정상 수준으로 회복되어 저염분수로 인한 어업인의 걱정을 크게 덜 수 있게 되었다.관련 기사
4.2. 일상적 사례
- 새옹지마의 일화
변방에 사는 어떤 노인이 잃어버린 말이 어느 날 굉장히 준수한 말을 데리고 돌아와 사람들이 좋아했으나 이 노인은 그다지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노인의 아들이 그 새 말을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게 되었다. 헌데 이 노인은 그렇게 슬퍼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이후 전쟁이 일어나 마을의 모든 청년들이 징병돼 전장으로 끌려갔으나 이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다친 덕에 끌려가지 않았다.
- 탈무드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어떤 여행객이 어느 마을에 방문했다가 숙소에 나귀와 개를 밖에 묶어놨는데, 그 날 밤 사자와 여우가 나타나 나귀와 개를 죽여버렸다. 다음 날 나귀와 개가 없어지자 여행객은 매우 막막해했다. 그런데 마을이 이상하게도 조용했는데 남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발견한 한 마을 여인에게 물어보니 그 여인은 울면서 '''어젯밤 웬 도적 떼가 마을에 몰려와 재물이란 재물은 다 뺏고 남자란 남자는 다 죽였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여행객은 만약 맹수들이 자기 동물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개와 나귀가 난동을 부려 자기도 꼼짝없이 죽었을 거라면서 감사했다.[6]
- 맘아이는 cmd를 막기 때문에 cmd기반으로 작동하는 랜섬웨어를 막는다.
- 결과는 좋았다에 나온 사례들.
4.3. 영화/작품/게임/애니
- 스파이더맨 트릴로지는 1990년대에 나올 예정이었지만 저작권 문제로 오랫동안 제작이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2000년대로 와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는데 그 사이에 CG 기술이 발전하면서 빌딩 사이를 거미줄을 타고 누비는 스파이더맨의 움직임을 한층 더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어졌다.
- 한국의 온라인 게임 소울워커는 본래 2018년 초만 해도 유저가 거의 없어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 때 소녀전선 K7 업데이트 연기 논란이 확장되어 소울워커에도 메갈리아를 지지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의 흔적이 있음이 발각되었을 때 끝장났다고 여겨졌으나, 이에 곧바로 적절한 공지를 띄우고, 개발진의 적극적인 피드백과 이벤트, 기존 유저들의 적극적인 신규 후원 등으로 갱생했다. 반면 똑같은 상황에서 안일하게 대처하던 클로저스는 완전히 오와콘으로 몰락하는듯 했지만 이후 나딕게임즈에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를 문자 그대로 실행하면서 남아있던 유저들을 어떻게 해서든 붙잡았고 이후, 시즌3 + 신캐 파이 윈체스터 출시로 유저수를 사건 이전때로 돌리는데 성공하면서 오와콘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경쟁작인 소울워커는 반대로 최근 들어 오와콘이 될 기미를 보이고 있는 중.
- 애니메이션 감독 오모토 타츠키와 그의 소속사인 야오요로즈는 케모노 프렌즈의 1기 애니메이션으로 죽어가던 IP를 소생시킨 공로가 큼에도 불구하고, 원작자를 포함한 높으신 분들의 모함을 받아 2기 애니를 만들던 도중에 쫓겨나버렸다. 하지만 그 뒤에 아마존 프라임의 훨씬 나은 대우 속에서 만든 오리지널 작품 케무리쿠사가 승승장구하고, 다른 제작진들에 의해 만들어진 케모노 프렌즈의 2기 애니메이션은 악평과 비판응 받은 것도 모자라 제작 과정에서 폭력 조직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오히려 강판당한 것이 다행이라는 소리가 많아졌다.
- 헤르만 헤세는 고압적인 가정 환경에서 자라나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적응에 실패하고 자퇴하여 한동안 방황했었다. 그러다가 18세에 한 서점의 점원으로 일하게 된 것을 계기로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작가가 되었다.[7] 그리고 그 방황기를 바탕으로 써낸 소설이 <수레바퀴 아래서>이다.
- 워해머 판타지는 상품 판매 부진으로 40k와 달리 엔드 타임으로 종결되고 에이지 오브 지그마로 넘어갔지만, 토탈 워: 워해머 시리즈와 버민타이드 시리즈의 성과로 부활에 성공했다. 반면 40k는 pc게임에서 죽을 쑤고 있다.
- 다니던 회사가 망하고 일자리를 잃은 타케우치 타카시. 그는 나스 키노코와 지인들을 데리고 TYPE-MOON을 세운다. 이후 월희, 페이트 시리즈를 히트시키고 페이트 그랜드 오더로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
4.4. 정치
4.4.1. 대한민국
- 노무현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굳이 험지인 부산에 출마해 크게 패배한 뒤 오히려 전국적인 인지도와 지지층을 얻어서 그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는 승리했다.
-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 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여 민주당과 대립하게 되었고 17대 총선 당시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을 한 것을 계기로 선거개입 논란이 일어나면서 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의 연합으로 국회에서 탄핵소추되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되면서 그 역풍으로 지지층 결집 효과를 가져와서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얻으며 승리하였다.
- 조응천은 본래 박근혜 정부의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과 더불어 박근혜 정부의 실세 노릇을 하던 우병우의 전횡을 참다못해 그의 승진을 막았다가 박근혜의 미움을 사서 바로 해고되어 버렸다. 이후 생계를 위해 횟집을 차리면서 해고당한 것에 대한 울분을 달랬는데[8] , 얼마 뒤에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어버린 그에게 더불어민주당에서 영입 제의가 들어오자 이에 응한 다음,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공직에 복귀했다. 특히 이거보다 더 운이 좋은 건, 그로부터 얼마되지도 않아서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사건이 생겼을 때 휘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박근혜 눈 밖에 나서 잘리지 않았다면 자기도 그 패거리들과 함께 뼛속까지 탈탈 털렸을 것이다.[9] 그리고 21대 총선에서도 당선되어 지금은 2선 의원이다.
- 새정치민주연합은 문재인 대표 체제에서 지지율이 지지부진했지만, 문재인과 친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일부 세력이 안철수와 함께 나가버리며 국민의당을 창당했고 잔류파들은 더불어민주당에 남게 됐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만 해도 국민의당의 영향력도 컸지만, 19대 대통령 선거 때 국민의당의 각종 실책들로 문재인이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 윤석열은 박근혜 정부 시절 박근혜 정부의 비리를 수사하다가 정권의 외압으로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겨누는 소신으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하여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문재인 정부 때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 송철호는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와 20대 총선에서 박맹우에게 졌고, 특히 20대 총선에서는 단일화를 안해서 석패했다. 하지만 이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당시 현직 울산광역시장이였던 김기현을 10% 이상 차이로 꺾고 울산광역시장에 당선되었다.
- 여주시장 이항진은 원래 식당 사장이였으나 4대강 반대 시위 한 후 근처 차에 펑크가 나는 등 테러를 당해서 식당을 폐업했다. 그 이후 정치에 투신하여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해 여주시장에 당선되었다.
- 국회의원 여영국은 창원시를 지역구를 한 재선 도의원이였다. 하지만 2018년 선거에서 민중당과 표가 갈려서 석패한 후, 노회찬이 사망한 후 치뤄진 2019년 4.3 재보궐 선거에서 상대편인 강기윤을 대상으로 504표 차이로 이겼고, 경남에서의 진보정당의 위신을 지킬 수 있었다. 만약 여영국이 2018년 당시의 지방선거에서 민중당과 표가 안 갈렸으면, 자연스럽게 재보궐선거는 권민호 vs 강기윤이 되었을 것이고, 정의당의 2석뿐인 지역구중 하나를 잃을 뻔 했다.
- 19대 대통령 문재인은 2020년 1월 말부터 발생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초기 대응에 실패해[10] 중국에 이어 감염자수 세계 2위를 기록하여 보수 쪽에서 공격을 받았으나, 시간이 경과하고 전세계가 코로나 확산으로 혼란에 빠질 때 대한민국은 감염자수가 10위 밖으로 밀려나고, 돋보였던 시민의식, 메르스 사태를 거치며 개선된 방역 시스템, 뛰어난 공업력과 의료기술을 기반으로 진단키트를 수출, 일본과 대비되던 의료진들의 헌신 등, 이른바 K-방역의 성과로 찬사를 받아 빌 게이츠와 통화하기도 했고 지지율이 크게 올랐다. 그 결과 임기 4년차에 치뤄진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을 얻어 거대여당을 달성하고 레임덕을 차단시켰다.
- 홍준표는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험지 출마하라는 요청으로 강북으로 출마하라고 하자 자신은 고향인 밀양시·의령군·함안군·창녕군에 출마하겠다고 주장했고 거절당하자 타협안으로 양산시 을에서 출마를 제시했지만 공천위원장 김형오에 의해 컷오프되었다. 공천 결과에 반발한 홍준표는 결국 탈당하여 대구에서 미래통합당 정치신인 이인선이 공천받은 수성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같은 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당 내에서 자신과 대립했던 황교안 덕분에 당선된 셈.
- 강대식은 대구 동구청장 시절, 유승민을 따라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래서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그대로 바른미래당으로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다. 그러나 이후 바른미래당의 후신중 하나인 새로운보수당이 자유한국당과 합당하여 미래통합당이 창당되었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승민이 불출마 함에 따라 그의 지역구인 대구 동구 을 선거구를 물려받아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 오영환이 의정부시 갑에 전략공천됐을 때 전임이자 그곳의 터줏대감인 문희상계의 반발을 심하게 받았고, 결국 그의 아들 문석균이 지지자들을 다 데리고 나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이 의정부시 갑을 전략공천지로 지정한 이유 자체가 문희상 집안의 세습 논란이었기 때문에 오영환은 여유롭게 당선됐을 뿐 아니라 당직자와 대의원도 대거 물갈이되어 일처리도 더욱 원활하게 할 수 있게 됐다. 한국에서 정치인 가문은 나올 수 있어도 지역구 세습은 있을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긴 건 덤.
- 배현진은 MBC 아나운서 시절 MBC 파업을 지지하지 않았고 2018년 MBC를 퇴사 후 자유한국당에 입당하였다. 2018년 재보궐선거 송파구 을에 출마하여 더불어민주당 최재성 의원에 패배했으나 2년 후 21대 총선 송파구 을에서 지역구 관리에 소홀했다고 평가받는 최재성 의원을 꺾고 국회에 입성하였다.
4.4.2. 외국
-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00년에 연방 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 그러나 2004년에 상원에 당선되여 초선 상원의 신분으로 대권에 도전할 수 있었다. 만약 하원에 당선되어버렸다면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없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12]
- 스즈키 나오미치는 편모 가정에서 자라 대학에 갈 돈이 없어 공무원이 되었고, 도쿄에서 일하다가 몰락한 홋카이도의 도시 유바리시에 갔다. 그런데 거기서 일을 정말 잘해서 도쿄로 돌아올 때는 주민들이 환송식까지 해 줬을 정도고, 후일 이를 바탕으로 홋카이도 도지사가 되었다. 나중에 코로나19가 터졌을 때 손빠른 대처로 일본 정계의 블루칩이 된 건 덤.
4.5. 스포츠
4.5.1. 보편적인 사례
- 상대 선수의 도핑으로 인해서 메달을 승계받는 경우가 있으며 대표적인 예로 장미란, 임정화, 김민재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뒷북이라 축하는 지인들 정도에게서나 받는다.
4.5.2. 축구
- 베슬리 스네이더르는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매우 부진한 시간을 보냈다. 당연히 이적 순위 1위가 됐는데 당시 그를 영입하겠다고 요청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제안을 계속 무시했다. 그러나 레알 측에서 그의 허락도 없이 짐부터 빼버리는 행위를 하는 바람에 결국 인테르에 가게 되었다. 주제 무리뉴 감독 밑에서 만개한 그는 자신을 버린 레알 마드리드에게 화려한 복수를 해 줬다.[13]
- 루카스 포돌스키는 자신이 폴란드 사람임을 잊지 않았고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거절의 소식이 들려왔고 할 수 없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향했으며 그리고 국대스키가 되었다.
- 파올로 말디니 이전에 AC 밀란의 영원한 주장 소리를 듣던 프랑코 바레시는 원래 형 주세페 바레시를 따라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 가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할 수 없이 AC 밀란에 들어갔다. 그래서 처음엔 바레시 2라고 불렸으나 형 주세페 바레시보다 훨씬 더 우승컵이나 타이틀을 많이 따서 신세가 역전되었다.
- 로렌조 인시녜는 처음에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키가 너무 작다는 이유로[14] 거절당했고 하는 수 없이 SSC 나폴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말이 필요없는 나폴리의 아이돌.
- 하비에르 사네티는 하도 트로피와 인연이 없는 것에 지쳐서 2002년에 레알 마드리드 CF로 떠나려고 했었다. 허나 마시모 모라티의 간곡한 설득에 남았고 2005년부터 2010년까지 UEFA 챔피언스 리그 빅 이어를 비롯한 트로피들을 쓸어담았다.[15]
- 에스테반 캄비아소는 레알 마드리드 CF에 작은형 니콜라스와 함께 기대를 받으며 입단했으나 별로 빛을 못 보다가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해서야 빛을 발했다.
- 사무엘 에투는 아프리카 최고의 축구선수 중 하나이지만 한때 펩 과르디올라와의 분쟁으로[16] 4800만 유로라는 돈이라는 돈까지 얹어져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맞교환되어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가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허나 거기서도 상술한 스네이더와 함께 바르셀로나를 깨부수고 트레블을 해서 다른 팀에서의 2연속 트레블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 그래서 에투는 자신의 인테르행을 지금까지도 자랑거리로 삼고 있을 정도다.
- 17-18시즌 로베르토 갈리아르디니가 부상으로 시즌 아웃이 되어버려 할 수 없이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감독 루치아노 스팔레티는 갈리아르디니보다 떨어지는 평을 들으며, 심지어 먹튀 소리까지 듣던 마티아스 베시노[17] 를 써야 했다. 처음에 헤매서 욕을 먹던 베시노였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극적인 결승골을 넣어서 인테르는 7년만에 챔피언스리그에 나가게 되었다![18]
- 아르연 로번은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처음 이적했을 때 한 단계 낮은 팀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나,[19] 결과적으로는 뮌헨에서 10년동안 뛰면서 뮌헨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 윙어로 발돋움했다. 특히 자신이 꿈에 그리던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자신의 결승골로 들어올렸으니... 현재 자신이 레알에서 뮌헨으로 이적한 것이 자기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고 인정했다.
- 필리페 쿠티뉴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서 자리를 못 잡다가 리버풀 FC로 이적했고 대박나서 간판 스타가 되었다.
- 루이스 수아레스는 연인이 바르셀로나로 이민을 간 후 실의에 빠져 있었으나 축구를 잘 한다면 유럽에 갈 수 있단 말에 열심히 노력하여 AFC 아약스로 이적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연인은 네덜란드로 왔고 둘은 이렇게 재결합해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 라울 곤살레스는 원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유소년 팀에 있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유소년팀이 해체되었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 CF로 옮겨갔고 그 곳에서 전설이 되었다.
- 파트리크 쉬크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가려 했으나 자금을 동결시켜버린, 인테르를 소유중인 회사 쑤닝에 의해 좌절되었고 하는 수 없이 AS 로마로 이적했다. 선수 개인도 처음엔 좀 헤매다가 어느새 정착했으며, 로마도 리그 3위를 하고 챔피언스리그 4강까지 갔다.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는 원래 툴루즈 FC의 이사 디우프를 영입하려 했으나 툴루즈가 값을 너무 비싸게 부르는 통에 할 수 없이 유망주 중 하나를 UC 삼프도리아에게 넘기다시피 하며 그 곳의 수비수 밀란 슈크리니아르를 영입했다. 그리고 팀과 선수 둘 다에게 윈윈이 되었다.
- 슈크리니아르를 영입한 인테르는 원래 있던 수비수 주앙 미란다의 짝으로 쉬코드란 무스타피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상술한 파트리크 쉬크와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그래서 슈크리니아르는 그대로 미란다와 함께 뛰게 되었고 이적 반 년 만에 FC 바르셀로나와 링크가 뜰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SS 라치오의 주전 센터백 스테판 더 프레이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해 이 둘은 2018-19 시즌부터 인테르의 미남 벽 듀오를 이룬다.
- 유벤투스 FC는 칼치오폴리 이후 주전 선수의 반을 떠나보내고 강등까지 되어 한동안 암흑기를 보냈으나 팀에 남은 몇몇 선수들과 새로이 떠오르는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나 조르조 키엘리니 등을 팀의 차기 상징 및 에이스로 키웠다.
- 하피냐 아우칸타라는 라 마시아의 차세대 유망주 중 하나였으나 라자 나잉골란에게 시즌아웃 태클을 당한 이후 유리몸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버렸다. 이후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임대를 가게 되었고 옛 친구와 재회도 하며 팀의 주전이 되며 마테오 코바치치 이후 인테르의 아이돌이 되었다.
- 마르셀리노 가르시아 토랄은 본디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감독이 되고 싶어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발렌시아 CF의 감독이 되었고 그 곳에서 자신의 구상한 바를 잘 이뤄냈는데, 대표적인 게 조프리 콩도비아의 부활. 마르셀리노나 콩도비아에게나 발렌시아로의 이적은 전화위복이었다.
- 리오넬 메시는 어린 시절 성장호르몬 장애에 걸려 성인이 되어도 키가 150cm도 되지 않을 것이란 소리를 듣는다. 허나 당시 메시의 집안은 물론[20] 소속팀이던 아르헨티나의 뉴웰스 올드 보이스도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에서 그를 영입하는 대가로 성장호르몬 치료를 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메시는 바르셀로나의 살아있는 상징 및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축구선수 중 하나가 되었다.
- 디에고 포를란은 본디 테니스 선수가 꿈이었다.[21] 헌데 그의 누나가 연인과 함께 드라이브를 즐기다가 큰 사고를 당해 연인도 잃고 본인도 장애인이 되었다. 수술비가 너무 막대하여 고민하던 찰나에 디에고 마라도나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고 이에 포를란은 아예 축구로 전향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한때 우루과이의 간판 선수가 되었다.
- 우나이 에메리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달리 선수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은퇴한 팀에서 우연히 감독을 맡게 되면서 꽃길을 걸었다.
- 시모네 인자기는 그 유명한 필리포 인자기의 동생으로 본인도 프로 축구선수였으나 형에는 미치지 못했으며 은퇴도 더 빨랐다. 하지만 그 동안 축구지도자 공부를 열심히 했다.[22] 둘 다 감독이 된 지금은 둘의 처지가 반대다.
- 제라르 피케는 FC 바르셀로나 회장이던 아마도르 베르나베우[23] 의 외손자다. 외할아버지가 실각하면서 세력 다툼에서 밀리게 되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갔다가 자리를 못 잡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적 첫 해부터 6관왕을 하면서 열심히 트로피를 모으고 샤키라라는 세계적인 여가수와 가정도 이루게 되었다.
- 주제 무리뉴는 아버지가 축구선수여서 자신도 축구로 성공하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20대에 은퇴를 해야 했다. 그리고 감독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고 결국 세계적인 감독이 됐다.
- 호마리우는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아버지가 납치당한다. 아버지와 사이가 매우 좋았던 호마리우는 월드컵에 불참 선언을 했고 정부는 물론 갱단들까지 그의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이에 쫄아버린 납치범들이 알아서 아버지를 풀어주었고 호마리우는 월드컵에 나가 월드컵을 따 냈다.
- 조르제 멘데스는 원래 축구선수가 되고자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축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에이전트가 되었고 지금은 미노 라이올라와 함께 유럽 축구판을 움직이는 거물 에이전트다.
- 지안루카 디 마르지오는 원래 축구선수였으나 심한 부상을 당해버려 은퇴를 해야 했다. 그래도 축구를 사랑했던 그는 축구 기자로 전업했고 가장 공신력 높은 세리에 A 축구 기자다.
- 마테오 코바치치와 마르첼로 브로조비치는 부진에 빠진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서 2015년 초 함께 있었으나 그 해 여름 코바치치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챔피언스리그 3연패 등 남부럽지 않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24] 한편 브로조비치는 남아 부진한 팀에서 이런저런 자리에 놓여지다가[25] 한때 매각설까지 나왔으나 결국 팀에 남게 됐다. 그래도 쩌리 취급을 계속 당하던 중 주전이던 마티아스 베시노가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자 대신 나오게 됐는데 각성했다. 샛별처럼 이적 3년만에 팀의 에이스로 떠오른 그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높은 평점을 받으며 챔스 진출에 기여하더니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선 코바치치를 밀어내고 자신이 주전을 차지해 버린다.[26] 월드컵 후에는 자신의 소속팀이 절대 못 데려올 것 같던 시메 브르살리코까지 입김을 불어넣어 데려옴으로서 코바치치가 남았다면 인테르의 팬들이 기대했던 역할까지 수행중.
- 케이타 발데는 원래 FC 바르셀로나 유소년팀의 촉망받는 유망주였으나 친구의 방 침대에 얼음을 넣어놓은 장난을 쳐서 쫓겨났다. 허나 이후 잘해서 동기들 중에서도 더욱 이름을 더욱 알리고 있다.
- 루카 모드리치는 원래 크로아티아의 국민 클럽 디나모 자그레브의 라이벌 팀인 스플리트 하이두크[27] 로 가려 했으나 키가 작다고 거절당해 자그레브로 가게 됐다. 이 거절 때문에 더욱 열심히 노력했고 지금은 크로아티아의 국민 축구스타.
- 샤페코엔시 감독 카이우 주니오르의 아들은 아버지의 결승전 경기를 구경가려 했지만 여권을 잃어버려 비행기를 못 탔다. 그러나 아버지는 비행기를 타고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 혼다 케이스케는 청소년 시절 감바 오사카 입단을 거절당하며 온갖 혹평을 들었으나 상세한 축구일기[29] 를 쓰며 노력하여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에이스까지 되었고, 지금은 캄보디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다.
- 니콜로 자니올로는 원래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기대받는 유망주였으나 라자 나잉골란 거래에 선배 다비데 산톤과 함께 AS 로마로 팔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회를 충분히 받으며 새로운 스타로 떠오르고 있다.
- 손흥민은 런던 올림픽 때 국가대표팀 차출이 안 돼 병역특례를 받지 못했고, 이는 그의 가치 성장에 방해가 되었다. 하지만 2018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 때 강한 투지를 월드컵 때부터 계속 보여줘 이에 감동해 국내의 국가대표팀 및 그의 팬들도 더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병역특례도 받고.
- 델레 알리는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 밑에서 크다가 결국 13세 때 같이 축구하던 친구의 부모님이 위탁부모 형식으로 거둬준다.[30] 그리고 그 위탁부모의 지원 하에 차세대 영국 축구스타가 된다. 지금도 양부와 사업을 함께하는 등 사실상 가족 맞다. 이에 친모는 다시 델레에게 치근덕대는 중이며, 델레는 굉장히 불쾌해한다고 한다. 친부는 친모의 주장과는 달리 델레의 출생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하니 예외적으로 델레가 연락한다고.
- 지미 버틀러는 13세 때 친어머니에게 대놓고 버림을 받았다. 결국 길거리에 내앉아 노숙을 하면서 농구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농구하던 다른 소년이 자신의 집으로 그를 초대했는데 그 집에 입양됐다. 이후 그는 농구계의 스타가 되었다.
- 라자 나잉골란의 인도네시아인 친부는 플란데런 아내와 자주 싸우다 아무것도 안 남기고 가출했다. 이에 집이 가난하자 라자와 쌍둥이 누나 리아나는 축구라는 돌파구를 찾아내 선수까지 된다.[31]
- 히샤를리종은 어릴 때 실수로 마약 갱단의 소굴 근처를 지나가다 마약 도둑으로 오해받았다고 한다. 죽을 힘을 다해 겨우 탈출한 후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았다고. 이후 그는 마약사범의 길로 빠져버린 친구들의 유혹에도 마약사범의 길을 거부하여[32] 프로축구선수로 잘 나가는 중.
- 주앙 마리우는 인테르에서 1년 가까이 출전하지 못했다.[33] 그러다가 SS 라치오 전을 시작으로 제노아 CFC전에 기용됐는데, 상대팀을 그야말로 찢어놨다. 제노아는 오래 출전을 못했던 주앙 마리우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준비를 했기 때문에 경기 내내 이 의외의 변수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 사울 니게스는 원래 레알 마드리드 유소년 팀에 있었으나 라커룸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몰리는 등 따돌림을 당했다. 이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옮겨가게 되고 거기서 주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레알전마다 레알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아틀레티코의 차기 아이돌이 되었다.
- 박항서 감독은 한일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의 코치 생활 이후엔 갖가지 불운이 겹친 것도 있고 해서 쭉 하락세를 타 실업팀에서도 극악의 성적을 내 본인도 자신의 감독 인생이 끝났음을 직감했을 정도로 몰락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 뒤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고 그야말로 역사를 쓰며 베트남의 히딩크로 발돋움했다.
- 축구선수 손웅정은 부상으로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해야 했지만 여유로운 시간에 유럽에 가서 유소년 축구선수들을 관찰하게 됐고 깨달음을 얻어 귀국해 축구교실을 여는 한편 작은아들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 그리고 보기 좋게 성공.
- 브라질의 축구 골키퍼 알리송 베케르는 형을 따라 운동을 시작했지만 키가 크지 않아서 감독이 잘 쓰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습을 반복했더니 1년 사이에 키가 엄청나게 자랐고 순식간에 슈퍼스타가 되었으며, 지금은 탑클래스 선수가 되었다.
- 제르단 샤키리는 인테르에 이적했으나 기대 이하의 모습에 반 년 만에 스토크 시티 FC로 이적했지만 스토크도 강등당하고 만다. 그래서 간 팀이 리버풀 FC였고 그 해 리버풀은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다.
- 첼시 FC는 레전드 페트르 체흐를 내쫓으면서까지 잘해준 티보 쿠르투아가 배신하자 울며 겨자먹기로 거금에 케파 아리사발라가를 사 온다. 그리고 유로파리그에서 우승했으나 쿠르투아는 그러면서 간 레알 마드리드 CF가 부침에 빠지며 무관에 그쳤다.
- FC 바이에른 뮌헨은 2011-12 시즌에 리그 우승을 2년 연속으로 도르트문트에게 내주었고, DFB-포칼 결승에서도 도르트문트에게 2대5로 대패하며 제대로 자존심을 구겼다. 무엇보다 2012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이 뮌헨의 홈구장인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펼쳐졌는데, 첼시에게 패하며[34] 홈 팬들 앞에서 결승전 패배의 비극을 맛봐야 했다. 허나 2012-13 시즌을 앞두고 분노의 영입을 시전하고, 리그 시즌 내내 단 1패만 기록하며 분데스리가 최단 시간 우승 신기록을 세웠다.[35] 포칼에서는 전 시즌에 패배를 안겨주었던 도르트문트를 8강에서 떨어뜨리며 복수에 성공했고, 결승까지 가서 슈투트가르트를 3대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바르셀로나를 4강에서 합계 7대0으로 우주관광을 시켜주고 떨어뜨린 후 웸블리에서 또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극적인 2대1 승리를 거두며 지난 시즌의 준우승 트레블을 독일 클럽 역사상 최초의 트레블로 1년 만에 바꿔놓았다.[36][37]
4.5.3. 야구
- 두산 베어스는 2019년 9월 14일 SK 와이번스와의 인천 원정경기에서 베테랑 배영수의 0구 끝내기 보크로 패해 선두 SK와의 승차가 벌어졌으나 불과 5일 후 SK와의 더블헤더 경기를 스윕하여 SK를 향한 압박을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 10월 1일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8회초까지 2대5로 뒤지던 경기를 8회말에 3점을 만회해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더니 9회말 박세혁의 끝내기 안타가 터져 SK를 2위로 밀어내고[38] KBO 리그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대역전 드라마를 완성했다.
4.5.4. 기타
- 율리아 리프니츠카야는 소치 올림픽 당시 김연아를 지나치게 견제한 러시아 측에서 푸쉬 대상으로 꼽혔으나 본인의 실수로 그걸 차버렸다. 본인은 그것을 굉장히 안타까워했지만 그 때 그 푸쉬를 그대로 받아낸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의 몰락한 처지를 보면 그녀는 여전히 피겨계에서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으니 전화위복 맞다.
- 농구선수 김민구는 2014년 음주운전 사고를 내고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법적처벌을 받지않고 경고조치 및 사회 봉사활동 120시간 징계에 그쳤으며 장애인 판정을 받아 군면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활을 마치고 복귀이후 풀타임을 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마디로 음주운전을 해서 이득본 케이스.
- 배구선수 김연경은 언니를 따라 배구를 시작했지만, 키가 너무 안자라서 방출될 위기에 있었는데, 그 이후 1년만에 키를 많이 키웠고, 마침내 프로로써 데뷔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9년 현재는 대한민국 여자 배구하면 생각나는 인물 중 1명이 되었다.
- 미국의 피겨스케이터 조엘 펄먼은 다리 부상을 입었다가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허나 그는 수술을 거부하고 단식으로 해결해 다리를 자르지 않아도 됨은 물론이요, 이듬해 우승을 휩쓸었다. 이 때의 경험으로 그는 건강한 음식만 가려먹는 게 매우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고 은퇴 이후 음식으로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 미국 모든 의사들의 스승이란 찬사까지 듣는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연아가 은퇴하고 명의가 된 것.
- 부산 KT의 2020-21 시즌 : 허훈을 보좌해줄 후보 가드진의 연속된 부진으로 7연패에 시달리다가 낮술듀오 사건으로 인해서 순식간에 부진하던 가드 2명이 2군으로 말소되었고 이후 드래프트에서 운 좋게 2순위를 얻어 박지원을 지명한 끝에 허훈-박지원-김종범-최진광으로 이어지는 가드진이 구성되며 12월 7일 현재 6연승으로 반등하고 있다.
4.6. 연예계
- 다른 가수가 부를 예정이었던 노래의 일부.
4.6.1. 한국
- 여자친구 그룹 자체
- 김소정 : DSP에 연습생으로 오랜 세월 있었으나 데뷔를 하지 못해[39][40] 결국 소속사를 나와 거의 신생 기획사나 다름없는[41] 쏘스뮤직에 들어가 걸그룹 여자친구의 멤버가 됐다. 그리고 여자친구는 중소 기획사라는 핸디캡을 딛고 당당히 인기 걸그룹이 되어서 거대 소속사인 JYP에 소속된 TWICE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 정은비 : 참고로 이 멤버는 원래 쏘스뮤직의 계획대로였다면 들어오지 못할 멤버였다. 만약 이거로 끝났다면 사랑과 전쟁에 나온 아역배우 출신 연습생으로 남을 뻔 했다. 하지만 1명이 튀었고[42] , 2명이 계약만료 후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간 후[43] 추가로 합류한 사람이 바로 정은비였다. 그리고 지금은 황은비랑 같이 투은비 콤비를 할 정도의 여자친구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 아이유 : JYP 오디션에서 떨어진 이후 로엔에서 합격했다. 물론 Boo,미아 때는 듣보잡 여고생 가수였지만, 마시멜로우 때 뜨기 시작했고, 그 이후 좋은 날, 너와 나 등등에서 승승장구하더니 모교인 동덕여고에 자신을 이름을 딴 장학금을 만들고, 1인 기획사까지 받아낸 로엔의 안방마님이 되었다.
- 가인은 배틀신화에서 떨어진 후 화장실에서 울고 있었는데 그 때 어느 연예계 관계자에게 캐스팅되었다. 그리고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간판 멤버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참고로 단 몇 개월만 앨범이 없어도 인지도가 떨어지는 아이돌판에서 15년동안 인지도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대단한 것이다.
- 현아는 중3이던 2007년 원더걸스로 데뷔했으나 의혹 속에 탈퇴했다. 이후 2년의 공백을 갖다 포미닛으로 다시 데뷔했고 팀의 간판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너무 노골적이라며 욕먹던 섹시 컨셉도 이제는 당당해보여 좋다며 걸크러쉬라고 불리게 됐다. 물론 그 이후 원더걸스는 해외만 돌다가 해체가 되었기에 전화위복이 되었고 비록 이던과 열애설로 큐브에서 방출되었지만, 다른 소속사에서 여전히 솔로 가수로서 영향력을 보이고 있다.
- 비스트 - 하이라이트: 비스트에 들어 온 멤버는 전부 다른 기획사에서 옮겨온 연습생어서 왕비호에게 재활용 그룹으로 까였을 정도다. 그럼에도 히트했으며 이후 하이라이트로 재데뷔한 후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한 명은 자신의 행실로 인해 패가망신했다.
- 윤두준: JYP 오디션에서 떨어진 뒤 큐브로 가서 비스트로 데뷔에 성공했다. 이후 원조 남친돌이 되었으며, 하이라이트로 재데뷔한 이후에도 여전히 인지도가 있다.
- 프로듀스 101 시리즈
- 프로듀스 101
- 전소미: SIXTEEN에서 아깝게 떨어져서 TWICE 멤버로 뽑히지 못했으나 프로듀스 101에서 최종 우승을 한 후 I.O.I로 사랑을 받다 솔로로 활동하는 지금도 특유의 친화력과 끼, 매력으로 잘 나가고 있다. 외모도 혼혈이라 이색적이게 예쁜데, 어릴 땐 도리어 이 외모가 잡종이라고 욕을 먹어서 진지하게 성형을 고민했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 청하 - JYP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다가 퇴출된 후 MNH엔터테인먼트으로 이적하였다. 이후 프로듀스 101에 참가해 4등이란 성적을 거두고 I.O.I로 데뷔하였고 I.O.I를 거친 후 솔로가수로 크게 성공하였다. 대형 소속사에서도 뜨지 못한 가수가 많은 것을 보면 다행인 일이다.
- 윤채경: 2012년에 조시윤, 유혜인, 전소민, 전재은과 함께 퓨리티로 데뷔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런칭된 그룹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한국에서의 무대를 단 한번도 가지질 못한채 카라 프로젝트를 위해 해체되었고, 퓨리티를 포기하고 출연한 카라 프로젝트 역시 프로그램 자체의 논란과 더불어 결국 허영지에게 밀려 5위로 탈락했다.[44] 이후 조시윤과 함께 프로듀스 101에 참가했지만, 왕따 논란의 피해자로 동정여론에 휩싸였고, 더불어 거의 10년을 함께해온 조시윤이 8회에서 탈락하고[45] 혼자 외로이 싸우게 되자 막판 스퍼트를 했지만, 결국 16위라는 성적으로 아이오아이 데뷔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결국 막판에 아쉽게 탈락한 연습생들이 모인 I.B.I로 무대에 다시 설 수 있었고, CIVA를 거치며 드디어 2016년 11월, APRIL[46] 에 합류하면서 정식 데뷔를 이루어냈다.
- 김소희: 2012년 상경한 후 슈퍼스타K2를 시작으로 무려 5번이나 슈퍼스타 K에 지원했지만 떨어졌고[47] , 이후 프로듀스 101에서도 15위의 성적으로 아쉽게 최종 멤버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위의 채경과 마찬가지로 I.B.I와 CIVA를 거쳐 네이처에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 프로듀스 101 시즌2
- 뉴이스트: 2012년 데뷔했으나 소속사 플레디스의 푸쉬를 후배 그룹들보다도 받지 못해서 결국 한 멤버를 제외하고 연습생 신분으로 돌아가 프로듀스 101 시즌2에 참여했다.[48] 그리하여 뉴이스트의 열악한 사정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다시 활동 중이다. 참가자 중 한 명인 황민현은 최고 인기 11인인 Wanna One 멤버로 활동하고 난 뒤에 예능에도 출연을 했다.
- 김종현: 파이널 전 5위에서 14위로 떨어지며 데뷔조에 못 들었지만, 방송 직후 여보세요의 역주행과 더불어 황민현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로 뉴이스트W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예능으로 치고 나가면서 황민현과 같이 그룹의 인지도를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후 소속사에서 나간 멤버가 단 한 명도 없던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인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에서 같은해 다른 그룹으로 데뷔했고 신인상까지 받았지만, 활동 종료 후 뉴이스트와 달리 연예계를 거의 3년 가까이 떠났던 윤조가 오디션 프로 사상 최고의 드라마를 집필하는 데에는 이 당시 김종현의 탈락으로 충격을 먹었던 러브의 미친 화력이 큰 역할을 했다.
- 정세운 - 비록 최종회에서 아쉽게 탈락했지만, 솔로 활동을 하면서 인지도를 증명하고 있다
- 뉴이스트: 2012년 데뷔했으나 소속사 플레디스의 푸쉬를 후배 그룹들보다도 받지 못해서 결국 한 멤버를 제외하고 연습생 신분으로 돌아가 프로듀스 101 시즌2에 참여했다.[48] 그리하여 뉴이스트의 열악한 사정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다시 활동 중이다. 참가자 중 한 명인 황민현은 최고 인기 11인인 Wanna One 멤버로 활동하고 난 뒤에 예능에도 출연을 했다.
- 프로듀스 48
- 프로듀스 X 101
- 프로듀스 101
- 차승원은 차노아를 사고쳐서 낳았다고 했으며 그 아들은 사고뭉치로 아버지의 속을 썩였다. 하지만 이 아들이 알고보니 차승원의 친아들이 아닌 부인과 다른 남자와의 아들로 의붓아들임이 알려지자 도리어 그의 주가는 더욱 올랐다. 그리고 그 차노아도 대마초 논란을 겪고 난 뒤에 개과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니 더욱 전화위복이 되었다.
- 미국계 한국인 로버트 할리[49] 는 2016년 3월 11일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비례대표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에서 집안 어른들이 옛날부터 공화당(보수성향 정당)에서 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경선에서 탈락했는데, 그 새누리당의 운명을 생각해보면... 물론 이 사람은 메스암페타민 투약 혐의로 2019년에 체포된 것도 모자라, 아내와 자식이 멀쩡히 있는데 외국인 남성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탄로나면서 화를 다시 입었다. 물론 평판이 매우 좋기에 후폭풍은 아주 덜했지만...
- 방탄소년단 그룹 자체
- 주이는 모모랜드로 처음 데뷔했을 때만 해도 못생겼다는 비아냥을 받아[51] 오빠가 분노할 정도였으며 그룹 내에서도 병풍이었다. 그러나 본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도리어 이를 자신만의 개성으로 살려내 단독 광고를 2개나 따내며[52] 그룹의 이름을 자신이 알리게 되었다. 원래 푸쉬 멤버이던 낸시와 더블 센터가 될 정도다.[53]
4.6.2. 외국
- 비틀즈는 밴드로 시작해서 데카 레코드에 지원을 했지만, 음악성을 문제로 떨어졌고, 그 이후 EMI 레코드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음악계를 뒤집었다. 실제로 영국-미국 음악계에선 데카 레코드에서 비틀즈를 떨어트린 건 역사적 오판 중 하나로 꼽는 다고 한다.
- 기무라 타쿠야가 쿠도 시즈카와의 속도위반 결혼을 발표한 이후 사실상 연예계 매장각이었으며 쿠도 또한 일본 내 비호감 여자 연예인 상위권 안에 꾸준히 들곤 했다(...). 허나 결혼 이후 타쿠야가 이전보다도 더 잘 나가며 이제는 쿠도 시즈카나 되니까 타쿠야를 감당한다는 소리가 더 많아졌다. 두 딸들을 모델로 데뷔시키기도 했다.
- 노기자카46의 하시모토 나나미는 대학 때문에 도쿄에 상경했으나 금전적인 문제가 심해서 머리카락도 한 헤어잡지에서 지원자에게 무료로 잘라준다고 할 때서야 겨우 자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연예인이 되기로 한 계기 또한 촬영장에서 나눠주는 도시락을 먹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팀의 인기 멤버라는 복신까지 되었다.
- 케야키자카46의 와타나베 리카는 아이돌에 지원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취업준비생이었다. 허나 취업이 잘 되지 않아 방황하던 중 여동생이 자신이 좋아하던 아이돌 노기자카46의 자매그룹 오디션을 본다는 소식에 함께 지원했고 지금은 그룹의 외모 담당인 인기 멤버.
- 테일러 스위프트는 어릴 적 음악 취향이 컨트리라는 이유로[55] 따돌림을 당했다. 가수의 꿈도 한 번 미뤄졌는데, 유명한 레코드사인 RCA 레코드의 제의를 받았으나 자기가 쓴 노래를 쓸 수 없다는 계약 내용을 보고 거절했다. 당연히 데뷔는 기약 없이 미뤄지고 홀로 카페 등에서 공연을 다니다가[56] 신생 레코드사 빅 머신 레코드와 계약했고 자신의 재능을 맘껏 뽐내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가수가 되었다. 이후 자신을 따돌리던 이들이 사는 동네에 일부러 찾아갔더니 그들이 자기 굿즈를 사 입고 사인 요청을 하고 있더란다.
- AKB48의 멤버였던 카와에이 리나는 악수회 날 동료 이리야마 안나와 함께 봉변을 당하고 만다. 트라우마로 더는 악수회에 나설 수 없게 된 릿쨩은 결국 이듬해 졸업을 발표했다. 그리고 졸업 후 그 어떤 졸업 멤버들보다 더 잘 나갔다. 하지만... 결국 2019년 5월 스캔들로 주저 앉았다.
- 알베르토 몬디는 본디 축구선수였다. 그러나 21세가 될 때까지 세리에 D에서만 뛰는 자신의 신세를 보고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과감히 그만뒀다. 그리고 대학 유학 시절 만난 한국 여학생을 따라 머나먼 한국 땅에 왔고 이후 그녀와 결혼해 가정까지 꾸렸으며 한국에서 자국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됐다.
- 카미키 류노스케와 유카나는 어릴 때 살아날 확률이 희박한 병을 앓았고 연기 시작 계기도 두 명 다 카미키 류노스케, 노가미 유카나란 아이가 살았단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살아남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잘 나가고 있다.
- 모델 엘라 우드워드는 약관의 나이에 희귀병을 앓게 되어 모델에서 은퇴해야 했다. 이후 대체 의학을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려 부단히 노력했고 결국 3년만에 완치하게 되었으며, 이 때 만들었던 요리들[57] 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그야말로 초대박이 났고, 이후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58]
-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어린 나이에 미키마우스 클럽에 나가 이름을 알리자 이를 시기한 친구들에게 대놓고 따돌림을 당했다. 이 경험과 친아버지로부터의 가정폭력의 경험을 바탕으로
를 내고 대히트시켜 그들에게 시원하게 복수했다.
- 제시 제이는 어릴 때 너무 별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으나 이후 가수로 성공하고 그 시절 급우들에게 일침을 날리는 노래
를 발매했다.
- 카밀라 카베요는 미국 이민 히스패닉 1.5세로 집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 장학금 타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으나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어 노래로 풀었다. 그렇게 쌓인 노래 실력으로 오디션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고 피프스 하모니를 거쳐 솔로로도 성공함으로서 집안도 일으키게 되었다.
- 퍼기는 원래 걸그룹으로 활동했으나 마약중독으로 그룹을 나와야 했다. 그러던 중 블랙 아이드 피스에 새 멤버로 영입되었고 초대박을 쳤다. 그리고 블랙 아이드 피스는 수많은 혼성그룹들의 롤모델로 등극했다.
- 베키 지는 9세 때 집안이 너무 어려워져서 6명의 식구가 할아버지 댁의 주차장에서 살 정도였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택한 게 연예인이었고, 마침 베키와의 재능과도 부합해 크게 성공하여 집안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현 히스패닉 아이돌 최고 주자가 되었다.
- 야마구치 마호는 NGT48의 초창기 멤버였지만 불의의 사건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구제받지 못한 채 자신의 친구들 몇 명과 함께 팀에서 쫓겨나듯 졸업했다. 그러나 이후 유명 소속사에 푸쉬도 확실한 켄온과 계약하게 되었다. 마호를 지지했던 하세가와 레나도 성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59]
- 나카이 리카는 하시모토 하루나에게 밀려서 AKB48 팀 8의 도야마현 대표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NGT48에 들어가 간판 멤버로 자리잡아 거꾸로 하루나가 리카를 롤모델 삼게 됐다. 리카는 야마구치 마호 자택 습격 사건 연루자가 아니기에 그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활동 중이다.
- 타구치 마나카, 토로부 유리 - 이들은 NGT48에서 떨어져서 다른 48그룹에 응모해 붙어 그쪽에서 활동했다. NGT48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를 보면 이들도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 카게야마 유우카와 키타가와 유리는 AKB48 드래프트에 지원했으나 탈락하고는 각각 히나타자카46[60] 과 노기자카46의 멤버가 됐다. 사카미치가 떠오르고 48그룹은 하락세인걸 감안하면 전화위복 맞다.
- 폴란드계 미국인 프로듀서 닥터 루크는 케샤에게 성범죄자라고 무고를 당해 진상이 밝혀졌음에도 한동안 일거리가 거의 끊긴 상태였다. 이에 자신이 이미 세웠던 레코드사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게 됐고 2020년 도자 캣을 스타덤에 띄우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4.7. 가상의 사례
- 침략! 오징어 소녀의 오징어 소녀는 타케루와 유우타가 초인종 장난을 하고 도망칠때 부딪혔다가 둘에게 초인종 장난 이야기를 듣고는 '나쁜 짓 아냐?' 라고 한마디 하자 그 즉시 유우타의 '침략자 주제에!' 라는 말 듣고 곰곰히 생각하다 실행을 한다. 그때 한 순간 갑자기 아이자와 치즈루가 이를 발견한다. 오징어 소녀는 초인종 장난이라는 사실이 들키면 혼나기 때문에 키요미의 이름을 듣고 오징어 소녀가 말돌리고 도망치려던 찰나 부활동을 끝내고 집에 온 사쿠라 키요미는 그녀에 의해 공원으로 끌려갔다. 오징어 소녀에게 사정을 청취하고 친구 연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키요미는 이를 거절하고 그 대신 신기하게 생긴 오징어 소녀에 대해서 알고 싶다며 정말로 친구가 되어달라고 하여 오징어 소녀와 친구가 된다. 오징어 소녀가 나쁜 짓을 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녀한테는 제대로 된 친구가 없었던 관계로 키요미와 절친이 된 것은 잘된 일이기는 하다. 물론 초인종 장난은 절대로 하지 말자.
- 벅스라이프의 일개미 플릭은 자신이 발명한 수확 기계가 지지대를 무너뜨려 애써 수확한 곡식을 날려버리고 곡식을 훔치러 온 메뚜기들과 대립하게 되면서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지고 메뚜기들과 싸울 전사들을 찾으러 도시로 향한다. 전사인 줄 알고 데려온 벌레들이 알고보니 그냥 극단이었다는 사실에 돌아오자마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뻔했지만, 메뚜기들의 공격에 곤충들을 결집하게 되면서 결국 하퍼를 무찌른다.
- 이나즈마 일레븐의 이나즈마 재팬 팀은 카게야마 레이지의 장난질로 주장을 포함한 주전 4명이 경기장에 오지 못해 디 엠파이어에 패배한다. 나중에는 승점 1점 차이로 오르페우스에 밀려 A조 2위로 준결승에 진출, B조를 전승으로 통과한 더 킹덤이 준결승 상대가 되지만 파워업한 이나즈마 재팬이 접전 끝에 더 킹덤에 승리하고 며칠 사이 또다시 엄청난 파워업을 해 결승에서 리틀 기간트까지 물리쳐 우승을 차지한다. 리틀 기간트는 B조 2위였기 때문에 만약 이나즈마 재팬이 디 엠파이어에 승리하고 A조 1위를 차지했다면 리틀 기간트가 준결승 상대가 되는데, 리틀 기간트의 진짜 실력으로 봐서는 이나즈마 재팬이 위에서 말한 엄청난 파워업 없이 리틀 기간트를 상대했다면 탈락했을 것이다.
- 죠죠의 기묘한 모험 스틸 볼 런의 우루무드 압둘은 스틸 볼 런 레이스 최초의 탈락자인데, 본인이 탈락한 후 스틸 볼 런 레이스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나옴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빨리 탈락한 덕분에 목숨을 건진 셈이 되었다. 게다가 그렇게 엄청난 사상자가 나온 원인이 스틸 볼 런 레이스 자체가 스탠드 배틀로 변질된 것이라서 스탠드 유저가 아닌 우루무드 압둘에게는 더더욱 전화위복이라고 볼 수 있다.
- 철권 시리즈의 리 차오랑은 원래는 미시마 가문에서 쫓겨나서 미시마에게 강한 원한을 가진 복수귀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나이를 먹고 성격이 둥글어진 건지 복수는 접고 바이올렛 시스템즈라는 인간공학 회사를 차려 사업가로써의 삶을 살고 있다. 작중에선 엑셀런트나 외치는 느끼한 개그캐가 돼서 그렇지 파괴와 멘붕과 패륜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고 있고 전세계의 공공의 적이 된 미시마 가문에 비하면 리는 금수저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다.[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