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서철권
1. 개요
고제는 처음 제후에 봉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단서' '철권' 을 하사하고 말하였다. "황하가 다 걷어 올려지고, 태산이 다 갈아 없어지게 될지라도, 한왕실의 종묘가 이어지는 한, 너희는 대대로 끊김이 없으리라!"
高帝初,封侯者皆賜丹書鐵券. 曰:"使黃河如帶,太山如礪,漢有宗廟, 爾無絕世."
태평어람 633 中
丹書鐵券.한나라가 처음 일어났을때, 공신들 중에 분봉 받은 자가 백여명이었다. 태초(太初)[1]
연간에 이르기까지의 1백 년 동안, 작위를 보전한 자는 겨우 다섯 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법을 어겨 목숨을 잃거나 나라를 망쳐버리고 말았다.漢興, 功臣受封者百有餘人. 至太初百年之閒, 見侯五. 餘皆坐法隕命亡國, 秏矣.
사기 고조공신후자연표 中
왕이나 황제가 내리는 일종의 국가유공자 자격증이라 할 수 있다. 옥새를 찍어 반으로 갈라 하나는 종묘에 보관해두고 하나는 상대방에게 주었다. 훗날 죄를 지었을 때 형벌을 감면해주는 까방권 역할도 했다. 공신에게 하사하는 아이템이란 점에서 구석#s-2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금서철계(金書鐵契), 금서철권(金書鐵券), 단서철권(丹書鐵券), 단서철계(丹書鐵契) 또는 간단히 철권(鐵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참고로 철권(鐵券)이란 철로 만든 기와장을 말한다.
단서철권은 적어도 전한 한고조 유방의 건국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시기에는 철로 만든 기와장에 단사라고도 부르는 주사로 글을 써서 완성했기 때문에 단서철권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주사로 쓴 글은 생각보다 잘 날아갔다. 더 정확하게는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철은 산화철이 되면서 붉은 색으로 변하고, 주사도 황화수은이 불안정해서 검붉은 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어두운 붉은 색 바탕에 어두운 붉은 색 글씨가 되어서 글을 알아볼 수가 없게 변했다. 그래서 남북조시기의 국가인 양나라에서는 은을 주입해서 은권(銀卷)이 되었고, 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수나라 때부터는 금으로 글을 새겨넣으면서 금권(金券) 또는 금서(金書)라고 불렸다. 금서철권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때문이다.
2. 역사
2.1. 중국사
원래 한고조 유방이 개국공신들에게 수여할 때까지만 해도 공신녹권에 가까웠다. 죄를 면제해준다거나 하는 의미는 없었고, 관직이나 봉토를 준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남북조시대가 되면서 북위의 효문제가 면죄부의 의미로 발급한 것을 비롯해서 면죄부로 흔히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게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 정도 되면 완전히 제도화되기 시작했다.[2] 대충 '이 사람의 조상은 이런이런 공적이 있으니 잘못을 저질러도 목은 치지 말 것'이라는 뜻이다. 비슷한 아이템으로 면사패(免死牌)가 있다.[3]
대표적인 예로는 수호전의 시진이 있다. 시진의 가문이 후주의 황족이었고, 송태조가 후주에 쿠데타를 일으킨 후 북송을 건국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서 시씨 가문의 대를 잇게 해주고 후대에도 반역죄같이 큰 죄가 아닌 이상 웬만큼 사면해달라는 의미에서 단서철권을 내려 그들을 보호해주었다. 수호전에서 각종 호걸들이 시진의 집에 모여드는 이유가 시진의 집이 단서철권으로 보호받는 일종의 치외법권이기 때문이다.[4] 드라마 포청천에서도 시씨 가문의 죄인이 이것을 들고 나타나면 상방보검으로 현 황제의 숙부와 사촌마저 가차없이 박살내는 포청천조차 쩔쩔매며 사실상 처벌할 방도는 없다. 태조 조광윤의 명이기 때문.
다만 조광윤도 시씨 가문의 후손들이 깽판을 칠 가능성을 감안해서 후주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 시종훈 본인과 그 후손 중에 '''가문의 수장'''에게만 적용하도록 하였다.[5]
주원장도 명 건국 후 공신들에게 단서철권을 내렸다. 하지만 단서철권을 하사한 창업주라서 눈치볼 사람이 없는 주원장은 공신들을 숙청하기로 마음먹고선 단서철권의 면사패 기능 따윈 뭉개버렸다(…).
2.2. 한국사
고구려 전기의 무장인 밀(密)은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창을 들고 혼자서 연나라 군대에 맞서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왕에 봉해졌다. 밀은 왕으로 책봉되는 것은 사양하였으나 대신 고씨 성과 금서, 철권을 받아 대대로 제후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삼국유사'''에도 등장한다. 백제가 660년 멸망하고 옛 백제 영토 일부는 당나라가, 일부는 신라가 점유하는 구도가 되었다.[6] 5년 뒤, 당나라의 사실상의 강요로, 옛 백제의 중심지였던 웅진성에서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주관하고, 옛 백제 태자였고 지금은 당나라의 관리가 된 부여융이 신라 문무왕과 만나서 신라와 백제 사이의 원한을 잊자고 하면서 맹세를 시킨 '취리산 회맹' 사건 당시 이 맹세문을 기록한 금서철계(=단서철권)를 만든 것이다. 즉 이미 멸망한 백제와 아직 멀쩡한 신라를 동격으로 놓아서 더이상 신라가 당나라가 지배하는 백제 영역으로 침투하지 말 것과, 여차하면 신라도 백제처럼 될 수 있다고 협박하는 메시지였다. 등장인물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웅진도독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고, 몇 년 뒤 나당전쟁이 터지자마자 신라가 옛 백제 지역의 웅진도독부를 대대적으로 공격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이후 이 단서철권은 휴짓장보다 가치가 없어졌다.[7]
기록이 다소 부족한 고려시대에는 언급을 찾기 어렵지만, 조선시대에는 종종 수여되었다. 조선의 선조도 임란 후 1605년 25의사와 5열녀의 가문에 단서철권을 내려 그 공적을 치하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오고, 가끔 명가의 족보를 찾아보면 ~~년 왕이 우리 가문에 단서철권을 내리셨다하고 자랑하는 일도 가끔 있다. 다만 조선의 단서철권은 모든 죄를 면죄한다는 의미의 면죄부라기보다는 원래 한나라 시기처럼 공신녹권에 가깝고, 그 형태 역시 중국에서처럼 철판에 금입한 물건은 아니라 두루마리 문서 형태이다.
3. 미디어
판관 포청천 뇌정노 편은 내용 자체가 이 아이템의 위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청천 시리즈 사상 어그로 랭킹 1, 2위를 다투는 연쇄변태살인마 시문의[8] 가 단서철권을 수여받은 시씨 왕가의 적장자라 개봉 부윤인 포청천 조차도 어떻게 손을 쓸수가 없는 것. 그 와중에 시문의의 막장행각은 계속되고, 결국 강간과 살인을 엄청나게 저지르고 나서야 체포된다.[9] 그러나 처형은 못하고 감옥에 가두는 게 고작인데, 시문의는 뻔뻔스럽게도 포증에게 법전을 뒤져보라면서 시씨는 구속되더라도 3품 관리 이상의 대우를 해야 한다며 명주솜과 비단이불, 산해진미는 준비되었느냐고 요구한다. 살펴보니 실제로 그러한 법이 있었고, 포증은 법을 철저히 지켜야 하므로 시문의는 옥중에서도 호의호식을 한다(...).
결국 포청천은 삭탈관직당하고 원지로 유배를 가는 한이 있더라도 시문의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는데, 시문의가 이를 알고 '''가문의 주인에게 주어지는 단서철권의 무적 특권'''을 누리기 위해 '''자기 아버지에게 자결을 강요하여 왕위를 물려받는다.''' 시정은 시씨 조상들의 신위 앞에서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통곡하면서 그래도 대는 이어가야 한다며 자결을 한다.
상기한 것처럼 가문의 주인(진교 소상왕)만큼은 절대적으로 건드리는 것이 불가했으므로, 빡친 포청천은 막판에 황명을 거역한 죄로 끔찍하게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미친 척하고 시씨 놈을 용작두[10] 로 썰어버리려고 하지만, 때마침 방태사가 시씨 가문의 단서철권을 들고 난입해 처형을 중단시킨다. 방태사는 '''"천자의 위를 물려준 은혜를 갚고자 태조께서 주나라 천자의 종가에게 하사하신 단서철권이다. 헌데 당신이 그 대를 끊어버리면 태조께서 천자가 되신 위대한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 제위를 물려받으신 황제폐하까지 포함하여 대송천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니, 포청천 본인은 물론 부하들까지 구족을 멸할 만고의 역적이 되는 것이다." 하는 논리로 협박하고,''' 결국 포청천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된다.[11] 이 광경을 보고 빡친 의협 전조는 즉석에서 칼을 뽑아 시씨놈을 베어버리려고 했으나,[12] 역시 단서철권을 씹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본인의 구족과 개봉부 관리들까지 다 죽을게 뻔하니 차마 베지 못하고 시씨놈은 그냥 방면된다. 시문의는 나가면서도 본인은 부와 혈통을 타고났으니 아무도 못 건드린다며 사람들 속을 잔뜩 긁어놓고 간다. 사용하지 못한 용작두만이 남은 텅 빈 재판장에서 포증은 혼자 무릎을 꿇고 "하늘이시여, 죽이면 불충이요 죽이지 않으면 불의인데 뭘 어쩌란 말입니까? 이게 하늘의 뜻이라면 나는 벼슬이고 뭐고 다 때려칠랍니다." 라고 기도하며 관을 벗는다.
그렇게 방면되어 웃으며 귀가...하면 포청천 스토리가 아닌 법. 뇌정노(雷霆怒), 즉 번개의 분노라는 에피소드 제목의 뜻 그대로 시씨 놈은 방면되자마자 벼락에 맞아 입에서 피를 토하며 비참하게 죽었다. 벼락이 자기 주변에 떨어지자 시문의는 허겁지겁 도망쳐보지만 정말 하늘이 노한듯이 그를 정확히 조준한 듯이 벼락이 떨어졌고 결국 정통으로 맞아 죽는다. 이런 어이없는 결말에 방태사가 분노하여 그 책임을 벼락 맞기 직전에 시문의를 죽이려 달려든 양가보에게 돌리면서 처형하라고 버럭거리는데... 문제는 양가보에게 단서철권이 인계된 상태라는 것. 시씨 가문에 적통 후계자가 없어진 상황이라 법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사위가 가문을 잇게 되는데, 그 사위가 양가보인지라 단서철권을 자동적으로 승계하여 억지로 살인죄를 적용시킨다 해도 벌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단서철권을 가진 이를 처벌하면 대역죄라고 방금 전에 방태사가 포청천 앞에서 자기 입으로 설명했으니, 결국 자기 논리에 걸린 방태사는 화가 잔뜩 난 채 퇴청한다. 그 모습을 본 포청천은 "하늘의 뜻이로다."[13] 하는 말을 되뇌이며 공손선생이 다시 가져다 준 관을 머리에 쓰고 이야기가 끝난다.
[1] 한무제의 연호로 기원전 104년~기원전 101년 까지 사용했다.[2] 당시의 시대상과 기타 등등을 고려하면 강력한 귀족 및 호족 세력의 권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원장을 포함한 명나라나 청나라 시기 정도 되면 말 그대로 죽지만 않은 정도였다면, 호족들 권위가 강한 시기에는 무한 우대권 취급을 받았다.[3] 단서철권과의 차이는 단 한 번만 효력이 발휘된다는 점. 이는 드라마 포청천(1993년판) 음양판 편에 잘 나온다.[4] 그러나 이를 무시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고렴이었다. 이 때문에 시진은 창주 감옥에 갇혔다가 양산박 호걸들에게 구출당한 뒤 양산박으로 향해야 했다.[5] 아래에 묘사하겠지만 드라마 포청천에서 시문의가 자기 아버지에게 자결을 종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당연히 아버지가 가문의 수장이므로, 그에게는 단서철권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일반 사대부들처럼 처결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패륜 아들도 아들이라고 결국 살리기 위해 진짜로 자결해 버렸고, 포청천은 그걸 무시하고 법대로 처결하려 했으나 황제의 명으로 풀어줘야 했다. 이런 식으로 시씨 가문은 대단한 특혜를 받았고, 그에 대한 보답인지 시씨 가문은 남송이 멸망하는 애산 전투 때까지 송 황실과 운명을 함께 했다. [6] 이후 670년에 발발한 나당전쟁으로 당나라 세력을 모두 축출하게 된다.[7] 문무왕은 부여융에게 자기 누이를 죽였다며 얼굴에 침을 뱉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좋아서 단서철권 따윌 만들었겠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8] 국내 더빙판에서는 '채문의'라고 나왔는데 이는 柴자가 '채'로도 발음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 무지한 번역자의 오류로 보인다.[9] 그 체포도 단서철권 때문에 못할 것을 겨우 한 것이다. 처음엔 전조가 현 황제(인종)의 권위를 상징하는 상방보검을 들고 갔음에도, 단서철권과 함께 수여된 시씨 왕가의 가보인 태조의 용포를 시씨놈이 입고 뻗대는 바람에 황제가 직접 온다 해도 손을 댈 수가 없어서(태조의 용포는 태조의 옥체와 같으므로) 빈 손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황제 본인 조차도 '시씨는 죽일 수 없다'란 말만 계속 하고 있고...[10] 시씨는 전조의 황족이자 조씨 황족 다음가는 대귀족이므로 용작두에 해당되는 듯하다.[11] 역사적인 사족을 덧붙이자면, 5대 10국의 혼란기 동안 이전 왕조의 황제가 신왕조의 황제에게 제위를 넘기는 '선양'의 전통은 완전하게 사라져버렸다. 그랬던 것을 조광윤이 다시 살려내어 후주 시씨로부터 선양을 받아 공식적으로 제위를 물려받고 송 왕조의 정통성을 구축했는데, 만약 포청천이 조광윤으로부터 안전을 약속받은 시씨를 해치면 송 왕조는 5호 16국 시대와 5대 10국 시대의 선양받지 않고 정권을 잡거나 전 왕조의 왕족과 핵심 인사들을 학살한 '무도한' 정권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되며 방태사의 말대로 송 왕조 성립의 정통성까지도 부정당할 수 있다. 즉, <무도하게 찬탈한 것이 아니라 천명#s-1.3.1에 따라 제위를 선양받은 것이다>라는 것이 송 태조 조광윤의 명분이었고, 그 증거로 <반역자면 뒤가 캥겨서라도 전 왕조를 도륙낼 거 아니냐? 하지만 송은 정당하게 세워졌으니 아무것도 무섭지 않고, 따라서 전 왕조를 나라 제일의 귀족으로 예우하며 그 안전을 보장한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후대에 시씨(그것도 가주)를 처형하는 일이 생기게 되면 "당장은 사람들의 눈이 무서우니 후대해주는 척 해 두고, 시간이 좀 흘러 사람들 관심이 떠나가면 적당히 트집잡아서 숙청하는 거구나! 원래 찬탈왕조는 다 그렇게 하는거지!" 라고 공격받을 명분이 생겨버리는 것. 물론 작품 내적으로 시문의는 실제로 죽을 죄를 지은 것이 맞고, 역사적으로 봐도 왕조 성립 직후도 아니고 건국 이후 60년 이상 흘러 체제는 완전히 안정되고 국력은 절정기의 한복판을 달리고 있었던 인종 치세에 와서 굳이 더이상 위협적이지도 않은 전 왕조의 후예를 숙청한다는 건 뭔가 좀 이상하지만, 어쨌건 실제 역사의 찬탈 왕조들에서 일단 전 왕조를 후대하는 척 하다가 그 지지세력이 와해되거나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졌을 때 슥삭 제거해버리는 일은 종종 일어났던 것이 사실이고 <자신은 그런 찬탈자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는 것이 송태조와 그 후대 황제들의 명분이었으나 송나라의 신하인 포증이 시씨(그것도 가주)를 죽인다면 송의 정당성 명분 자체에 타격이 간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닌 셈.[12]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젊고 혈기왕성한 전조가 다소 성급하게 움직이다 낭패를 당하거나 당할 뻔 한 적은 있지만, 법이고 나발이고 관아에서 칼 뽑아 범인을 베어 버리려고 한 건 이 에피소드가 유일하다. 혈기왕성할지언정 포청천의 충복 답게 준법정신 투철하던 전조마저 분을 못 이길 상황이었던 것.[13] 작중 인물들이 시문의를 보고 천벌을 받을 거라고 비난하거나 수군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최후를 암시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