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키녹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Neil Kinnock (1942~)
노동당 소속의 영국 정치인이다. 마가렛 대처 정부 시절 쇠퇴해 가던 노동당을 9년간 맡은 정치인이다.

2. 생애


웨일스의 Tredegar라는 조그마한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들의 각각 전직 석탄 광부와 지역의 간호사였다. 키녹은 카디프 대학교에 진학해 그곳에서 산업과 역사에 관한 학위를 획득했다. 이듬해 교육 대학원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1967년 배우자를 만나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1970년 베드 웰티 지역구에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한다. 1978년 키녹은 웨일스의 자치의회를 만들자는 법을 발의,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었지만 정작 웨일스에서 약 80% 가량의 반대표가 나오며 무산된다.[1]
1979년 당시 야당이었던 마이클 풋 노동당 대표에 의해 그림자 내각의 교육기술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1983년 총선에서 베드 웰티 지역구가 통폐합됨에 따라, 신설된 이슬윈 지역구에 출마해 5선에 성공한다. 허나, 노동당마가렛 대처보수당에게 참패를 거둔 선거였다.[2][3]
총선 이후 마이클 풋 대표가 사퇴함에 따라, 닐 키녹 의원은 1983년 노동당 대표 경선에 출마해 당선된다.
대표직 취임 후 키녹은 왼쪽으로 치우쳐져 있던 당을 중도주의로 옮기고자 하였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주창한 제3의 길의 시작은 닐 키녹 대표였던 셈이다.
1987년 총선에서 노동당자유민주당-사회민주당[4] 연합에 의해 제2야당으로 추락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와 노동당의 목표는 '제1야당 굳히기'였으나 대처 내각의 장기화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도와 창의적인 정당 선거 방송으로 인해 이전 총선보다 20석을 더 차지해 229석을 확보하며 기사회생에 성공한다.
1988년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경쟁자였던 토니 벤 후보에게 승리함으로써 키녹은 대표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고, 당 내에서도 절대적인 입지를 지니게 되었다. 때마침 마가렛 대처 총리가 인두세 도입과 유럽 통합 논란으로 서서히 지지를 잃고 있었으며, 1990년 사퇴하게 된다. 그리고 존 메이저 총리의 보수당이 내분으로 인해 반사이익을 보며 보수당에게 경합우세인 여론조사를 1989년부터 3년동안 유지하며 13년이라는 길고 길었던 야당 생활을 끝맺을것 처럼 보였다.[5]
하지만 이길줄만 알았던 1992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만다. 이유는 노동당의 계속된 정책 변경과 보수당의 대처 색채 줄이기로 인한 보수층들의 단결이었다.
정작 다 잡은 쉬운 선거에서 패배한 키녹 대표는 총선 후 사퇴했으며, 그 자리는 존 스미스 의원이 이어받게 된다.
이후 유럽연합에서 활동하며, 영국 정치계와는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후 브렉시트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3. 기타


  • 그의 아들 스티븐 키녹은 1970년생으로 닐과 마찬가지로 웨일스 출신이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브뤼셀 유럽대학교를 졸업한 뒤 EU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996년 덴마크 사회민주당 정치인인 헬레 토르닝슈미트와 결혼했고 배우자인 헬레는 2011년부터 4년간 덴마크 국무총리로 일했다. 스티븐은 2015년부터 런던 제56회 영국 총선에 도전해 , 2019년 기준 하원 3선 의원이다.
[1] 이는 토니 블레어 총리 시절인 1998년, 웨일스 정부법을 제정하며 자치의회를 만들게 하고 대부분의 분야에서 입법 가능을 가능하게 해 준다.[2] 단 209석만을 얻으며 몰락했다.[3] 훗날 이 기록은 제58회 영국 총선에서 제러미 코빈 대표가 이어받는다.[4] 이후 자유민주당에 병합된다.[5] 물론 중간에 존 메이저 총리의 취임, 허니문 효과로 잠깐 우세를 내주었다가 반년만에 다시 경합우세를 유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