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레어

 


'''토니 블레어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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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제73대 총리
The Right Honourable[1]
Tony Blair'''
<colbgcolor=#010131> '''본명'''
<colbgcolor=#ffffff>Anthony Charles Lynton Blair
앤서니 찰스 린튼 블레어[2]
'''국적'''
[image] 영국
'''출생'''
1953년 5월 6일 (70세)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신장'''
183cm
'''학력'''
페티스 컬리지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존스칼리지[3]
Inns of Court School of Law[4]
'''직업'''
정치인
'''정당'''

'''재임 기간'''
제73대 영국 총리
1997년 5월 2일 ~ 2007년 6월 27일
'''종교'''
가톨릭[5]
'''배우자'''
셰리 블레어[6] (1980 ~ ), 3남1녀
'''지역구'''
세지필드[7]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49, 50, 51, 52, 53, 54
'''서명'''
[image]
'''SNS'''

1. 개요
2. 생애
2.1. 정치 입문 전
2.2. 정치 입문
2.2.1. 총리 취임
2.2.2. 총리 퇴임
2.2.3. 총리 퇴임 이후
3. 선거 이력
4. 기타

[clearfix]

1. 개요


영국의 제73대 총리.
20세기 영국 총리 중 가장 최연소로 총리가 된 인물[8]이자, 현대 영국 정치사에 '제3의 길'을 처음으로 내세운 정치인이다. 1997년부터 2005년까지 3차례의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역대 노동당 최장수 내각, 전후 유이하게 영국 총리를 10년 넘게 역임한 정치인이다.[9]

2. 생애



2.1. 정치 입문 전


1953년 5월 6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엘리자베스 2세 시기의 역대 영국 총리 중,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기간 때 태어난 최초의 총리이다.(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월에 즉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성장기의 대부분을 스코틀랜드에서 지냈지만, 스코틀랜드인은 아니다. 집안은 원래 잉글랜드 북부 출신이고 정치적 입지를 다진 곳도 잉글랜드.[10] 그래서 그런지 스코틀랜드 출신인 고든 브라운 전 총리와 달리 스코틀랜드 억양이 드러나지 않는다.
아버지 리오 블레어는 법률가로 보수당을 지지했다.[11] 아버지가 호주 애들레이드 대학교 로스쿨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3년 반 동안 호주에서 지내기도 했고, 이후에는 잉글랜드 북부(더럼)에서 살기도 했다. 10세 때 아버지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페티스 칼리지(Fettes College)[12]을 다녔다. 엄격한 교칙과 선배 학생들에 의한 부조리에 반발하여 무단으로 교정을 이탈하기도 했으며, 록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71년에 페티스 칼리지를 졸업한 후 프랑스로 건너가 1년 정도 알바를 하며 지냈고 그 덕에 프랑스어가 유창하다. 돌아와서는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다녔다. 전공은 법학.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고.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고 록밴드 보컬을 하기도 했다. 밴드이름은 어글리 루머스. 대학 졸업 후에 영국 노동당에 입당했고, 법률 사무소에서 만난 동료 셰리와 1980년에 결혼했다.

2.2. 정치 입문


1982년 보수당 의원 로널드 벨이 사망함으로써 보궐선거로 치뤄지게 된 지역구 비컨즈필드에 출마하나 보수당의 텃밭인 지역구였고, 당시 마가렛 대처 내각에 밀리고 있던 노동당이라 자유민주당 후보에게도 패하며 3위로 낙선한다. 하지만 그는 이 선거에 출마함으로써 당 내 의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1년 뒤 열리는 총선에서 노동당의 텃밭이라 불리는 북동부 잉글랜드에서 9년만에 복설된 지역구 세지필드에서 당선되며 공직에 처음 입문한다.
하원 재선의원 시절 노동당의 그림자내각(shadow cabinet)[13]에서 노동부, 에너지부, 내무부 장관 등을 맡았고, 노동당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1994년 노동당 대표 존 스미스가 급사하면서 차기 노동당 대표를 뽑게 되었는데, 이때 당시 노동당의 차세대 지도자 후보로 각광받던 동료이자 라이벌 고든 브라운과 같이 식당에서 노동당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결국 2명이 합의하여 블레어를 먼저 밀어주고 그 다음에 브라운을 밀어주기로 약속한다. 이에 힘입어 블레어는 손쉽게 제1야당 노동당의 대표가 되었다.[14] 즉 노동당이 집권하면 총리가 되는 것.

2.2.1. 총리 취임


블레어가 노동당 대표에 취임할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보수당존 메이저 총리는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관련한 보수당 내의 반발, 지방선거에서의 대패 등으로 곤경에 처했으며, 블레어와 노동당에게는 정권 탈환의 기대를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하여 당 대표에 취임한 지 3년만인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43.2%의 득표율로 659석 가운데 418석을 획득하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면서, 총리에 취임했다. 이때 노동당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양당 통틀어 사상 최다 의석'''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보수당은 1832년(!) 이후 최저 득표율(30.7%)이라는 충공깽스런 결과를 받아들어야 했다. 이로서 보수당의 존 메이저 총리가 퇴임하고 노동당은 제임스 캘러헌이 1979년 내각불신임 결의로 물러난 지 무려 18년 만에 재집권하게 됐다.
[image]
1997년 총선 승리 직후, 아내 셰리와 함께 다우닝가 10번지의 총리 관저에 도착한 모습.
취임하자마자 영국 의회에서 총리에게 하원 의원들이 질문하는 시간을[15] 기존의 화요일, 목요일 15분으로 진행되던 관례를 깨고 수요일 30분으로 고쳤다. 또한, 언론인들로부터 1달에 1번씩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임기 2기와 같은 시기에 집권했고, 클린턴의 선거 전략을 모방하여 1997년 총선에 승리하는 등 초기에는 중도 좌파의 이미지가 강했다. 수개월 후 프랑스에서도 조기 총선에서 우파 여당(공화국연합)이 참패하여 리오넬 조스팽 내각이 설립되었고, 이듬해에는 독일 독일 사회민주당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집권하면서 유럽에 불어닥친 '제3의 길' 노선의 선두주자로 조명되었다.[16]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97년 8월 31일에 다이애나 스펜서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들의 추격을 피하려다가 교통사고로 서거했는데, 영국 왕실을 압박하여 다이애나 스펜서를 추모하게 했다. 이 과정은 영화 더 퀸에 잘 나온다.[17]
''''신노동당'(New Labour)'''라는 브랜딩을 통해 고든 브라운과 함께 영국 노동당의 우클릭을 주도했다. 90년대 보수당 정권 시절부터 이어진 노후화된 제조업 탈피 및 금융, 문화 산업 중심으로의 체제 개편을 계승하고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대거 받아들였다. 또한 블레어리즘으로 대변되는 현대 영국의 생산적 복지 체계를 확립했다. 그 효과로 영국은 블레어 시기 평균 3% 중후반의 경제성장률을 꾸준하게 유지하였으며, 제3의 길로 대표되는 현대적인 선진국 이미지로 세계에 다시 자신을 어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2001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40.7%의 득표율로 단 5석만을 잃은 413석을 획득하며 압승, 블레어 총리는 재선에 성공한다. 이 무렵 블레어의 인기는 정말 대단한 것이어서, 당시 블레어 총리에 대한 영국인들의 사랑은 "그가 물 위를 걷는다면 걸을 수도 있을 것이라 믿을 정도"라는 언론인의 회고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우클릭 정책 때문인지, 노동당의 전통적인 지지층들을 중심으로 안티들이 블레어에 대한 경멸적인 별칭들을 여럿 만들어냈다. 블레어가 우파인지 좌파인지 애매하고 흐릿하다는 '''토니 블러'''(Tony Blur), 사실상 보수당원이라고 공격하는 '''토리 블레어'''(Tory Blair),[18] 아예 둘을 합친 '''토리 블러'''(Tory Blur)(…)도 있었다. 노동당도 Red Tories(색깔만 노동당 상징인 빨간색으로 칠한 보수당이라는 뜻)라고 공격당하기 일쑤였다.[19][20] 쉽게 말해서 "당신 정책이 보수당이랑 다를 것이 뭐냐?"는 지적.
여기에 테러와의 전쟁미군 다음으로 많은 규모의 숫자의 영국군을 파병하게 되며 비판 여론에 쐐기를 박는다. 이는 당시 보수당에서도 반대하던 정책이었고, 언급한 여당 노동당 내 좌파 세력들에게도 비난받으며[21] 인기를 점차 잃게 된다. 이때 '조지 W. 부시푸들(Bush's Poodle)'이란 좋지 않은 별명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좌파 진영으로부터 부시와 함께 전범이라고 공격당하게 되었고 후에 2010년대 중반 노동당 대표가 되는 '정통 좌파' 제레미 코빈이 대놓고 "전범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소리를 하게 되었다. 블레어와 코빈 사이에는 같은 당 소속이라는 의식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간극이 넓은 것이다.
결국 2005년 총선에서 35.2%의 득표율로 58석을 잃고 355석으로 추락하여 노동당 내 여러 의원들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기 시작한다.[22]
이 시기 영국인들 중엔 자존심의 상처를 겪은 이도 많았고, '러브 액츄얼리'에서 휴 그랜트가 하는 대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블레어 본인은 "나는 휴 그랜트가 아니며, 정치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미 공화당 소속이었던 아놀드 슈워제네거와도 친했던 걸 보면 정말 노동당 출신이 맞는지 신기할 정도.
사실 이미 1999년코소보 내전 당시에 미국보다 더 적극적으로 강경한 군사 개입을 주장한 바 있었다. 당시 미국은 빌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로 탄핵 위기까지 몰려서 무기력한 상태였는데, 블레어가 미국을 직접 방문하여 코소보에 대한 '인도적 개입'을 촉구했던 것. 이를 보면, 부시 행정부 시절의 대테러 전쟁 개입도 단순한 '변절', '줄서기'보다는 그의 정치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국제문제에 대해서 적극적 군사개입을 주장한 것과 별개로, 토니 블레어는 1998년 4월 10일 현대 영국/역사에 가장 중요한 결정인 벨파스트 협정을 아일랜드와 체결하는 것을 주도한다. 북아일랜드 문제의 핵심이었던 이 벨파스트 협정(성 금요일 협정)을 통해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폭발한 IRA#s-2의 무력투쟁 및 테러위협에서 무려 26년만에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2.2.2. 총리 퇴임



퇴임 선언 후 마지막 총리 질의 응답 시간을 가진 토니 블레어
2006년 9월 총리직 사임 의사를 밝히고, 2007년 6월 27일에 10년간의 총리 생활을 마치고 퇴임했다.[23] 총리 기간 중에는 명목상 성공회 신자였지만, 가족이 모두 가톨릭 신자라 퇴임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총리가 되기 전부터 가톨릭 미사에 참례하는 등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던 걸로 추정되지만[24], 영국 총리가 영국 성공회 주교임명 추천권이라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가톨릭 신자가 총리직에 있으면 종교적, 정치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 등 여러가지 제반 사정때문에 개종은 퇴임 후에 했다.영문기사 가톨릭 개종 일치예식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치렀다.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은 총리로 유명했다. 이슬람교 경전인 꾸란도 3번 읽어봤다고. 나름 종교적인 신심이 있는 인물이라서 그런지 종교의 유용성에 관하여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TV 토론을 벌인적도 있다.

2.2.3. 총리 퇴임 이후


2010년에는 야인 자격으로 국회에 출석해 "테러와의 전쟁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2015년 10월 25일, 2003년 당시 영국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점과 또 전쟁의 여파로 ISIL의 세력확장 원인을 제공한 한 점에 대해 "나와 당시 영국 행정부의 오판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다"라고 CNN과의 인터뷰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연합뉴스,BBC(비디오클립포함).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된 사과가 아니었다. '영국의 이라크 전쟁 참전은 2002-2003년 당시 미국 행정부가 주장했던 이라크 WMD보유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기인되었으며, 전쟁의 결과로 이라크중동에서 일어난 오늘날의 후폭풍은 2003년 당시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다. 또한 따지고 보면 해당지역의 오늘날 딜레마는 2011년 아랍의 봄으로부터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고, 더욱이 예로부터 시리아 및 이라크 북부에 존재해왔던 정치, 종교, 역사적 문제들과도 연결된 문제다' 로 일축 및 일관하는 떠넘기기식 뉘앙스를 보였다. 그래서 영국 내 이라크 전쟁 전사자 유가족들은 "이리 무책임할 수 없다!!"며 폭풍같이 분노하는 중이다.
2016년 영국의 이라크 전쟁 참전에 대해 조사한 칠콧 보고서가 "영국의 전쟁 참전은 토니 블레어 총리의 오판에 의한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결론을 내리자, 토니 블레어는 "나는 잘못한 것이 없으며,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오히려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은 데다, 분노한 전사자 유족들이 "토니 블레어를 전쟁 범죄자로 고소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하겠다!!"고 들고 일어났다.
2016년 9월 이라크 전쟁에서 영국군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블레어 본인이 직접 일으킨 전쟁인 만큼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블레어는 영국군을 두둔하고 있으며 "나라를 위해 희생한 군인과 그 가족들에게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며 혐의를 조사하고 있는 위원회를 비판했다. 위원회 측은 "영국 내에서 자체 조사를 면밀히 하지 않을 시, 국제 재판소에 기소될 수 있다"며, 어느 측도 억울하지 않게 풀어가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여론 반응은 "만약 군인들이 전쟁 범죄를 저질렀으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불법 전쟁을 일으킨 토니 블레어도 법의 심판대에 올라야 한다"는 반응이다.
2019년 3월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만나 영국의 EU 잔류 방안을 조언하는 것으로 알려져 영국 내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11월에는 보수당, 노동당을 비판하였다.#
제58회 영국 총선 이후 인터뷰에서 코빈 시절 노동당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과 함께 "제레미 코빈브렉시트에 대한 불분명한 태도가 참패의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보리스 존슨 총리의 노림수에 따라 보수당과 조기 총선을 합의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고 지적했다.#
2020년 5월 신임 노동당 대표로 선출된 키어 스타머를 향해 좋은 평가를 내렸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2
보궐선거
비컨즈필드

3,886 (10.42%)
낙선 (3위)
[25]
1983
제49회 영국 총선
세지필드
'''21,401 (47.56%)'''
'''당선 (1위)'''
'''초선'''
1987
제50회 영국 총선
'''25,965 (56.02%)'''
'''당선 (1위)'''
'''재선'''
1992
제51회 영국 총선
'''28,453 (60.50%)'''
'''당선 (1위)'''
'''3선'''
1997
제52회 영국 총선
'''33,526 (71.16%)'''
'''당선 (1위)'''
'''4선'''
2001
제53회 영국 총선
'''26,110 (64.86%)'''
'''당선 (1위)'''
'''5선'''
2005
제54회 영국 총선
'''24,421 (58.88%)'''
'''당선 (1위)'''
'''6선'''[26]

4. 기타


  • 1984년생인 아들인 유안 블레어(현재 40세)가 꽤나 꽃미남으로 유명해서, 2000년대 초반 한참 국내에 꽃미남 열풍이 불 때 회자되기도 했다. 하지만 16살 때 음주운전으로 입건된 적 있고, 2006년에는 미국 공화당 의원 사무실의 인턴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같은 센터의 한국인 여대생과 인턴 모임을 가졌다가 연애로 오인받아 기사화되는 등, 한때 꽤나 트러블 메이커였다. 2015년 총선 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아버지의 정치 세습을 준비 중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그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 현재 유안은 블레어 가족이 50%의 지분을 보유한 부동산 회사 ‘올드베리 주택’의 이사로 일하고 있다. 이 회사는 맨체스터와 스톡포트에서 아파트 27채의 임대 사업을 벌이고 있다.
  • 비교적 근래에 활동했던 정치 지도자임에도 영화,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 편이다.
[image]
2007년의 영화 《더 퀸》, 2010년 HBO의 TV 영화 《특별관계》[27]가 대표적. 블레어 역으로는 모두 마이클 쉰이 출연.
  • 토니 블레어는 총리 시절 총리관저 수석수렵보좌관[28]을 임명하지 않았다. 아내 셰리 블레어가 수렵보좌관을 매우 싫어해서, 전임 보좌관인 험프리(Humphrey)를 1997년 해임한 이후 총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관저 수렵보좌관을 임명하지 않았다.[29] 이 때문에 후임 총리인 고든 브라운이 2007년 시빌(Sybil)을 수렵보좌관에 임명할 때까지 보좌관 직은 공석으로 남았다.
  • 2010년 자서전을 출간했다. 제목은 <토니 블레어의 여정 (TONY BLAIR A JOURNEY)>이다. 2014년 한국판으로도 출판되었다. 10년이나 영국 총리를 지낸 정치인답게 책의 분량도 상당한 편이다. 1,000페이지가 넘는다.
  •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노무현과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기 쉬운 환경에 자랐음에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 지도자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소속 당 내에서 비주류로 분류되었다는 점[30], 참신하고 신선한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다는 점, 아내의 처신 때문에 보수 진영과 당 내 반대파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는 점[31], 집권 후 우파적인 경제정책[32]과 외교안보정책[33]을 추진했다는 점, 그리고 이로 인해 좌파 진영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는 점이 매우 비슷하다.
  • 부부 금슬이 무척 좋은 편이다. 심지어 그가 46세, 아내가 45살이던 2000년늦둥이로 넷째(현재 24세)를 출산했다. 장남 이안과는 무려 16살이나 차이가 난다.
  • 2019년 12월 15일, 비 지스배리 깁과 조우하여 잼 세션을 가졌다. 평소 유명인, 특히 음악인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던 토니는 버킹엄셔에 배리 깁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기타를 들고 바로 달려가 같이 음악 활동을 했다. 그들은 비 지스의 히트곡 Stayin' Alive와 You Win Again을 연주했다고 한다.
  • 가끔씩 장관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멋대로 정책을 바꿔서 장관들을 격노하게 만든 적이 있다고 한다.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과 복지 예산을 늘리겠다고 상의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방송에서 말한 적이 있다던지, 불법 이민자 유입률을 또 자기 마음대로 방송에서 말해 내무장관이 엄청난 격노를 하게 만든 적이 있다고 한다.
  • 한때 노동당의 중도좌파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았으나 신자유주의적인 행위를 하여 현재는 금지어로 낙인찍혔다. 당장 위의 배리 깁은 토니 블레어와 친하지만, 노엘 갤러거는 토니 블레어를 극혐한다. 사실 노엘 본인이 토니 블레어를 지지했으나[34] 그가 이라크 전쟁을 파병하자 크게 실망하여 완전히 적대적으로 돌아서버렸다. 이외에도 사회주의자인 로저 워터스는 토니 블레어를 강하게 반대한 인물이다.
  • 2003년 Channel 4에서 진행한 '최악의 영국인 100명'에서 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35]

[1] 총리 본인에 대한 경칭[2] 이 이름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3] 법학 / B.A.[4]런던 시티 대학교 법학대학원 [5] 본래 모태신앙개신교(성공회) 신자였으나 2007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6] 혼전 성은 부스(Booth)[7] 마가렛 대처 이후 전통적으로 노동당이 강세를 보인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접경지대인 레드 월 지역구 중 하나였고, 덕분에 블레어 본인도 이곳에서 편하게 6선 고지를 밟았다. 하지만 제58회 영국 총선에서 세지필드 지역구는 1931년 이후 처음으로 보수당 의원이 당선되며 '''88년'''만에 격변을 맞게 되었다. 오죽하면 승리한 보리스 존슨 총리가 총선 다음날 이 지역구를 찾았을 정도.[8] 21세기까지 포함할 경우 데이비드 캐머런이 최연소 취임 총리이다.[9] 또 다른 한 명은 마가렛 대처이다.[10] 한국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출생지나 성장지는 대전광역시이지만, 부모 고향 및 본적지는 서울특별시인 셈.[11] 아버지는 본래 사회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경제적으로 성공하면서 보수주의자로 전향했다.[12] '스코틀랜드의 이튼'이라 불리는 명문 칼리지로, 이름은 칼리지지만 대학이 아니라 고등학교이다. 미국에서는 college가 (단과)대학의 뜻이지만, 영국이나 유럽 대륙에서는 고등학교 레벨의 기숙사 학교(boarding school)도 college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에서는 이튼'스쿨'이라고 잘못 알려진 Eton College.[13] 의원내각제 국가에선 조건에 따라 언제든 수권정당이 될 수 있기에 미리 내각을 결정해둔다.[14] 그런데 블레어가 고든 브라운을 밀어줄 차례가 된 2003년에 블레어 측이 약속을 어겼다. 이에 4년 후인 2007년에 당권을 장악한 브라운이 영국 총리가 되면서 블레어는 정계를 떠났다.[15] PMQ(Prime Minister Qustion's)라고 한다.[16] 당시 블레어를 위시한 유럽 중도좌파의 강세는 한국에서 김대중이 'New DJ Plan' 및 DJP연합을 통해 집권하는 과정에도 영향을 주었다.[17] 영화에서 그의 아내 셰리는 공화주의자라고 표현된다. 이 점은 극중에서 엘리자베스 2세와 보좌관들이 토니 블레어의 정권 교체를 달가워 하지 않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18] 영국 보수당의 옛 이름과 별명이 Tory Party이다.[19] 영국 노동당의 이념 투쟁과 무관하게, 2010년대 들어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에서 노동당을 싸잡아서 Red Tories라고 비방하는 경우도 있다.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노동당이나 보수당이나 그게 그거라는 얘기. 반대로 노동당 지지자들은 SNP가 보수당과 적대적 공생을 하니 스코틀랜드의 보수당이라는 뜻에서 Tartan Tories(타탄은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면직물이다)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결국 2010년대 후반 스코틀랜드에서 노동당이 SNP와 보수당 모두에 밀려 3등으로 추락하는 상황에 직면했다(…).[20] 심지어 보수당도 비슷한 소리를 듣곤 한다. 2010년대 이후 브렉시트 때문에 영국독립당(UKIP)과 다를 바 없다며 블루킵(Blukip: 색깔만 보수당 상징인 파란색으로 칠한 영국독립당이라는 뜻)이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다.[21] 당시 노동당 의원 413명 중 139명(대략 전체 1/3 이상)이 반대했다.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여당 내부의 분열은 정책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는 일이다.'''[22] 그래도 과반수는 넘어 노동당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 파병과 여러 좋지 않은 별명(…)들로 인해 지지율은 계속해서 내려갔고 마침 보수당 당수가 된 데이비드 캐머런이 이를 구실로 잡고 공격하며 레임덕에 걸리기 시작한다. [23] 본인의 지역구인 세지필드 하원 의원직도 당일에 사퇴했다.[24] 성공회 신자 시절에도 가톨릭 미사에서 영성체도 했지만, 1996년에는 영국 가톨릭 추기경으로부터 "더 이상 가톨릭 영성체에 참여하지 말라"는 경고 서한을 받기도 했다.(천주교에서 영성체세례성사를 받은 천주교 신자와 특수상황에 처한 정교회 신자만 할 수 있다) [25] 전임자 로널드 벨 의원 작고[26] 2007.6.27 총리직 사임 후 사퇴[27] 원제는 'Special relationship'으로 미영 동맹관계를 지칭하는 관용어이기도 함. 내용 자체는 블레어의 집권 초기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와의 관계가 주를 이룬다. 르윈스키 스캔들, 코소보 전도 등장.[28] 모르는 사람을 위해 소개하자면, 고양이(…)다. 인간이 고양이 역할을 하는게 아니라 진짜 고양이다. 를 제거해 총리 관저의 위생을 돕는 역할이랜다. 정식 총리 참모 중 하나(…)로 쳐 주는 듯 하다.[29] 참고로 셰리 블레어는 영국 왕실의 폐지를 주장하는 공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이전의 영국 총리 배우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30] 새천년민주당의 당 내 주류 세력은 동교동계였고, 노무현 등 영남계 인사들은 철저하게 비주류였다.[31] 노무현의 아내인 권양숙의 아버지는 빨치산 행위를 한 적 있는 좌익 인사였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 이미 사망한 상태라 딱히 대통령과 연관이 크진 않다. 오히려 더 유명한건 이에 대해 공격하는 이인제 당시 경선 상대에게 "그럼 내 아내를 버립니까?"라고 반문한 것. [32]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은 신자유주의에 가까웠다.[33] 한미 FTA 체결,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시작했다. 또 토니 블레어와 마찬가지로 노무현 또한 자국의 군대를 이라크 전쟁에 파병하였다.[34] 심지어 이쪽은 토니 블레어가 파티를 열때마다 재깍재깍 참석하는 등 광적인 지지 수준이었다(...) 이로 인하여 동생 리암 갤러거에게 비판받기도 하였지만.[35] 참고로 3위가 마거릿 대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