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저

 



'''영국 제72대 총리
The Right Honourable[1]
Sir John Major
KG CH
'''
'''본명'''
Sir John Major
존 메이저 경
'''국적'''
[image] 영국
'''출생'''
1943년 3월 29일 (80세)
'''작위'''
'''가터 기사 (Order of the Garter)'''
'''직업'''
정치인
'''학력'''
Rutlish School (졸업) (-1959년)
'''정당'''

'''부모'''
톰 메이저 볼(1879–1962)
그웬 코티스
'''총리 임기'''
1990년 11월 28일1997년 5월 2일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48, 49, 50, 51, 52
'''종교'''
개신교 (장로회)
'''서명'''
[image]
'''문장'''
[image]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정치인
2.3. 총리 재임 시기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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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제72대 총리'''
1990년부터 1997년까지 7년동안 영국의 총리직을 지낸 보수당의 정치인이다. 근데 정작 전임후임의 존재감이 너무 강해서 7년이나 총리했음에도 인지도는 별로이다.현재 영국의 살아있는 전직 총리 중 최고령자. 전임 총리인 대처와 달리 친유럽 중도 성향으로 분류된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몇 년 간 의회에서 치고 받고 싸웠던 후임자 블레어와 성향이 비슷하다.

2. 생애



2.1. 유년기


1943년 서리 지방에서 서커스 단원의 아들[2]로 태어났다. 세례는 존 로이 메이저(John Roy Major)로 받았지만 전시의 혼란스러운 행정 탓이었는지 로이라는 미들네임은 생략되고 존 메이저로 출생신고가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정작 본인은 그 후로도 꿋꿋이 미들네임을 사용한다. 가세가 점차 기울어지면서 16살의 나이에 학교를 자퇴한 이후 각종 허드렛일을 전전하면서 살아가다가[3]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에 취직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고 평소부터 관심이 깊었던 정계에 본격적으로 투신한다.

2.2. 정치인


이미 16살의 나이에 보수당에 입당했던 존 메이저 총리는 보수당 내 소장파들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는 소위 청년 보수당(Young Conservative)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당 내에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각종 지방의회를 거쳐 1979년 헌딩턴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마가렛 대처 역시 이 젊은 정치인에게 눈길을 들이기 시작했고, 메이저는 1987년 대처에 의해 재무부 차관으로 발탁된 데 이어서 1989년에는 외무장관으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한다.
한편 마가렛 대처인두세를 도입했다가 국내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고 그 여파로 1990년 11월 14일에 열린 보수당 당수 1차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했으며, 이에 대처는 보수당 중진들의 압박을 받아 2차 선거에 불참했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대처가 총리직에서 사임하자 많은 야심가들이 대처의 후임에 도전하고 메이저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대처가 출마한 1차 선거 당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 때 대처에게 도전하여 대처를 몰락시킨 인물은 바로 메이클 헤즐타인이라는 인물. 11월 27일에 있었던 2차 투표에서 메이저는 대중적 지지도는 낮았지만 대처의 지지에 힘입어 여유있게 다른 경쟁자들을 누르고 보수당 당수직에 선출됐고 375명의 대의원에게서 185표를 받았다. 과반수에 두 표가 모자랐지만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적으로 앞섰기 때문에 다른 경쟁자들이 선거 후 줄줄이 사퇴했고 그 덕에 당수직에 오르게 된다. 이와 동시에 영국 총리에 오르게 된다.
메이저가 당수직에 선출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그의 정치적 위치였다. 비타협적이고 강경했던 대처와 달리 메이저는 상대적으로 타협적인 사람이었으며, 비록 보수당이지만 노동자 출신이라는 그의 출신 배경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던 것.

2.3. 총리 재임 시기


1992년 검은 목요일을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없이 지나가던 메이저 내각이었지만 취임 2년차였던 1991년 말 걸프 전쟁이라는 커다란 파도가 다가온다.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느라 울며 겨자먹기로 참여[4]한 걸프 전쟁에서 영국은 커다란 부채(30억 파운드)를 얻었고, 이 부채는 영국 경제를 다시 침체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대처가 재임 기간 내내 펼친 신자유주의마저 악순환의 고리로 작용한다.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생산성/수익성이 없음을 빌미로 각종 산업들을 대거 해체했는데 정작 이 산업을 대체할만한 산업을 키우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파운드화의 가치가 대폭락[5]한 것은 덤
그렇지만 1992년 4월의 총선에서 메이저는 재선에 성공한다. 메이저가 재선에 성공했던 원동력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메이저가 점진적이지만 꾸준히 보수당에게서 마가렛 대처의 색채를 지우는 데 성공[6]하면서 지지자들을 조용히 재결집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인두세로 인하여 노동당의 핵심 지지층들이 선거인 등록을 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노동당도 바보는 아니라서 인두세를 폐지하고 새로운 종합특별세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 종합특별세 실시에 겁을 먹은 기득권층이 단결하여 보수당에게 표를 몰아줬다
1992년의 선거를 통하여 메이저는 권력의 기반을 탄탄히 다진듯이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경제는 집권 초 침체를 벗어나 안정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보수당 내에서는 스캔들[7]이 터졌고[8], 심지어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관련하여 자당 내에서 반란표가 쏟아져나와 조약 비준이 부인되는 굴욕까지 맛본다.[9] 여기에 1995년 5월에는 스코틀랜드 내 지방 자치 선거에서 참패를 맛보자[10] 보수당 내에서 '메이저로는 안된다'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메이저 본인의 무미건조한 이미지도 발목을 잡았다. 이에 메이저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당수직 사퇴와 조기 당 내 경선을 실시한다. 다행히 이 승부수가 먹혀들어 메이저는 당수로 재신임을 받지만 결국 1997년 5월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에 역대급 대패[11]를 겪고 총리직을 넘겨주고 만다.
총리직 사임 이후에는 2001년까지 하원의원직을 유지하다, 2001년에 열린 53회 영국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한다.

3. 여담


  • 1991년 2월, 걸프전과 관련해 전쟁내각(War Cabinet) 각료회의를 주최하다가 IRA박격포로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하마터면 영국 내각 전체가 날아갈 뻔한 상황. 정말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 평민 출신이지만 2005년에 기사 작위를 받아서 이후로 존 메이저 경이 공식 호칭이 됐다.
  • 2019년에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메이저 정부 때인 1995년, 맬콤 리프킨드 당시 국방장관이 러시아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시키자는 의견을 냈는데 당연하지만 내각 안에서 반대가 있었고 그 해 1월 리프킨드 장관의 의견은 거절당한다.
  • 크리켓의 열렬한 팬이다. 총리 직에서 물러난 후로 정계 활동보다 크리켓 경기장에서 더 자주 보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 2019년에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영국 올림픽 협회장이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영국 올림픽 대표팀 경기 관람을 위해 애틀랜타를 방문하기를 원했다는데 그 때 당시 잉글랜드가 파키스탄을 상대로 크리켓 경기를 치르는 바람에 애틀랜타 방문을 포기했다고 한다.#
  •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소설판 제 1장에서 머글 총리가 나오는데, 작중 배경 시간대를 두고 따지자면 이 사람이 수상이던 시절이다.[12] 다만 존 메이저인지는 소설 내에서 정확히 언급되지 않는다.[13] 여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머글 총리가 새로 취임하면 마법부 장관이 마법이 걸린 액자를 통해 연락을 취하고 방문해서 마법사 사회의 존재를 밝히고,[14] 필요한 때 연락을 한다. 물론 어지간해서는 연락할 일이 없지만, 머글 세계에도 영향을 끼칠 중대한 사항이 있으면 이를 통보한다. 예를 들어 시리우스 블랙이 탈옥했을 때는 이에 대해 알렸고, 실제로 머글 신문에도 '총기를 소지한' 블랙의 탈옥 기사가 실렸다. 당시 마법부 장관은 코닐리어스 퍼지였는데, 머글 총리는 마법사라는 존재 자체도 충격인데 만날 때마다 안 좋은 소식만 가져오니 당연히 만나기 껄끄러워했다. 하지만 혼혈 왕자 시점에서 만났을 때는 퍼지가 잇달은 정치적인 위기 상황에 몰린 끝에 사퇴하게 되었고, 새로 취임한 마법부 장관인 루퍼스 스크림저를 소개하러 왔다고 하자 같은 정치인으로서 동병상련을 느꼈는지 위로의 말을 건네고,[15] 스크림저를 보면서 사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왜 마법 세계가 위기 상황에서 그를 선택했는지 알 것 같다, 는 정치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작중에서는 해리 포터가 학교를 다니는 기간 동안 총리라 그만큼 마법부 장관의 방문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마법 세계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져서 퍼지가 해주는 상황 설명을 듣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고 망연자실한다.[16] 결국 회견을 끝나고 전현직 마법부 장관들이 떠나기 전 떠나기 전 참지 못하고 "당신들은 마법사잖소! 뭐든 할 수 있잖아!!!"라고 절규하고, 스크림저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문제는 상대방도 그렇다는거요."라고 답해준 다음 떠난다.
  • 1997년 웨일즈 공비의 죽음 이후 케임브리지 공작서섹스 공작의 후견인으로 임명됐다. 2018년 서섹스 공작의 결혼식에 정치인은 초대하지 않기로 했지만 메이저와 니콜라스 솜스 하원의원[17]은 초대됐다.
  • 첼시 FC의 팬이다.

[1] 총리 본인에 대한 경칭.[2] 근데 메이저의 아버지는 메이저가 태어났을 당시에 이미 65세였다. 늦둥이도 이런 늦둥이가...[3] 여담이지만 이 시기 전기배공일을 하다가 자신의 정적이자 후임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를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4] 사실 영국 내에서도 참전 자체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일단 여전히 막강한 정치력을 발휘하던 대처가 걸프전을 지지했다.[5]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통일 과정에서 막대한 독일 마르크화가 시장에 풀렸다. 그러자 독일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막는다는 이유로 금리를 미친듯이 인상하는데, 문제는 유럽 국가들이 서로의 환율을 일정하게 유지하기로 약속한 것. 그러기 위해서 다른 나라들도 자국의 화폐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금리를 올리는데 문제는 독일보다 경제 구조가 취약했던 국가로서는 그게 경제 불황을 가져온 것. 영국도 그 중 하나였고, 결국 이러한 영국 경제의 취약한 점을 노린 헤지펀드들의 공격으로 파운드화의 가치가 폭락하게 된 것이다. 이때 이탈리아스웨덴 같은 나라들도 제대로 피봤다.[6] 1990년대 중반 영국의 사회적 분위기는 과장 좀 보태서 무슨 일만 있으면 '이게 다 대처 때문이다.'였다. 보수당 입장에서는 대처와 거리를 둬야 했다.[7] 흔히 "Back to Basics"이라고 하는데, 메이저가 1993년 다시 영국 사회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내세운 표어였는데 그 이후 스캔들이 하도 많이 터지다보니 조롱하는 의미로 바뀌었다. 전두환 정부 시절 "정의 사회 구현"과 비슷한 케이스.[8] 장관급 인사들이 불륜을 저지르거나 사생아를 낳는 정도면 기본이었다. 나중엔 저소득층을 위해 만들어진 주택보조금을 받아 싸게 집을 사다 걸리는 의원이 나오고, 보수당의 신진 스타로 떠오르던 의원이 자기색정사로 질식사를 하더니 심지어는 의회에서 특정 질문을 던지는 조건으로 돈을 받아 챙기는 사건까지 터졌다. 1992~1996년 총 5년간 목이 날아간 장차관급 의원만 해도 16명이나 된다.[9] 여기에 제대로 꼭지가 돈 메이저는 반란표를 던진 자당 의원 8명을 그대로 출당시켜 버린다 이후 2019년 보리스 존슨 총리는 그보다 더해, 노딜 브렉시트 법안에 반란표를 던진 '''자당 의원 21명을 출당'''시켜버렸다. 심지어 이로 인해 '''보수당 과반의석이 붕괴'''되었다[10] 스코틀랜드는 노동당 표밭이었는데 뭘 기대한 건가 싶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스코틀랜드에서 보수당의 지지가 상승해서 스코틀랜드 국민당에 이어 지지율 2위가 되었고 노동당은 추락하여 근소한 차이로 3등을 하는 상황이 돼서 스코틀랜드가 노동당의 텃밭이라는 소리는 옛말이 되고 있다.[11] 의석 비율로만 놓고 보면 이때 노동당이 창당 이래 사상 최고의 총선 성적을 거두었다. 얼마나 대단한 승리였는지는 노동당 문서 참고.[12] 혼혈왕자 1장의 시간대는 1996년 7월이다. 머글 수상이 "7월에 이토록 짙은 안개라니, 이건 정상이 아니야." 라고 중얼거린 장면이 있으며 호그와트 마법 학교는 9월 1일에 학기를 시작해 다음해 6월 30일에 학기가 끝난다. 이후 두달간의 하계 방학을 한다. 즉 불사조 기사단의 시간대는 1995년 7월 1일~1996년 6월 30일까지다. 보통 소설 첫장에서 최대 6장까지 하계 방학 내용으로 체운다. 그러므로 혼혈 왕자의 첫장은 1996년 7월 1일부터다.[13] 여담으로 퍼지가 머글 총리에게 말하길 귀하는 전임자보다 자신을 더 점잖게 받아들이는 편이라고 말하며 전임 총리는 반대파의 계략으로 보고 자신을 창문 밖으로 던지려 했다고 하는데 현실에 대입하면 해당 인물은 마거릿 대처다.[14] 물론 머글 총리들은 말해봤자 미친놈 취급을 받을테니 마법 세계의 존재에 대해 함구한다.[15] 물론 퍼지가 실제로 뭔 짓을 했다가 그렇게 된건지 몰랐으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16] 볼드모트 일당이 곳곳에서 사고를 쳐서 민심이 악화되고 야당 당수의 공격을 받고 있는데, 진실을 도저히 설명을 할 수 없으니...[17]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웨일스 공의 시종 무관이었으며 윈스턴 처칠 전 총리의 손자로 1983년부터 2019년까지 하원의원을 지내고 메이저 정부 때 국방차관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