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닐루 아우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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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을 이겨낸 왕자
1. 선수 생활
1.1. 초기의 역경
다닐루 아우빙은 1920년 부동산 업자인 아버지 아우시지(Alcide)와 어머니 에지치(Edith)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돈이 있는 사람이어서 어린 시절에는 제법 유복한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9세에 고향 히우지자네이루의 클럽 중 하나인 아메리카 FC에 입단한 그는 막 커리어를 시작할 무렵인 1941년 1월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움직이는 전차#s-2.2에 타기 위해 뛰어들다가 차에 치었고, 다리뼈가 으스러져 39조각이 날 정도의 큰 부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심한 부상도 다닐루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부상으로 인해 다닐루는 다시 피치에 서는데 1년 6개월이 걸렸다.
부상을 딛고 피치에는 섰지만 아메리카에서는 그의 회복에 대한 확신이 완전히 서질 않았고 재정적 이유도 있고 하여 1943년 칸투 두 히우 FC로 1년간 임대를 보냈다. 하지만 여기에선 감독의 전술과 맞지 않아 거의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고 다시 아메리카로 돌아갔다. 돌아온 그는 강해져 있었고, 아메리카에서 2년간 좋은 활약을 펼쳐 보이며 소속팀 아메리카를 강팀 킬러로 만들었다.
1.2. 비상
그 활약으로 1946년 다닐루는 30만 헤알에 CR 바스쿠 다 가마로 이적하였다.[3] 바스쿠 다 가마에서 그의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꽃피게 되는데, 원래 아메리카에서 그의 포지션은 윙 하프였다. 하지만 그의 드리블 능력을 눈여겨보던 바스쿠 다 가마의 감독은 다닐루에게 센터 하프로의 포지션 변경을 주문하였고, 그 변경은 적중하였다. 그는 더욱 성장하였고, 40년대 중후반의 바스쿠 다 가마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익스프레스의 멤버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1947년 셀린다와 결혼하는 겹경사도 맞았다.
1.3. 국가대표팀. 그리고 흑역사
이런 그에게 국가대표팀의 승선은 당연해 보였다. 그는 1945년에 처음 소집된 이후, 자주는 아니지만 선발되면 꽤 쏠쏠한 활약을 보였고 홈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함으로서 그의 기량을 증명해보였다.
그 다음 해인 1950년. 역시 홈에서 월드컵이 열렸다. 호스트 브라질은 강했고, 누구나 그들의 우승을 점쳤다. 하지만 마지막에 삐끗하는 비극이 일어나고야 말았고, 패배로 인해 통곡하는 그의 모습은 FIFA 월드컵 결승전에서의 일종의 상징처럼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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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닐루 아우빙의 눈물
1.4. 이후
1954년에 그는 바스쿠 다 가마를 떠나 보타포구 FR와 2년간 계약을 체결하였고, 큰 활약은 보이지 못했다. 프리로 풀린 그는 어느덧 35세의 노장이 되어 있었고, 우베라바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다 은퇴하게 된다.
2. 감독 생활
감독으로 여러 팀을 돌아다녔고, 볼리비아를 이끌고 코파 아메리카를 우승하는 지도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우승이 볼리비아의 유일한 메이저 대회 우승이다. 홈에서 열렸고, 코파 아메리카의 전신인 수다메리카나 챔피언십이 1959년 대회 이후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는 핸디캡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승했으니 그로서는 다행. 그 이후인 1968년에 파라엔시의 강팀 헤무[4] 에서 우승을 이끌기도 했지만 다음 해에 우승을 못했다는 이유로 잘렸다.
축구로 많은 것을 얻었던 다닐루 아우빙이었지만 말년에는 빈민촌에 그의 이름으로 된 집 한 채밖에 남지 않았다. 다닐루 아우빙은 1996년에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정확한 롱 패스와 예술적인 드리블로 이름을 떨치던 중앙 미드필더로, 50년대 브라질 최고의 스타 중 한 사람이었다. 필드의 지배력도 뛰어나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월드컵에서의 뼈아픈 우승 실패로 묻혀버린 선수. 하지만, 큰 교통사고를 겪고도 결국은 재활하여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간 그의 열정만큼은 폄하될 수 없다.
4. 수상
4.1. 클럽
캄페오나투 카히오카 우승 4회: 1947, 1949, 1950, 1952(이상 바스쿠 다 가마)
4.2. 국가대표
FIFA 월드컵 준우승 1회: 1950
코파 아메리카 우승 1회: 1949
4.3. 감독
코파 아메리카 우승 1회: 1963(볼리비아)
캄페오나투 파라엔시 우승 1회: 1968(헤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