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카낭의 비극
1. 개요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결선리그 최종전인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경기를 지칭한다. 앞선 2경기에서 2승을 거둔 개최국 브라질은 1승 1무를 거둔 우루과이와 비기기만 해도 우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승을 예약해놓은 듯 한껏 분위기가 달아올라 있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1:2 역전패를 당하면서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브라질 국민들을 큰 충격에 빠뜨린 이 사건은 '''마라카낭의 비극'''으로 명명되었다.
2. 비극 이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2년 만에야 다시 열리게 된 FIFA 월드컵에서 개최권을 따낸 브라질은 첫 우승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지역 예선이 시작되기 전 아르헨티나가 기권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코파 아메리카에서 3연패(1945년~1947년)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강팀이었기 때문에 그런 아르헨티나가 기권했다는 것은 난적이 하나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승을 노리는 브라질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없는 호재였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1950 FIFA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개최국으로 선정되는 바람에 이에 불만을 품고 이 월드컵은 물론 그 다음 월드컵인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까지 기권해 버렸다. 단, 아르헨티나가 다시 참가한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에서 아르헨티나는 1라운드조차도 통과를 못했다. 그리고 그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그렇게 아르헨티나가 빠진 상태에서 시작된 월드컵 본선은 좀 특이한 방식으로 치렀다. 브라질 월드컵 조직 위원회는 경기수익을 한 푼이라도 더 뽑아먹기 위해, 모든 경기를 조별리그로 바꿨으며 그 조별리그에는 총 4개 조 16개 팀이 참가하는 걸로 했다. 하지만 우루과이가 속한 조를 비롯한 두 개의 조에서 기권팀이 연거푸 발생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13개 팀이 조별리그를 치렀다.
개최국 자격으로 1조에 배정된 브라질은 개막전을 멕시코와 치르고 그 다음은 스위스, 마지막으로 유고슬라비아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멕시코를 4:0으로 크게 꺾고 스위스와는 2:2로 비겼지만 유고슬라비아를 2:0으로 꺾으며 조 1위로 당당하게 최종 리그에 진출하였다.
옆의 2조는 껄끄러운 상대로 여겨졌던 잉글랜드가 미국에게 0:1로 덜미를 잡히는 이변이 일어났고[1][2] 그 여파로 스페인에게도 털리며 최종 리그 진출권을 스페인에게 내줘야만 했으며, 3조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이탈리아가 1949년에 있었던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해 국대 전력이 누수된 탓에 스웨덴에게 2:3으로 덜미를 잡혀 광탈해 버렸다[3] . 단지 4조의 우루과이가 볼리비아를 8:0으로 캐관광시키고 올라갔을 뿐이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 터키가 일찌감치 기권했고 바통을 넘겨받은 프랑스, 포르투갈까지 줄줄이 기권했기 때문이었다(이 외에도 인도가 기권했다). 우루과이는 사실상 '''부전승으로 결선리그에 올라간 것이다.'''
이러니 브라질 입장에서 남아 있는 난적이라고는 우루과이 하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브라질에선 우승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고조되기 시작한다. 최종 리그 첫 경기는 스웨덴과 치르고 그 다음은 스페인, 마지막으로 우루과이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브라질은 스웨덴을 상대로 7:1 대승을 거두고 스페인을 상대로 역시 6:1 대승을 거둔다. 그러는 동안 우루과이는 스페인을 상대로 2:2로 무재배를 하더니 스웨덴을 상대로는 선제골을 얻어맞고 엄청나게 고전하다가 3:2로 겨우 역전승을 거둔다.
2.1. 폭풍전야
마지막 경기를 남겨 두고 이렇게 되자, 아예 브라질에서는 아직 경기도 치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우승을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경기가 사실상의 결승전이 된 모양새인데, 무승부만 해도 우승컵은 브라질의 손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페인과 스웨덴을 상대로 고전했던 우루과이가 그 두 팀을 압살한 브라질을 이기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브라질 전역에선 모두가 브라질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분위기였고, 브라질 바깥의 축구 팬들 가운데서도 어느 누구 하나 농담으로라도 우루과이의 우승을 점치지 않았다. 그저 우루과이의 축구 팬들이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며 격려를 해 줄 뿐이었다. 이미 우승컵의 주인공은 브라질로 정해져 있고 우루과이는 들러리일 뿐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4]
게다가 브라질 월드컵 조직위원회까지 월드컵 우승 메달에 '''1950 FIFA 월드컵 우승국 브라질'''이라는 글귀를 굵직하게 새겨넣기까지 하면서, 브라질은 월드컵 우승을 축하할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언론사 역시 이 설레발에 동참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마치 우승팀이 브라질로 미리 정해져 있다는 뉘앙스의 기사를 내보냈다. 숙소에서 이 신문을 본 우루과이 팀의 주장 옵둘리오 바렐라는 '''"우리가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자!"'''며 팀 동료들과 함께 문제의 신문에 오줌을 누는 퍼포먼스를 했다.
드디어 7월 16일, 운명의 그 날이 왔다. 킥오프 전부터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낭 경기장 관중석에는 조국 브라질이 우승하는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려는 브라질 관중들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니 아직 킥오프도 안 했는데 우루과이 선수들이 분위기에 눌려 버리기는 당연지사. 게다가 결승전에 킥오프 직전 연설위원으로 초대된 당시 상파울루 시장이었던 안젤루 멘데스 지 모라이스조차 미리 브라질의 우승은 기정사실이라는 식의 연설을 했다.
우루과이의 입장에선 꽤나 기분이 나쁜 연설이었지만, 다들 브라질의 우승을 확신하는 분위기였는지라 이해했다. 게다가 FIFA 측도 브라질의 우승을 예상했는지 당시 우승 트로피로 사용했던 쥘 리메 컵을 미리 브라질 월드컵 조직 위원회 측에 넘겨줬을 정도였다. 브라질 전역에서는 이미 경기 시작 전부터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리기 시작했고 아마 브라질 선수단도 쥘 리메 컵을 들고 우승 기념 사진부터 미리 찍어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이 표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나는 브라질 선수들이 토너먼트의 승자라고 생각하고, 그들이 챔피언이 되는 데는 몇 시간이 남지 않았다. 이들의 적수는 세계 어디에도 없으며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나는 이 위대한 정복자들에게 미리 경의를 표한다.'''
- 안젤루 멘데스 지 모라에스
2.2. 운명의 경기
당시 경기를 중계한 브라질의 라디오 중계 실황은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유튜브에도 올라와 있다. 브라질의 국가 연주부터 '''경기 종료 후의 침묵까지 모두 상세히 남아 있으니''' 관심있다면 참고할 것.[5] 당연히 포르투갈어지만 해당 언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경기장 분위기는 파악이 가능하므로 한 번 들어보자. '''진정한 갑분싸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참고로 베플에 몇 분 몇 초에 골이 들어가는지 친절히 적혀 있으니까 편하게 이용하도록 하자. 104분짜리 영상이므로 모바일은 데이터에 자신이 없다면 와이파이를 쓰도록 하자.
초반부터 당연히 압도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브라질은 우루과이를 상대로 골을 터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지만 않는다면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기 때문에 브라질의 우승을 굳게 믿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리고 후반 2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브라질의 프리아사가 선제골을 터뜨린 것이다. 그 순간 마라카낭은 물론이고 브라질 전체가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고 축제 분위기도 한껏 달아올랐다. 그렇게 브라질이 이대로 첫 월드컵 우승을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루과이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선제골을 허용하고는 오히려 더 악착같이 맹공을 퍼부은 끝에 후반 21분 우루과이가 오른쪽에서 공격을 전개하다 땅볼 크로스를 올렸고 후안 스키아피노가 논스톱 슈팅으로 골문 오른쪽 상단 구석을 찌르면서 1:1 동점을 만들었다. 순간 우루과이 벤치에서는 화색이 돌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브라질 선수들과 관중들의 얼굴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중계 방송으로 경기를 시청하고 있던 브라질 국민들도 '''"이거 정말로 역전골 먹혀서 지면 어쩌지?"''' 하면서 순간적으로 초조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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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알시데스 기지아의 역전골[6]
브라질 선수들은 어떻게든 추가 실점을 막으려고 했지만, 점점 막강해지는 우루과이 선수들의 화력을 견뎌내지 못했는지 결국 후반 34분에 우루과이의 알시데스 기지아가 오른쪽에서 빈 공간으로 공을 몰고 들어가다 페널티박스에 진입하자 곧바로 슛을 날렸고 공은 바르보사 골키퍼와 골포스트 사이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렇게 해서 '''우루과이가 2:1로 역전하여 앞서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역전을 당하면서 뜨거운 함성이 가득했던 마라카낭은 완전히 침묵 속에 빠져들었으며 다급해진 브라질 선수들은 계속해서 우루과이의 골문을 두드렸지만 터지라는 만회골은 터지지 않고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갔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즉, 우루과이에게 지고 결국 우승을 놓친다는 그 시나리오가 진짜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기지아가 역전 결승골을 넣은 지 10분 남짓 지나자 브라질 우승의 불씨가 거의 다 꺼져가는 와중에 마지막 공격 기회가 찾아왔고 우루과이의 골문 근처에서 브라질의 자이르가 공을 받아 최후의 슈팅을 날렸으나 그마저도 마스폴리의 선방에 막히고 말았고 잠시 후 주심은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불었다. '''그렇게 브라질의 첫 우승의 꿈은 결국 잔인하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경기 결과'''
우루과이는 이 우승으로 인하여 기록을 하나 세우게 되었는데, 그것이 '최소한의 경기로 FIFA 월드컵 우승을 이룩한 팀'이다.[8] 아이러니한 것은 그 우루과이가 정확하게 60년 후에는 오히려 정반대로 'FIFA 월드컵 한 대회 최다 경기팀'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우루과이는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대륙간 플레이오프 코스타리카전과 3, 4위전 독일전까지 총 27경기[9] 를 뛰었다. 총 전적 10승 9무 8패를 기록했다.
여담으로, 이전 대회에서 이탈리아도 최소 경기 우승을 이룩해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올 토너먼트였고 이 대회부터 본선에서도 조별 예선이 치러졌다. 우루과이는 이 대회에서 단 4경기만 치르고 3승 1무로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한편, 같은 시각 상파울루에서 벌어진 스웨덴과 스페인의 마지막 경기는 스웨덴이 3:1로 승리하였다. 아래는 최종 순위표.
3. 경기 종료 직후 반응
그런데 주심이 경기 종료를 선언하며 휘슬을 분 그 순간, 마라카낭 스타디움은 그대로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마라카나를 고요하게 만든 사람은 오직 3명뿐이다. 교황과 프랭크 시나트라, 그리고 나다.'''
(When you look down through history, only three men have ever silenced the Maracanã: the Pope, Frank Sinatra…and me.)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브라질 관중들은 이 충격적인 결과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응원 열기로 가득했던 마라카낭 스타디움에는 차가운 침묵이 들어찼다. 당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 입장한 공식 관중 수는 무려 '''17만 3850명'''[10] 이나 됐는데, 앞으로도 절대 깨질 수 없는 월드컵 불멸의 기록 중 하나이다. 이렇게 엄청난 숫자의 관중들이 일제히 침묵 속에 빠져들었으니, 그 섬뜩함은 더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쥘 리메 피파 회장은 이를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적막감"'''이라고 표현했고, 어느 한 브라질 관중의 목격담에 따르면 '''경기장 안에서 파리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경기가 끝난 직후 '''4명의 관중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는데,''' 2명은 '''심장마비,''' 2명은 '''권총 자살이었다.'''
이 때문에 우루과이 감독과 코치들, 선수들 또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성난 브라질 관중들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승 시상식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우루과이로 줄행랑을 쳐야만 했다.
참고로 우루과이는 일찍이 브라질에 잡아먹힐 뻔하다 독립한 나라이기 때문에 한국으로 치면 도쿄 대첩에 맞먹는 승리였다. 당시 브라질의 우승이 거의 기정사실화 되었기 때문에 우승기념 메달은 브라질만 만들고 다른 나라의 메달은 만들지도 않은 상태였다. 당시 FIFA는 월드컵 우승 메달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니 브라질이 아닌 다른 나라가 우승했으니 이 메달들은 당연히 폐기 처분. 게다가 쥘 리메 회장도 '''포르투갈어로 된 우승 축사만 만들어 와서[11]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브라질의 우승 연설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브라질의 첫 월드컵 우승을 기념하기 위한 노래인 "Brasil os vencedores"(Brazil the Victors)도 미리 만들어졌지만 브라질이 준우승에 그치면서 결국 그냥 묻혔다. 그 외에도 브라질의 우승 기념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는 등, 미리 터뜨려놓은 설레발들이 한순간에 모조리 김칫국으로 변했다.
또한, '''브라질 전국에 조기가 게양되었고 울분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전국적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12]
4. 비극 이후
브라질 역사상 최악의 악몽인 경기. 반대로 '''우루과이의 입장에서는 매우 영광스러운 승리'''이기도 하다. 브라질 축구 팬들에게는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게 만든 경기다.
그리고 그들의 후배들이 64년 후 다시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브라질 축구의 또다른 치욕을 만들게 되었다.[13]
이 비극으로 인해 분노한 브라질 축구 협회는 그 당시 결승전에서 선수들이 입었던 유니폼들을 모조리 수거해서 '''싸그리 불태워버린''' 후, 유니폼의 색깔을 새로 정했다. 1914년 브라질 축구 협회의 창립 이후 상/하의 모두 흰색 유니폼을 입어왔는데, 이를 버리고 새로 디자인한 유니폼은 노란색 유니폼, '''카나리냐'''다.[14] 이 유니폼이 세계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현재 유니폼이며 앞으로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1950년 이전과 같은 흰색의 유니폼을 착용하는 꼴을 볼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브라질의 축구 팬들은 현재까지도 그 당시 입었던 흰색 유니폼을 항복과도 같은 상징이자 수치라고 생각하고 있다.[15] 브라질 국적의 축구 팬들에게 이 경기 이야기를 하면 표정이 싹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2019년 코파아메리카 원정 유니폼을 다시 흰색으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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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경의 브라질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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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월드컵 결승전의 브라질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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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승전의 결과 브라질의 유니폼이 이렇게 바뀌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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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의 브라질 국대 유니폼.
결승전 패배의 주범으로 지목된 선수들은 그 이후 다시는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지 못하게 되었다. 골키퍼 바르보자와 수비진 모두가 이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7] 특히 골키퍼로 뛰었던 모아시르 바르보자는 더욱 심했는데, 일례로 바르보자가 은퇴 후 길을 가고 있는 도중 한 아이가 바르보자를 보고 엄마에게 누구냐고 묻자 아이 엄마의 대답이 '''브라질 국민을 절망과 좌절감에 빠뜨린 인물이란다.'''라고 한 일이 있다.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자 만악의 근원 취급.[18] 엔트리 멤버 중 오직 단 한 명, 니우통 산투스만이 다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멤버가 될 수 있었고 그 역시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2년 동안이나 국가대표에 못들어왔다. 그나마 '''니우통 산토스가 국가대표 복귀가 가능했던 것도, 1950년 월드컵에서 엔트리에만 들었지 전 경기에 걸쳐 단 1초도 뛰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그는 2000년에 7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 '브라질에서는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범인도 43년 이상 형을 선고받지 않는데 나는 그 경기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50년을 죄인처럼 지내야만 했다' '''는 넋두리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니까 바르보자는 이 비극 때문에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평생 고통받은 것이다. 정말로 안습. 이 일이 터지기 전만 해도 바르보자는 남미에서 가장 잘 나가던 골키퍼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이 경기로 인해 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실제로 그는 은퇴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골키퍼 코치 자리에 지원했지만 브라질 축구 협회로부터 패배의 징크스를 가진 선수를 쓸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1993년에는 라디오 중계도 브라질 축구 협회에서 막았다고 한다. 또 바르보자는 흑인이었는데, 이것까지 꼬투리를 잡혀 이후 모든 흑인 골키퍼들에게 '''인종차별'''이라는 커다란 벽까지 생겼으며, 실제로 디다의 2006년 독일 월드컵 선발출전 전에는 월드컵에서 선발로 출전한 흑인 골키퍼가 단 한 명도 나오지 못했다.
그나마 참화를 비껴 간 선수들도 편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월드컵 골든 볼러 지지뉴는 7월 16일, 그러니까 마라카낭의 비극이 발생했던 그 날만 되면 전화선을 끊어 놓았다고 한다, 무려 50년 동안이나.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브라질 전역에서 그때 왜 졌냐는 전화가 하루 종일 울려댔기 때문이다.''' 지지뉴는 선수 시절의 수많은 영광보다 그 한 경기의 상처에 평생 가슴아파했다고 한다.
이 경기에서 역전 결승골을 넣은 주인공 알시데스 기지아. 그는 50년 정도 지나서 브라질에 여행을 갔다가 정말 기가 막힌 일을 겪었다. 어떻게 봐도 20대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여성 세관원이 기지아를 알아본 것. 기지아가 놀라서 "그건 50년 전의 일이다"라고 답하자 세관원은 '''"브라질의 우리들은 아직도 그때의 일을 오늘 일어난 일인 것처럼 느낀다"'''고 했다고... 이 정도라면 정말 무서울 지경이다.[19]
이 비극으로부터 63년이 지나 2013년, 알시데스 기지아는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본선 조추첨을 직접 하게 되었다. 브라질에서 각오를 다지는 의미에서 초청한 것. 그런데 이렇게 전의를 불태웠던 자국의 두 번째 월드컵에서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따지고 보면 새 역사를 창조한 게 맞기는 하다. 새 '''흑'''역사라서 문제지(...)
국제적으로는 안그래도 브라질이 우루과이와 사이가 나쁜 편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 우루과이에 대한 브라질의 분노와 증오가 증폭되었다. 즉, 원래부터 사이가 나빴던 두 나라가 이 사건으로 인해 그 사이가 더더욱 나빠진 것이다.
펠레는 이 경기의 패배를 라디오로 들으며 브라질을 반드시 세계 최강의 팀으로 만들겠다고 아버지와 예수상 앞에서 맹세했다. 그리고 197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4강 상대가 우루과이로 정해지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고 한다. 나이 대가 비슷한 동료들은 물론이고 당시 아기였던 젊은 선수들까지 4강전이 끝날 때까지 틈만 나면 모두 불러 모아서 이 시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왜 반드시 이겨야 하는지를 역설하고 다녔으며, 당시 해설자로 멕시코에 와 있던 지지뉴와 아데미르도 브라질 선수들에게 우승을 못 해도 좋으니 반드시 우루과이만큼은 꺾어 달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결국 자신이 선두에 나서 우루과이에 승리를 거두며 어릴 적 아버지와 예수상 앞에서 했던 맹세를 지켰다.
그 날 안타깝게 우루과이의 벽에 막혀 우승이 좌절되었던 브라질은 다음 월드컵인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에서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과 단체 현피(일명, 베른의 전투)를 뜨는 등 개판을 쳐서 우승을 또다시 놓쳤다. 아니, 아예 준결승도 못갔다. 하지만 그 다음 1958년에 이르러서는 펠레의 활약으로 드디어 첫 우승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후 브라질은 1970년 월드컵 4강에서 우루과이를 만나 3:1로 승리하여 이전의 비극을 설욕하고, 우루과이를 4등으로 떨어뜨린 뒤 우승을 차지했는데, 우루과이와의 경기 직전에 펠레가 '''"우승을 못해도 좋으니 우루과이만큼은 꼭 이기자!"'''라고 말하며 서로 결의를 다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201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우루과이를 꺾으며 마라카낭의 복수를 했다. 지금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남미 지역 예선이나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만나면 꼭 이를 악문다. 브라질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우루과이와 맞붙게 되면 실력차 여부를 떠나서 '''"니들한테 만큼은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준다. 2016년 3월 남미 예선에서 있었던 헤시피 경기장 브라질 vs 우루과이전에서 수아레스가 동점골을 넣자 브라질 관중들은 죽일 듯한 기세로 수아레스에게 달려들기까지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K7rC74MZZQ 참조.
여담으로, 이 사건을 나타내는 포르투갈어인 마라카나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브라질 대표팀 또는 그 곳을 쓰는 프로 팀인 플라멩구, CR 바스쿠 다 가마, 플루미넨시, 보타포구 FR 등의 팀에게 이길 가망이 없이 작살난 팀을 조롱하는 뜻의 일종의 슬랭으로 쓰인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같은 장소에서 치러진 여자축구 4강에서 브라질 여자 축구대표팀이 스웨덴 여자 축구대표팀을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가는 끝에 패배해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그나마 브라질 남자 축구대표팀은 마라카낭에서 열린 4강전에서 온두라스를 6:0으로 KO시키며 결승전에 진출해 첫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비록 U-23이지만, 2년 전 브라질에게 치욕을 안긴 독일과의 빅 매치가 성사됐다.
이후 브라질은 독일과 1:1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에서 이기며 브라질의 '''올림픽 축구 역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하게 되었다. 비록 U-23 팀이 나간 관계로 A매치는 아니었지만, 2년 전의 대패와 66년 전 마라카낭의 비극을 조금이나마 씻어줄 수 있는 의미있는 승리였다.
덤으로, 이 경기 결승골을 넣은 알시데스 기지아는 이 경기 나온 22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로 상술하듯이 2014 브라질 월드컵 조추첨에 나왔다, 그리고, 그는 브라질이 미네이랑의 비극을 겪는 걸 다 보고 다음 해인 2015년, 참으로 기묘하게도 바로 이 경기가 열리던 '''7월 16일''' 딱 65년이 지난 그 날에 심장마비로 만 88세로 숨을 거두었다.
5. 마라카낭의 기적을 만들어낸 영웅
브라질에서 우루과이로 입장을 바꾸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마라카낭의 기적', 그 중심에는 당시 우루과이의 주장 옵둘리오 바렐라가 있었다. 앞서 말했듯 경기 전날 숙소에 브라질의 우승을 미리 기사로 내보낸 신문이 투척되자 그 신문지에다가 오줌을 누는 퍼포먼스를 주도한 그 선수 맞다. 경기 당일 당시 우루과이의 감독이었던 후안 로페스조차 홈 어드밴티지를 등에 업은 브라질의 막강한 화력을 의식하여 수비적인 플레이를 주문했는데 후안 로페스가 나가자마자 옵둘리오 바렐라가 말하기를
그리고 세계 최고의 팀과 그 팬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식으로 감동적인 연설을 하다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긴다.후안 로페스는 좋은 감독이야. 하지만 오늘은 그의 판단이 틀렸어. 만약 우리가 수비적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스페인이나 스웨덴과 같은 꼴을 당할 것이야.
이 말에 선수들이 감동을 받아 킥오프를 하자마자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수비적인 플레이로 일관할 것이라던 예상을 완벽히 깨는 플레이였기 때문에 처음 브라질 선수들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브라질의 화력은 막강했다. 어쩔 수 없이 브라질의 화력에 밀려 전반에만 17개의 슈팅을 허용하고 말았고, 골키퍼 로케 마스폴리의 선방으로 전반을 동점으로 마무리하였다. 후반 2분, 브라질이 선제골을 넣자마자 우루과이 선수들이고 코치진이고 완전 멘붕에 빠졌는데, 유독 바렐라만이 평정심을 전혀 잃지 않고 공을 하프 라인에 가져다 놓으며경기를 하는 것은 제3자가 아니야. 쇼를 보여주자.
이렇게 외쳤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투지를 잃지 않은 진정한 멘탈갑이었다. 이 말에 우루과이 선수들은 더 맹렬하게 브라질의 골문을 두드렸다. 한 골 먹으면 모든게 끝이야라고 할 줄 알았는데 더 거세게 나오니 브라질 선수들은 당연히 더 당황해서 연신 허점을 드러냈다. 결국 브라질 선수들도 20만명이 들어찬 경기장과 국가적인 우승 분위기에 압박을 받는 보통 사람이었던 것. 우루과이 선수들이 그 허점을 잘 파고들어 동점골과 역전골을 만들어 낸 것. 바렐라가 마라카낭 대첩의 진정한 영웅인 셈. 그가 우루과이 선수들의 투지를 북돋워주지 않았다면 스키아피노의 동점골도, 기지아의 역전골도 없었을 테니까. 여담이지만 옵둘리오 바렐라는 경기가 끝난 뒤, 그에게 달려들어 승리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이제 우리가 본때를 보여줄 때가 왔다!
그리고 64년 후, 당시 우루과이의 영웅 기지아 옹이 2014 브라질 월드컵 조 추첨식에 참석하였다. 물론 각오를 다지는 의미에서 일부러 초청한 것이다. 나이 탓인지 지팡이를 딛고 등장. 64년 전의 일을 생각하면 오묘한 상황일 듯.순전히 우연이었지.
이 경기에서 승리한 우루과이는 월드컵 역사상 '''최소 경기 우승팀'''이라는 이색적인 기록(조별리그 포함해서 4전 3승 1무 0패)을 달성했으며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월드컵 역사상 최다 경기를 치른 팀이라는 또다른 이색적인 기록(총 27경기, 지역예선 18경기 + 대륙간 플레이오프 2경기 + 조별리그 3경기 + 토너먼트 3경기 + 3/4위전.)을 갖게 되었다.
또한 첫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이기고 우승한 데에 이어 이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을 이기고 우승한 우루과이는 당시 기준으로 남미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된다. 물론 이 수식어는 1970년대 이후 빛이 바래버리고 말았지만... 참고로 이 우승이 현재까지 우루과이 대표팀의 마지막 월드컵 우승이다.
그리고 64년 후인 2014 브라질 월드컵, 우루과이는 64년 전 브라질을 초상집으로 만든 업보인지, 이탈리아/잉글랜드/코스타리카와 한데 묶이는 월드컵 역사에 남을 죽음의 조에 걸려 버렸다. 그리고 수지가 빠진 1차전에서 코스타리카에게 사상 첫 패배를 당하며 불안한 출발을 했으나, 이후 잉글랜드와 이탈리아를 잇달아 잡으며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그런데 우루과이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수지는 키엘리니에게 핵이빨을 시전해서 그에 대한 징계로 16강전 직전에 시즌 아웃당했고, 결국 16강에서 64년 만에 다시 찾은 마라카낭에서 수니가 동네한테 0:2로 발려버렸다. 브라질 사람들은 우루과이가 마라카낭에서 발리는 모습을 보면서 통쾌함을 느꼈을 듯했지만......
'''얼마 안 지나 자국 역사에 영원히 길이 남을 또다른 대재앙이 터지게 된다.'''
자신을 이런 구렁텅이로 내몰아버린 상대가 우루과이에서 독일로 바뀌었을 뿐... 게다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네덜란드한테 또다른 굴욕까지...
6. 유사 사례
사례 난립을 방지하기 위해 월드컵 사례만 기재한다.
-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북한 vs. 이탈리아 - 모두의 예상을 깨고 북한이 1:0 승리를 거뒀으며 이탈리아는 고국으로 돌아가야했다.
-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2라운드 C조 브라질 vs. 이탈리아 - 파올로 로시에게 헤트트릭을 먹히며 이탈리아에게 2:3으로 패배한 브라질은 2명이 자살하고 5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를 데 사리아의 비극이라고 한다.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16강전 브라질 vs. 아르헨티나 - 브라질이 경기 내내 아르헨티나를 가둬 팼지만 골은 터지지 않았고, 마라도나의 킬패스 한 방에 카니자가 패스를 받아 넣어 브라질이 광탈당하게 된다.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결승전 프랑스 vs. 브라질 - 4강전까지 승승장구하던 브라질이었지만 호나우두의 부상으로 브라질의 공격 라인에 큰 공백이 생겼고, 결국 지네딘 지단에게만 전반전에 헤딩골을 두 골이나 먹힌 끝에 0:3이라는 충격적인 대패를 당했다.
- 세네갈 쇼크(2002) - 프랑스 국대가 주인공.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 중에서도 역대 최악이었던 사례이다.[20]
- 2006 FIFA 월드컵 독일 F조 일본 vs. 호주 - 일본이 전반 중반에 골을 넣어 1:0으로 앞서다가 후반 막판에 호주의 팀 케이힐과 존 알로이지의 활약으로 3골을 때려넣는 바람에 1:3으로 역전패를 당하여 16강 전망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그 후 일본은 크로아티아와는 무재배, 브라질한테는 대역전패를 하여 결국 조별리그 탈락의 쓴맛을 봤다.
- 남아공 쇼크 - 한마디로 세네갈 쇼크 2탄.[21]
-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 B조 스페인 vs. 네덜란드
- H조 한국 vs. 알제리
- 4강전 브라질 vs. 독일 - 위에 작성된 모든 사례들을 합쳐도 이 사건의 파장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축구라는 종목이 정립된 이후 가장 충격적인 경기 중 하나.
-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 F조 한국 vs. 독일 -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 중에서는 이론의 여지 없는 역대 최악의 참사며, 마라카낭의 비극 이후의 월드컵 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충격적인 경기 중 하나.[22]
- 16강전 벨기에 vs. 일본 - 일명 로스토프의 14초. 일본이 후반전에 2골을 먼저 넣고 시간을 끌려다가 벨기에의 전술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3골을 허용해 탈락하게 되었다.
7. 기타
한국 SCP 재단에 마라카낭의 비극을 주제로 한 SCP가 있다.#SCP-947-KO 해당 SCP는 알시데스 기지아가 사망하자 무효화되었다. 하지만, '''미네이랑의 비극'''이 제 2부를 만들면서.....
8. 둘러보기
[1] 원래 미국 팀은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에서 준결승에 진출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팀이였지만, 이 월드컵에서의 미국 팀은 원래 참가하기로 되어 있던 선수들이 한국전쟁에 죄다 징집당해 버려서 그 빈 자리를 불법 체류자, 유학생들로 대충 메워서 급조한 어중이떠중이 팀이었다. '''네임밸류만 있었지 내용물은 부실한 팀이었던 것.''' 그런 팀한테 '''축구 종주국의 세계 최정예 멤버로 구성된''' 잉글랜드가 뜻밖의 일격을 먹은 것이다. 결승골을 넣은 게이텐즈는 '''미국 국적조차 취득하지 못한 아이티 출신 일개 유학생'''이었지만, 이 득점 하나로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가 되었다. 참고로 경기가 끝나고 한 잉글랜드 신문사는 현지에서 날아온 '잉글랜드 0:1 미국' 메시지를 멋대로 '탈자가 났군?' 하고 생각하고는 <잉글랜드 10:1 미국>으로 오보했다가 망신을 산 해프닝까지 있었다.[2] 당시 잉글랜드는 축구 전술, 기술적인 면에서 타국의 추종을 불허했다. 종주국이었고 세계 축구의 틀을 만든 국가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 1930년대 아스날의 채프먼 감독이 만든 WM전술은 40년대, 50년대도 세계를 지배했고, 잉글랜드는 '''월드컵같이 수준이 낮은 대회에 참석할 이유가 없다'''며 불참했을 정도다. 실제로 '''세계 최초 월드컵 연속 우승국가인 이탈리아'''를 영국에 초청해서 격파하기도 했었다.[3] 이탈리아는 이로부터 67년 후, 러시아 월드컵 본선진출권을 놓고 가진 플옵경기에서 또다시 리타이어 당했다.[4] 상술한 바와 같이 브라질과 호각세를 다룰 만한 유럽세들은 일찌감치 기권한 데다 숙적인 아르헨티나마저도 대회 시작 훨씬 전에 기권해서 불참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단지 이를 대놓고 냈다는게 문제였다.[5] 당연하지만 영상이 담긴 기록 같은건 아직까지 없다. 소실되었거나 봉인되어 있는듯.[6] 이 사진에 나와있는 7번 선수가 바로 역전골을 넣은 그 주인공이다.[7] 다만, 이 경기에서는 포메이션을 알 수 있어서 등번호를 기재했다.[8] 월드컵에 참가할 수 있는 팀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인 데다가 본선에서 기권을 하면 FIFA가 징계를 내릴 수도 있으니 이 최소 경기 우승 기록이 깨질 일은 없을 듯하다.[9] 월드컵 남미 예선 18경기 + 대륙간 플레이오프 2경기 +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3경기 + 16강전 + 8강전 + 준결승 + 3, 4위전[10] 다른 기록상으로는 '''19만 8854명'''이라고 하고, 비공식으로는 '''20만 명'''도 넘었을 것이라고 하며, 최대 추정치는 '''25만 명'''이다.[11] 남아메리카에서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국가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 뿐이다. 브라질을 제외한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지라 전부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간혹 다른 외국어도 쓰긴 하나 주 언어는 스페인어.[12] 남미 국가들에게 있어서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가난하고 고달픈 삶의 비애를 잊게 해주는 희망이자 부와 명예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활로다.'''[13] 다만, 1950년 월드컵에서는 모두들 브라질이 우승할 것이라고 여겼던 반면, 2014년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이 절대적인 강팀은 아니었고, 객관적으로도 브라질이 독일보다 뛰어난 스쿼드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인한 브라질 국민의 충격이 마라카낭의 비극보다 컸다고 보기는 힘들다. 1950년 월드컵은 출전 선수들 거의 모두가 대표팀에서 은퇴하고, 유니폼조차 아예 완전히 바꿔버렸을 정도로 브라질의 충격이 너무나 엄청났다. 전술했듯 경기장에서 권총 자살자가 두 명, 심장마비로 죽은 이가 두 명이 나왔을 정도. 포포투에서는 미네이랑은 슬픈 코미디지만, 마라카낭에서의 비극은 아니다 라는 기사에서 마라카낭과 달리 미네이랑에서는 폭동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디펜던트에서도 어째서 화요일의 상처가 1950년대의 마라카낭보다 깊지 않았나라는 기사에서 브라질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울지는 않았다며 마라카낭보다 큰 충격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브라질이 위대한 축구를 보여주던 1950년대와 달리 현재의 브라질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브라질 사람들은 그들이 언더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충격적인 패배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충격의 수준으로 보면 4강전에서 7점을 실점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진 만큼,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인한 충격도 상상을 초월했다. 둘 다 세계를 뒤집어 엎어버렸을 정도이니... 심지어 2014년 월드컵의 로고도 브라질 입장에선 우는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다.[14] 또 다른 별명으로는 베르데-아마렐라. 우리말로 하면 초록-노랑이다. 이 둘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명이기도 한데 유니폼 색깔에서 따온 것이다.[15] 그 이후 흰색 유니폼이 등장한 적이 있긴 있다. 2004년 FIFA 100주년 기념 친선 경기에서 100년 전 유니폼을 재현했을 때 브라질이 입고 뛴 것. 참고로 경기는 0:0 무승부.[16] 원정 유니폼은 상·하의 색깔만 바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원정 유니폼은 하의가 흰색이다.[17] 하지만 경기 내용을 보면 그렇게 골문을 두드리고도 골을 뽑아내지 못한 공격진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하는게 옳았다. 수비진의 잘못은 브라질에 비하면 훨씬 적었던 우루과이의 몇 번의 공격에서 골을 내줬다는 것. 그것 뿐이다.[18] 하지만 24년 후의 대회 때 있었던 일에 비하면 이건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다. 결승전에 못 올라갔다고 사람 이름을 전염병 이름으로 삼아버리는 실로 개막장짓까지 저질렀을 정도다.[19] 이런 정도의 열성이 있었기에 세계 축구 최강국의 지위와 월드컵 최다 우승국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다만 이게 너무나 과도한 나머지 축구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국민적 정서가 심해졌고, 그래서 과거에 스콜라리 감독이 "축구 말고 딴 것도 신경 써 쫌!"이라고 했을만큼 집착이 심하다.[20] 특히, 2020년 현재까지도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 중 전 경기 무득점으로 광탈당하는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21] 다만, 이번에는 1점을 득점했다.[22] 마라카낭이나 미네이랑은 그래도 상대팀이 같은 체급이고 패했어도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이 되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그나마 있었던 반면, 카잔의 기적은 상대 팀도 체급이 현저하게 다르고(FIFA 랭킹 1위 vs 57위), 네임 밸류 역시 비교 불가능한 데다, 결정적으로 전 대회 챔피언이 조별리그 최하위로 밀려 광탈했다는 것이다. 더욱 치욕적인 것은 그 상대 팀에게 조에서 유일하게 득점을 하지 못한 팀이란 점이다. 여러모로 독일판 세네갈 쇼크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