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임베르트 다 피사
1. 개요
다임베르트 다 피사(Daimbert da Pisa : ?년 ~ 1105년)는 초대 피사(Pisa)의 대주교이자 아데마르의 뒤를 이은 로마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예루살렘에 파견한 교황의 대리인이다.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를 지냈다.
2. 생애
다임베르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곳은 마인츠(Mainz)다. 당시 대주교였던 웨지로(Wezilo)에게서 부제로 서품받았데, 당시 웨지로는 교황과 황제의 사제 서임권 투쟁에서 황제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1087년 다임베르트는 토스카나의 여백작 마틸다와 가깝게 지내면서 친분을 쌓았고, 그곳에서 머물던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자연스럽게 다임베르트를 정식 사제로 인정했는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1088년에는 피사의 주교로 임명된다. 그러나 피스토이아(Pistoia) 주교 피에트로는 자신의 관할권이 침해받는 교황의 인사에 강하게 반대했고, 교황청 참사회도 교황의 선택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1092년에는 교황이 마틸다 여백작의 청원을 받아들여 다임베르트를 피사의 대주교로 승진시켰다.
1094년 교황과 성탄절을 보낸 다임베르트는 교황의 이탈리아와 프랑스 순방을 함께했다. 이 순방에서 카노사의 굴욕 이후에도 계속해서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피아첸차를 방문했는데, 때마침 교황을 쫓아온 동로마 제국 사절단을 조우한다. 이슬람 준동에 대한 동로마 황제의 읍소를 전해들은 그들은 다음 행선지인 클레르몽에서 교황은 역사의 길이 남을 십자군 선포 연설을 하며 데우스 불트를 주창했다. 곧바로 피사로 돌아온 다임베르트는 교황의 지원하에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것을 설파하였고 피사는 십자군의 원정의 항해와 원정 후반부의 보급을 도맡아 진행한다.
1098년에 교황은 서방의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에게 다임베르트를 파견하여 왕이 최근에 레콩키스타 원정으로 무어인들로부터 수복한 영토의 교회 조직 재건 사업을 맡겼다. 다임베르트는 알퐁소 6세가 교황에게 보내는 진상품 상당 부분을 착복했다는 의심을 받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교회 재건 임무를 완수하여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2.1. 예루살렘 2대 총대주교
1098년 말, 다임베르트는 교황 파스칼 2세의 명령으로 레반트 지역으로 가기 위하여 피사의 함선에 승선했다. 항해 도중 동로마 제국의 해군과 약간의 충돌이 있었으나 보에몽 1세의 영토였던 안티오키아 공국의 연해에 상륙하였다. 그곳에서 보에몽 1세를 접견했고 함께 제국의 군항이였던 라오디케아를 봉쇄하는데 함께하였다. 동로마 제국과의 충돌은 신생 예루살렘 기독교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다른 십자군 국가들은 보에몽에게 전선을 풀라고 요구했다. 보에몽은 생색을 내면서 제안을 받아들였고 포위를 해제한 후 다임베르트와 함께 1099년 12월 9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성지에 당도한 다임베르트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아데마르의 선종 후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가 복원되자 그 자리를 맡고 있던 아르눌 드 쇼크의 지위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아르눌은 수석부제로 밀려났고 다임베르트는 새로운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에 오르게 된다. 그러자마자 다임베르트는 고드프루아에게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교회에게 완전히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영주들의 격렬한 반발을 동반했고, 고드프루아의 동생인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 1세는 다임베르트에 대한 충성 요구를 거부하고는 영지로 떠나버렸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고드프루아는 다임베르트에게 이집트를 정복하면 예루살렘과 그 근방을 교회에 봉헌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다임베르트가 보에몽의 조카인 갈릴레아 공작 탕크레드와 함께 자파(Jaffa) 원정길에 올라있던 와중에, 1100년 7월 18일에 고드프루아가 갑작스럽게 서거한다. 소식을 접한 다임베르트는 탕크레드의 도움을 받아 보에몽에게 예루살렘으로 병력을 이끌고 오라는 전서를 보냈으나, 밀사가 중간에 트리폴리 백국의 레몽에게 체포당하여 보에몽에게는 닿지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근처를 약탈하던중에 투르크 군사들에게 사로잡힌다.
그해 11월 11일에 고드프루아의 동생이자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이 다른 영주들의 추대를 받아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다. 다임베르트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무렵에는 모든게 끝나있었고, 다임베르트와 함께 온 피사 함대의 지원이 필요하던 보두앵은 그를 재신임하기로 결정했다. 다임베르트는 어쩔수없이 최소한의 저항으로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보두앵 1세의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1101년 4월 제노바인들이 이끌고 온 함대가 도착하자 보두앵은 더 이상 제해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피사와 다임베르트 의 협조가 필요하지 않게 됐고, 얼마 후 교황 파스칼 2세의 특사인 모리스 드 포르투(Maurice de Porto) 추기경이 도착했다. 보두앵은 다임베르트를 보에몽과 함께 엮어 반란을 모의했다며 추방하려 했다. 다급해진 다임베르트는 막대한 뇌물을 보두앵에게 헌납하였으나 그가 그동안 재정을 착복하였던 사실들이 모리스에게 들통나면서 탄핵되고 임시로 모리스가 총대주교를 맡는다.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망명한 다임베르트는 섭정 탕크레드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모리스는 1102년 봄에 선종했고 후임으로 에브르마르 드 테루안(Evremar de Thérouanne)이 선출되었다. 1105년, 보두앵의 군사적 협조를 요청받은 탕크레드는 다임베르트의 복권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보두앵은 이를 받아들였고 다임베르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으나, 새로운 교황 사절인 파리의 추기경 로베르가 도착하자 다임베르트는 라오디케아 봉쇄 당시 동방 정교회 교도의 살해를 묵인한 책임과 보에몽에게 보두앵을 모함했다는 혐의를 받고 다시 안티오키아로 추방당했다.
이후에 다임베르트는 로마로 귀환, 교황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하고 총대주교로 복권되었으나 1105년에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 시칠리아의 메시나에서 선종하였다. 예루살렘 총대주교직은 에브르마르가 대행하였고 다임베르트가 선종한 이후에는 아를의 주교였던 기벨린 드 사브란(Gibelin de Sabran)이 뒤를 이었으며 피사의 대주교직은 피에트로 모리코니(Pietro Moriconi)가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