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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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철거
4.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에서 명나라 만력제숭정제에게 제사을 지내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던 제단. 창덕궁 후원에 존재했다. 유사한 기능을 했던 만동묘가 민간에서 세웠다면 대보단은 국가에서 조성한 시설이었다.

2. 상세


대외적으로는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군사를 보내 원조하였던 나라 만력제와, 명나라 최후의 황제인 숭정제를 기린다는 목적으로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당한 삼전도의 굴욕의 치욕을 씻기 위해 군신이 절치부심하면서 '명에 대한 충절'을 부르짖던 무렵, 청나라에 불복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지은 단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조선 반청 퍼포먼스의 상징이자 관제 구심점'이라고 볼 수 있다.
1704년(숙종 30년) 예조 판서 민진후의 발의로 옛 내빙고 터에 지었다. 9월 25일 공사를 시작해 12월 24일 준공될 때까지 많은 물자와 인력이 소비, 동원되었다. 공사의 감독은 당시 선공감 감역으로 있던 김시택이 맡았고, 공사의 지원은 호조를 비롯해 6조의 당상이 돌아가면서 하였다.
공사에는 민간이 동원되기도 했으나 주로 5영에서 차출된 군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규모는 건물이 없는 제단으로 교사를 지내던 남교의 규모를 따라 밖에 담을 세우지 않고 제단의 담을 쌓았다.
전체 크기는 정방형으로 한쪽의 길이가 150척(45m)이고, 정방형의 모양의 단의 한쪽의 길이가 25척(7.5m)이며 높이는 5척(1.5m)으로 바닥에서 단까지는 네 개의 계단을 두었다. 명칭의 결정은 그 해 11월 24일 예문관에서 정해 올렸다. 제사는 연 1회 2월 상순에 길일을 택일해 지냈다.
2월로 정한 까닭은 매년 2월이 중국의 황제가 정기적으로 동쪽으로 순행하는 시기이므로 그 시기를 이용한 것이다. 즉, 죽은 명나라 황제의 혼령들이 가장 조선과 가까워지는 시기가 이때라는 논리. 제사 때는 팔일[1]의 악을 사용하고, 악장은 문묘의 악장을 쓰도록 하였다. 위판은 만력제의 묘호인 '신종'을 넣어 대명신종의 명칭을 사용, 대명의 국호를 밝히게 하였다.
제례는 임금이 친제[2]함을 원칙으로 했지만. 부득이한 경우 중신을 보내어 대제하게 했으며, 희생은 누런 소를 쓰고 제물과 기구는 문묘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

3. 철거


대보단에서의 제사는 조선 후기까지 이루어지다가 1884년 갑신정변 이후부터 중단되었다. 사용처가 사라진 대보단은 이후 계속 방치되었다가 1921년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고 그 위치에 신선원전이 들어선다.

4. 관련 문서



[1] 나라의 큰 제사 때 추는 규모가 큰 춤을 말한다.[2] 직접 제사를 주관함.